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작성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한 이유?
혹시 합작을 시도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고…
관건은 두려워하지 말라
빼어든 칼은
호박이라도 찔러봐야 한다
한미합작
제6회
계약서 작성
권유선 집을 나온 오선덕은 운전석에 앉고는 자신의 가방을 열어보았다. 합작계약서 복사본이 얌전하게 들어 있다. 007영화에서 스파이가 작전을 마친 후 느끼는 쾌감을 이해할 것만 같다. 묘하고 짜릿한 기분.
“역시 여자는 지구상에 존재해야 돼.”
오선덕은 그녀가 사본을 전해주면서 지어 보인 모나리자 같은 미소를 잊을 수 없다. 계획하는 일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는 눈빛이었다.
“고맙다, 그대여.”
그런데, 어렵게 입수한 자료를 어떻게 써먹지?
회사를 그만뒀으니 오선덕에게는 나가서 일할 사무실이 없다. 그렇다고 친구의 회사나 도서관에 갈 처지도 못된다. 집에서 죽치고 두문불출하여 합작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필 따름이다.
계약서의 내용이 복잡해 변호사나 컨설턴트를 써야겠다는 유혹이 자신을 자꾸 괴롭힌다. 큰 사업을 위해서는 돈 좀 써도 괜찮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곤 하나, 피 같은 자본금을 이런 데 쓰기는 진실로 아깝다.
계약서의 첫머리에 주주 명부가 등장하고 계약 합의를 약속하는 문구가 들어간다. 주주 3명 이상이면 주식회사 설립이 가능하지만 합작의 권위를 생각해서 5~7명 정도로 하자.
자본금 비율은 한국과 미국이 51:49로 합의한 바 있다.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따라 내국인 투자율이 과반이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얼마 전에 외국인 투자비율의 제한 규정이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알렉산더는 무방하다고 했고, 송금액에서 남은 자투리는 이후 대리점료로 정산하면 된다고 양해했었다.
“짜식, 생각보다 인심 좋네. 닥터지바고!”
넉살좋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고마웠다.
주주는 한국 측 6명과 미국회사를 대표한 알렉산더와 함께 모두 7명이 세워졌다.
요즘 오선덕의 생활은 밤낮의 시간이 뒤바뀌어 있다.
올빼미형이 아닌 새벽닭형인 그는 여지없이 고생문으로 들어선 것이다.
뉴욕과 팩스를 주고받으며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밤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자정 무렵 뉴욕으로 전화하는 오선덕.
여자의 목소리가 받는다.
“미스터 오, 우리 보스는 올가와 커피를 함께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곧 전화하도록 할게요.”
그녀는 알렉산더의 미국인 비서 레베카다.
오선덕과 올가와의 주종관계를 아는 그녀는 살짝 질투심을 건드려 놓는 것이다.
상냥한 여성이다. 그리고 영어를 참 잘한다. 미국인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미국 영어가 아닌 영국 영어를 잘한다는 뜻이다.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출신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순도 백퍼센트의 뉴요커라고 말한 적 있다.
말랑한 젤라틴 피부와 오통통한 새우살 목덜미가 레베카의 전매품이다. 톡톡 터지는 캐비어의 향기가 몸 전체에서 풍길라치면 동양적 미인을 연상시킨다. 닥터지바고도 이런 타입을 좋아한다고 슬쩍 고해성사한 바 있다.
10분 후 전화 속의 알렉산더는,
“오래 기다렸지? 커피 마시느라고…….”
올가와 커피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도 되나?
아, 농담할 시간이 아니지.
“매일 5페이지씩 초안 작성해서 팩스 보낼 테니 하나씩 검토해나가자구.”
하고 오선덕이 말했다.
“OK, 해외담당 변호사와 검토해서 답하겠소.”
뉴욕 T사에는 두 명의 변호사가 근무하고 있다.
국내담당 변호사와 해외담당 변호사.
합작계약 관계는 해외담당 변호사의 업무영역이다.
말해놓고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알렉산더는,
“By the way(그런데), 회사명은 어떻게 할 거요? 생각해둔 것은 있고?”
하고 물었다.
평소 생각해둔 것이 없었더라면 당황할 뻔했다.
“글쎄 생각해봤는데, ‘SH해운’.”
“무슨 뜻?”
“Success & Harmony Shipping Company."
“아, 좋아요. 뉴욕에 와서 성공과 화합을 위해 건배합시다,”
졸지에 회사 이름이 결정된 것이다.
S는 선덕과 사치코프의 이니셜을 함께 포함한다고 하니까 그는 너무 흐뭇해했다.
계약서 내용은 다음의 순서대로 착착 검토돼 나간다.
첫째 날: 회사의 조직, 목적, 정관 등
둘째 날: 출자금액, 비율, 주식 종류, 납입, 양도, 신주인수권 등
셋째 날: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 업무 분장 등
넷째 날: 운영자금, 배당금, 회계장부, 설립비용, 조세 등
다섯째 날: 양도금지, 경쟁금지, 계약효력, 법령적용, 중재 등
여섯째 날: 대리점계약서 내용 등
일곱째 날: 대리점 수수료 결정
마치 신이 계획한 천지창조의 스케줄 같다.
차이점은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 아닌, 돈 문제를 의논하는 날이라는 사실이다.
돈이 있어야 먹고 살고, 그런 후 편히 쉴 수 있지 않느냐로 이해하면 괜찮을까.
계약서 내용은 타이핑하지 않고 일일이 수기로 작성해서 팩스로 보낸다. 실은 작성이 아니라 베끼는 것이다. 손으로 쓰다니 바보 아냐?
그러나 나름대로의 계산이 오선덕의 머릿속에 들어있다.
조항마다 자신이 직접 구상해서 작성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오선덕, 사기 치지 마. 넌 엉터리야!”
갑자기 누군가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라고 하면서.
남의 계약서를 그대로 베끼는 몰염치는 용서할 수 없어, 하는 것 같기도.
“베끼는 것도 쉽지 않아. 알아야 면장노릇 하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어?”
자신은 항변하고 있다.
아, 이런 싸움도 있구나.
베낀 보람이 있었는지, 너무도 충실한 내용이었다. 때문에 상대는 수용에 인색하지 않았다. 다만 대리점 계약서의 집하수수료(集荷手數料) 부분에서 정기선화물 5%를 3.75%로, 부정기선화물 3.75%에서 2.5%로 조정한 것은 예상했던 부분이다. 수정을 예상하고 처음부터 높게 설정한 면이 있었으니까. 광석 등 대량화물은 1.25%로 시장의 관례에 따랐다.
커미션 부분이 확정되자 태어나서 느껴보지 보지 못한 자부심을 한꺼번에 다 받아보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계약서 작성에서 특이한 조항에 주목하고 싶다.
주주의 유고 시에는 기존 주주에게 감정가로 공평하게 매각하는 것. 계약기간 중 혹은 계약해지 후 5년 동안 동종 또는 경쟁 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 한국과 미국의 관청인허가 시점부터 효력 발생한다는 것(혹시 있을지 모를 어느 일방국의 법령 저촉 가능성 때문). 합작법인 인허가취득 의무는 한국 측에 있다는 것. 적용법은 한국 법령으로 하고, 분쟁 중재는 런던 중재원의 3인 중재위원회에 회부하는 것. 당해 합작계약서가 다른 합의서보다 우선하고 정보의 기밀을 유지하는 것.
대리점 계약이 체결되어야 합작이 유효하다는 것은 영업 주업무가 대리점 업무이기 때문이다.
서류는 영어원본 3통을 작성하여 우선 적용한다. 한국어와 러시아어로도 만들어지나 어디까지나 참고용에 불과하다.
계약 체결
팩스를 주고받으며 일주일 만에 계약서 초안이 작성됐다.
합작계약서(Agreement of Joint Venture)는 주주 7명의 서명란이 만들어지고, 대리점계약서(Agency Agreement)는 합작회사 대표 오선덕과 미국의 T회사 대표 알렉산더 사치코프의 서명란이 만들어진다.
“수고했소. 뉴욕으로 와서 서명합시다.”
초안 작성이 끝나자 알렉산더는 오선덕의 뉴욕 방문을 재촉했다.
“야간작업하느라고 난 녹초가 됐어. 시금치에 소금 뿌린 것 같아.”
오선덕의 표현은 거짓말이 아니다. 몸살기운이 조금씩 피부를 뚫고 나온다.
“맨해튼호텔 특실을 예약해두겠어. 뉴욕에 와서 쉬어요. ㅎㅎ.”
알렉산더는 당장 내일이라도 비행기를 타라는 말투다. 전세기가 없어 죄송하다고 농담할 때는 그리스 선박왕 오너시스 흉내로 들린다. 재클린이 타고 갔다고 둘러대는 것처럼.
가을은 어느덧 막바지로 접어들었지만 오선덕에겐 금년 가을단풍은 생략되고 말았다. 합작 작업이 이 모든 계절의 풍유를 훔쳐가 버린 것이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11월 중순.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는 오선덕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많다. 따뜻한 분위기가 휘감도는 사무실에 마음이 편안하다. 우선 올가가 옛날 보스를 보자 활짝 미소를 짓는다. 레베카는 알렉산더의 눈치를 보며 흰 이빨을 보인다. 안드레이와 세르게이는 자신들의 상관이 온 것처럼 반겨준다. 한국에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한국이 결코 낯선 곳이 아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뉴욕에 도착한 다음날 양측은 서명식을 가졌다.
합작계약서와 대리점계약서에 깔끔하게 서명한다. 오선덕은 일생에서 가장 값나가는 사인을 했다고 자부한다. 사인 마지막 부분의 올챙이 꼬리가 어느 때보다 멋있어 보인다.
저녁엔 회식 자리가 만들어졌다.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한국식당 한수장.
합작회사 설립을 축하하는 자리로 변했다.
“성공과 화합을 위해 건배!”
합작회사명 SH를 두고 알렉산더가 건배를 외쳤다.
“한국과 러시아를 위해 건배!”
이번에는 업무부장 블라디미르가 건배를 이끌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내담당 변호사가 나서면서,
“한국과 미국을 위해 건배!”를 외쳤다.
한미합작이니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빼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좀 우스꽝스럽다.
뉴욕방문을 2박3일로 끝내는 것은 항공료가 아깝긴 하다.
그러나 지금은 비용보다 시간이 아까운 상황이다.
합작회사 설립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새로 스카우트한 총무부장이 모든 등록업무를 담당한다.
서명 일주일 만에 ㈜SH해운을 법원등기소에 등록하고, 강남세무서에 사업자등록을 마쳤다.
사무실은 강남역 사거리 우뚝 솟은 건물 15층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테헤란로는 최근 창업거리로 상징되고 있다.
사무실의 주인이 된 기분은 일단 소파에 앉아봐야 알 수 있다. 쿠션이 CEO의 무게를 잘 조정해 준다. 소파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주위 건물의 조화도 마음에 든다.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코를 골고 잠들어버릴지 모르니 일어나자.
이제 외국인투자인가 수속에 들어가야 한다.
합작계약서와 대리점계약서는 공증이 필요하다. 모든 주주와 계약당사가 공증사무소에 입회하는 것이 원칙이나 위임장을 받아 공증 수속에 들어간다. 알렉산더는 이미 모든 권한을 서면으로 오선덕에게 위임한 상태다. 공증은 등기 후 2주경 12월 중순 완료했다.
서울에서 공증을 마친 두 개의 계약서는 뉴욕에서도 공증을 받아야 한다. 한미합작이기 때문이다. 공증 후 뉴욕에서는 하나 더 확인을 받아야 한다. 바로 뉴욕주재 한국총영사의 확인이다.
1994년 정초 뉴욕으로 날아갔다.
첫날 뉴욕 공증사무소에 들르고, 이튿날 한국총영사관으로 향한다.
뉴욕 회사에서 영사관까지는 3백 미터 거리다.
“미스터 오, 혹시 미국이나 영국에서 거주한 적 있어요?”
함께 영사관으로 걸어가는 중 해외담당 변호사가 오선덕에게 물었다.
No라고 했다. 그럼 영어는 어디서 배웠냐고 그는 계속 물고 늘어진다. 한국에선 중학 때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해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계약서가 퍼펙트하다는 것이다. 베꼈다고 했더라면 그는 또 한 번 놀랐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해운항만청에 대리점계약서를 제출하여 대리점 면허를 받은 후 닷새 만에 다음의 서류를 제출하여 재무부로부터 외국인투자 인가를 받았다.
-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
- 외국인 출자기업 사업계획서
- 합작투자계약서(대리점계약서 첨부)
- 외국인 국적증명서
- 외국인투자자 대리권증명서
사업계획서의 머리말에는 거창한 문구가 들어갔다.
<우루과이라운드로 세계 무역량이 증가해 해운업이 발전하고 있다. 특히 남미지역의 무역량이 증가하고 한국을 중심으로 어획물 운송이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운송선이 필요하다>
합작법인 설립의 타당성이 웅변식으로 강조되다니.
모든 인허가 절차가 완료되자 회사 창립식이 1월 15일로 결정된다.
“권유선 차장을 초청해야지.”
계약서 사본을 빼내준 그녀의 공로는 표창감이다.
선물로 사준 빨간 코트는 입고 오겠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