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금은 마련했지만…
합작계약서는 어떻게 작성하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미지를 향해서 달려라!
한미합작
제5회
사직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부사장은 사직서가 든 봉투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악취를 피하려는 듯 허리를 한 번 돌리고 제자리로 바로 앉았다.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오 상무?”
봉투 안에 든 사직서가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부사장은 화염을 덮어쓴 사람처럼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난 사장님께 말씀 못 드리니까, 오 상무가 알아서 하시오.”
오선덕이 사장실로 간 것은 이틀 후.
약간의 숙려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장은 이미 부사장으로부터 보고 받은 듯하다.
“오 상무, 생각을 바꾸면 안 될까. 알다시피 요즘 회사가 바쁘잖아. 특히 러시아와 장기용선계약도 있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그게 좀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이때 사장은 듣기를 멈추고 탁자 위 말보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오선덕은 테이블 위의 지포라이터를 얼른 집어 불을 붙여드렸다.
사장이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순간 오선덕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설립할 회사에서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동일한 선주이므로 전보다 더 협조적으로 해나갈 수 있습니다.”
비서실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쪽지가 고마웠다.
사장실을 나오니 해방된 기분이다.
점심 먹기를 미루고 자동차를 몰고는 한강으로 나왔다. 일부러 88올림픽대로를 달리며 강바람을 쓸어 모았다. 시원한 바람으로 흐트러진 정신을 헹구고, 강변에서 가까운 골프연습장에 가서 세 박스의 공을 날린 후, 야구스윙연습장으로 가서 방망이를 휘둘러 땀을 국수처럼 뽑았다. 사람을 설득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혹독하게 깨달은 하루였다.
사표 제출 사흘 만에 결재가 나왔다.
패티 김의 ‘이별’을 부르기만 하면 되는 건가.
“상무님, 영업부에서 회식을 준비했습니다.”
영업부장이 무랑루즈 룸을 예약했다고 한다. 시끄러운 홀 대신 룸을 택한 것은 석별하는 마당에 하고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칭찬이든 조언이든 원망이든 헤어지는 순간에 결자해지할 기회라고 하면서.
“유부남을 사모한 여직원은 이실직고할지어다.”
회식 중반 무렵 가스선(船)팀 과장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다들 당황하셨지요, 하는 표정들이다. 동석한 아홉 명의 눈동자가 화자에게 집중된다. 그 유부남과 여직원이 누구냐, 지금 밝히라고 다그치는 분위기 같다.
“조큽니다. 여러분들의 눈동자는 ‘쉬어자세’로 원상복귀해 주세요.”
하고 과장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김새는 말을 하고 말았다.
분위기가 회복되었지만 오 상무의 기분은 묘하다.
이때 케미컬선(船)팀 김양희 대리의 시선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총각이었다면 상무님께 프러포즈했을 거라고 말한 적 있는 영업 베테랑 여직원이다. 케미컬 화물의 특성을 너무 잘 알아 화물에 따라 선창 청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박식하게 알고 있다. 벤젠, 톨루엔, 자일렌 등의 구조식을 척척 그려낸다. 만약 벤젠이 벤젠고리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가 찾아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선박 방문을 위해 인천항으로 함께 차를 타고 갔을 때, 훌륭한 배우자를 소개해주는 것이 상사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양희 씨는 배우자로 어떤 남자가 좋아, 신성일 스타일?”
오 상무의 질문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신성일은 제 스타일이 아녀요. 상무님 같은 남자……. 전 현실적예요.” 하고 말했다.
‘현실적’ 의미를 끝내 캐묻지 않은 채 그들은 배의 현문사다리에 도착하고 말았다.
무랑루즈 룸에 간편 가라오케 장비가 들어오자 분위기가 달라져간다. 작년에 일본 가라오케가 처음 부산에 수입되었지만, 서울에는 금년 들어 한두 군데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보는 장치에 모두들 신기해한다. 기계에 따라 노래 부르기가 아주 흥겹다는 감탄이다.
회식의 막이 내릴 무렵 한 여직원이 ‘친구야’를 합창하자고 제안하자, 빙 둘러 어깨동무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김양희의 오른손이 오 상무의 어깨에 고리가 되었다.
벤젠의 고리?
의도된 것은 아닌데
양희 씨, 유부남은 부인이 있는 남자라는 뜻이야.
대외비
합작계약서(Agreement of Joint Venture) 작성은 넘어야 할 산 중에서 가장 험난하다.
“전문가에 맡겨야 하나?”
그 전에 알아볼 만한 곳은 다 접촉해 보기로 하자.
상공회의소, 선주협회, 무역협회.
아, 외국인투자기업협회도 있지.
아니 재무부를 방문해 상세하게 알아봐야 되겠구나.
그러나 합작회사 설립 신청이라면 모르지만 합작계약서 내용은 재무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아, A해운회사를 찾아가자.”
자신도 모르게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입가에 미소가 사푼 머금어진다.
A해운은 일본과 합작한 해운회사다. 거기에는 오선덕이 전부터 업무 관계로 알고 지내던 권유선 총무차장이 근무한다.
“그녀라면 도와줄 거야.”
모르는 문제의 답을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권 차장이 현재의 한일합작 A사로 스카우트돼 오기 전 H상선 업무 과장으로 근무했었다. 일처리가 깔끔하다는 평판이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 오선덕이 용선료 청구를 했을 때 그녀가 신속하게 처리해준 것이 인연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찾아갔을 때 그녀는 기대했던 대로 친절히 대해줬다.
“알겠습니다. 절대 외부유출하시면 안 됩니다.”
그녀는 합작계약서 원본을 살짝 보여줬다.
표지에는 ‘대외비’ 주홍글씨가 큼직하게 찍혀 있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내일 퇴근 후 저희 집으로 오세요. 한가할 때 복사해 놓겠습니다.”
그녀는 한남동 빌라 주소를 건네주었다. 간단한 주소는 그만큼 찾기가 쉽다는 뜻이 된다.
복사 분량도 많지만 비밀서류는 엄밀히 취급해야 하므로 집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혼자 사는 여자 집을 방문할까 말까를 주저할 상황은 아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 배려에 감사할 뿐이다.
“내일 오후 6시반경 댁에 들르겠습니다.”
이른 퇴근 시간을 제안했고 그녀는 끄떡였다.
남편과 사별한 여성의 눈치를 살필 필요는 없지만, 만약 이웃이 본다면 드라마 소재감이다.
“늘 차 조심하세요.”
사무실에서 나올 무렵 그녀는 친절했다. 친절에 이유가 있을 리 없지만 그녀의 인사는 속이 차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남편은 5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 조종사가 항공기사고가 아닌 자동차사고로 죽었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으로 운명의 개입을 믿으려는 사람도 있다. 휴가 중 혼자 고향에 성묘 갔다가 빗길에 전복하여 즉사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사고확률이 비행기, 선박, 자동차 순일 거라고 생각될진대 현실은 거꾸로다. 아마도 사고 회피 공간이 3차원, 2차원, 1차원 순으로 좁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의 생명보험은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애를 KBS합창단에 보내고, 도우미 아주머니를 두며 유복하게 뒷바라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방문
이튿날.
오선덕이 빌라 현관에 들어섰을 때 권유선은 퇴근하여 옷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맞이했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좋겠지요. 오 상무님은 워낙 바쁘신 분이라서.”
그녀는 커피잔을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옆의 가방에서 합작계약서 복사본을 꺼냈다.
커피 마시면서 계약서를 검토하라는 뜻이다. 소위 투잡이다.
“계약서는 국제변호사가 작성한 건데 2만 달러가 소요됐어요. 원하신다면 그 법무법인 소개해드릴 수 있어요.”
변호사 비용에 오선덕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비쌉니까? 저희 합작회사는 규모가 작아서…….”
“저렴한 곳을 알아봐 드릴 수도 있어요.”
이미 금액에 주눅이 들어버린 오선덕은 ‘좀 생각해보겠다’ 하고는 커피 마시기에만 열중했다.
“자본금은 얼마로 하실 계획이세요?”
“30만 달러.”
“그게 작은 규몬가요? 저희 회사도 자본금 4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아요. 해운대리점 회사로선 큰 편이지만 선주 회사에 비하면 소규모에 불과하지요.”
“권 차장님 회사는 국내랭킹 서넛 번째 가는 해운대리점이잖아요.”
그 회사는 직원이 80명에 가깝다. 주로 컨테이너 정기선 화물을 취급하고, 반면 오선덕의 합작회사는 직원 20명 정도로 거의 냉동운반선을 취급할 예정이다.
“미국회사와 합작하시다니, 역시 오 상무님은 대단하셔!”
“정확히는 슬라브인이 경영하는 미국회사지요. 한국에서 러시아인과의 합작은 우리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화하면서 오선덕은 계약서의 내용을 대충 눈으로 훑어보았다. 이 정도면 직접 만들어도 되겠구나, 판단하고 그는 계약서 복사본을 소중하게 가방에 넣었다.
“다음 화요일 점심 같이해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 넉넉히 여유를 갖고 나오세요.”
오선덕이 현관에서 구두끈을 묶는 동안 여자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페니큐어가 예쁘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일어서면서 그녀와 악수했다. 매니큐어도 예쁘네. 서른다섯 살이라면 그 정도 센스쯤이야.
권유선의 집을 나오면서 그는 다음 화요일 스케줄을 생각해보았다.
S백화점 8층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3층 여성의류 코너에서 빨간색 코트를 사고, 6층 아동용품 코너에서 어린이 가방을 사서 그녀에게 선물하기로 잠정 결정을 내렸다.
그러고 혼자 생각해본다.
“2만 달러어치에 보답하는 선물 치고는 넘 짜지 않을까?”
오선덕은 수지맞는 장사로만 계산하기에는 너무 미안하다. 선물은 모두 합쳐도 기껏 백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니다. 그녀와 딸을 위해 제주도여행 티켓은 마련해줘야겠지?”
거기까지 미치자 미안함이 조금 줄어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