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13.유빙해역 항해

오선닥 2020. 3. 16. 17:13


 ▲선상의 여인들
 
남극기지로 가려면
유빙해역을 지나는데
배멀미를 어떻게 극복할까


 


13. 유빙해역 항해


  아라빙호는 인천을 출항해 뉴지에 기항하여 보급품과 극지요원을 탑재하고, 중간 해상에서 러시아 쇄빙선과 상봉하여 안내를 받으며 목적지 케이프벅스로 향했다.

  일단 케이프벅스에 도착하여 후보지 조사 준비를 하게 된다.

  아라빙호의 주요 임무는 쇄빙능력시험과 대륙기지 후보지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정밀조사이다. 제2 남극기지 선택을 위해 케이프벅스와 테라노바베이가 경합을 벌이다가 최종적으로 테라노바베이가 선정됐다.


  아라빙호 여정은 다음과 같다.
  인천(2009.12.18 출항) → 크라이스트처치(2010.1.8 - 1.12) → 남위 63도(1.17 도착) → 남위 72도(1.22 페도로프호 상봉) → 케이프벅스(1.26 - 1.30) → 테라노바베이(2.7 - 2.10) → 크라이스트처치(2.18 - 2.23) → 인천(2010.3.15 도착)


  남위 60도부터는 긴장감이 감돈다.
  얼음이 떠다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자해도에는 위도가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에 얼음 이미지 화면을 받아낸다.
  뉴지에서 남극으로 향하는 선박은 보통 남위 62~63도에 이르면 정동향으로 돌려 등위선(等緯線)을 따라 1,300해리쯤 진행한 후 다시 남하하는 항법을 취한다.
  “얼음을 피하기 위해서니 그냥 열심히 따라오세요.”
  앞서가는 러시아 쇄빙선 페도로프호가 아라빙호더러 묵묵히 따라오라고만 한다. 옆으로 비껴가는 항로를 취하더라도 얼음바다만큼은 자신이 ‘도사’라는 거만함을 피운다. 쇄빙항해(碎氷航海)의 경험을 한국선에 한 수 가르쳐주는 건데 군말이 필요 없다는 뜻일 수 있다. 
  아라빙호는 엄마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보조를 맞춰가며 열심히 페도로프호를 뒤따라갔다.

 

  디지털시계는 2010년 1월 21일 오전. 
  뉴지를 출항한 지 열흘째, 배는 남위 70도 해역을 지났다.
  지금부터 선상생활의 애로 사항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뭐니 해도 통신과 인터넷 사정이 너무 열악하다.
  선원들은 이런 불편함에 익숙해져 있지만 탑승객들은 고통에 가깝다.
  지금이 21세기 아닌가.
  “왜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되지?”
  여기저기서 야단들이다.
  친구와도 같은 인터넷이 말을 듣지 않으니 답답해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자단이 발을 동동거린다. 남위 60도부터 간헐적으로 말썽을 부리던 것이 이젠 하루 종일 불통일 때가 있다. 적도 상공에 떠있는 인공위성이 아라빙호의 이동항로 반경을 제대로 커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통신 담당자는 말한다.
  인터넷 전화로 가족과 안부를 주고받던 탑승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자 그야말로 맥 빠지는 상황이다.
  “언니, 형부한테 안부 전화 어떡하죠?”
  양외란이 장세빈을 먼저 걱정했다.
  “얘들이 걱정되기도 하네. 큰애가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인말샛으로 해야 될까봐. 카드가 좀 비싸더라도.”
  인말샛 통화는 조타실에서 음성통화로 안부를 전하는 방법이다.
  “그러세요. 그리고 형부 목소리도 들어보시고요. 목소리만 들어도 형부가 집인지 바깥인지 알 수 있잖아요.”
  “얘는, 내가 귀신이야?”
  두 선후배 간의 대화는 옆길로 빠질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친근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가족의 안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름 전에는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 아이티에서 규모 7.0의 강진이 덮쳐 50만 명의 사상자와 180만 명의 이재민을 냈다. 파키스탄과 이라크에서는 대규모 자살폭탄 사건이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있으므로 안부는 제1순으로 꼽는 관심사다.
  인말샛 카드마저 남위 70도 이상에선 접속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
  선상의 24시간을 생생하게 소식 전해야 하는 기자들에겐 낭패일 수 있다.


  저녁식사 후 휴게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양외란은 직업 선원으로서 지금 배를 타고 남극에 왔지만 수입이 좋은 의사가 구태여 배를 탈 필요가 있을까 궁금했다.
  “박사님, 왜 사서 고생하십니까?”
  의사는 양외란이 씩씩하고 상냥해서 모름지기 괜찮은 여성 항해사라고 늘 생각해 왔다.
  “일상에서 벗어나 남극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싶었지. 기회만 되면 북극에도 가보고 싶은데…."
  의사는 낮은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었다.
  딸 같은 여성 항해사가 말을 걸어올 때는 친근함이 주는 평온을 느낄 뿐만 아니라 외로움이 뱀 허물처럼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한편 내재된 본능이 꿈틀대고 오기 같은 본능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려는 것은 걱정이라고 했다.
  극지 항해에 동참한 동기는 가지각색이다.
  손이 고운 조리장은 금강산관광 유람선에서 5년정도 근무하다가 아라빙호 승조원이 됐다.
  한 신학생은 아라빙호 명칭공모 포상자의 신분으로 남극행을 체험하는 기회를 얻었다. 하나님이 남극 추운 지방에도 계시는지 확인해볼 참이라고 여유 있는 농담도.
  어떤 참여교수는 연구조교를 비서같이 대동하여 조교의 앞길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고 싶다나.
  세종기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승조원도 있다. 조리원, 기관사, 조타수 등등.
 
  남극은 지금 한국과 정반대인 여름철로 거의 낮만 계속되는 백야현상을 보인다.
  남극권(66°33'S)을 넘어서면 동지 무렵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구가 삐딱하게 기울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잠을 못 자는 사람이 많군.”
  선장이 선교에 올라와서 오전 당직 중인 양외란 삼항사에게 걱정스런 말을 건넸다.
  선장은 보통 이 시간에 선내를 한 바퀴 돌아보곤 한다. 선내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밤은 사라지고 낮만 있으니 그런가 봐요.”
  “선원은 잠을 잘 자야 해. 삼항사는 잘 자지?”
  건강 유지에는 습식, 숙면, 운동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장소를 옮기는 선원이나 비행사에게는 숙면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저는 요즘 커튼을 내리고 잠을 청합니다. 베개를 안고 자는 버릇이 있어요.”
  “엄마 생각 혹은 애인 생각?”
  “아녜요. 아들 생각합니다.”
  “아가씨가 별소리를?”
  “거짓말, 아, 아네요.”
  “선장을 놀리면 안 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생각해요. 놀라셨죠?”
  말을 해놓고 어이없어 양외란은 스스로 배꼽을 눌러야 했다.
  선장은 의외라는 표정이다.
  “너, 신학생한테 전도 당했구나. 원래 교회 안 다녔잖아?”
  “간혹 선데이 교인이었죠. 섬유 용어로 나일롱 말입니다.”
  이 능청스런 아가씨를 선장은 미워할 수가 없다. 남성 항해사를 능가하는 재치와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 언제나 든든하다. 어쩌다가 술을 좀 마시긴 해도.
  “잠을 청하려고 술을 마시지는 않겠지. 술은 스토킹을 잘해 밤낮 없이 따라붙어.”
  선장은 초급항해사일 때 시차적응을 못해 불면으로 고생한 경험을 들려줬다. 다행히 삼항사는 취침기술은 좋은 것 같았다.
  대화하는 중에 앞 유리가 희뿌옇게 변했다. 해수가 튀어 올라 서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겨울이라면 당장 얼어버렸을 것이다.
  추운 지방을 다니는 선박이 겪는 어려움은 무엇보다 결빙이 문제다. 갑판상에 눈과 얼음이 쌓이면 배가 무거워져 감항성(항행 안전성)이 악화된다. 원목선의 경우는 중심(重心)이 올라가 전복의 위험이 커진다.
  “열선 스위치를 켜겠습니다.”
  극한의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아라빙호는 선교 유리창과 출입문, 갑판 전체에 열선을 깔아놓았다.


  항해가 순탄치 않았다.
  남위 62도 해역에서부터 유빙을 접하기 시작했다. 남위 70도를 지나면서 유빙은 무수히 늘어났고, 남위 72도 해역부터는 그야말로 얼음천지를 이루었다. 남위 72도에서 73도를 넘어오는 결빙해역에서는 남극해가 온통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진풍경을 보였다.
  배는 속력 12노트로 남극으로 꾸벅꾸벅 접근하고 있다.
  선내 6층의 선교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색다른 풍경이다. 시계(視界) 밖까지 펼쳐지는 청백의 대형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잔물결이 만들어내는 파도소리.
  빙하가 쩡 무너지는 소리.
  다른 세상의 소리 같다.
  남극해에 떠다니는 빙산들은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낼 만큼 장관이다.
  서남극에 위치한 케이프벅스(74°45'S, 136°48'W)가 첫 목적지이다.
  항해하는 동안 여성들의 고생이 많았다.
  특히 여성 선임연구원은 뱃멀미로 심한 고생을 했다. 파고 2미터의 흔들림조차 그녀에게는 전혀 익숙지 않았다. 의사를 앞세우고 왕진을 핑계 삼아 ‘금남의 집’으로 들어가서 멀미약을 받아들고 입안에 털어 넣었을 때 제정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사는 것이 문제이지 자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시차 때문에 잠자기가 힘들다는 동료의 말에 대한 그녀의 반응이었다.


▲황천 항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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