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한미합작

한미합작(I)

오선닥 2013. 11. 29. 21:53

  러시아가 오선덕의 운명 속으로 파고든다

 

1990년대 초 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가 장자 상속받아

15개 독립국가의 종주국이 되고

 

국제 감각이 뛰어난 눈치 빠른 몇몇 슬라브인이

세계의 중심지 맨해튼으로 건너가

해운회사를 설립하는데…

 

이 회사가 오선덕을 꼬드겨

한미합작 해운회사를

서울에 설립하는 이야기…

 

흥미진진할 거라고?

 

<수회 연재>

 

 

 

한미합작

제1회

 

러시아인

 

자신의 미래를 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까. 어쩌면 불행해지기 전에 인생이 너무 따분해 살맛을 잃을지 모른다. 미래를 모르는 인생이 다행스러운 것은 인생은 모름지기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삶의 역동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참 신기하다.

 

오선덕은 운명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요즘 자신의 운명에 조그만 변화가 보이는 것 같아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개인이 아니라 한 국가가 그의 운명에 개입하려는 느낌이 들어 적잖이 당황해진다.

 

지구의 북방에 소련연방이 있었고, 이 연방이 무너져 15개 독립국가로 분리된 것은 1991년 끝 무렵이다. 70여 년간 쇳덩어리처럼 단단해 보였던 거대한 연방은 옐친이라는 사람이 탱크 위에 올라가 깃발 한 번 흔들어대더니 와해되고 말았다. 똑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희망은 한 번도 현실이 되어보지 못하고 공룡 나라는 무너졌다.

 

아, 러시아가 서서히 클로즈업된다.

 

붕괴된 소련연방을 장자 상속받은 러시아는 대외채무를 비롯해 연방의 상속을 군소리 없이 모두 끌어안았다. 여지없이 장자다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땅덩어리는 연방의 3/4을 가져갔지만 인구는 반밖에 건지지 못했다. 1억4천만은 미국 인구의 반이 채 되지 못하는데도 땅덩어리는 아직도 지구 육지의 1/8을 차지할 정도로 거인 국가다.

 

연방 해체 후 독립국이 된 러시아가 오선덕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소설을 쓰게 만든 마중물, 즉 해운용어로 프라이밍 워터(priming water)라고 한다.

 

“미스터 오, 도쿄로 좀 와주겠어요?”

 

아침 8시 오선덕이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뉴욕에서 걸려온 전화의 첫 마디였다. 전화를 건 곳은 뉴욕이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그렇듯 러시아인, 그 사람이다.

 

이 시간이면 틀림없이 출근해 있는 오선덕 상무의 근무습관을 잘 아는 터라 그는 수화기에서 찰가닥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미스터 오’부터 시작한다. 한번은 오 상무가 화장실 간 사이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도 ‘미스터 오’였다. 아주머니가 오선덕으로부터 배워둔 유일한 영어 ‘원 모멘트, 프리즈’라고 하자, 상대방은 여성비서가 받는 줄 알고 길게 이야기하려 하는데 상대 쪽의 오랜 침묵에 전화기를 놓고 말았다. 여성비서라면 쫄깃한 대화를 계속하려 했던 모양이다.

 

오선덕이 다른 직원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한다고 해서 월급이 더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뉴욕 퇴근시간인 오후 6시를 맞추기 위해서일 뿐이다. 미국은 좀체 시간외근무를 하지 않아서 부지런한 한국인이 늘상 손해 본다. 배고픈 러시아인이지만 미국에 산다고 미국인양 거드름 피우는 것이 아니꼽지만 할 수 없다.

 

“알렉산더, 갑자기 도쿄라니?”

 

알렉산더 사치코프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한마디로 똑 소리 나는 위인이다. 국가명이 러시아로 바뀌자 평소에 익혀둔 영어가 자신의 위치를 신천지로 옮겨놓을 거라고 믿고 그는 세계의 중심지 뉴욕으로 눈을 돌렸다.

 

뉴욕 맨해튼으로 키를 돌려!

 

선장출신인 알렉산더는 인생의 뱃머리를 맨해튼으로 돌리기로 결심했다. 42세의 젊은 패기답게 액션이 누구보다도 빠른 그는 러시아가 독립국가로 된 이듬해인 1992년 초 맨해튼에 있는 한 러시아계 무역회사의 사무실 옆에 T해운회사를 설립했다. 러시아인 30여명을 데려오고 미국 현지인 10여명을 고용해 해운회사를 시작했다.

 

지금이 1993년 8월이니 그의 뉴욕생활은 1년 반이 지난 셈이다.

 

“도쿄 출장갈 일이 생겨서 그때 만났으면 하고…….”

 

“글쎄, 상황을 체크해봐야겠는데.”

 

오선덕이 머뭇거리자 알렉산더는 만나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다.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로 의논하지 못할 일이 있을까. 일단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고, 일정에 이상이 없으면 그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알렉산더 사치코프는 오선덕에게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다. 냉동운반선만 100여척을 운항하는 회사의 부사장이다. 직책은 부사장이지만 사장과 다름없다. 모든 선박의 운항권이 뉴욕 맨해튼에 있는 그의 손에 달려 있다.

 

한편 사장 레오나르드 레프는 미국 시민권자로서 회사 운영의 편의를 위해 대표를 맡았을 따름이다. 사장은 15년 전 미국에 건너와서 지금까지 줄곧 러시아제 무기를 거래해 왔다. 알렉산더가 러시아인을 무더기로 데려오고 많은 선박을 가져왔으니, 레오나르드는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놓은 셈이다. 낯선 땅에 와서 헤맬 뻔한 알렉산더로서도 의지할 동족이 있다는 게 마음 든든하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뭐, 운항선박이 100척이나 된다고?

 

놀랄 일이 아니다. 아직도 러시아는 구소련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어 회사들이 대부분 국영이다. 나라 전체 냉동운반선을 한 국영회사에 끌어 모아둔 것이다. 국제해운 경험이 적어 뉴욕에 운항회사를 설립한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러시아는 한국과 일본에 냉동운반선을 많이 임대했다(charter out). 특히 냉동운반선이 절대 부족한 한국이 러시아 선박을 많이 빌렸다.

 

과일과 어획물 수송에 바쁜 K해운이 러시아 운반선을 많이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와 오선덕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끈끈하게 형성된 파트너십은 오선덕을 한 시간 일찍 출근하게 만들었다. 업무량이 많으면 많은 대화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스케줄 조정해서 내일 이 시간 확답 주세요.”

 

뉘앙스로 봐서 꼭 도쿄로 오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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