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한미합작

한미합작(III)

오선닥 2013. 12. 24. 22:49

1993년 여름은 덥지만

호텔 방에서 밀담은 계속

‘합쳐보자’

뭘?

 

 

 

 

한미합작

제3회

 

밀담

 

바깥은 더우나 호텔의 일식당 안은 시원했다.

 

여름의 더위가 생선회 접시 위에 내려앉았다가 안개를 살짝 피운다. 태평양을 지날 때 더운 공기가 차가운 해면에 닿아 일어나는 해무도 그랬다. 수분 먹은 생선회가 입으로 들어가면 식도로 미끄럼 타 내려가고 미각이 쾌감을 준다.

 

일식당 안에는 서양인이 딱 한 사람 있다. 그 사람이 알렉산더이고, 걸신처럼 먹는 모습은 회를 미각으로 먹는 식당에서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 취향대로 먹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컷 먹어둬요. 오늘밤 내 방에서 마라톤회담이 있을 테니까.”

 

궁금증을 자꾸 증폭시킨다. 뭔가 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이다. 여름 더위도 해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그는 예전의 침착함이 길들여진 것과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

 

오선덕은 마라톤회담의 의제를 묻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비밀을 스스로 토해낼 때까지는 건드리고 쉽지 않은 것이다.

 

대신,

“본격 회담에 들어가기 전 공원에 바람 좀 쐽시다.”

제안했다.

 

알렉산더는 20분간이라는 조건을 달아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임페리얼호텔에서 500미터 거리에 있는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간에 산책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집안의 더위를 싸 들고 나와서 공원에 털어 놓는 것처럼 사람들은 팔을 휘젓고 다녔다.

 

둘은 공원의 중앙을 걸었다. 100년 전 일본식 정원에다 독일식 화단으로 꾸민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 도심에 만들어진 것은 대단하다. 3200그루에서 뿜어대는 나무의 향기가 콧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사랑을 위해서 전위가 필요하듯 회담을 위해 맑은 공기를 마셔두는 것이 필요할지도.

 

일본의 고쿄(皇居; Imperial Palace)가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해자(垓子)가 있어 일본 왕을 만날 수는 없겠지. 다리를 건너는 순간 보초병이 멱살을 잡겠지. 메이지유신 때 교토에서 이곳 에도성(江戶城)으로 옮긴 것은 이런 안전 때문인가.

 

“이유는 더 있지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위해서. 도쿄는 항구가 있잖아요.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문 말이지요.”

 

알렉산더의 견해가 옳다.

평소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을 좋아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모르고, 여름철 매미는 봄, 가을, 겨울의 계절을 모르는 한계적 사고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곤 했다. 일찌감치 뉴욕으로 건너간 자신이야말로 고르바초프의 지지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한가하게 정치 역사에 시간을 빼앗길 때가 아니지. 내 방으로 갑시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사람처럼 호텔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응접테이블을 마주하고 둘은 앉았다.

일본녹차를 마시려 했으나 일식당에서 차를 마셨으므로 커피를 하기로 했다.

 

커피 물이 끓기 전에 알렉산더는 말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미스터 오, 사업할 생각 없어요?”

 

갑자기 방안에 누구 없어요, 하는 소리로 들렸다.

너무도 낯선 목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오선덕은 동문서답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지금도 우린 해운업을 하고 있잖아요.”

 

“말하자면, 당신이 회사 차릴 생각 없느냐고?”

 

아, 그렇구나. 최고급 호텔을 예약한 것은 최고급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였구나.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는 준비되지 않은 답변만 있을 뿐이다.

 

“……”

 

“우리 합작회사 만듭시다.”

 

알렉산더는 일인극을 하는 사람 같았다.

오선덕은 충실한 관객이었고.

 

“?”

 

“서울에 합작회사를 만드는 거요. 한미합작 해운회사.”

 

참으로 괴상한 친구다. 자본주의 물 먹은 지 2년도 채 안 되었는데 합작회사의 의미도 알다니? 고것 명석한 루스키(러시아인)네. 뉴욕에 체류할 때도 합작회사에 대해서는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닥터 지바고는 의사가 됐더라도 성공할 놈이야.

 

“물 끓었으니 커피 한잔 하면서 얘기합시다.”

 

오선덕은 일부러 커피포트 쪽을 가리켰다. 템포를 늦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임기응변에 능할 정도로 자신의 머리 회전은 빠르지 않다.

 

 

 

작품

 

“네슬러 커피 맛이 어때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오선덕에게 알렉산더는 물었다.

 

“커피 맛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근데 부드러운 감촉에 강렬한 향기?”

 

“그래요, 그게 콤비네이션이지. 합작 냄새 나지 않아요?”

 

그러곤

 

“‘네슬러 일본’은 스위스와 일본의 합작회사라고요.”

 

하고 알렉산더는 개념없이 갖다 붙였다.

 

그렇구나. 닥터 지바고의 합작에 대한 의지는 대화에서도 여실히 엿보인다.

 

그가 합작회사를 주장하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풍부한 화물과 러시아의 풍부한 운반선을 잘 활용하자는 의도이다.

 

합작회사를 차리면 한미합작이냐 한러합작이냐?

법적으로는 한미가 되고 내용은 한러가 되는 것인가.

 

“일단 생각할 시간을 줘요. 회사 업무가 산적해 있어서.”

 

오선덕은 머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러나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결정하는 거요.”

 

주저하는 사람을 몰아붙이는 방법까지 루스키는 알고 있었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빠질 상황이 안 된다는 오선덕의 말에 대해사도 그는 이미 반박이 준비되었다는 듯 상담자의 자세로 나왔다.

 

“회사는 조직이 움직여요. 한 사람이 빠진다고 톱니바퀴가 망가지는 것은 아니요.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일종의 우월감이라 할까.”

 

자존심을 건드릴 줄 아는 걸 보니 모든 것을 꿰차고 있는 느낌이다. 만만찮은 친구다.

주저하는 오선덕에게 그는 말을 이었다.

 

“기회는 화살 같아요. 활을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라고. 물론 나에게도 기회가 되기 때문에 권하는 거지요. 한 달의 여유면 되겠어요?”

 

그렇지 않다. 회사 직무를 두부 자르듯 일시에 그만둘 수 없다.

대답이 궁할 때는 커피 한모금의 힘이 크다. 커피가 진하게 혓바닥을 훑고 흘러 들어갔다.

 

“적어도 3개월의 여유가 필요해요.”

 

“알았어요. 3개월, 충분하겠지요. 기다릴게요.”

 

오디오장치의 디지털시계는 새벽 1시30분을 가리켰다.

한 자리에서 4시간을 보냈다는 뜻이다.

 

할일이 끝났다는 듯 알렉산더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이제 알코올로 머리를 식힙시다. 당신 머리가 석고처럼 굳어 있는 것 같으니까. ”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술을 많이 마신다는 러시아인이 술을 마실 때를 아는 것이 대견해 보였다.

 

한 시간 동안 기분좋게 마셨다.

자신의 와이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따뜻한 여름 흑해의 아름다운 항구 소치 해변에서 한 아담한 아가씨를 만났다. 여자는 러시아 볼쇼이 극장의 발레리나였다. 한 상선사관의 흰 제복에 압도당해 사진 한 번 찍은 게 인연이 되어 편지를 주고받았다. 연애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상선학교를 졸업한 해 24살의 청년은 20살의 발레리나와 웨딩 링을 교환했다. 첫딸이 결혼 10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다.

 

“오늘 밤 긴자에 가지 않겠나. 쭉쭉빵빵 깔렸다구.”

 

오선덕의 제안에 그는 “야밤에 거리로 나가는 게 위험하지 않으냐?”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세계에서 새벽에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라는 말에 안심하는 듯하면서도, 호텔에서도 군인이 경비 서는 러시아의 상황과 너무 달라 이해가 쉽지 않다는 눈치다.

 

“발레리나 나타샤 한 명이면 족해.”

 

질투할 정도로 그는 애처가였다.

내일 뉴욕으로 돌아가면 발레리나는 속옷차림으로 기다릴 거라고 했다. 당신 와이프는 아예 벗고 기다리겠지, 하고 그가 농담했을 때, 오선덕이 한국은 치안이 철저하므로 벗고 기다려도 안전하다고 말하자, 이런 카레이스키(한국인)가 다 있어? 식으로 쳐다보았다.

 

회담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올 무렵,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는데, 우린 40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회사를 만들자는 거, 잊지 말아요.”

 

알렉산더는 다짐을 해둬야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이튿날 아침 7시 모닝콜에 그들은 일어났다.

가와사키 항에 정박해 있는 선박을 함께 방문하기로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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