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8.남극 탐험가

오선닥 2019. 12. 29. 18:14


▲허영호 북극탐험 모습


에베레스트 북극 남극
세 곳을 정복한
세계 유일의 탐험가 허영호
비슷한 꿈을 꾸는 양외란 항해사?


 


8. 남극 탐험가
  

  선내 사무실에서는 얼어붙은 땅을 두고 인터뷰가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고득종 기자는 한국인의 북극탐험에 대해 궁금했다.
  “북극점을 탐험한 한국인이 있다는데 누구죠?”
  “허영호의 오로라탐험대가 1991년 5월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았지요. 허영호 대장은 끓는 물에 화상을 입어 최종렬 대원과 신정섭 대원이 밟았다지요. 11번째 국가였고 18번째 팀이었다고 하네요.”
  고득종 기자는 양외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탐험대원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그녀의 열정에 놀랐다.
  “엉뚱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양외란은 어떤 질문에도 주눅 들 이유가 없다.
  “뭔데요?”
  “만약 북극점에서 일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날짜변경선을 기준으로 북극점을 원심으로 해서 여덟 바퀴 돈다면 날짜는 8일 갔을까요?”
  “여덟 바퀴가 아니라 수백 바퀴를 돌아도 지구 자체가 돌지 않는 한 시간은 절대로 음직이지 않지요. 시간이란 지구가 자전한 만큼 움직이니까요.”
  이론이 체계화돼 있으면 대답은 간명하다.
  <극지 탐험>이라는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는 궁금한 게 많다. 당돌하게 생긴 여성 항해사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니 인터뷰가 흥미를 더해간다.
  “그럼 남극 쪽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계속 사진까지 찍으시면서 특별한 주문을 하시고 그러네.”
  “인터뷰를 멋있게 하기 위해서 그럽니다.”
  “준비됐고요.”
  사진 찍을 포즈다.
  기자도 옷매무새를 고친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김치’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선원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마치 약혼사진이라도 찍는 것처럼 피사체는 다정해 보였다.


  사진 찍기를 마친 두 사람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자료를 보고 대화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양외란 이항사는 고득종 기자의 질문을 기다렸다.
  기자의 질문은 남극탐험 쪽으로 옮겨갔다.
  “남극점 탐험에는 두 명의 인물이 경쟁했다지요. 아문센과 스콧의 얘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실은 남극 항해를 하기 전에 남극탐험에 대해 공부를 좀 했지요. 굉장히 치열한 경쟁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 승자 독식의 냉혹한 승부세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요. 패자는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고….”
  죽음의 단어가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어서인지 인터뷰는 숨을 죽여 나갔다.
  기자로선 궁금한 게 더 있다.
  “북극은 오래전부터 탐험이 시도됐습니다만 남극이 북극보다 탐험이 늦은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요?”
  양외란은 상식을 물어보는 것 같아 기자를 곁눈으로 살짝 쳐다보았다.
  “남극은 대륙이고 북극은 바다란 거 아시죠? 땅이 물보다 훨씬 더 춥고 더 더워 그만큼 환경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거죠.”
  기자는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결국 아문센이 승리했지요?”
  “아문센은 피어리가 먼저 북극을 탐험하자 기수를 남극으로 돌려 결국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 됐지요.”
  기자가 보는 이등항해사 양외란은 항해와 관련해 많은 주변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있었다.
  양외란은 준비한 자료들을 보여주며 설명해 나갔다.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은 1872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15세 때부터 북극탐험을 꿈꾸며 난센과 함께 북극해를 탐험한 일이 있었고 25세 땐 벨기에 탐험대원으로 남극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1906년 작은 배로 처음 북서항로를 개척하고 자북극(磁北極)을 발견하여 탐험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미국의 피어리에게 북극점의 정복을 빼앗긴 후 남극탐험 준비를 시작했다.
  1910년 6월 3일 노르웨이를 떠난 아문센은 공식적으론 북극으로 출항한다고 발표했다. 경쟁자인 스콧을 방심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11년 1월 14일 남극점으로부터 1,300km 지점인 남위 78°30′에 전진기지를 세웠다. 아문센이 이끄는 노르웨이의 탐험대가 개썰매로 55일 동안의 목숨을 건 행군 끝에 1911년 12월 14일 인류 사상 최초로 남극점을 밟는 데 성공했다.
  한편 로버트 스콧(Robert Scott)은 아문센보다 13일 후인 6월 16일 영국을 출항했다. 스콧은 아문센보다 4일 늦은 1월 18일에 남극대륙 바닷가에 상륙하여 기지를 건설했다. 아문센보다 남극점에서 100km 더 먼 곳이었다.
  북극점의 정복을 미국에 빼앗긴 영국으로서는 국가적인 자존심이 걸린 경쟁이었다. 남극은 제임스 쿡 선장이 처음 발견한 이후 웨들, 비스코, 로스, 새클턴 등의 영국인들이 개척해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스콧은 1868년 영국에서 태어나 1880년에 해군에 들어갔으며 1901년부터 4년간 디스커브리(Discovery)호를 이끌고 떠난 1차 탐험에 참가하였는데, 이 때 동참했던 새클턴은 자남극(磁南極)을 밟고 남위 88°23′까지 나아갔으나 식량 부족으로 남극점을 155km 남기고 되돌아온 일이 있었다.


  “출발부터 아문센은 스콧을 크게 앞질렀군요. 거기다가 속임수를 써서 신사답지 못하게…… 바이킹족의 기질이 다분히 있군요.”
  “그게 다는 아니죠. 그래도 철저하게 준비한 것은 존경할 만하지요.”
  “남극탐험 경쟁은 흥미진진한데 아문센이 승리한 것을 요약하면?”
  “제가 정리해둔 자료를 보여드릴게요.”
  양외란이 보여준 자료에서 아문센의 장점이 이렇게 요약돼 있었다.


  - 아문센의 탐험대는 스콧의 탐험대와 여러 모로 달랐다. 우선 숫자 면에서 스콧의 탐험대가 55명인 데 비해 아문센의 탐험대는 9명으로 소수 정예였다.
  - 스콧처럼 로스해로 향했으나 로스섬에 정박하지 않고 더 안쪽의 빙붕(바다가 얼음으로 덮여 있는 곳)으로 배를 정박시켜 스콧보다 남극점에 100킬로미터 더 접근했다.
  - 조랑말에 주로 의지한 스콧과 달리 북극 에스키모들이 이용하는 개썰매를 물자 수송수단으로 이용했다. 늑대와 교잡종인 허스키들은 추위에 매우 강했다. 개를 식량으로도 이용해 썰매무게를 가볍게 하기도 했다. 개는 바다표범이나 펭귄 고기도 먹을 수 있어 개 사료를 절약할 수 있다.
  - 열 개의 저장소를 마련했고 주위에 깃발을 많이 꽂아 찾기 쉽도록 했다. 썰매 무게를 75kg에서 22kg으로 대폭 줄이고, 썰매에 바퀴를 달아 이동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
  - 대원 네 명과 함께, 썰매 4대를 끄는 개 52마리를 데리고 1911년 10월 19일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기지 인근을 탐사하고 기지를 지켰다.
  - 동물의 가죽으로 된 털옷을 입고 스키를 탔다. 그러나 스콧은 합성섬유로 된 방한복을 입었다. 탐험 당시 남극의 온도는 평균 영하 40도 정도로 방한과 보온에 있어 천연섬유가 인조섬유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결국 아문센은 경험에서 많은 지혜를 얻었군요.”
  기자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문센의 개들은 썰매를 몰고 사람은 스키를 지치며 일행은 전진했다. 크레바스에 사람이나 개가 빠지면 자일로 구조하기도 했다. 위도 1도씩 전진할 때마다 식량저장소를 만들어 표시를 해두고, 가는 도중 개 몇 마리를 잡아 식량으로 이용하고 남은 고기는 저장소에 두기도 했다.
  “유럽인도 개고기를 먹는가요?”
  커피 마시는 시간을 포착하기 위해 질문 아닌 절문을 한 고득종 기자다.
  나중에 매체는 탐험을 위해 동물을 그렇게 죽여도 되느냐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지만 탐험은 현실이었다.
  경쟁심리가 아문센의 지친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1911년 12월 14일 오후 관측기 바늘과 썰매의 거리계가 남위 90도를 가리켰다. 영국 탐험대가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노르웨이 국기를 꽂고 3일간 남극점에서 머물렀다. 기지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1월 25일이었다.
  “패자인 스콧은 남극점을 밟고도 돌아오는 도중 사망했는데, 그의 일기가 증명하는 불굴의 용기는 인정해줘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콧에 대해서 정리해 놓은 것도 있는데 보세요.”
  양외란의 자료는 이렇게 요약돼 있었다.


  1910년 6월 1일 스콧의 탐험대는 테라노바호를 타고 영국을 출발해 호주에 정박했다. 이 때 스콧은 북극 탐험을 위해 떠났던 노르웨이의 아문센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남극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전보를 받는다. 스콧으로서는 남극 탐험의 강력한 도전자가 생긴 셈이다. 스콧 탐험대는 긴장했고 영국인들은 아문센을 맹렬히 비난했으나 세계는 이 세기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스콧의 탐험 행로는 몇 갑절 험준했다. 뉴질랜드에 입항해 조랑말 19마리와 개 34마리, 자동썰매 3대를 실었으나 자동썰매와 말썰매는 개썰매보다 추위에 약하다는 것이 증명됐다. 조랑말은 남극점으로 향할 때 이미 8마리밖에 움직일 수 없었고 그나마 추위에 약해 곧 다 쓰러지고 말았다. 눈보라로 날씨도 좋지 않아 거의 진행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밟은 그 순간에도 스콧 일행은 사력을 다해 빙벽을 넘고 있었다. 개썰매를 잘 다룰 줄 몰라 개들을 돌려보내고 남은 조랑말도 너무 지쳐 사살한 데다 자동썰매마저 고장나버려 결국 사람이 무거운 썰매를 끌어야 했다. 예정보다 전진이 느렸고 그만큼 식량 문제가 심각해져갔다. 지친 상태에서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34일 전에 아문센 일행이 노르웨이 깃발을 세운 뒤였다.
  낙담해 돌아가는 길은 더욱 가혹했다. 대원들은 동상과 피로에 시달렸고 일부는 설맹(雪盲)이 되었다. 마침내 동상으로 죽고, 눈보라 때문에 천막에서 꼼짝을 못하다가 연료와 식량이 모두 바닥나 남극점 도달 후 2개월 만에 제1 저장소 근처에서 모두 숨을 거두었다.
  반년 후 수색대에 의해 시신과 함께 스콧의 일기가 발견되었고, 일기에 드러난 탐험대원들의 고통과 인내, 용기, 애국심과 희생정신에 감동하며 스콧을 다시금 높이 평가했다.


  “사람들은 왜 목숨 건 경쟁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셔요?”
  이번엔 양외란이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웅심 때문일까요?” 기자가 되물었다.
  “개인의 영웅심에다 국가가 부추긴 점도 있지요. 극지탐험은 원래 항로개발과 포경개척 등이 목적이었는데, 나중에 군사 목적과 영토 야심이 노골화됐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1958년 세계는 연구 또는 스포츠 목적으로 이용하도록 했고요.”
  양외란은 마치 세계평화주의자인 듯 설명했다.
  “남극탐험에도 한국인은 빠지지 않지요?”
  “빠지면 섭섭하지요.”
  그녀는 설명을 이었다.
  “세계에서 4번째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 바로 한국의 허영호 대장입니다. 그것도 도보로 만년설을 헤쳐서 말입니다. 결국 44일 만인 1994년 1월 남극점에 도착한 거지요.”
  설명이 맞는지는 한국산악협회에 물어봐야 할까.
  긴 인터뷰로 질문자나 답변자나 지칠 만한데 둘은 여유 있어 보였다. 이를 계기로 혹여나 남녀관계로 발전하는 거 아닐까. 그거야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일.
  그러나 미리 양외란의 어머니 전계린 박사에겐 알려야 할 텐데.
  어쨌든 남극 탐사 항해를 위해 이야기는 빨리 진행해야 한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띄어야 하기 때문일까.


▲인터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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