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11.크라이스트처치 관광

오선닥 2020. 2. 17. 19:30

▲크라이스트처치 시내 전경


잠깐의 정박 시간
선원들의 외출 기회
세 명의 동문은 모처럼 동행?

 
 
11. 크라이스트처치 관광

 

  “보급품 선적에 나흘간이나 걸리니, 우리 시내 관광이나 해볼까?”
  입항수속을 마친 후 선장이 두 후배 여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급품 선적과 인원 승선을 위해 배는 나흘 동안 리틀런항에 정박할 예정이다. 이 기간 동안 선장은 두 여성을 위해 뭔가 배려해 주고 싶었다.
  뉴지 남쪽 섬의 제일 큰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 시가지는 리틀턴 항구에서 2킬러미터의 터널을 통해 자동차길로 연결된다. 시내 박물관이나 갔다 올까 하는 생각으로 의향을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해양스포츠를 좋아하는 양외란이 가보고 싶은 곳이 따로 있다.
  “선장님, 요트장 구경 시켜주세요.”
  화산분화구에 바닷물이 들어와 형성된 리틀턴항은 태평양의 험한 파도를 막아내는 데는 천혜의 항구이다. 뒤로 길게 두른, 가파른 언덕은 항구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요트 정박지로서 이만한 항구가 없을 것 같다.
  남반구의 태평양 항구는 지금 여름의 평온함을 자랑한다.
  요트장에 도착하자 그들은 요트 한 대를 빌렸다.
  요트 항해사는 해안을 감돌아 여기저기 요트를 몰고 돌아다녔다. 남극 얼음바다로 들어가기 전 아름다운 태평양 바다에서 오후 두 시간 동안 요트 항해를 즐기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시원한 바람이 싸하게 스쳐갔다.
  “선장님의 학창시절엔 해양스포츠 팀이 없었나요?”
  선장 옆에 앉아 있는 양외란이 물었다.
  “그런 건 없었지만 미식축구는 있었지. 내가 선수로 뛰기도 했고.”
  선장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 보이자 양외란은 선장의 어깨가 유난히 넓다고 느꼈다.
  “저는 조정 선수를 했습니다. 조수를 했었는데 협동심이 많이 필요한 경기였죠.”
  “삼항사는 그럴만한 체격이 돼. 아마 좋은 성적을 냈을 것 같아. 타수의 리더십과 조수의 협동심이 사회생활에도 많이 도움이 될 거야.”
  전국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3등을 했다고 양외란이 말했을 때 선장은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 정도 이력이면 여성 항해사로 손색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을 하기도.


  요트장을 나와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원주민 마오리 부족과 영국인이 조약을 맺은 후 사이좋게 지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싸움보다는 신사협정이 인간 세상에 도움이 됨을 확인했다.
  구경을 마치고 그들은 부근 카페로 들어갔다. 공원을 옆에 둔 아담한 휴식처였다.
  “선장님은 가족들에게 교훈으로 어떤 말씀을 하시나요?”
  장세빈이 말문을 열었다.
  가족이 있는 사람으로서 가족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선장에겐 두 아들, 장세빈에겐 아들과 딸이 있다. 가족을 두고 온 부모로서 생각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교훈보다는 밥 얻어먹을 궁리부터 먼저 하지.”
  선장은 농담부터 하고 싶었던가 보다.
  “예를 들면 어떤 말씀인데요?”
  장세빈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마누라한테 아침밥 잘 얻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선장은 이런 내용으로 말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를 존경의 눈으로 봐야 한다. 여자는 작은 것을 크게 만드는 마법의 기술자다. 남자가 정자를 주면 여자는 아기를 주고, 집을 주면 가정을 주고, 농산물을 주면 음식을 만들어주고, 미소를 주면 침대를 마련해준다고.
  “받는 것의 여러 갑절을 주는 게 여자라고 말했지.” 라며 마무리했다.
  “두 아드님한테 하시는 말씀은요?”
  장세빈이 또 물었다.
  “윈스턴 처칠의 명언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는데, 돈과 명예를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고 하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지위가 높아도 위태하지 않다고 말해주었지.”
  좋은 교훈이 아니냐고 동의를 구하려는 듯 선장은 두 여성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부부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양외란이 물었다.
  “아무래도 신뢰의 문제가 아닐까. 가족과 떨어져 사는 우리 선원들에게는 더욱 그렇지. 믿음이 부족하면 손에서 물 빠지듯 신뢰가 사라지니까.”
  신뢰는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단어일 거라고 두 여성은 동의했다.
  ‘남자의 집은 곧 아내’라는 말을 어는 책에선가 읽은 것 같다고 양외란은 반응을 보였다.
  선후배 동문의 외출은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으로 끝났다.


  리틀턴항은 태평양쪽에서 남극으로 가는 전초기지로 여러 배들이 수시로 기항한다. 필요한 보급, 급유, 급수를 하고 헬기 탑재와 참여인원 승선이 여기서 이뤄진다. 인근 부두에선 미국 남극기지로 가는 선박에 기지 요원들이 탑승하고 있다. 
  리틀턴항에서 남극요원 47명이 아라빙호에 탑승했다. 
  극지 탐사단 24명, 러시아 전문가 5명, 뉴질랜드 헬리콥터 조종사와 엔지니어 4명, 그리고 언론인 14명이 포함됐다. 이들 중에 여성 탑승객 두 명도 끼어 있다. 그들은 환경연구원과 방송기자이다. 이제 전체 탑승 인원은 77명이 됐다.
  요원들은 인원배치표에 따라 1인실, 2인실 및 4인실로 나뉘어 거주하게 된다. 배는 대가족을 태우고 남극으로 가는 것이다.
  뉴지에서 많은 인원이 탑승하자 배는 분주해졌다. 마치 다양한 사람들을 한 바구니에 담아놓은 종합세트 같다.
  남극 기지 탐사단 24명은 극지연구소를 비롯해 환경정책평가연구원, 건설연구원, 대학 관계자 및 외부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이들의 임무는 빙하·해빙 조사, 기상조사, 대기환경 조사, 지질조사, 상수원 조사, 물자 하역·수송, 건설환경 조사, 안전지원 등 분야가 다양하다. 쇄빙능력시험과 관련해서는 러시아 측에서 쇄빙시험 전문가 4명과 유빙항해사 1명이 합류했다.
  언론사에서는 신문방송보도팀, 다큐팀 등 총 14명이 탑승해 미지의 땅 남극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지구상 가장 사람의 발길이 적은 곳인 만큼 들려줄 내용도 다양할 것이다.
  
  탑승원의 짐과 장비를 올리는 책임을 진 일항사는 무척 바빴다. 남성인 그가 바쁠 때 여성 삼항사가 열심히 도와주고 있어 힘이 되기도 했다.
  “언젠가는 탑승정원 85명을 다 채우겠군.”
  선내안전 업무를 담당하는 일항사는 인원 증가만큼 더 무거운 책임으로 느꼈던지 삼항사 양외란에게 심경을 토로했다.
  “복잡하긴 하나 사람이 많아 마치 한 마을에 사는 기분이어요.”
  일항사와는 달리 삼항사는 오히려 사람 사는 곳으로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항해 초년생이기 때문일까.
  극지연구소 직원인 장세빈이 자주 대화의 소재로 등장했다. 아마도 일항사와 삼항사에겐 같은 상선학교를 졸업하고도 진로가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남극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선 많은 전문가가 필요하겠지요. 장세빈 언니가 해양 연구로 진로를 바꾼 건 잘하신 것 같아요.”
  양외란이 일항사에게 말했다.
  “장세빈 선배님에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지.”
  일항사는 양외란의 상선대학 5년 선배다. 그러니 장세빈은 일항사의 6년 선배가 된다.
  쇄빙연구선이라는 특성상 항해·기관·조리 등 일반적인 항해 업무 승조원 외에도 전기기사, 전자기사, 유빙항해사(Ice Pilot) 및 해빙분석원이 배치된 게 일반 선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처녀항해인 만큼 극지연구소 쇄빙선 연구팀, 쇄빙능력시험 용역사, 대륙기지 탐사단, 조선소 기술자 및 감리사의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지의 세계일수록 해야 할 일이 많다. 남극 얼음은 지구상 얼음의 90퍼센트, 지구 담수의 75퍼센트를 차지한다. 남극의 한기 소용돌이 세기는 북극보다 훨씬 강하다. 석유 매장의 반이 극지에 모여 있다고 하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다.
  “남극의 얼음이 모두 녹으면 해수면이 60미터 상승한다는 거 알고 있니?”
  장세빈이 연구원답게 두 후배를 앞에 두고 질문을 던지면서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극지 탐사가 아직 국제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각국은 연구 자료를 좀체 공개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 독자적 연구를 하든지 상호 협약을 맺든지 하여 극지연구를 진행한다.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은 지금부터 빠른 속도로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양외란과 장세빈이 선내 사무실에서 뉴지의 과일 키위를 깎아 먹으며 담소를 하고 있을 때 현지 선박대리점이 우편물을 던져 놓고 갔다.
  “한국 떠난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편지가 왔지?”
  탐사단과 함께 온 우편 꾸러미를 장세빈이 먼저 열어보고 말했다.
  이번에는 편지 하나를 흔들어 보이며 그녀가 또 말했다.
  “고득종이가 누구야, 외란아?”
  양외란은 편지를 빼앗다시피 받아서 급히 뜯어보았다.
  연애편지와는 달리 남극 정보가 있으면 빠짐없이 전달해 달라는 업무서신 같은 한 장의 편지였다. 다만 마지막에 “하루도 빠짐없이 사진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라고 표현한 것은 양외란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 사진은 선상 인터뷰 때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사랑이 만들어내는 파도는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세빈은 아들의 짧은 손편지를 한참 들고 길디 긴 가족사랑을 느꼈다.
  가족과 떨어져본 사람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그들을 행복하게 했다.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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