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한미합작

한미합작(II)

오선닥 2013. 12. 12. 17:11

1993년 여름

도쿄 임페리얼호텔에서

알렉산더와 오선덕의 만남 

 

 

 

 

한미합작

제2회

 

 

제국호텔

 

오선덕은 회사 선박과 용선 선박의 운항스케줄을 점검했다.

해상과 항구에 있는 선박들의 위치가 엉망진창이다.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배들의 위치를 차분히 앉아서 챙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포클랜드 오징어를 만선하여 유럽 혹은 극동으로 가는 배, 페루 오징어를 실으러 가는 배, 남태평양의 참치를 싣고 동남아로 가는 배, 북태평양의 꽁치와 정어리를 실으러 가는 배……

항구에서 하역하는 배, 조선소에서 수리하는 배……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20여척의 배들 위치가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을 만큼 그는 요즘 너무 바쁜 시간에 묻혀 살고 있다.

 

알렉산더가 이 바쁜 사람을 꼭 만나야 하나. 이유가 자꾸 궁금해진다.

이튿날 아침 답을 줘야하는 시간이 왔다.

오선덕은 전화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하루 저녁 여유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아, 좋아요 좋아. 그럼 오늘, 아니면 내일?”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빠른 반응을 보였다.

 

“모레 목요일. 그때까지 급한 일 처리 좀 해놓고.”

 

“그래도 괜찮아요. 내 스케줄을 하루 연장시킬 수밖에 없지.”

 

알렉산더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도쿄로 온다는 것만으로도 자기의 존재감을 인정해주는 증거로 여기고 싶은 것이다.

 

이제 오선덕은 한 가지 걱정에 맞닥뜨렸다.

갑작스런 도쿄 출장의 이유를 어떻게 회사에 설명해야 하나. 회사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을 권리가 있다.

 

마침 일본 가와사키 항에는 K해운이 인수할 용선 선박이 있었다. 그 선박이 알렉산더가 운항하는 러시아 냉동운반선이라는 것은 절묘한 조합이다. 알렉산더의 출장 목적에는 이 선박도 포함되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가와사키 항이 도쿄 옆에 있는 항구라는 것은 누가 봐도 출장 이유에 손색이 없다.

 

목요일 오후 3시 30분.

김포에서 나리타로 가는 비행기 탑승.

 

좌석에 기대곤 심호흡을 해보지만 머릿속은 온통 알렉산더가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뇌세포가 자꾸 기웃거리는 느낌이다. 늘 감탄해 마지않던 스튜어디스의 미끈한 다리도 오늘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옆자리에 앉은 파란 눈 아가씨의 머리카락 냄새도 참기름 냄새 이상은 아니다.

 

나리타공항에서 도쿄시내까지 가는 70분의 버스주행은 늘여놓은 고무줄처럼 길게 느껴졌다.

 

도쿄역에서 택시를 잡고,

 

“임페리얼호텔로 가주세요.” 하고 그는 주문했다.

 

“데이코쿠호텔 말입니까?”

 

택시기사는 일부러 일본어명을 강조한다. 데이코쿠(帝國)호텔이라고 호칭함으로써 기사는 열렬한 황국신민임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이코쿠(帝國)라는 이름은 아무 곳에나 붙여도 되는 이름이 아니다. 일본인이 고상하게 여기는 이름이다. 천황(天皇)을 엄숙하게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호텔은 백년의 역사만큼이나 규모가 크다.

로비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7시 20분을 가리켰다. 너무 높이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으므로 목이 좀 아팠다.

 

체크인을 담당하는 메니저는,

 

“오 사마.” 하고 너무 크게 말하여 왕을 알현하는 것같이 들렸다.

 

손님을 깍듯이 부르는 호텔직원들의 자세가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카운터 아가씨든 벨 보이든 직원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사마’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거기에다 ‘오’까지 전치(前置)하다니. 일본인들은 성기에도 ‘오’를 붙일 정도로 존칭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자, 오 씨라는 성이 일본에서 과분하게 존경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묘함이 느껴졌다.

 

 

간단한 가방 하나만 든 오선덕은 자기 방에 들어가지 않고 알렉산더를 인터폰으로 불렀다.

수화기를 제대로 내려놓았는지 염려될 정도로 그는 재빠르게 로비에 나타났다.

 

닥터 지바고가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사실 알렉산더 사치코프는 닥터 지바고를 빼닮았다. 얼굴 윤곽이며 콧수염이 특히 그러하다. 잘 생겼다는 뜻도 되고, 그 생김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는데 기억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왜 이런 호텔에 부킹했어?” 하고 오선덕은 따지다시피 물었다.

 

“일본의 프라이드를 짓밟고 싶어서…… 하하.” 알렉산더는 호탕하게 웃었다.

 

“비싼 호텔료는 왜 내는데?”

 

“머리 숙이는 일본 직원들이 볼만하잖아. 러일전쟁 땐 우리가 숙였지만…….”

 

“우리 코리아도 일본에 숙인 적이 있었지.”

 

“아니, 엎드린 적이 있었을 텐데……?”

 

“거룩한 코리아의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그러니 당신도 이 호텔에 오물을 떨어뜨리고 가면 돼. 하하”

 

천천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고 있는 중에 방향도 없이 가다가, 알렉산더는

 

“저녁 먹읍시다. 당신 기다리느라고 배가 너무 고파. 7시 반이 넘었군. 일식으로 해요.”

 

일본 콤플렉스에 걸렸나. 그는 계속 일본에게 덤벼드는 자세다.

알렉산더는 뉴욕의 한국 음식점을 자주 들르는 중에 회 먹는 법도 배워뒀단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친해졌는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풀어줄 기회다.

 

 

 

 

맨해튼 이야기

 

작년 1992년 12월 오선덕은 맨해튼에 2주간 머물렀다.

맨해튼에 있는 맨해튼호텔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맨해튼 섬에서 가장 큰 호텔은 아니다. 도시의 중구가 제일 중앙이 아니고, 제일교회가 제일 큰 교회가 아닌 거와 마찬가지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메가톤급 용선계약서를 가방에 넣고 왔다. 뉴욕의 T사와 한국의 K사 간의 냉동운반선에 대한 용선계약이다. 서명자는 물론 알렉산더 사치코프와 오선덕이다. 3년간 장기계약으로 조건이 같을 때는 선박사용에 우선권을 갖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계약서가 교환되고 귀국할 무렵 알렉산더는 공산주위 물을 먹은 사람도 감사할 줄 안다는 증거를 보였다.

 

“오랫동안 뉴욕에 머물러 줘서 고마워. 당신 덕분에 장기계약이 성사되어 행복해요.”

 

계약에서 어차피 당사자는 반쪽 만족일 수밖에 없다. 반쪽은 상대방 몫이다. 그런데도 알렉산더는 행복하다고 표현했고, 오선덕은 그 말이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난 지금 회사로 돌아가면, 책상이 치워졌을지도 몰라.”

 

알렉산더는 능청스럽게도,

“그땐 뉴욕으로 와요. 올가 옆에 커다란 테이블을 마련해 놓을 테니…….”

웃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올가 양은 오선덕의 전속비서 노릇을 했다. 속옷만 빨지 않았을 뿐 철저한 비서였다. 20대 후반의 러시아 여성 특유의 몸매는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그런 타입이었다. 들어갈 곳과 나올 곳이 뚜렷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서류를 책상에 놓는 동안 패인 가슴이 눈으로 들어왔을 때가 가장 곤혹스러웠다. 저녁에 혼자 있을 때 상상으로 딱 한 번 바지 속에 손을 넣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류 보편적 건강한 남자의 행동이라 해서 양심에 멍은 들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더 감사할 게 있는 모양이다.

 

“한국의 친구를 만난 건 영광이요. 이제 국제해운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군. 당신은 우리의 훌륭한 선생!?”

 

“그럼, 수업료 충분히 준비했나요, 하하.”

 

솔직히 성의를 다하여 계약서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해주면서 계약서 작성에 진지했었다. 니콜라이 톨스토이에게 문학을 가르치듯이 알렉산더 사치코프에게 해운을 가르쳤다고 자부할 만큼.

 

“수업료는 착불(payment on arrival)로 해요. 아마도 충분히.”

 

도착일(ETA)이 명시되지 않았으니 웃자고 한 말은 틀림없는데.

 

알렉산더는 십 미터 쯤 떨어져 있는 올가에게 얼굴을 돌렸다.

 

“올가, 보드카 칵테일 있잖아. 연하게 두 잔 만들어줄래요?”

 

올가 포포바는 평소 하던 대로 열심히 칵테일을 준비했다.

참, 올가가 남자였더라면 그녀의 성은 포포프로 불렀을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사무실 내에서도 간혹 연한 칵테일을 녹차처럼 마시곤 한다.

미국회사지만 러시아인 30여명과 미국 현지인 10명가량이 근무하는 회사는 사무실이 마치 러시아 나라 같다.

 

하이어베이스(Hire Base; 임대료)가 높은 중역이 2주간 본사 사무실을 비웠다는 건 그만한 보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기대해도 좋겠다고 알렉산더는 자신감을 보였다. 매일 머리를 맞대고 계약서 작성에 열중했으니 알렉산더와 오선덕이 친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백만 독자의 오해는 불필요하다. 오선덕의 귀국 항공기 탑승자 명단에 러시아 여성 올가 포포바는 들어 있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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