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6.외동딸의 학예회

오선닥 2019. 11. 27. 15:24

▲펭귄 가족


펭귄 연극이 인연이 돼
남극탐사 항해사가 되고
극한 직업을 경험하는 여자는
언제 등장할까




6. 외동딸의 학예회


  작은 역사가 큰 역사로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섯 명의 연구원이 ‘운항사 제도’라는 큰 역사를 만들어냈다.
  두 달 간 실습선에서 연구를 마치고 상경한 연구팀은 선주협회로 돌아와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학교, 선원양성소, 조선소, 기술연구소 등에서 수집한 자료가 너무 많아 미리 서울로 탁송해 놓았다.
  “선원직의 매력이 상실돼가는 이유를 뭐랄까…, 챙겨봐야 하지 않을까요?”
  팀장 박기용 박사가 연구 아이템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자고 했다.
  우선 선원제도 합리화 문제부터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실습선에서 선원들과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한테서 많이 들어봤잖아요.”
  팀장한테는 전계린이 애교 있게 말대꾸를 잘하는 편이다.
  그렇다. 가족과 떨어진 생활, 급료의 매력 상실, 문화생활 기회의 박탈, 정보 접근성의 부족 등 여러 이유가 나열됐다. 마치 시베리아 횡단열차만큼이나 이유가 길어졌다.


  70년대 초 해외취업선원 급료가 엄청 좋았다고 이해출 박사가 들은풍월을 이야기했을 때 오선덕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때가 있었지요. 선원직의 매력을 유지하려면 급료가 육상의 것보다 두세 배는 돼야 할 겁니다.”
  항해 중에는 TV를 볼 수 없고 무선전화나 전보는 비용 문제로 자주 사용할 수 없어 선원의 고독과 무료는 벌레처럼 스멀거린다는 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인터넷이나 화상통화를 왜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백투더퓨처(Back to the Future) 영화 같은 이야기를 예를 들어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때 엄청 굶주렸다고 이야기하면 손자는 라면이라도 먹으면 되지 않으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거와 다름없다.
  팀장은 다음 주제로 가정생활의 영향에 대해 거론했다.
  각국의 법 사례를 조사한 바 있는 이해출 박사가 대답하는 게 적합하다.
  “현행 10개월 의무승선기간은 너무 길다고 하겠습니다. 유럽에선 부부가 6개월만 떨어져 있어도 이혼사유가 되지요.”
  듣고 보니 유승운 박사는 오 선장의 사례가 궁금했다.
  “오 선장님은 마지막 배 얼마나 타셨지요?”
  그는 대충 알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이럴 때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게 자연스럽다.
  “부끄럽네요. 2년 6개월이나 돼서….”
  여기에 전계린이 가만히 있어도 좋은데 끼어든다.
  “그럼 이혼 다섯 번은 가능하네요. 전 한 번밖에….”
  “전 선생, 40세 불혹의 애처가한테 그런 말을…?”
  박기용 팀장이 엄숙하게 개입했는데 이미 박장대소 장면으로 바뀐 후였다.
  연구실이 코미디 녹화실로 바뀌어도 괜찮은 수준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어려운 연구 과제라도 해결될 것 같다.


  은행잎이 떨어지고 찬이슬이 맺히는 늦가을에는 여기저기서 연극이나 축제가 열린다.
  서리풀 어린이집은 꼬마들을 데리고 작은 학예회를 열기로 했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전계린이 오선덕의 책상 쪽으로 왔다.
  “오 선장님, 오늘 한번만 저와 동행해주시면 안 될까요? 두 시간이면 충분한데….”
  평소답지 않게 살짝 귀 가까이로 다가와 말했다.
  “뭔지 모르지만 두 시간이라면… 저도 오늘 특별한 약속이 없으니까요.”
  혹시나 거절하면 어쩔까 걱정했는지 그녀의 입가에서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후 다섯 시 딸의 학예회에 참석하여 옆집 아저씨 노릇을 좀 해달라는 부탁이다.
  딸에게 아저씨에 관한 홍보는 이미 여러 번 해 놓았으므로 어색한 분위기는 아닐 거라고 했다. 아저씨를 배에서 파이프 물고 호령하는 선장쯤으로 설명했는지는 궁금하다.
  그들은 오후 4시 사무실을 나왔다. 해양조선 관련자와 면담이 있어 좀 일찍 퇴근한다고 말해도 좋았으나 그런 구실은 달지 않았다. 연구원 개인은 퇴근시간을 고무줄처럼 조절할 권한은 있다고 믿었으니까. 너무 과도하여 고무줄이든 직장이든 끊어지는 사태는 피해야 하겠지만.
  두 사람이 시차를 두고 사무실을 나온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학예회의 프로그램에는 연극이 하나 들어 있다.
  연극의 주인공으로 전계린의 외동딸 양외란이 등장한다.
  연극의 제목은 ‘꼬마 펭귄 지키기’.
  남극 땅 위에서 사는 유일한 동물인 펭귄에 관한 이야기다.
  꼬마 펭귄을 지키던 아빠 펭귄이 먹이를 구하러 간 엄마 펭귄을 기다리다가 지쳐 굶어 죽는데, 죽는 순간까지도 아기 펭귄을 발 위에 올려놓고 품고 있다가, 마침 먹이 구하러 간 엄마 펭귄이 돌아와 아기 펭귄을 살려내고, 엄마 펭귄은 다른 아빠 펭귄의 도움을 받으며 아기 펭귄을 훌륭히 키워 나간다는 줄거리다.
  만 4살의 양외란이 주인공 엄마 펭귄으로 나오니 전계린이 엄마로서 가슴이 뿌듯하다.
  펭귄이 살아가는 방법에서 모두가 감동했다. 부부 펭귄이 둥지를 만들고, 돌을 굴리며 알을 품는 연습을 하고, 알을 낳아서는 40일 동안 부부 펭귄이 교대로 발 위에 알을 올려놓고 품고 있는 모습에서 끈기와 협동을 함께 느낀다.
  영하 50도라는 가장 혹독한 추위에서 펭귄은 어떻게 살아갈까?
  남극은 천적이 없는 안전한 곳이다. 북극곰이나 북극여우 등 육식동물이 사는 북극과는 달리 남극에는 그런 동물이 없다. 혹한의 바람을 피하기 위해 무리가 소용돌이치며 안팎으로 자리바꿈하는 그들의 살아가는 지혜는 사람도 배워야 할 것 같다.
  연극을 마치자 엄마와 아저씨는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엄마를 본 양외란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아저씨가 옆에 있어서 좋았다. 양외란이 커서 남극항해 쇄빙선 항해사가 되었을 때 오선덕이 롤모델이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이때의 기억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날엔 외란의 아빠를 부르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오선덕이 두 아이가 있는 아빠의 입장에서 말했다. 아무리 이혼을 했더라도 기쁜 날에는 아버지에게 연락하는 게 좋다는 아주 평범한 생각 때문이었다.
  전계린은 불쾌하다는 반응이다.
  “외란이의 기억에 흠집 내지 마세요. 아빠라는 존재를 잊은 지 오랩니다.”
  아이가 들을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허리를 쿡 치기까지 했다.
  외란은 피자를 한참 열심히 먹고 있는 중이라 어른의 대화를 듣지는 못한 것 같다. 맥주잔이 급히 채워지고 건배를 크게 외친 엄마와 아저씨의 행동을 더더욱 알 턱이 없다.
  피자를 다 먹은 외란은 피곤하다며 소파에 누웠다.
  “오늘 힘들었는데 좀 쉬어라.”
  엄마가 쉬라고 했을 뿐인데 아이는 피곤한지 레스토랑의 소파에 누워 잠들고 말았다. 오선덕이 양복을 벗어 아이에게 덮어줬다.
  이 장면에서 전계린은 울컥했다.
  “꿈에서 아빠의 꿈을 꿀 지도 모르겠네요.”
  전계린이 모처럼 아빠라는 용어를 썼다. 이혼이 아이에게 상처를 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평소 아빠 이야기를 피해 왔던 그녀였다. 엄마의 담대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이 저녁 꺾이고 말았다.
  “오 선장님, 고맙습니다. 외란이가 평화롭게 자네요.”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했던 것이 벌써 네 시간이 지났다.
  오선덕이 잠든 아이를 업고 전계린의 아파트까지 갔다.
  침대에 아이를 내려놓고 현관문을 나설 때 전계린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 아이의 아빠가 돼 주셔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가세요.”
  잡은 손은 가슴까지 따뜻함이 전달되었고, 키스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 “우린 직장 동료이니까” 눈빛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연구의 방향과 내용이 정리돼 갔다.
  선원제도 합리화 연구는 운항사제도, 외국선원 혼승, 여성 선원 허용, 가족 동승, 해륙 교환 근무, 조기 유급휴가, 선원복지 향상, 선원교육 강화, 관련법 정비, 국제협력 등의 세목으로 정리했다.
  선박설비 근대화 연구는 기관실 무인화, 육상지원 강화, 선박자동화 확장, CCTV 확충, 부품조달 체계화, 비상시설 강화, 보수정비 시스템화 등의 세목까지 언급했다.
  한편 선원교육제도 개혁 연구는 선원제도와 설비자동화의 변화 추세에 맞춰 각국의 교육제도 및 국제기구와 공조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근간이 잡혔다.
  그리하여 세 권의 연구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선원제도 합리화’
  ‘선박설비 근대화’
  ‘선원교육제도 개혁’
  모두 다 귀중한 성과물이다. 제도 개혁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운항사 제도는 항해, 기관 및 통신 분야를 통합하는 게 원래 목적이었으나 항해와 기관을 전적으로 통합하기는 아직은 이르고 점차적으로 추진하는 쪽으로 견해가 모아졌지만, 항해와 통신은 지금 당장 통합해도 좋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송호걸 회장은 만족해했다. 선원선박의 근대화가 한국 해운을 지속가능케 하는 길이라고 찰떡같이 믿는 그에게는 이번 연구의 의미가 컸다.
  정원 감축으로 인한 선원들의 직무 과부하의 대가로 급료 인상을 제시하나, 소수 정원에서 야기되는 정신적 고독과 사회적 고립성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는 큰 과제로 남는다. 

  실제로 일선 상선대학에서는 선주협회의 강력한 요청으로 1990년대 초부터 운항사 교육과정을 설치하여 졸업생을 배출했으나 개별 선주의 무책임한 외면, 국내법 미비, 국제협약 개정 등의 이유로 2000년에 들어서자 운항사제도는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고의 유연성과 융합기술이 지향되는 시대에 다시 부활 것으로 믿어진다.


▲커서 뭐가 될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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