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5.바다의 울음

오선닥 2019. 11. 17. 18:33


▲바다의 울음


바다의 울음소리는
선원의 고독을

 이해하게 하는데




                                        5.바다의 울음

   
  은은한 스탠드바 안은 남녀의 구분을 어렵게 했다. 이런 때는 여성의 향수가 성별 구분을 도와줄지 모른다. 남자는 향수에 취해 멍하니 서 있는데 여자는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자마자 서슴없이 주문한다.
  “전 블랙 언더락스로 하겠어요.”
  전계린이 주문하는 용어에 오선덕은 적잖이 놀랐다. 술에 대한 그녀의 상식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이혼 후에 술에 대한 지식이 더 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블랙 자니워커에 얼음을 얹는다는 뜻이죠?”

  영어 under가 아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 오선덕이 물었다.

  얼음을 넣는 줄은 알지만 술을 먼저 넣고 얼음을 넣는 것(under the rocks)인지, 얼음을 먼저 넣고 술을 넣는 것(on the rocks)인지 그는 솔직히 구분이 잘 안 되었다.
  “온더락스(on the rocks)라고 하는 게 이해가 쉬운데 미국식 발음으로 흔히 언더락스라고 하더라구요.”
  그녀의 대답에 수긍하면서 그의 머리에는 갑자기 다른 뜻들이 떠올랐다.
  “온더락스는 일반인에게는 방해가 된다는 뜻이지만, 우리 해운인에게는 배가 좌초한다는 뜻으로 들리지요.”
  “그럼 잘 되었어요. 오늘 저녁 여기에서 몸 바쳐 좌초해 보세요.”
  상황 적응이 이렇게 빠른 여자인 줄은 몰랐다. 오늘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 후회는 늦은 것 같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격언도 이 상황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자니워커 블랙이 혀끝을 부드럽게 하자, 그녀는 이어서 궁금한 걸 묻는다.
  “아까 바다 울음 들었죠? 방에서 분명히 들었어요.”
  아이 같은 말인데도 너무 진지하게 들려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과학적 설명으로는 그녀를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충은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명량대첩 승전지로 알려진 울돌목의 뜻이 ‘소리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란 뜻으로 울 ‘명(鳴)’에 대들보 ‘량(梁)’을 써서 ‘명량’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합치면 그렇게 들려요. 사방을 먹구름으로 감싸면 바다울음으로 들립니다.”
  “망망대해 큰 배에서 혼자 있으면 무섭겠어요.”
  “선원수를 계속 줄여나가면 선원들은 무인도의 고독을 느낄 겁니다. 이런 심리적인 면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라고 할까….”
  오선덕이 결코 농담하는 것이 아니다.
  간혹 몸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울 때가 있다. 무서울 때는 누군가 껴안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 상대가 배우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성 친구라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오히려 이성이 금상첨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윤리위원회에 회부 받아 마땅할까.
  “그렇다면 선원수를 줄일수록 여성 선원 허용이 정당화될 수 있겠어요.”
  “전 박사님의 적극적인 응원이 대한민국 선원제도의 변혁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이디어란 연구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서도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사람이 프로 연구원일지 모른다. 
  두 사람이 선원의 고독을 주제로 알코올에 취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둘은 동시에 움칠했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연구원님들도 통선이 없어 호텔에서 머무는 신세가 되셨군요.”
  한바다호의 최승호 선장이다.
  그 역시 배로 들어가려다가 같은 신세가 된 꼴이다. 울산 집에서 며칠 쉬었다가 배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는데 높은 파랑 때문에 호텔 신세가 되었다는 것.
  술 한 잔 생각이 나서 내려왔다고 한다.
  오선덕이 그를 옆자리로 안내했다.
  “같은 처진데 한잔 하시죠.”
  “그럴까요. 저도 심심하던 차에….”
  최 선장은 못이기는 체 하면서,
  “혹시 두 분의 업무 이야기에 방해라도?”
  덧붙이며 오선덕의 옆에 앉았다.
  ‘업무’가 ‘연애’로 들리는 건 최 선장의 야릇한 웃음 때문이다.
  최 선장은 몇 달 전 해사대학 3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순회 실습을 마치고 돌아왔다.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순으로 50일간의 항해를 마쳤다. 현지 교민들의 초청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동문들을 초청하여 선상 리셉션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선박 현장에 관하여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많다.
  “선원 감축이 선원합리화라고 하면 결국 무인선으로 가는 게 아닌가요?”
  전계린은 두 선장이 들으라는 식으로 SF소설보다 앞서가는 질문을 했다.
  “그게 문젭니다. 기술적인 문제 외에 법적문제, 책임문제, 정서문제 등이 발생할 수 있지요. 특히 국제법을 어떻게 정비하는가는 국제해사기구의 과제이기도 하겠지요.”
  최 선장은 의견을 이어나갔다.
  “소수 인원 선박에서는 인간 고독의 심각한 고민이 탄생합니다. 이 때문에 무인선이 해법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요.”
  술자리에선 문제점만 나열하고 해결은 연구과제에 붙이기로 했으나 오선덕은 무인선의 문제를 한 가지 더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4만 킬로나 되는 지구 원주를 무인선이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네요. 혹시 실수로 유조선이나 가스선이 서로 충돌한다면 그 결과는?”
  오선덕의 선장 출신답지 않은 코멘트에 최 선장이 고약한 쪽으로 말꼬리를 돌린다.
  “배들이 술 취한 사람처럼 돌아다닌다? 교통경찰이 오토바이로 따라다닐 수도 없고…하하.”
  “글쎄, 무섭기까지 하네요.”
  전계린의 떨림이었다.


  오선덕은 여성 선원 문제가 궁금해 최 선장에게 물었다.
  “실습생들의 여성선원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다들 찬성하지요. 성의 고독을 해소하는 방편이 될 수 있고….”
  “폐쇄된 공간이라… 남녀 혼승으로 인한 스캔들 같은 것은?”
  “있을 법하지요. 그런데 스캔들이란 속성상 인간 세상의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 아닌가요? 솔직히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네. 현대의 자유분방한 시대에.
  유럽 국가들은 일찌감치 여성을 동승시켜 직업인으로 대우해 왔으니까. 특히 구소련은 여성을 선장 비서로 혹은 정보원으로까지 탑승시키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는 적어도 정박할 동안 선원가족이 승선하도록 출입국관리소와 세관, 검역소 등이 협조하는 것은 마땅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밀수 방지를 위해 가족 승선을 금지했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화제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먼저 오선덕이 말머리를 틀었다.
  “선박자동화로 인해 선교에서 집중제어가 가능해 기관실을 무인화하고, 아파트 13층 높이 아래의 기관실에 당직서려 내려갈 필요가 없으니 어느 정도 정원을 줄이는 데는 문제가 없네요.”
  “입출항이나 하역작업 시 소수인원이 선수미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지요. 평면적이 축구장의 다섯 배나 되는 배를 걸어서 다니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은 안전문제가 따르지요.”
  최 선장의 현실감각이 두드러진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선박자동화로 인한 정원 감축 가능성은 전 박사님께서 결론을 잘 만들어 보십시오.”
  실습선 선장이 전계린의 전공을 알아채고 주문한다.
  술자리는 어느덧 연구실 냄새가 나서 오선덕이 분위기를 전환하기로 했다.
  “연구는 월급 받는 시간에 하도록 하고 이제 술맛에 집중하시죠.”
  적응력이 빠른 건지 금방 주류매상 분위기로 전환했다. 바깥의 험악한 날씨에 비해 지하 바의 공기는 취기로 가득하면서 따뜻해졌다.
  “이 따뜻한 기분을 안고 자고 싶으니, 절 방으로 좀 데려다 주세요.”
  전계린이 갑자기 벗었던 코트를 들고 일어났다. 발음으로 미뤄 봐서 주량을 다소 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선덕은 그 정도쯤은 아는 사이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열쇠를 쥐고 호텔 방 문을 여는 그녀의 손이 부자연스럽다. 취했는지 취한 체를 하는 건지 약간은 애매하다.
  “주세요. 제가 열어드릴게요.”
  오선덕이 열쇠를 받아들었다.
  “코트 거기 좀 걸어주실래요?”
  호텔 웨이터처럼 부려먹는 전계린을 탓하지 않고 얌전하게 옷걸이에 옷을 거는 오선덕은 자신이 대견스럽게 여겨진다. 평소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자란 원래 술에 약하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같이 보인다.
  “이럴 때 남자가 필요한 거군요.”
  옷을 걸려고 집어 들었을 때 향수와 술 냄새가 뒤섞여 기분이 싫지 않았다. 부산이 주는 독특한 느낌 때문인지 모른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의 이미지 탓일 수도 있다. 

    혼자 사는 티를 너무 낸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말을 계속한다.
  “고마워요. 이젠 돌아가셔도 돼요. 굿나잇!”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어. 녹차라도 한 잔 권하지 않고?
  아니, 그럴 만하지.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
  아마도 둘이서만 술을 마셨더라면 그녀의 방에서 차 한 잔 정도는 더 뒤풀이했을 것이다. 최 선장을 떼어 놓고 두 사람만 홀짝거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선덕은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전계린은 바다 울음을 또 들어야 했다.
  이 밤을 견뎌내는 것은 기적이다.


▲스탠드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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