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항공기를 압류하라

항공기를 압류하라(제 8회)

오선닥 2015. 8. 12. 20:47

  한강변 데이트족들

자전거데이트와 자동차데이트

두 쌍은 우연히

다리 밑에서 조우했는데...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8회

 

 

그들의 데이트

 

요즘 박태훈(27) 과장의 심사가 편치 못하다. 경쟁사의 양도준(27)이 시코여행사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이 부쩍 잦아졌기 때문이다. 동종 기업으로서 산업 비밀을 빼 가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해가 될 법도 하지만, 그것도 아닌 연가람(24)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것 같아 기분이 찜찜하다.

 

양도준이 박태훈의 기분을 간파했는지,

 

“박 과장님, 양해하십시오. 가람 씨와 차 한 잔만 딱 하겠습니다.”

 

하면서 대놓고 예의를 갖추니, 노골적으로 싫은 표시도 할 수 없다. 양보한 여자를 다시 탈환하겠다는 뜻은 아닐 테고.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선후배 간의 대화를 의심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그러던 차에 숨은그림찾기가 풀렸다.

 

퇴근 무렵 사무실 빌딩 코너를 돌아가는 순간 양도준이 어떤 노랑머리 아가씨를 만나 낚아채 가는 것이 목격됐다. 노랑머리는 시베르항공의 나타샤(28)였다.

 

사실 양도준이 연가람과 대화한 것은 연막작전이었다.

나타샤와 만남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튿날 사무실에서 박태훈은 연가람의 정보능력을 떠보기로 했다.

 

“최근 양도준 씨가 우리 사무실에 자주 오는 이유가 뭘까?”

 

“절 만나러 오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도 없어요.”

 

양도준과 나타샤의 관계를 아직 모르고 있는 연가람으로선 당연한 대답이다. 박태훈은 자신의 질문이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럴까? 아직도 널 좋아하는 건 아니고?”

 

“오빤 날 의심하는 거야? 그는 학교선배일 뿐이야.”

 

그녀가 정색으로 나오자 박태훈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일부러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너무 자주 오니 오해할 만하잖아. 커피 마시러 우리 사무실까지 올 리는 없고…….”

 

“오빠 자꾸 이러면 나 화낼 거야.”

 

이거 아닌데. 장난은 여기서 그쳐야 한다. 가람이 폭발하면 수습이 어려울 수 있다. 결국 박태훈은 양도준과 나타샤가 건물 모서리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말했다.

 

“정말?”

 

“그렇다니까. 그럼 우리도 주말에 데이트할래?”

 

박태훈이 제안하자 연가람은 자연스럽게 평소 좋아하는 주말 자전거 데이트에 동의했다. 그들은 자전거 동호회 회원이며 DMZ생태보호와 통일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회원이기도 하다.

 

여름 주말 저녁은 꽤 더웠다.

 

반포한강공원에서 자전거를 빌린 두 사람은 저녁 바람을 시원하게 받으며 강변을 달렸다. 더워서 그런지 공원에 나온 사람이 많다. 롱보드 타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베드민트 치는 사람…… 다양하다.

 

다리 밑에 차를 세워 놓고 쉬는 사람도 보인다. 차문을 열어 놓으면 강바람은 차 안을 훑고 지나감에 시원한 피서가 된다.

 

다리 밑은 참 좋은 곳이다. 비바람을 피해 좋고 전쟁 중에는 비행기의 포격을 피해서 좋았다.

 

“이제 좀 쉬어요.”

 

강변 자전거길을 따라 반포에서 잠실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남대교 근처에 왔을 때 연가람이 휴식을 제안했다. 박태훈도 땀을 식히고 싶었다.

 

“여기 다리 밑이 좋겠네. 조용하고.”

 

한남대교 밑에 자전거를 세우고 뒷좌석에 있는 돗자리를 내려서 시멘트 바닥 위에 깔았다. 둘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한강을 바라보았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면서도 이렇게 다정하게 있어본 적이 없었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니 마치 드라마 속의 주인공 같다고 연가람이 말했다.

 

강물이 흘러가는 중에 침묵이 흘렀다. 흘러가는 물처럼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시의 분주한 노동이 끝나고 휴식을 깔기 시작하는 시간 같다.

 

“가람 씨 뭘 보고 있어?” 박태훈이 침묵을 깼다.

 

“저쪽 너머 다리를 보고 있어요.”

 

“무슨 다리?”

 

“성수대교.”

 

멀지 않은 거리에 성수대교가 보인다.

 

“왜?"

 

“4년 전 다리 붕괴로 우리 친구 여동생이 죽었어요.” 연가람이 말했다.

 

1994년 가을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30여 명이 사망했다. 등교시간이라 희생자는 대부분 건너편 여자고등학교의 학생들이었다. 박태훈은 여성의 희생에 대해 적절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상황적 예의라고 생각했다.

 

“15년밖에 안 된 다리가 두부 자르듯 끊어졌다니, 참담하고 억울해.”

 

규격 이하의 철판 두께와 리벳과 볼트의 불량으로 야기된 대형 사고는 고속성장 후유증의 표본이 되기도 했다. 여자는 사고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정말 끔찍해요. 이듬해 삼풍백화점이 붕괴해서 500여 명이 사망했잖아요. 그때도 우리 여자들이 많이 희생됐구요. 저의 고모가 저녁거리 사러 갔다가 그만…….”

 

그녀는 여자만의 희생을 성토하는 사람 같았다.

 

“여성이 출산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도 대단한데. 우리 남성들이 너무 이기적이라서.”

 

남자의 말을 진지하게 접수했는지 여자의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다.

 

“오빠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의 행복이 죄스럽기까지 해요.” 연가람이 말했다.

 

“죄책감에 빠질 필요 없어. 내 몫까지 살아줘, 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해요.”

 

“열심히 사랑하는 건 어때?”

 

그러자 박태훈은 재빨리 입술을 그녀에게 가져갔다.

 

다리 위로 무수한 차들이 시끄럽게 지나가지만 다리 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중부경찰서장인 그녀의 아버지가 순찰차를 타고 다리 위를 지나간들 딸의 데이트 장면을 알지 못할 것이니까.

 

그런데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리 밑에 주차해 있는 청색 승용차 한 대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다. 유리의 선탠이 짙은데 차를 세워 놓고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차 안에서 은밀한 데이트를 하고 있는지 바깥에서는 알 도리가 없다. 차 앞에 가서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데이트가 불법도 아닌데. 키스한다고 경찰서장이 잡아가겠어?”

 

“자꾸 우리 아버지 얘길 하고 그래요?”

 

“난 솔직히 네 아버지가 젤 겁나. 우릴 사이를 떼어 놓을까 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훈이 가람을 끌어안고 입안을 꽉 채웠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누가 듣거나 보아도 상관없다. 그만큼 급한 상황이다. ‘내 몫까지 살아줘’의 행복이 이런 걸 의미할 것이다. 격렬함 후에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들의 숨소리에 박자가 맞지 않았다. 그친 숨소리가 중복되고 있었다. 사랑의 숨소리는 이렇게 박자가 맞지 않은 건가? 박태훈은 참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에 잠시 숨을 멈춰봤다. 그래도 들렸다.

 

“가만! 우리의 심장 소리가 아니잖아?”

 

그들은 사랑을 멈추고 일어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고 애견동물도 보이지 않았다. 틀어놓은 라디오도 없었다.

 

“헉! 헉!”

 

소리는 청색 자동차 반대편에서 났다.

박태훈은 자동차 반대편으로 갔다.

은색 돗자리 위에 두 남녀가 누워 있었다.

 

여성의 젖무덤이 긴 머리카락을 비집고 나와 보였으나 풍기문란의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예의를 갖추어 두 남녀를 비스듬히 보았다. 동공의 확대와 동시에 그는 놀랐다.

 

양도준과 나타샤였다.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면 더 어정쩡한 상황이 돼 버릴 것 같았다.

최대한 침착성을 발휘하여 박태훈은 말하려 했으나 입에서 나온 말은 엉겁결에 질문식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왜 여기서 만나야 합니까?”

 

이럴 때 당사자는 멍한 상태를 보이는 것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다.

양도준은 웃지 않았는데 웃는 표정이 나왔다.

 

“반갑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 미안합니다.”

 

누웠던 두 남녀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연가람을 본 나타샤는 얼굴을 피하려다 뭐를 포기한 사람처럼 마주 보고는 부끄럽게 웃었다. 민망해하는 두 사람에게 박태훈이 말했다.

 

“그러나 19금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마세요.”

 

“두 분도 여기 계셨어요?” 양도준이 물었다.

 

“우린 자전거 데이트하고 있었어요.”

 

“돗자리가 저기 있는 것 보니 우리와 비슷한 데이트?”

 

“하하, 자동차와 자전거는 많이 다르죠.” 박태훈이 대답했다.

 

심판자 솔로몬이 있었다면 서로가 피장파장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양도준은 자전거라이딩복장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부러웠다.

 

“복장이 참 멋있습니다. 두 분은 자전거를 좋아하십니까?”

 

“우린 자전거 동호회원입니다.”

 

박태훈은 자전거데이트에 대해서 설명했다. 공원에서 자전거를 쉽게 빌릴 수 있고 두 사람이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고 말했을 때 나타샤가 더 관심을 보였다. 두 사람이 같이 탈 수 있는 자전거도 있다고 하자 남자의 허리를 잡고 타는 모습이 상상되어 나타샤는 기분이 좋았다. 자전거 캠핑은 더 재미있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많은 호기심을 보였다.

 

“8월에 DMZ지역에 자전거캠핑 갑니다.” 박태훈이 말했다.

 

“DMZ가 뭐예요?” 나타샤가 물었다.

 

“한국에만 있는 특별한 지역입니다. 군사분계선 부근 비무장지대죠.”

 

자전거 라이딩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행업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나타샤는 이유가 궁금했다. 박태훈은 경쟁사의 양도준이 있음에도 자기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해 나갔다.

 

“앞으로 여행업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티켓만 팔아서 수수료로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여행업은 무궁무진한 벤처사업이라는 거죠.”

 

듣고 보니 그렇다. 어떤 유명 금융업자는 미래 유망업종의 랭킹에 여행업을 올려놓았다. 소득이 높아지고 연금 수급자가 늘어나면 자연히 여행자수는 증가하게 된다는 것. 여가생활은 삶의 이유라는 것.

 

‘돈을 쓰겠다는 사람을 잡으라.’

 

여행업은 편의 제공으로 돈 쓰는 사람을 잡는 업종이다. 숙박, 교통, 요식, 체험테마, 렌트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한다. 세미나, 학회, 축제, 종교모임, 팸투어 등과 연계한 상품개발은 다양하다. 크루즈 강좌나 한류 관광 등 연계 개발의 가능성도 많다. 보는관광, 즐기는관광, 체험관광 등에는 종류의 제한이 없다. 관광개발 지도자 및 인재 양성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DMZ에 자동차캠핑은 없습니까?” 양도준이 물었다.

 

“앞으로 그런 것도 있을 겁니다. 통일시대를 대비한 평화활동과 환경활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더욱 중요하고요.”

 

“그럼 두 분은 시민단체에 가입했다는 말씀인가요?”

 

“우린 ‘통일을위한청년모임’ 회원이죠. 두 분도 가입하세요. 외국인도 가능하니까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끄러운 데이트 장면은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다.

 

박태훈이 눕혀 놓은 자전거를 세웠다.

 

“그럼 두 분은 자동차 데이트하시고, 우린 자전거 페달을 밟겠습니다. 반포한강공원으로 갑니다.”

 

한강은 역시 흥미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곳임에 틀림없다.

다음 DMZ자전거캠핑도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