소설/한미합작

한미합작(IV)

오선닥 2014. 1. 3. 18:33

같은 말에 올라 탈 두 사람

달리기만 하면 될까?

아직 안장을 얹지 않았군

지금부터 준비…

 

 

 

 

한미합작

제4회

 

 

세상 달래기

 

각자 회사로 돌아간 오선덕과 알렉산더는 매일 두 번 정도 전화 연락한다. 바쁜 영업 일정에 묻혀 도쿄 의제인 합작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의논할 틈은 찾지 못하고 있다.

 

냉동화물을 비롯해 액화가스와 화학제품 등 특수화물이 K해운을 통해 교통 정리되는 현실에서 그가 여유를 부릴 시간은 거의 없다. 국제경쟁에 철저하게 노출된 해운은 늘 긴장 속에서 배를 움직인다. 요즘은 사회주의 국가 선박들이 자유화와 개방의 물결을 타고 국제해운시장으로 쏟아져 나와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다행히 한국의 해운시장은 통폐합의 오랜 후유증에서 벗어나 호경기를 맞고 있다.

 

문민정부 대통령은 한손으로 금융실명제를 가동했고, 다른 손으로 군의 하나회 해체에 들어갔다. 갑자기 변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피곤을 호소하곤 한다. 해운회사 임원들은 떠돌아다니는 정보 수집에 안테나를 열심히 돌려야만 하고.

 

“피곤하니 집에 가서 좀 쉬자.”

 

오선덕은 모처럼 큰맘 먹고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지난 삼일 동안 소위 갑이라는 거래처들과 술자리를 하느라 피곤이 쌓이고 쌓여서 몸은 벽돌처럼 무겁다.

 

책상 위의 가방을 드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선덕아 나야. 윤수 말예. 지금 좀 만났으면 하는데?”

 

윤수는 고교 친구로, 하나회 해체가 본격화되자 첫 번째로 희생된 군인이다. 그는 스타 진급에서 누락됐다. 인생상담을 위해 귀 좀 빌리자고 했다. 영업상담 외는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해도 친구 좋은 게 뭐냐며 막무가내다.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강남역 부근 삼겹살집으로 갔다.

 

수도권 부대에 근무하는 친구는 대령 복장 대신 사복 차림이었다.

상담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너무 상심하지 마라. 인생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냐. 강창성과 윤필용의 운명이 서로 바뀐 거 봤잖아. 그게 새옹지마라 하는 거여.”

 

“남의 일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냐.”

 

대령은 소주를 연거푸 털어 넣었다.

 

사관학교 수석 입학하고 일등 졸업했는데 이럴 수가? 그의 울분은 그치지 않았다. 지구상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바보스런 똑똑이가 있음을 오선덕은 모처럼 확인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 구절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사람은 태어난 순서대로 죽을까? ……크크.

 

“군이 싫으면 교수나 공공기관으로 진출해도?”

 

실력이 있으니 그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생각하고 말한 것인데, 친구는 오히려 역정을 낸다.

 

“물고기더러 물을 떠나라고?”

그리고 “시팔~ 누가 이기나 두고 보자.”

세상을 향하여 그는 술잔 하나를 던졌다.

옆의 손님이 맞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문민정부는 엘리트 군인 한 사람을 포기했다.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겠지.

 

희망과 절망을 목발 삼아 양 겨드랑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택시를 태워 보내는데, 대령의 어깨는 절망 쪽으로 너무 처져 있었다.

 

변화된 사회에서 적응해 나가기 위해 사람은 피곤하다.

피곤한 사람은 술을 피곤하게 만든다.

사람과 술은 함께 피곤하다.

피곤하면서 웃는 게 사람이다.

 

 

 

전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오선덕은 벗어제끼기 시작했다. 부인이 주섬주섬 줍는다. 한아름 들고 그를 쳐다본다. 그녀는 웃었다. 그도 웃었다. 바깥은 전쟁터인데 가정은 너무 평온한 게 이상해서 웃어버렸다.

 

적당히 취한 그는 샤워를 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남자는 기분이 좋아 또 술 생각이 났다.

 

“여보, 우리…… 포도주 한잔, 어때?”

 

부인은 찬장에서 포도주를 꺼내왔다. 남편이 늦게 들어올 때 함께 와인을 한잔씩 하는데, 그게 싫지 않았고, 은연중 습관이 되고 취미가 되어 버렸다.

 

피로한 남자를 위로해주는 방법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다. 여자는 레이스가 달린 얇은 분홍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옆이 트인 잠옷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가 섹시하다고 언젠가 한번 말해줬더니 자주 그것을 입곤 한다. 살과 옷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은 살색의 취약점이다. 살색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는 이유를 알듯 말듯.

 

“애들은 공부하고 있소?”

 

“다들 자는가 봐요. 지금 11시 반인데.”

 

부인은 애들 방문을 열지 않아도 그들의 취침 여부를 안다. 베란다로 새어나오는 불빛은 좋은 도우미가 된다.

 

큰애는 옆방, 작은애는 건넌방에 있다. 건넌방에 더 주목하는 이유는 사춘기의 중학생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소음에도 예민하다. 비록 자고 있을지라도 부부가 합심으로 유의해야 하는 대목이다.

 

알맞게 몽롱한 상태에서 자정이 가까이 왔다.

시계 바늘 두 개가 서로 끌어안기 5분 전, 남자는 와인 병의 뚜껑을 닫고 일어선다.

 

주방 테이블에서 안방까지 부담스런 노동이 시작되었다. 팔에 안긴 여자를 침대에 내려놓았을 때 침대가 한순간 삐걱했다. 스프링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다행이다.

침대 위의 공기가 이상해질 무렵.

 

“따르릉~”

 

머리맡의 전화가 울렸다.

 

“미스터 오,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는 건 아닌지?”

 

당연히 주무시지.

전화 속의 여자는 뉴욕의 올가였다. 알렉산더가 전화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다. 올가로 하여금 전화하게 한 것은, 부끄럽고 미안한 시간에는 여성의 목소리가 용서될 거라는 알렉산더의 계산된 의도임에 틀림없다. 여성에 취약한 오선덕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래도 괜찮다. 사실 한밤중 전화 받는 일은 다반사다. 배가 많다 보니 선박사고, 계약취소, 선원교대…….

 

서울은 자정이지만 뉴욕은 오전 10시다. 알렉산더의 목소리는 맑았다.

 

“두 달 정도 지났으니 우린 충분한 검토기간을 거쳤소. 오늘 당신 계좌에 15만 달러 송금했으니 체크해 주시오.”

 

일방적이라 할 수 있으나 지난 2개월 동안 합작의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겁도 없이 개인 통장에 거금을 송금해버린 것.

루스키의 대담하고 끈질긴 대시에 오선덕은 거의 무릎을 꿇은 상태다.

합작 계약 내용을 구상해 두라는 말도 그는 잊지 않았다.

 

왜 15만 달러인가. 주식회사 설립 자본금을 2억 원 이상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 때문이었다. 한국 측 15만 달러와 합하면 자본금은 30만 달러로 환율 800원에 한화 2억4천만 원이 된다.

 

도쿄에서 만났을 때, 여행경비 송금이 필요할지 모른다면서 개인 계좌를 알려 달라하더니 이런데 쓰려고 했던가 보다.

 

알렉산더의 머리는 확실히 물레방아다. 잘 돌아간다. 합작 논의는 철저하게 개인 문제로서 오선덕의 근무 시간에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밤에 전화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알렉산더는 하던 이야기의 마무리에 들어갔다.

 

“내일부터 합작계약서 초안을 작성해 주시오.”

 

합작계약서는 뉴욕에 첫눈이 오기 전에 서명해야 한다고 우긴다. 눈이 오면 그동안 의논해 왔던 것이 눈 속에 묻히기 때문이라고 건사한 이유를 들이댔을 때 웃음이 나왔다.

 

“모든 내용 잘 알아들었으니, 나 이제 자도 돼요?”

 

분위기를 깨기 전에 전화를 마치고 싶었다.

대화를 빨리 끝내려는 이유를 알만하다고 알렉산더는 아리송한 말을 첨가했고, ‘굿 나잇’ 대신 ‘핑크 나잇’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제 자의든 타의든 합작에 들어가야 하는 상태다.

내일부터 회사에 진지하게 사직 문제를 마무리하는 작업이 남아 있다. 결코 농담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취기에 돌아가는 머리는 일의 우선순위를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합작’이라는 단어는 뚜렷한 이미지로 다가 온다.

 

“골치 아픈 일은 내일로 미루자. 오늘 밤은 가정의 합작이다.”

 

남자의 손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으로 목덜미로 유방으로 허리로, 그리고 곡선의 리듬을 타고…….

폭풍 속의 선박이 파도의 고랑으로 곤두박질치는 장면은 무서움보다 스릴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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