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항공기를 압류하라

항공기를 압류하라(제 5회)

오선닥 2015. 7. 18. 18:18

항공사와 합의에 성공

경쟁 여행사를 의식

표정관리 돌입

상생의 방법 찾다!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5회

 

 

표정관리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단판을 짓고 서울로 돌아온 황지명 사장은 조심스럽게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항공사 측과 가로채기 계약을 해서 그동안 짭짤한 재미를 보아온 아태여행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축하연은 하지 않겠습니다. 계약을 새로 한 것도 아니고 기존 계약을 돌려받았을 뿐이니까.”

 

직원들을 불러놓고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샴페인이라도 터뜨릴 줄 알았던 직원들은 실망하는 눈치다. 계약내용이 잘못됐나. 몇 푼 받았으니 사업을 접으려고 하나. 엉뚱한 비약을 하는 눈빛도 있어 그는 믿음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항공사의 사업계획이 나오는 대로 영업 방향을 정하겠소.”

 

기대치를 낮추는 말부터 했다.

계약 성사로 들떠 있으면 아태여행사 등 주위의 시기심을 유발할 수 있어 표정관리가 필요했다.

 

그동안 안겨준 수치를 곱씹으면 샴페인을 몇 병이라도 터뜨리고 싶지만 몸의 세포가 익힌 사업적 경험은 ‘잘 나갈 때 자중하라’고 충고한다. 장맛비가 그치자 텃밭의 원래 주인인 잡초가 찾아온다는 ‘잡초논리’를 황지명은 잘 알고 있다. 나훈아의 잡초가 준 교훈은 아니다. 돈은 잃을 수 있지만 용기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각오로 버텨왔는데 한순간의 자만이 일을 망칠 수 있음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나른한 몸을 눕히고 싶은 5월의 늦은 오후.

 

사무실 형광등을 꺼놓고 의자에 몸을 젖혔다. 후속 사업 구상을 그려보며 미래의 세계를 유영해 보기도. 돈 한 푼 들지 않는 여유와 밀당 중이다가 마사지 의자로 착각하고 깜빡 오수에 빠져들었다. 도망가는 비행기를 잡으러 쫓아가는 중 벨소리에 눈이 떴다.

 

아태여행사 태철민(55) 사장의 전화.

 

“이미 소식 들었습니다. 지금 강남역 노블레스 커피숍인데 좀 뵙고 싶어서요.”

 

들었다는 소식은 뻔하다.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태 사장만큼은 만사 제쳐놓고 만나야겠다고 황지명은 생각했다. 실망한 그에게 상처를 덧입혀서는 안 되겠다는 동정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에 놓이기 전에 태 사장은 자신의 심정을 내 보였다.

 

“일이 잘됐다면서요. 우리 관계는 어떻게 정리하는 거죠?”

 

우리라고 할 관계는 아니지만 그의 입장이라면 당연한 질문이 될 수 있다.

황지명은 의연함을 보이려 한다.

 

“비정상적인 계약 관계에서 이런 사태가 오리라고 태 사장님은 예상하셨을 거 아닙니까. 저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린 항공사에서 하자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 항공사의 이중계약에 당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손해배상을 강구하겠지만, 사전에 황 사장님의 견해를 듣고 싶어서요. 물론 말을 안 하셔도 되지만.”

 

“……”

 

그의 말대로 황지명은 침묵했다.

대신 태철민 사장이 말을 이었다.

 

“이젠 제가 비행기를 잡을 겁니다. 피해자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황지명은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다. 아태여행사와 시베르항공은 여러 비즈니스에서 상호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음을 이미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학생의 러시아 유학 알선, 동대문시장 의류의 러시아 수출, 러시아 항공기에 기내식 공급, 러시아 여성의 한국 취업, 러시아 녹용의 한국 수입, 군사용 헬리콥터의 한국 수입, 러시아 발레단의 한국 공연 기획…… 지금 열거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수두룩하다.

 

이런 정보를 얻는 데는 박태훈 과장의 역할이 컸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태여행사 신입사원 연가람의 협력이 절대적이었다.

 

몇 달 전 퇴근시간 무렵 박태훈이 아태여행사를 찾았다. 직원들은 연가람의 남자친구임을 알고 선남선녀가 자주 만나는 모습을 부러워했다. 다른 용무로 온 것을 눈치 챌 리 없다.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남자에게 주면서 연가람이 말했다.

 

“오빠, 그건 어려워. 알다시피 난 회사의 졸자야.”

 

“졸자라는 게 오히려 장점이야. 뭐를 복사하더라도 아무도 눈치 못 채. 용기를 가져!”

 

“그래도 두려워. 가슴이 두근거려.”

 

“두근거려? 그럼 이리 와봐.”

 

박태훈은 연가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구먼. 가슴이 뛰는 건 사랑의 두근거림이야. 알았지?”

 

연가람은 결국 기획부장이 참고용으로 가지고 있는 ‘시베르항공사 협력사업’이라는 문서를 복사했다.

 

그날 저녁 두 연인은 저녁을 함께 먹었고, 영화를 함께 보았으며, 작별 키스를 하고 헤어졌다. 서류를 잘 챙기라는 여자의 말에 “생긴 것과는 다르게 꼼꼼하네. 앞으로 살림 잘하겠네.” 남자가 추겨주자 여자는 하늘까지 사랑하고 싶었다. 밤하늘을 바늘로 찔러 구멍 사이로 새어나오는 별빛이 아름답다고 두 사람은 느꼈을까.

 

박태훈 과장의 이런 노력에 황 사장은 그를 곧 차장으로 진급시킬 준비가 돼 있다.

 

태 사장이 자기 회사에서 이런 무서운 스파이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리 없다. 그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두 개비 채 물었을 때 황지명이 신중하게 말했다.

 

“비행기를 잡는 것은 태 사장님이 판단하실 일이지만, 저희는 항공사로부터 보상 받고 계약을 이행하면 됩니다. 단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시베르항공과 항공업무 외는 전혀 관심이 없고 또 그럴 능력도 없다는 점입니다. 저의 분명한 뜻이에요.”

 

태 사장이 딴지를 걸지 못하도록 안심시키는 의도가 숨어있다. 쥐구멍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일이란 시끄럽게 해봤자 서로 좋을 리 없고, 장사에는 상도덕이라는 게 있다. 잔을 가득 채우지 않고 오직 칠 할쯤 채워야만 술을 마실 수 있는 계영배의 뜻 같은 거 말이다.

 

“지정 변호사와 더 의논해보겠습니다만 잉여 직원 문제도 있고…… 어쨌든 골치 아픕니다.”

 

태 사장이 은연중 자신의 의중을 드러냈다. 비행기 압류가 본심이 아니라는 것.

 

“직원 문제라면 여직원 한 명 정도는 저희가 인수할 수 있습니다.”

 

황지명은 연가람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그 말에 태 사장은 안심했는지 담배를 끄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일단 기억해두겠습니다. 앞으로 몇 번 더 만나서 의논했으면 좋겠습니다.”

 

태 사장은 비로소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이중계약에 대한 죄의식이 적은 러시아인들의 사업 형태 때문이다. 그들은 법치전통이 희박하고, 상황이 불리해지면 계약을 쉽게 파기한다. 힘 있는 관료가 기업하나 죽이기는 간단하다. 기업 문을 닫게 하는 데는 6만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할 정도다. 러시아의 복잡한 법규와 관료주의를 꼬집은 것이다.

 

“양쪽 다 피해잡니다. 국기가 바뀌었다고 관습이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황지명은 피해자로서 동류의식을 보이며 러시아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했다. 누구나 사람들이 괄호 밖으로 밀려난다는 생각이 들면 꽥 소리를 지르는 법이다. 여행업계는 시장이 좁아 한 다리 건너면 친구고 동료다. 그러므로 상생이 최선이다.

 

소련 → 러시아

연착륙이 되지 않았다.

 

낫과 도끼로 상징되는 소련연방 적기가 내리고 백청적의 러시아 3색기가 올리었다고 해서 체제의 전환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아직 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우며 맨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90년대 초 개방 2년 동안에 물가가 166배로 치솟았고, 국민총생산이 3분의 2로 떨어졌으며, 국민의 9할 이상이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다면 믿어지려나. 금년 1998년은 최악이다. 러시아는 모라토리움(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준 푸틴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러시아 인구는 매년 약 50만 명씩 줄어들고 있다.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떠나는 바람에 거의 빈 땅이 되다시피 한 시베리아 지방과 극동 지방에는 중국인들이 떼로 몰려와 둥지를 틀고 있다. 이미 러시아인보다 중국인의 수가 더 많은 곳도 있다. 부자들은 서유럽이나 미국으로 가고.

 

며칠 후 태철민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황 사장님 협조에 감사합니다.”

 

예상했던 대로 아태여행사는 항공사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편 시코여행사에서 여직원 한 명을 받아준 데 대해 감사 표시까지 했다. 태 사장은 항공사와 협력할 다른 사업이 많기 때문에 관계 유지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로써 경쟁사를 의식한 황지명의 표정관리는 해제 수순에 들어갔다.

 

우선 남자 직원과 여자 직원 한 명씩 더 채용하기로 했다. 아태여행사에서 연가람이 오기로 했으니 남자 직원 한 명만 구하면 된다. 러시아 감독은 같은 층 사무실을 쓰되 방만 따로 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안드레이(38)와 나타샤(28)가 주재할 것이다.

 

강남역 사거리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을 때 황지명은 그동안 심신의 피로로 방전된 자신의 몸에 충전과 힐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상의 태양이 가장 먼 길을 짚어 흐르는 이른 저녁시간에 황지명이 찾은 곳은 르네상스호텔 옆 기와집 지하 1층이다. 그동안 표정관리 하느라 딱딱해진 얼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참치회를 먹이고 싶다는 세포의 신호가 왔다. 오늘은 비싼 걸 먹여주마, 얼굴이여!

 

이참에 김유현(46) 변호사를 불렀다. 황지명(48) 사장이 여직원 조은정(38) 차장을 데리고 간다고 했더니 김변은 자기 비서 안영란(28)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자 분들을 위해서 맛있는 걸 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붉은 카펫을 밟고 들어가서 룸의 좌석에 다 앉았을 때 황지명이 입을 열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소송의 성공을 위해서 애쓰신 분들입니다. 십만 원짜리 회 정도는 사드려야죠. 곧 배달돼 올 겁니다.”

 

일식집도 아닌데 회 요리라니?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들이다. 황지명이 그들의 흐트러진 눈동자들을 정리하기 위해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온 목적이 있어요. 일식집이 아니더라도 고급요리 회를 경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여운을 남기는 설명이었다.

 

“4인분에 십만 원이라면 좋은 곳이네요.”

 

비서 안영란이 분위기 파악 전에 말했다.

김변이 손을 저으면서 나섰다.

 

“영란 씨, 황 사장님의 수준을 그렇게 보지 말아요, 일인분에 십만 원, 일인분!”

 

안영란의 놀란 표정 다음, 조은정이 나섰다.

 

“일반 일식집과는 많이 다르네요. 분위기도 그렇고.”

 

룸 안에는 긴 테이블과 긴 소파가 있다. 술과 과일안주만 들어오면 영락없이 그런 곳이다. 그 정도는 회사 생활에서 그녀는 익히 보고 들었다.

 

김변이 룸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보았을 때 그는 황 사장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저게 왜 저기 있냐고?” 정말 모른다는 눈치는 아니겠지.

 

어쨌든 고생한 사람들에게 색다른 요리를 체험케 하고 싶은 게 황지명의 생각이다. 여성들을 데리고 왔으니 도우미를 앉힐 필요는 없다. 먹는 것에만 신경 쓰면 된다. 이들에게 앞으로 비즈니스 우먼으로서 알아둘 만한 것을 가르쳐 놓으면 불필요한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 교육 현장이라고 하면 거창한가.

 

조은정이 같은 여성으로서 안영란의 슬릿스커트가 섹시하다고 말했을 때 수줍은 이 미혼 아가씨는 기분이 좋아 슬릿을 약간 더 열어 보였다. 칭찬은 이래서 장점을 더 자랑하게 만든다. 좋은 것은 좋다고 표현한 것뿐인데.

 

시베르항공의 중역들이 방한하면 그들은 저 엘리베이터를 탈 기회를 가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