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14.선상 대화

오선닥 2020. 4. 3. 15:41

▲선내 휴게실
 
사회적인 동물이 사는
작은 섬 같은 배에
대화 소통이 중요합니다

 
 


14. 선상의 대화


  외로운 항해를 잘 이겨내는 법은 마음 맞는 사람끼리 대화하는 일이다.
  양외란과 장세빈은 자주 대화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케이프벅스(Cape Burks)로 향하는 도중 그들의 대화는 지칠 줄 몰랐다.
  케이프벅스는 남극 킹조지(King George) 섬의 세종기지에 이어 남극 제2기지 후보지로 유력시되는 곳이다.
  “기존 세종기지가 있는데 구태여 제2 기지가 필요할까요?”
  양외란이 장세빈에게 물었다.
  “세종기지는 섬에 있고 위도가 낮아 남극대륙의 특성 연구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남극 세종기지(남위 62°13′, 서경 58°47′)는 남극에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1988년 2월 건설됐으니 22년이 지난 셈이다. 제2기지 후보지의 위도가 74도 이상 되므로 두 기지 간의 위도 차이는 12도가 넘는다.
  “남극점에 연구기지가 있으면 더 좋겠네요.”
  양외란의 낭만적인 생각은 현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장세빈의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남위 90도를 말랑하게 보지 마. 추위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워. 또 지대도 높고. 미국과 중국이 기지 건설을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아직 희박하지.”
  “그러네요. 동태가 될 각오를 하면 모르지만요.”
  양외란은 금방 남극점의 추위를 상상하고 몸을 떨었다. 가까이 있으면 찬바람이 스칠 만한 제스처였다.


  두 여성이 선내 휴게실 창가에서 커피향을 즐기는 동안 갑자기 테이블에 희미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숨소리가 섞인 약간 터프한 목소리는 귀에 익었다.
  “남극점 연구기지 건설은 앞으로 당신들의 과제로 남겨둘게요.”
  남극통인 수석연구원이 풍성한 몸집을 앞세워 두 여성 앞에 나타났다. 두 여성은 엉겁결에 선 자세로 예의를 표시하고 양외란이 의자 하나를 내밀었다. 선내에서 남의 대화에 끼어드는 건 실례가 아니다. 너무 자주 보니까.
  “수석님은 처음 남극에 오셨을 때 두렵지 않았어요?”
  그가 자리에 앉자 양외란의 궁금증이 발동한 것이다.
  “처음엔 러시아 사람들한테 많이 배웠지. 그 양반들은 얼음 전문가이니까.”
  곧 은퇴를 앞두고 있는 수석은 남극 전문가로서 남극에 관해서는 개척자임에 틀림없다.
  장세빈은 커피를 타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설탕 한 스푼을 넣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사의 커피성향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커리어우먼 직업관이다.
  “수석님 같은 분이 계시기에 저희 후배들은 쉽게 배울 수 있나 봅니다.”
  장세빈의 진심어린 말이었다. 바람개비 같은 범선으로 신대륙 발견을 시도하다가 희생된 선원이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하면 개척자의 발자취는 소중하기만 하다.
  양외란은 연예기자처럼 언제나 질문에 끈질기다.
  “페도로포프호 선장과 다정한 통화를 하시던데 친하신가요?”
  “우리의 만남이 세 번째이니 이젠 확실한 친구가 된 거지.”
  수석은 페도로포프호를 빌려 타고 2007년과 2009년 남극대륙 후보지 현장답사를 한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 쇄빙선 탑승 경험은 남극 진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으로선 2010년 진수할 국적 쇄빙선 운항을 위해 경험이 필요했던 때였다.
  한국이 쇄빙선 건조 계획을 처음 발표했을 때 러시아의 반응은 조금 떨떠름했다.
  “일부러 돈 들여 건조할 필요가 있어요? 러시아가 빌려주면 되는데….”
  그런 식이었다.
 
  남위 73도를 지나는 저녁
  양외란은 습관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른 저녁의 하늘은 훤했다.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으니 훤하기는 한밤중인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상 시각은 한국시각보다 4시간 빠르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라는 존재는 선주협회연구소에서 뭔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선박과 선원 문제를 움켜쥐고 아이디어를 짜고 있겠지?”
  생각하면 불쌍한 우리 엄마다. 오로지 딸 하나만 보고 살아온 여자이니까.
  차라리 ‘남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연구과제로 삼았더라면 아빠와 다시 결합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았을 텐데, 생각이 들었다. 연구 과제는 유연성 있게 결합을 잘하는 것 같으나 남편 문제로 들어가면 속수무책 아니면 협상불가의 여성으로 느껴졌다.
  퇴근해 저녁을 먹을 때면 외동딸을 옆자리에 두는 착각에 빠질지 모른다. 딸을 너무 사랑해서 탈이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포장마차에서 딸 생각이 더 난다는 것이다. 술이 부추긴다고 고백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엄청 고독해진다나. 딸 몫까지 합해 두 배로 고독해진다는 말까지.
  “오선덕 선장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야.”
  딸이 사춘기를 넘기고 고3을 통과하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엄마가 한 말이다. 대학생이니 사랑이라는 단어를 써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용어 사용의 타이밍을 잘 맞추는 엄마 전계린 박사니까.
  “엄마, 사랑해.”
  너무 간절한 회상이라 입술을 흔들고 큰소리가 나올 뻔했다.
  그러곤 한 남자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누군가 했더니 고득종 기자였다.
  공원이나 바닷가에서 데이트조차 한 적이 없는 남자가 떠오르는 걸 보면, 그동안 엄마의 사랑이 워낙 커서 다른 사람의 사랑이 끼어들 틈이 없었노라고 양외란은 결론 내리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고득종과의 추억은 바깥의 하얀 바다처럼 하얗게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여름철 남극 해상은 비교적 기상이 좋다.
  한국은 한창 겨울이라 가족은 탑승자가 추위에 떨지 않을까 걱정하곤 한다. 그들이 지구 반대쪽 상황을 잘 알 리가 없으니, 찬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고드름이 얼고 배가 흔들릴까 조마조마해진다.
  역시 극지라 갑자기 풍력이 강해졌다.
  예상보다 파도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남극의 일기는 변화무쌍해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
  양외란의 어머니는 변덕스런 날씨를 이야기할 때마다 남편 성격을 대입시키곤 했다. 아버지를 예화의 소재로 써먹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자주 등장시키니 양외란은 그만 “엄마, 그래도 제 아빠예요. 너무  씹지 마세요” 하며 역정을 내고 말았다. 모녀는 사흘 동안 말을 걸지 않았다.
  그때를  회상하며 양외란은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오로지 딸만 보고 살아온 엄마인데.
  이제 발을 딛고 있는 배의 문제로 돌아가자.

  쇄빙하면서 항해하는 배에는 기름이 많이 소요된다.
  연료 소모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 기상이 가장 신경 쓰이는데, 날씨가 나쁘면 기름 소비가 많아지고 항해 기간이 길어진다. 남극 항해에서 선원들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기름이 떨어진다는 건 상상하기가 무섭다. 자동차의 경우 보험서비스 회사가 급히 달려와 손을 써주겠지만 여기는 남극이다. 오가는 배도 잘 안 보인다. 연락이 되는 배가 있다 하더라도 쇄빙이 가능해야 한다. 오는 데도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고립무원을 뼈저리게 느끼고 구조선이 와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아라빙호는 페도로프호 꽁무니를 따라 나흘간 동행했다.
  드디어 목적지 케이퍼벅스에 도착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아라빙호는 제2기지 건설을 위해 필요한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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