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게맛에 미친 사람들
러시아 활게를 운반하기 위해
중국 냉동운반선을
활어운반선으로 개조해서
활게를 수입하는 사람
그의 이야기를 수회에 걸쳐
펼쳐나갈까 합니다
제 1회
게맛
솥에서 쪄 나온 게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가위로 자른 다리 틈 사이로 허연 속살이 드러났다. 한 줄을 쏙 뽑아 입에 넣은 임동박(52) 사장은 “이게 바로 게맛이야!”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옆에서 숨죽이며 반응을 지켜보던 영일관 사장 오영애(36)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게 맛이 좋으세요?”
“니들이 게맛을 알어?”
임 사장은 의기양양했다. 게에 관한 한 업계 전체를 싸잡아 얕잡아보는 말투이기도 하다. 게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혼자뿐이며, 자신의 게 지식수준에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표정이다. 어획물을 운반하면서 익힌 경험과 게의 생태와 요리법에 대한 지식을 의심하지 말라는 암묵적 자랑이기도 하다.
“킹크랩 맛이 좋으면 아예 러시아에서 수입하시죠.”
너무도 의기양양한 임동박의 모습을 확인이라도 하듯 오영애가 말을 넣었다.
임동박은 게살이 묻은 입을 닦으며 말한다.
“좋은 제안이야.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냐.”
그리고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입맛대로 쉽지는 않어. 수산물 사업에 러시아 마피아가 득실거려.”
러시아 마피아는 러시아 정부가 배정한 쿼터 물량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지만 초과조업이나 개인 수출 어획물에는 손을 대곤 한다. 이들은 러시아 정부 관리와 교묘하게 연계해 불법을 저지른다. 이들의 활동을 신고하면 보복의 위협이 따르기도 한다.
“오빠가 잘 아시는 부산의 김택구 씨도 있잖아요. 명태 수입 중개인 말에요. 명태도 러시아 마피아와 끈이 있다면서요.”
“글치 않아도 한번 알아볼 참이여. 킹크랩은 어느 마피아가 덤비는지도 알아보고…….”
“어쨌든 물량 공급은 오빠가 알아서 하세요.”
임동박은 영일관에 30퍼센트 투자했다. 오영애는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별도 차용증을 써줬다. 믿음이 흔들리면 땅도 흔들린다는 평소 소신 때문에 그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임동박은 그런 그녀를 사업 파트너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게가 왜 이리 모자라지. 게구멍으로 다 도망갔나.”
“이참에 영덕게 대신 수입게로 바꿔야겠네요.”
“어렵더라도 그렇게 밀어붙여야겠어.”
영일관을 운영하는 오영애는 임 사장으로부터 게를 공급받아 게 요리를 전문으로 장사를 해왔다. 그녀의 고향이 영일만이라 요릿집 이름도 고향 이름을 땄다. 그렇다고 고향 사람을 반가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신분이 드러날까 조심스러워 했고 말씨도 사투리를 쓰지 않고 일찌감치 서울말로 바꾸었다. 서른여섯에 영일관 주인이라면 웬만한 사람들은 그녀의 성공 스토리에 놀랄 것이다.
“오빠와 저는 바늘과 실 관계예요. 오빠 가는 곳에 제가 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갈 뿐 게처럼 옆걸음질은 안 돼요.”
언젠가 그들은 각오를 앞세워 관계 설정에 진지했다.
임동박은 오영애의 기를 세우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영일관을 대원각 정도로 올려놓아야지.”
영일관은 한남동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한강이 기분 좋게 내려다보인다. 전망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다. “이제 돈도 좀 모았으니 시집갈 생각도 해야지.” 임 사장이 장난삼아 말해도 그녀는 “한강물은 제가 시집을 안 가도 계속 흐른답니다.” 그의 말을 다른 귀로 흘려보냈다. 자신을 고향 누이동생으로 삼아준 그를 배신할 수 없다. 결혼한다고 배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누이 사이를 벌려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골에서 어렵게 올라왔는데 성공하지 않고는 시집 못 가요.”
“논개의 기개를 닮았나. 고집이 세다니까.”
임동박의 고향은 영덕이다. 어릴 때부터 게와 친했으니까 게 박사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 바닥에 게를 공급하다 보니 오영애를 알게 되었고, 고향이 가까워 친숙해지는 데 걸림돌이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아 한번은 딸로 여기면 어떻겠냐고 살짝 제안을 했다가 그녀는 펄펄 뛰었다. 어떻게 여자의 진정성을 무시할 수 있느냐고.
“저희 큰오빠가 저보다 열세 살 많아요. 겨우 열여섯 살 차이 가지고 큰소리친다니까.”
결국 호칭을 오빠로 하기로 했다. 간혹 큰오빠로 불러주겠다고 하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재처로 들어왔기 때문에 전처의 큰오빠와 자신과의 나이 차이가 많다는 것을 고백했을 때 나이에 관한 의문은 풀렸고, 자연스럽게 오누이 관계는 묵인되었다.
“자야, 장사하는데 어려운 점 없어?”
어느 날 갑자기 호칭을 자야라고 부르자 오영애는 깜짝 놀랐다.
“자야가 뭐예요. 촌스럽게.”
“자야가 얼마나 좋은 이름인 줄 알긴 알어? 길상사의 전신인 대원각의 여주인 이름이 자야라는 걸. 어린 기생 시절에 애인인 천재 시인 백석 청년이 지어준 아명이란 걸 몰랐지?”
“그럼 동박 오빠가 저 애인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백석 선생은 북한으로 갔지만 나는 한국에 있으니 어려울 일 없잖아.”
대원각 여주인 김영한은 자신의 소유 요정을 사찰에 기부했고 백석문학상을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준 애인 월북시인을 잊지 않았다. 대원각의 가치가 백석의 시 한 수만도 못하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임동박은 게의 다리를 눌렀다.
“여기 다리 한 번 만져봐. 꾹 눌러도 들어가지 않잖아. 살이 꽉 찼다는 뜻이야.”
“이런 속살배기 게들은 어디서 잡아요?”
“킹크랩과 스노크랩은 주로 청정해역인 베링해나 오호츠크해에서 잡지. 이런 다리라면 누구나 혹할 만하겠지?”
임동박은 주제넘게 오영애의 다리를 곁눈질로 훔쳐봤다.
눈치를 챈 오영애.
“영덕대게, 울진대게도 씨알이 굵고 살이 꽉차 있답니다.”
그리고 한 템포 죽이고,
“근데 왜 제 다리를 자꾸 쳐다보세요?”
웃으며 그녀는 열린 다리를 모았다.
“자야는 게맛이 아니라 게맛살이 어울릴 것 같아.”
“전 혼합물이 아니에요. 순수한 영일만산이라구요”
게맛살은 명태 연육에 게의 향이 나는 향료와 게 엑기스를 혼합하여 제조한다. 생선의 살을 뼈째 으깨어 소금, 칡가루, 조미료 등을 넣고 쪄서 만든 어묵과는 다르다.
“결국 순수 게맛이라는 거지? 그래 맞어. 넌 서울 와서도 전혀 물들지 않았어. 속살의 순수함이 보존되고 있어. 영락없는 내 누이야.”
덕담과 음담을 구분하려는 노력은 허사다.
“오빤 그런 살을 좋아하니까.”
마지막 다리를 뜯어 입에 넣는 임동박의 얼굴에 만족감이 젖어 흐른다.
“아주 부드럽고 입에서 살살 녹는 그 맛. 저항할 수 없어.”
“한 마리 더 드실래요?”
“3킬로짜리 한 마리 더.”
일어나 나가는 오영애의 뒤태가 유난히 고혹적이다. 옆이 트인 블랙드레스에서 살짝살짝 삐져나오는 허벅지는 남자의 시선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하다. 그는 다짐한다. 한 가지 단어만은 연상시키지 말자. 속살.
그녀가 게 한 마리를 안고 들어오자 그는 남성의 식욕을 느꼈다.
“자야, 오늘밤은 안 되겠지?”
“저도 이제 처녀 자존심 지켜 시집갈 준비해야죠.”
“시집 이야기만 하면 펄쩍 뛰더니. 오늘 웬일이야. 나더러 축의금 준비하라고?”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오빠 입에서 시집 이야기는 싫어요.”
“누이야, 알았다. 게 다리만 파먹을래.”
3킬로 게를 잘랐다. 두 사람은 함께 먹었다. 한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한 사람은 살을 뽑아내곤 하면서. 청하를 곁들이니 취기가 오른다. 밤 10시 반은 남녀 간에는 아주 애매한 시간에 속한다. 허리를 일으킬까 눕힐까. 동박은 영애의 마음을 떠보고 싶다.
“자야는 돈 벌어서 뭘 하려고 해? 절 지으려고?”
삼청각이나 청운각, 대원각 정도는 아니지만 영일관의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다. 한강의 전망을 앞세워 일반 요릿집으로서는 꽤 소문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오영애는 돈을 벌면 좋은 일을 하겠다고 말해 왔으니.
“난 영한 언니와는 달라요. 절은 아니에요.”
“그럼 사랑의열매 등?”
“아니, 교회를 지어 헌당하려고요.”
의외의 대답이다. 그녀에게 교회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은 가끔 그녀의 목을 두르고 있는 십자가 목걸이뿐이었는데.
자정 전에 임동박은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고 영일관을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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