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양실습 나가는 해양대학생들
오선덕과 전계린을 포함한
연구진이 실습선에 승선해
현장 연구에 임함
4. 실습선 연구소
한 달 후 연구팀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한바다호에 승선했다.
국제해양대학교의 원양실습선 한바다호에 짐을 풀었을 때 그들은 마치 학생 기분을 느꼈다. 수업하고 실습하는 학생 120명의 틈에 끼어 선원 인턴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실습선 한바다호 길이 117m, 총톤수 6,700톤, 최대 탑승인원 250명.
배는 옛 실습선 반도호를 대체해 1975년 취항했다. 선원선박 근대화 연구를 위해 그들이 두 달 간 머물게 될 장소다. 여기에 머물면서 학교 및 산업체의 선박관련 실험실이나 선원양성소 등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하며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
참고자료와 옷가지가 든 짐은 2인1실의 방에 풀었다. 전계린은 여성 동행이 없어 혼자 방을 사용한다. 연구실은 선내 교수사무실을 쓰기로 했다.
선원선박 합리화와 근대화가 절실하다는 것은 부산의 현장에서 목격했다. 두 차례의 유류파동에 의한 해운불황은 조선불황으로 이어져 해운과 조선 양쪽에서 나타난 비용절감 경쟁은 핏방울이 튀길 정도다. 80년대 후반의 원화절상과 노사분규 발생 등이 겹쳐 결국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십 년 가까이 이어지던 장기불황은 1988년 전후해 회복기에 접어들고, 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결과로 해운업계는 정상화를 되찾아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해운업은 규제완화, 자유화, 개방화를 통해 정부의 보호 우산에서 나와 무한경쟁시장을 구축했다. 또한 1990년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해운시장을 발견했다. 북방해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STX팬오션이 글로벌 선사로 도약해 나갔다.
“해운과 조선의 회복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빨리 선원선박의 근대화와 합리화를 추진해 국가 경쟁력을 도모해야 합니다.”
박기용 팀장은 한국인의 ‘빨리 문화’를 연구에 끌어들이려 했다.
이에 선박이 마냥 생소하기만 한 전계린이 먼저 제안했다.
“연구를 위해서는 선박구조를 익혀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여객선 형태의 실습선은 내부가 화려하다.
이런 배는 이해출 박사에게 호기심을 잔뜩 불어 넣어 주었다.
“배가 이렇게 화려해도 됩니까? 호텔 뺨치네요.”
“호텔은 이미 뺨쳤어요. 여기 선장실 보세요.”
선장실을 본 전계린은 자지러지는 감탄을 발사하면서 그만,
“여기서 살래요. 연구고 뭐고 이젠 끝났어요.”
주저앉으려 했다.
연구원은 주 5일 근무를 원칙으로 했다. 평일 배에서 24시간 체류하는 것을 감안한 결과다. 주말 이틀간을 쉬지만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비가 만만찮다. 때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연구원들이 부산에서 뭉개곤 한다.
오선덕은 배에서 머무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시간 나는 대로 서울 집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셋째 주는 상경하지 않고 부산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전계린이 부산 구경을 시켜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부산이라면 한 시절 오선덕이 휩쓸었던 곳 아닌가.
그들은 태종대 자살바위와 등대가 있는 신선암에서 파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자살과 타살의 구분을 애매하게 할 만한 장소라는 점에 둘의 생각은 일치했다.
부부사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걸을 때 약간의 거리를 둔다든지, 딴 방향으로 경치를 감상한다든지, 은연중 손을 잡을지 모르므로 5월의 꽃가지를 의식적으로 손에 쥐고 있다든지 하면서 오선덕은 의심이 될 만한 행동은 피했다. 그런 남자를 여자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발을 헛디뎌 쓰러질 뻔한 그녀를 오선덕이 잽싸게 허리를 낚아챈 것은 불가피한 상황에 속한다.
순직선원위령탑 앞에서는 바다가 삼킨 선원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2012년 9,000위의 위패가 안치되었다는 통계를 나중에 본 적이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섬이 다섯 갠지 여섯 갠지 애매한 오륙도를 보았고, 그 앞에 우뚝 솟은 조도라는 섬에 얹혀 있는 학교를 보았는데, 전계린은 그냥 지나치기를 거부하고,
“오 선장님의 모교인가요? 빠삐용 감옥 같네요.”
농담을 섞었다.
오선덕은 오히려 기분 좋게,
“감옥 치고는 고급 감옥? 학생들은 갇혀서 공부만 하면 되지요.”
대화에 보조를 맞췄다.
이번에는 택시기사로 하여금 아리랑고개를 넘어 동삼동의 구 캠퍼스 쪽으로 가게 했다. 봉래산 허리를 두르고 있는 가파른 도로를 달리면서 해변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중에 차가 급하게 커브를 돌자 두 남녀의 어깨가 밀착했다. 아찔한 광경에 놀란 탓이라고 핑계 대기에는 밀착 정도가 컸다.
“데이트 드라이브 코스로는 역동적 감동을 주네요.”
여자가 어깨를 회수하고 남자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때는 더 역동적이었답니다. 포장되지 않아 아예 자갈길이었으니까요.”
“상상이 가네요. 오 선장님의 처지가….”
여자는 낭떠러지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먼 수평선으로 시선을 두었다.
당시 젊은이 데이트코스로 자주 이용되던 에덴공원과 성지곡수원지는 추억을 회상하는 필수코스였다. 해운대의 동백섬은 부산갈매기의 날개 짓을 지켜보며 바다와의 친밀감을 배우던 곳이었다.
용두산에는 모름지기 올라가봐야 한다.
부산항을 근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언제 봐도 든든하다.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찍어 놓으면 항구를 손아귀에 넣은 기분이 든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 남포동과 광복동 거리에 맞닥뜨린다.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간 두 사람은 유리창 채색이 진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저녁을 얻어먹은 쪽이 영화 티켓을 산 것은 자연스럽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해적>은 공동체 연구에 조금 참고가 될 거라면서 튀니지 해안에서 벌어지는 해적 화면에서 스릴을 느꼈다.
“설마 해적선까지 근대화하진 않겠지요?”
여자는 옛날 해적선을 지금의 상선으로 착각할 만큼 어리석은 박사 연구원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소말리아 해적은 21세기 이야기로 알 턱이 없을 테고.
영화관을 나오는 두 사람은 마음이 바쁘다.
“통선시간에 맞출지 모르겠네요.”
어느 쪽이 초조함을 나타냈는지 알 필요 없이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겨우 몇 분을 남기고 통선장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
파랑주의보로 통선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것.
다른 배 선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부득이 부근의 관광호텔에 들어갔을 때 전계린이 어색함을 나타냈다.
“기혼 남녀가 한 호텔에 머문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오선덕은 그녀가 걱정하는 게 뭔지 짐작했다.
“부산에 아는 사람이 많으신가요? 여긴 서울이 아니라 부산입니다.”
“제 문제가 아니라, 오 선장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까 걱정돼서요.”
“양심에 부끄럼 없으면 됐습니다. 여성 선원이 승선했을 때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그는 일부러 웃음을 보였다.
“뭐든지 연구와 관련시키려 하시니 이것도 문제네요.”
전계린이 먼저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객실은 같은 층이었으나 한참 떨어져 있다.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항구는 구름과 바람과 파도가 뒤섞여 험악하다. 저 해상 상태에서 통선이 운항할 순 없지. 여자는 바다가 우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무서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인터폰을 손에 들었다.
“오 선장님, 바다 소리가 너무 무서워요. 이런 호텔 첨이에요”
“그럼 지하 바에서 워커 한 번 신어 보실래요?”
워커는 당연히 자니워커다.
오선덕의 말을 전계린이 알아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눈치도 박사급이다.
▲영도 봉래산에서 내려다본 부산항 야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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