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항공기를 압류하라

항공기를 압류하라(제 7회)

오선닥 2015. 8. 2. 18:26

에어로플로트의 양도준은

나타샤와 만나게 되는데

어디서 어떻게?

읽어보면 알겠지요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7회

 

 

노랑머리

 

“너 진짜 후회 안 하는 거다?”

 

“누나! 줄 때 받아. 내 맘 바뀌기 전에.”

 

에어로플로트의 양도준(27)은 회사로부터 받은 바이칼(Baikal) 여행권 두 장을 누나에게 주려고 하는데 누나는 좋으면서도 받기를 주저한다. 동생이 여름휴가용으로 받은 것을 차마…….

 

“본인이 써야 하는 거 아냐? 네 사귀는 여자도 있잖아?”

 

“가족이 써도 돼. 그 애는 이미 라이벌에게 양보했어. 글구…… 사귄다고 3박4일 여행을 같이 갈 수 있어? 어느 부모가 허락하겠어? 누난 오케이 하겠어?”

 

그렇게 말하니 누나도 할 말이 없다. 누나는 연가람을 머릿속에 두고 말했으나 그들은 이미 2년 전에 헤어졌고, 그것도 양보한 것이 아니고 빼앗긴 거라고 동생은 자랑처럼 말하니, 이런 남자가 내 동생이라니 제정신인가.

 

“어쨌든 고맙다. 동생 덕에 바이칼호수 구경을 다하고…….”

 

“바이칼호가 어떤 곳인지 양념상식으로 조금은 알아야지.”

 

“굉장히 크다고 하던데 가보면 알겠지.”

 

“호수 넓이가 남한의 3분의 1이나 돼. 담수량으로 세계최대 담수호로 최대수심이 1마일이나 돼.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 물이 얼마나 맑은지 40미터 깊이까지 보인다니까.”

 

일반적 호수의 나이는 약 3만년인데 비해 바이칼 호수는 2500만년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이다. 빙하가 녹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전세계 지표 담수량의 20퍼센트. 바다로 이어진 오대호 전체 저수량과 맞먹는 양이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얼어있고 해빙기에는 고기잡이가 활발하다.

 

양도준은 호수 이야기에 대해 뻥튀기를 하고 싶어 한다.

 

“호면은 명경지수. 거울로 이용해도 될 걸.”

 

지리산 높이의 산들로 완전히 둘러싸인 호수는 낮은 지대에 울창한 숲, 산봉우리에는 만년설이 장관을 이룬다. 약 330개의 강이 호수로 흘러드는데 반해 밖으로 나가는 수로는 앙가라 강 하나뿐이다.

 

“그렇게 좋은 호수가 러시아 땅이라니, 부럽다.”

 

누나는 벌써부터 바이칼호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흥분된 상태다.

 

“원래는 몽골 땅이었어. 북원이 청나라에 멸망해 주인이 없어지자 러시아가 슬그머니 무혈입성한 거지. 몽골어로 자연을 바이갈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연유한 거래.”

 

“너 많이도 알고 있구나.”

 

“다양한 희귀동식물이 많아 진화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

 

“러시아의 갈라파고스라고 하겠군.”

 

“그럼. 자연의 보고. 그런 곳에 우리 누나가 가는 거야.”

 

“벌써 흥분되네.”

 

“이번엔 비행기로 이르쿠츠크로 가지만, 통일이 되면 시베리아 횡단철도로도 갈 수 있어. 동생 잘 뒀다고 생각하지 않아?”

 

동생한테 바이칼호수에 대해 듣고 나니 자꾸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네 매형은 마누라 덕에, 참 처남 덕에 그런 유토피아에 가보다니.”

 

흥분도 잠시,

 

“근데 애들은 어떡하지?” 누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 당황해했다.

 

“걱정 마. 휴가 내서 조카들 돌봐 줄 테니까.

 

“그래……고맙다야. 동생이 다용도로 쓰이네.”

 

조카 주원과 유진은 각각 초교 1학년과 유치원에 다닌다.

 

동생에게 아이들을 맡긴 누나와 매형은 걱정 매달아 놓고 3박4일 바이칼 여행을 떠났다.

 

남자애 조카 주원은 어렵지 않으나 여자애 유진은 돌보는 데 적잖이 신경이 쓰인다. 괜히 맡았나 하는 후회도 들었으나 그동안 누나가 베풀어준 것을 생각하면 이런 서비스쯤은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린이차에서 내린 유진이 놀이터에서 놀겠다는 것을 억지로 엘리베이터로 데리고 왔다. 막 문이 닫히려 하는데 한 서양 아가씨가 급히 따라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놀랐다.

 

“나타샤?”

 

“미스터 양?”

 

옆집 아이 유진의 손을 왜 잡고 있느냐고 나타샤가 의아한 듯 양도준을 쳐다보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내 조카. 누나가 602호에 살아요.”

 

“이 단지에 사신다는 누나가 바로 옆집 아주머니로군요. 그것도 모르고……. 우린 603호.”

 

그녀는 반갑다고 다시 악수를 청했다.

우리라고 한 것은 그녀의 친구와 함께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나가 바이칼여행 떠났고, 자신은 휴가 내어 조카들을 돌보는 신세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동정심을 보였다.

 

“저녁에는 제가 돌봐줘도 되는데…….”

 

“말씀만 들어도 고마워요. 조카들과 놀면 재미있어요. 에어컨 밑에서 푸쉬킨 시나 톨스토이 소설을 읽으면 시간이 잘 가고요.”

 

이튿날 저녁 조카들을 집안에서 놀게 놔두고 양도준(27)은 나타샤(28)와 시내 드라이브를 나갔다. 룸메이트 아가씨는 왜 데리고 나가지 않았냐고? 러시아어 학원 강의 나갔잖아.

 

“한국 땅에서 러시아 역사가 시작된 곳을 보여줄게요.”

 

자동차는 반포대교를 지나 시청 로터리를 돌아서 덕수궁 돌담길이 있는 정동으로 향했다.

 

“여기가 러시아 공사관 터랍니다. 지금 망루만 남았는데 저기서 우리 고종황제의 동태를 감시하곤 했지요.”

 

“러시아 사람 나쁘네요.”

 

나타샤는 러시아 국민을 대표해서 미안함을 표시하는 목소리 같았다.

 

덕수궁 옆에 있는 러시아공사관 터 7500평은 러시아가 1885년 고종으로부터 샀다.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하자 러시아는 이 땅의 반환을 요구했다. 협상 끝에 한국은 정동제일교회 옆에 있는 땅 2500평을 주면서 대사관 건물을 지어주기로 했다. 문화재경관지역이라 최고 12층까지 가능하나 지붕 높이는 사선으로 해야 한다. 러시아대사관 안에는 학교, 병원, 아파트도 함께 지어 달라고 했는데 대사관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는 KGB식 사고방식이다. 건축공사는 2000년 시작했다. 한편 한국은 모스크바에 대사관 부지 2500평을 물물교환으로 받았다.

 

“다음은 워커힐호텔로 갑니다. 봄에는 꽃들이 아름다운 곳. 러시아 발레와 아이스쇼가 유명한 곳이지요.”

 

“저도 발레를 하고 싶었는데 너무 통통해서 안 된대요.”

 

“귀여운데 왜 그럴까. 발레는 귀여우면 안 되는가 봐.”

 

“그런가 봐요. 너무 귀여우면.” 맞장구가 싱거웠다.

 

아차산에 위치한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전경은 특별하다. 1963년 완공 후 최정상 해외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이뤄졌던 곳. 6.25당시 초대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따왔다. 기둥을 W자로 세운 것도 그런 의미다. 처음 남북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진 것은 뜻 깊은 일이다. 개관기념식에서 재즈 가왕 루이 암스트롱이 열연했던 곳.

 

“저기 강 건너 남쪽에 고층건물들 보이죠. 이 호텔이 지어질 무렵엔 저쪽은 허허벌판이었어요.”

 

“한국은 정말 많이 발전했어요.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었는데…….”

 

“덕분에 한국은 백지에서 멋진 그림을 그려나가게 된 거지요.”

 

“이젠 스탈린 욕 안 하는 거지요.”

 

“역사는 피를 마시지만 자연은 시간을 먹는다고 하잖아요. 남 욕할 시간 없습니다.”

 

“미스터 양, 우리가 살고 있는 강 건너 아파트 자리도 벌판?”

 

“물론이지요.”

 

그리고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호칭을 그렇게 길게 하지 말아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불러요?”

 

“한국에서 나이 많은 남자를 오빠라고 한답니다. 오빠라고.”

 

나이를 비교해 보자고 해서 여권과 주민증을 대조했다. 여자가 한 살 많다.

양도준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친구라면 오빠로 부르는 거요.”

 

“억지군요. 그럼, 오빠!…… 됐어요?”

 

그들은 큰 협상을 성공리에 마친 사람들처럼 손을 잡았다.

 

서울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원했다. 북악스카이웨를 돌고 남산타워로 차를 몰았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한강에 놓인 23개의 교량들이 만들어내는 야경. 어느 것도 모양과 색깔이 같은 게 없다. 나타샤의 눈에 파노라마로 비쳤다.

 

이튿날은 한강을 따라 88올림픽대로를 드라이브했다.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둘러보고 음악이 흐르는 강변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노보의 오브강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그녀는 남자의 허벅지를 문지르곤 했는데 무의식중에 했던 거라면서 미안해했다. 양도준의 생각은 달랐다. 의식중에 했어도 괜찮았다. 공갈빵처럼 부푼 그녀의 가슴이 아슬아슬한 모양으로 옆눈길을 자꾸 유혹했기 때문.

 

누나가 바이칼 여행에서 돌아왔다.

 

얼굴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고 대놓고 칭찬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솔직히 20대의 나타샤와 비교해 좀 그랬기 때문이다. 그리고 칭찬이 과하면, 노파심이지만 뭔가 의심할 수도 있다. 소파에 여자의 긴 노랑 머리카락이라도 발견된다면 변명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옆집의 푸들이 놀러 왔다고 하는 것은 더 어색하다. 그 강아지의 털은 흰색인데다가 길이도 짧으니.

 

양도준이 조카 유진에게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고 엄마에게 말하라는 다짐은 잘했던 것 같다. 놀이터에서 노는 줄만 알았던 조카가 생각보다 빨리 들어와 소파의 남녀가 너무 밀착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나는 아들과 딸을 함께 끌어안고 그동안 보고 싶었던 마음을 한꺼번에 다 위로해 보려는 듯 기쁨을 주체 못했다.

 

“네들 삼촌하고 잘 놀았지? 삼촌 말 잘 듣고, 또 숙제도 잘했고?”

 

“잘 있었어. 글구 엄마 엄청 보고 싶었단 말야.”

 

애들은 엄마에게 매달리며 좋아했다.

엄마가 딸 유진의 볼에다 입맞춤을 하자, 유진은 삼촌을 가리켰다.

 

“삼촌도 옆집 노랑머리 이모하고 뽀뽀하고 그랬어.”

 

“……?”

 

누나는 어안이 벙벙해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양도준은 기도 안 찬다는 반응이다. 조카 딸애에게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말이다. 애들이 다 그렇겠지만.

 

“누나 오해하지 마. 가까이서 대화하다 보니 그렇게 보였을 뿐이야.”

 

“너, 큰일 저지른 건 아니지, 글치?”

 

“그런 일 없었어. 누나가 괜히 동생 자랑한 바람에 나타샤가 날 좋아하는 거야. 그녀 사무실에서 만난 적이 있는 아가씨야. 동생이 핸섬하다고 했다면서?”

 

“핸섬한 것하고 아가씨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변명은……?”

 

누나는 동생의 어깨를 치려했다.

양도준은 재치 있게 피했다.

 

“여행권 주고, 애 봐주고…… 이런 대우가 어딨어?”

 

동생의 말에 누나도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러서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