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3.여성 해기사

오선닥 2019. 10. 30. 17:15


▲선박조종 실습장면


금녀 영역에 1993년
최초로 여학생 입학
현재 여성 해기사 활동 왕성



3. 여성 해기사


  흥미롭게도 연구가 끝난 4년 후 1993년 상선대학에 여학생 입학이 허용됐다.
  뉴스감은 오선덕의 생질녀 장세빈이 국제해양대학의 최초 여성 입학생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외삼촌의 늠름한 마도로스 모습이 그녀의 입학에 영향을 줬다는 것.


  제1회 졸업생의 프리미엄은 참으로 대단하다. 총장이 직접 여성 졸업생의 취업에 발 벗고 나섰다. 여성 졸업생의 백퍼센트 취업이 달성됐음은 물론이다.
  “너는 씩씩하고 미인이니까 앞으로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야.”
  오선덕은 마구 추켜올렸으나 생질은 전적으로 동의하려 하지 않는다.
  “외삼촌, 미인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씩씩하다는 말은 빼세요.”
  진정한 여성다움이 씩씩한 기상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여자들은 스스로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오선덕이 몇 문장을 덧붙인다.
  “여성에게도 인생은 어차피 도박이야. 프리미엄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건가? 지금부터 결심을 다지고 올인하라구.”
  “어떤 진로가 전망이 좋을 것 같은데요?”
  조카는 조금 마음이 내켰던 모양이다. 오선덕은 자신의 세대가 주지 못하는 근사한 미래상을 추천하고 싶다.
  “궁극적으론 크루즈선 선장이다. 일만 명이 승선하는 20만톤짜리 대형 크루즈선의 여성 선장, 상상해봐. 얼마나 멋있어. 드라마 러브보트에 출연할 수도 있다니까.”
  오선덕의 솔직하고도 감격 섞인 발언이었다.
  조카는 반응이 신통찮았다.
  “동양에서 크루즈선은 아직 먼 나라 얘기예요. 다른 여학생 추천하세요.”
  외삼촌의 기대와는 달리 결국 조카 장세빈은 의무 승선기간 3년이 종료하자 곧 해양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업하고 말았다.
  “아까운 여성, 미래의 크루즈선 선장을 놓쳤군.”
  조카란 삼촌에겐 실망 덩어리인가.


  이런 장세빈이 왜 소설에 등장했는가에 대해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은 나중에 소설의 주인공 여성 항해사 양외란과 쇄빙선에서 만나기 때문에 미리 살짝 소개한 것이다. 양외란은 전계린 박사의 딸이라는 사실도 곧 알게 되고.


  선주협회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한 지 3주째 되는 날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한강 쪽으로 불었고, 이윽고 한강 유람선을 타며 한강을 배경으로 저녁을 먹자는 신선한 발상에 연구원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선원 및 선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실제 승선 경험이 중요하다면서.
  “배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지요. 유람선의 구조도 한번 보자는 겁니다.”
  해운물류가 전공인 유승운 박사의 조금 해괴한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람은 본인 외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강드림호 뷔페에 다섯 명이 모였다.
  저녁을 럭셔리하게 체험하자.
  가난한 연구원도 한 번쯤은 고급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던 터다.


  88서울올림픽을 기해 한강은 잘 정비되었고 수량은 풍부하다. 유람선이 허리 깊게 잠겨도 배의 항해에는 지장이 없다. 한강에 비하면 템즈, 센느 강은 도랑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의도-잠실-양화대교를 순항(巡航)하는 두 시간의 항해는 와인 두 병을 소비하기에는 적당하다. 창을 옆에 두고 물 냄새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분위기도 색다르다.
  한강의 야경은 총천연색.
  올림픽 관광객의 혼을 빼놓곤 하는 분수, 폭포, 다리 난간의 곳곳에서 화려한 무지개 불빛을 뿜어낸다. 외국의 어느 강에서도 좀체 보기 드문 광경.
  각자 와인 잔을 들고 선교로 올라간다. 유람선 선장에게 와인을 권하는 해사법학 연구원 이해출 박사를 오선덕이 급히 만류한다.
  “근무 중인 선장님에게 음주 운전시키면 곤란합니다.”
  유람선 선장은 비시시 웃는다.
  알래스카 해역에서 대형 기름유출을 일으킨 엑손발데즈호의 좌초사고도 선장의 알코올중독이 원인이었음을 설명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들은 습관적으로 연구과제가 하나 더 생겼다고 신기해하면서 고마워한다.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유람선 안에서 라이브 공연과 마술쇼조차 일행에겐 관심 밖이다. 결혼기념일, 프로포즈 등 행사를 하는데도 신경을 끈다. 연구의 목적을 위해 유람선을 탔을 뿐이라고 강조하는 연구원으로 인식되고 싶어서일까.
  마리나 선박들에는 승조원과 법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도 그들의 연구과제에 포함된다. 종류도 다양하다. 모터보트, 고무보트, 요트, 윈드서핑, 수상오토바이, 호버크래프트, 카누, 카악, 유어선, 유람선….
  특색에 따라 선박의 구조와 선원제도의 합리화가 요구된다. 연구원의 연구 과제로서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포도주가 주는 얇은 취기를 한강 바람에 비벼 날리며 유람선을 떠나 여의도 선착장에 내리는 그들. 아쉽지만 택시에 나눠 타고 귀가하기로 했다.
 
  부두에서 부른 택시 두 대가 도착했다.
  강북 방향 세 사람, 강남 방향 두 사람.
  강남 방향 택시에 전계린과 오선덕이 오른다.
  오선덕이 전계린을 택시 뒷좌석으로 안내하고 자신은 앞쪽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뒤에 분 방배동에 먼저 내려드리고 서초동으로 가세요.”
  방배동 아파트 앞에서 택시는 얌전히 섰다. 여성을 하차시킬 때는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밟는 것이 예의라고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린 전계린의 발걸음이 흔들리며 휘청거린다.
  “오 선장님, 포장마차에서 한잔 더 하실래요? 저기 저희 단골이 있어요.”
  오선덕이 멈칫했다. 처음 받는 여성의 호의에 신사는 순순히 따라야 하나.
  택시 안에서 전계린은 자신의 신상을 간단히 소개한 바 있다.
  세 살짜리 딸이 있는 이혼녀라는 것, 회사의 여성 직원과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콕 잡아내 이혼장에 도장을 찍게 했다는 것, 자신은 남다른 촉이 있고 눈치가 빠른 여자라는 것 등을 소개했으나, 제삼자가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줄 지는 미지수다.
  “아이가 기다린다면서요.”
  “괜찮아요. 외할머니가 돌보고 계시니까요.”
  대답의 유무에 관계없이 그녀가 앞장서 가더니 깔끔한 포장마차에 머리를 들이밀어 넣는다.


  둘은 포장마차 아주머니를 마주보고 나란히 앉았다.
  “꼭 물어볼 게 있어요. 어떻게 2년 반 동안 한 배에서 지내셨습니까? 전 이혼한 지 열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외로워서 못 견디겠어요. 오 선장님은 네 식구의 가장 맞으세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잠시 가족 이야기를 한 것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집을 보여줬더라면 숟가락까지 셀 사람이군. 
  심각한 질문에는 부드럽게 대답하는 습성이 오선덕에겐 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쯤 한국에 오니까 괜찮았어요. 옛날 외국선 승선했을 때는 일 년 반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요. 거기에 비하면 해피한 거지요.”
  “지독하시다.”
  그러고 소주 한 잔 들이키고는,
  “바람 많이 피웠겠다…?”
  상대방을 보지 않고 그녀는 혼자 말했다.
  “그런 걸 바람피운다고 하지 않아요. 불가항력이랄까…… 그런 겁니다.”
  맞장구를 쳐줄 만한데 오선덕은 그러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표현은 달라야 한다. 가령 살림에 필요한 돈을 생활비, 생계비 혹은 생존비로 호칭하듯, 동일한 사건일지라도 ‘불가항력’이 들어가면 책임을 면한다. 선박 사고에서 불가항력은 면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그녀가 알 턱이 없지.
  “맞아. 우리 남편, 아니 포머 허즈번드(former husband), 아니 그 개자식처럼 눈뜨고 코 빼먹는 외도(外道) 같은 게 바로 바람이지…….”
  그녀의 입이 이렇게 험악해지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선덕을 쳐다본다.
  “원래 선장은 핸섬해야 하나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의도인지 모르는 듯 그녀는 술잔에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오선덕은 그녀의 주량이 여기까지임을 감지하고 일어서려 했다.


  “쇠주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술값 지불도 핸섬하겠습니다.”
  오선덕이 일어설 구실로 그렇게 말하자, 이때 손을 휘젓는 그녀,
  “여긴 제 구역이에요. 과부 얕보지 마세요. 위자료 톡톡히 받아놨거든요.”
  일어서려는 그녀의 발이 약간 꼬이기 시작했다. 오선덕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고, 그도 따라 앉았다. 펄썩 했는데도 의자는 튼튼하다.
  “외란이가 이 엄마의 외로운 심정을 알 턱이 없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딸 이름을 잘못 지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오선덕도 그 이름은 운명적인 냄새가 나서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명가한테 가져가도 같은 구실을 붙일 거라는 느낌이었다.
  여자는 옆에 있는 남자에게 잔을 권하지 않고 혼자 홀짝인다. 남자도 자기 잔을 비운다.
  “외란이를 위해서 다시 합치시죠?”
  생각할 여유 없이 여자가 바로 받아친다.
  “합칠 걸 왜 이혼합니까? 그 자식도 똑같은 소리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서… 진절머리 나요.”
  “남편이 배라도 타고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 같군요.”
  “그럼 감지덕지지. 왜 그런 놈 골라서 배 태우지 않는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오 선장님 같은 분은 육상에서 근무하시고….”
  너무 솔직했다는 듯 전계린이 잔을 든 채로 아파트 쪽을 가리킨다.
  “저기 아파트 불이 보이죠? 맨 왼쪽 맨 위쪽 말예요. 저희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시는가 봐요.”
  밤은 늦었다. 남편이 위자료로 남겨두고 간 아파트에 여자는 벌써 들어갔어야 하는데 계속 미적거린다.
  중심 잃은 여자를 아파트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는 오선덕은 앞으로 연구 사항에 바람둥이 남편을 배 태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판이다.


▲포장마차 연인(드라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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