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12.남반구 항해

오선닥 2020. 3. 4. 15:22



남극이 어떤 곳인지
항해를 하면서 경험해
나가는 여전사들

 
 
12. 남반구 항해


  2010년 1월 12일
  리틀턴항을 출항한 아라빙호는 남극으로 가고 있다. 남위 60도까지는 동경 172°38'을 따라 1,000해리 정도 정남향해서 내려가면 된다.
  남위 60도는 의미 있는 지점이다. 남극해의 기점이요, 인터넷이 두절되고 유빙화면을 받아보아야 하는 곳.
  남극으로 향하고 있으니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하다.
  “선원이 아닌 탑승객은 선내생활이 미숙하니까 안내를 잘할 필요가 있어요.”
  김선봉 선장은 탑승객이 염려돼 최극진 일항사에게 지시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방송국 여기자가 궁금 반 불안 반으로 일항사에게 다가갔다.
  “해난 중 구명정에 파도가 덮치면 어떡하죠?”
  일항사는 선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명정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캡슐식 구명정 2대가 있습니다. 밀폐돼 있어 파도에도 안전합니다. 또 잘 뒤집히지도 않고요. 훈련만 잘 받아두시면 안전합니다.”
  리틀턴을 출항한 다음날 비상 퇴선 훈련을 했다. 탑승객 전원이 훈련에 잘 임해줬다. 캡슐식은 물론, 개방식 구명정과 구명벌, 구명복 등 모든 구명장비에 관한 사용 설명은 일항사가 요령있게 잘 수행했다. 안전교육 및 비상탈출 훈련은 선원법이 요구하는 필수 사항이다.
  “구명정에는 일인당 사흘간 생존에 필요한 비상식량·약품·기름·낚시 등 보급품과 조난신호 장비가 들어 있습니다. 사전에 확인이 필요합니다.”
  일항사가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갔다.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낚시는 왜 들어 있죠? 비상시에 한가하게 낚시질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자는 의문을 제기했다.
  “비상식량이 떨어졌을 땐 물고기라고 낚아야죠. 자급자족의 의미죠.”
  일항사의 설명과 관계없이 러시아인 유빙항해사는 자기 이야기에 열중했다. 러시아인들의 대화는 독특한 발음 때문에 때때로 싸움판을 연상시킨다.
  “얼음을 정복하지 않고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얼음전문가를 자처하면서 다섯 명의 러시아인은 거드름을 피웠다. 지구온난화로 북극항로가 현실화돼가는 마당에 장래 북극항로 행행 선박에는 러시아 유빙항해사의 탑승이 필수라는 것을 강조했다. 북한보다 남한과 더 가깝게 된 지금이 흥미롭다고 구소련 시대 사람으로서 감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남극의 얼음은 한국이 정복하겠습니다.”
  삼항사가 호기심을 가지고 대화에 끼어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려면 우리 러시아한테 배워야죠.”
  러시아 유빙항해사는 지는 성격이 아닌 것 같다.


  뉴지를 출항한 후 사흘이 되자 남극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배의 요동이 점차 심해지면서 여기저기서 배멀미를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울렁증을 참지 못해 침실을 빠져나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네 명의 여성이 유난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멀미를 어떻게 이기느냐가 궁금해서다.
  악천후에도 배멀미를 하지 않는 해기사 출신 여성 두 명이 화젯거리가 됐다. 생김새까지 마도로스 기질을 타고 났다느니, 늘씬한 키는 배에서 필요한 체격이다니 하면서.
  “별종 여성들이군.”
  해기사 출신 여성을 부러워하는 커리어 우먼들의 코멘트다.
  이들 여성은 환경연구원과 국영방송의 과학전문기자이다.
  배가 마구 흔들리는데도 멀쩡하기만 한 여성 해기사들이 강철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커리어 우먼들은 높은 파도에 전혀 경험이 없다.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그들은 선교로 올라 왔다.
  양외란은 그들 가까이 다가가 살짝 말했다.
  “승선 6개월만 되면 멀미는 아듀 해요.”
  아쉬운 것은 익숙하기 전에 그들이 하선한다는 점이다.
  얼굴이 구겨진 백지장처럼 되어도 부끄럼이 사라져버렸다. 아라빙호에는 발에 채는 것이 남성인데 여성이 멀미로 부스스한 얼굴을 해도 민망할 게 없다는 분위기가 돼버렸다.
  여성 연구원이 멀미에 지쳐 침대를 짊어지고 지낸 지 오래다.
  “아이 가질 때도 입덧 한번 안했는데 이건 참을 수 없네요. 선원들이 존경스러워요.”
  직접 경험해 보니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그녀 자신은 멀미할 체질이 아니라면서 뱃사람은 월급을 많이 받을 자격 있다고 강조했다.


  출항 후 일주일이 지날 무렵 바다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탑승자들의 뱃멀미도 수그러들었다.
  양외란은 선실 점검 중에 장세빈과 마주쳤다.
  “배가 인간 백화점 같아 심심하진 않네요. 언니는 예뻐서 인기가 좋은 거 같아요.”
  “뚱딴지같긴……. 아이가 둘인데 누가 여자로 보겠어.”
  “그래도 바탕이 있잖아요. 학교 땐 인기 좋았었다면서요.”
  “외란, 니야말로 지금 인기 욱천이야. 미혼에다 피부 탱탱하지….”
  “남극 눈세계에 갔다 오면 피부가 좀 하얘질까요?”
  “넌 이대로가 좋아. 완전 무공해 처녀로 주가가 고공 상승할 거야.”
  “주가 떨어지기 전에 남자친구 좀, 언니?”
  “얼음 두께 재듯 남자 속은 내가 잘 재니까 좋은 신랑감 한 번 알아보마.”
  뜸을 들이고
  “아니, 고득종은 어떡하고? 하긴 대원들 중에 총각도 많더라. 40일 동안 지켜봐.”
  장세빈은 후배를 마구 흔들어댔다.
  배라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데.
  “남위 60도가 되면 인터넷이 안 되는데 아이들한테 전화하셔야죠.”
  “그래야 되겠구나. 바다 이야기 들려줘야지.”
  “형부한테는 어떤 이야기하실 거예요?”
  “전화하는 김에 외란이 남자 친구 한번 찾아보라 해야지.”
  “기대해 볼게요.”
  구태여 웃을 필요는 없었다.


  남극과 북극은 지구 양 끝에 위치한 거대한 청정환경 공간으로 기권·지권·수권·생물권·빙권 등 환경 시스템을 모두 갖추고 있는 하나의 소지구적 영역이다. 모든 과학 분야의 천연실험장 역할을 한다. 현재 선진 19개국이 37개 남극권 상주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은 1988년 남극반도 킹조지섬에 세종과학기지를 세워 운영 중이다.
  뉴지에서 남극 왕복 거리 6,000해리는 인천에서 뉴지까지 편도 거리와 같다. 그러나 남극 탐사 기간 20일 가량이 포함되므로 뉴지로 돌아오기까지는 40여일이 걸릴 것이다.
  선상에서 바라본 남반구 태평양은 수평선과 맞닿은 온통 검푸른 망망대해다.
  비바람 속에 가끔씩 갈매기 떼와 돌고래 무리들이 외로운 아라빙호 항해를 호위하곤 한다.
  파고 10미터가 선수에 자주 부딪친다.
  “우리 배로 남극에 가기는 처음이라 험난한 대장정을 각오해야 돼.”
  장세빈은 양외란에게 다짐을 줬다.
  “언니는 가족들이 걱정되지 않아요?”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엄마가 외동딸 걱정 많이 하시겠군.”
  “쬐금요. 아마도.”
  “엄마가 딸을 대장부로 키운 보람이 있군.”
  팔뚝을 들이미는 양외란.
  이를 능청스럽게 만져보는 장세빈.
  이럴 때는 둘 다 물개 멍청이 같다.
  “언니, 얘들한테 선물은?”
  “얼음대륙에 백화점이 있냐? 선물 사게.”
  “그러네요. 얼음덩어리밖에. 뉴지에서 지구본 잘 사셨네요. 얘들 좋아하겠어요.”
  “남극에 대한 개념이 없을 테니 손으로 만져보게 해야지.”
  “아들은 피어리나 아문센으로 키우세요.”
  괜히 얘들 얘기를 꺼내 장세빈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고 양외란은 생각했다.


  유빙해역이 가까워지는데도 남위 63도 부근 해역에서 랑데부(만나기) 하기로 약속했던 러시아 쇄빙선 아카데믹 페도로프(Academic Fedorov)호의 도착은 자꾸 늦어졌다. 하는 수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선과 빨리 상봉하기 위해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렇다고 항해속력을 무리하게 높일 순 없다. 아라빙호의 최고속도는 16노트이지만 경제속도는 12노트이다. 경제속도에서 하루 평균 연료 21톤을 소비하는데 여기에 3노트만 올려도 연료는 두 배 가까이 소모된다. 극한 상황을 고려해서 연료를 절약해야 한다.
  결국 아라빙호는 뉴지 출항 10일 만인 1월 22일 쇄빙선 페도로프호와 랑데부했다.
  위치는 남위 70도 서경 140도 부근.
  예정 상봉위치보다 420해리 남쪽이고 또 더 동쪽이다.
  불필요한 하루 대기가 신경을 더 건드렸다.
  “밉지만 어떡하겠니. 우리가 걔들한테 배워야 하는 입장이니까.”
  선장은 늦장 랑데부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일항사를 달랬다.
  러시아선도 기상 악화로 자국 기지 보급품 전달이 5일이나 늦어졌다고 구실을 붙였다. 상황을 예측하기 힘든 극지 항해에서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만.
  안전한 거리를 두고 랑데부한 후 페도로프호에서 호출이 왔다.
  “유빙 항해사를 태워갈 헬기를 보내주세요.”
  얼음정보를 분석·제공하는 유빙항해사((Ice Navigator) 한 명이 아라빙호가 보낸 헬기를 타고 왔다. 쇄빙 경험이 전무한 한국 쇄빙선에 추가로 파견된 러시아 유빙항해사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러시아선과 동행 항해하면서 쇄빙능력시험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받게 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위력을 넘어 “아는 것이 국력이다”의 파워를 느끼는 기분이다.

 


<계속>

'소설 > 극지 탐사 항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선상 대화  (0) 2020.04.03
13.유빙해역 항해  (0) 2020.03.16
11.크라이스트처치 관광  (0) 2020.02.17
10.남극 처녀항해  (0) 2020.01.27
9.쇄빙선 아라빙호  (0) 2020.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