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항공기를 압류하라

항공기를 압류하라(제 10회)

오선닥 2015. 8. 31. 21:32

시베르항공 주재원

그만 큰 실수

일단 한국 탈출

차후 수습 시도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10회

(마지막 회)

 

 

항공기를 붙잡아라

 

술이 자주 말썽의 씨앗이 된다.

 

“이 분은 외국인입니다. 언어와 관습 차이로 인한 오해일 수 있습니다.”

 

시코여행사 조은정(36) 차장이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담당 경찰은 더 강경하다.

 

“외국인일수록 더 신중했어야죠.”

 

시베르항공의 서울주재원 안드레이(38)가 성추행으로 현장 체포되어 무교동에 있는 태평로 파출소로 호송돼 온 것은 오후 10시 반경이다. 피해 여성도 함께 왔다. 조은정은 안드레이를 통역하기 위해 동행했다.

 

사건은 무교동의 고풍스런 양주집 ‘루소’의 화장실 통로에서 일어났다.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로 나눠지는 통로 지점에서 안드레이가 한 여성에게 강압적 키스를 했다.

 

원래 술을 좋아하는 안드레이는 이날 유난히 많이 취했다. 직원들이 열 번째 기항한 항공기를 기념하기 위해 호텔 뷔페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후 헤어졌지만 조은정과 안드레이는 진토닉 한잔만 하자고 해서 무교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분위기 좋은 테이블에 앉았을 때 조은정이 안드레이와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웬만하면 가족을 데리고 오시죠.”

 

가족 없이 객지에서 자주 술을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는 그가 안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대답하기가 괴롭다는 듯 안드레이는 진토닉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노보로 돌아갈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네요. 아이 둘을 한국에 데려오자니 마땅한 러시아 학교도 없고…….”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는 러시아 학교가 충분하지 않다. 일반 국제학교에 보내자니 아이들의 외국어가 따라주지 않는다.

 

“그럼, 술을 줄이시든지?” 그녀가 꾸짖듯 말했다.

 

“술을 줄이기에는 견뎌야 하는 밤이 너무 길어요.”

 

“그래도 요즘 술이 과한 것 같아요.”

 

“회사에서 같이 술 마실 연배는 은정 씨뿐인데, 은정 씨도 가정을 돌보셔야 하고…….”

 

간혹 두 사람은 술자리를 같이한다. 대리점은 본사 직원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도 업무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여성으로서 남성을 대하기가 쉽지 않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연배가 비슷한 남성 직원이 있으면 좋을 텐데…… .”

 

“그래도 은정 씨가 잘해주잖아요. 고마워요.”

 

오늘따라 안드레이는 급히 마시는 것 같다. 그의 얼굴이 점점 벌게져 갔다.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바지춤에 손이 먼저 가는 걸로 봐서 많이 급했던 모양이다. 화장실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흔들려 적잖이 불안하다.

 

볼일을 보고 나온 그는 화장실 앞에서 조은정을 만났다. 훤칠한 키에 아름다워 보이는 여인. 그는 왈칵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갑자기 급습당한 여자는 놀랐다.

 

“억! 왜 이러세요?”

 

비틀거리면서도 남자는 여자를 꽉 껴안으려 한다.

키 큰 서양 남자가 덮치자 여자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서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안드레이는 놀란 나머지 여자의 팔을 끌어 잡고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은정 씨, 나에요. 나, 안드레이!”

 

러시아어로 하는 말을 여자가 알아들을 리 없다. 여자는 도와 달라고 더 큰소리를 질렀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누군가가 신고했는지 곧 경찰이 들이닥쳤다. 바로 옆에 파출소가 있어서 경찰이 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자는 조은정이 아니었다.

 

흰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를 입은 것이 우연히 일치했고, 약간 큰 키가 조은정과 비슷해 보였을 뿐이다. 일부러 꾸민 듯 비슷해 보인 것은 그날의 일진으로 돌려야 할까.

 

화장실로 간 안드레이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자 조은정은 화장실 쪽으로 가봤다.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안드레이가 경찰에 끌려가고 있다. 강제성추행 혐의로 끌려가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이야?”

 

조은정은 따라가면서 러시아어로 안드레이게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비틀거리며 경찰에 끌려가는 마당에 대답조차 귀찮다는 듯.

 

피해여성은 26세였다. 조은정과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되는데 안드레이는 그 젊은 여성을 조은정으로 착각한 것이다. 서양 사람에게는 동양 사람의 얼굴이 엇비슷하게 보였는지도.

 

‘아무리 술김이라지만 젊은 아가씨를 두 아이의 엄마로 착각하다니?’

 

조은정은 어이없다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을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아직 젊음의 팽팽함이 피부 밑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안드레이가 종종 자신의 얼굴을 감상하듯 쳐다보았던 때가 기억나기도 했다. 몸 전체에 풍기는 조화로움이 스며들어 있기도.

 

조사가 길어질 것 같아 경찰은 피해자의 양해를 구했다.

 

“괜찮으시다면 두 분이 내일 출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해자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또 신분이 확실한 외국인임을 고려하여 피해자는 경찰의 요청에 동의했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내일 조사는 남대문경찰서에서 하겠습니다. 오전 10시 출두해주십시오.”

 

시코여행사의 책임 하에 가해자는 일단 귀가하기로 했다.

 

안드레이를 레지던스호텔에 데려다 주고 집에 온 조은정은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부끄럽고 황당하며 기분이 묘했다. 너무 분별없이 그를 대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이 들기까지 했다.

 

이튿날 아침 8시 안드레이에게 전화했다.

잠결에 받는 전화.

 

“은정 씨, 나 오늘 출근 못할 것 같아요. 골이 띵해요.”

 

“아니, 오늘 사무실에 나와야 해요. 오전 10시 경찰서 출두잖아요.”

 

“경찰서? 거기 뭐 때문에?”

 

조은정이 어제 저녁 상황을 이야기했을 때 안드레이는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지금은 속이 쓰리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도로 자야겠다고 말했을 때 조은정은 “그럼 숙소로 데리러 가겠어요!” 하고 전화에 소리를 질렀다. 그때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럼 오후 2시로 연기해 주세요.”

 

“경찰서에 이야기는 해보겠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전화가 끝난 후 안드레이는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사람이라도 때렸단 말이야? 왜 경찰서야? 어떤 여자를 붙잡고 실랑이한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완력을 행사한 일은 없는데…….

 

일단 정신을 차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가하게 누워 있을 상황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타샤에게 전화했다.

 

“잠시 내 숙소로 좀 와주겠어요? 급한 일이 있어서.”

 

그는 말미에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다짐을 주었다.

나타샤가 급히 왔을 때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급하게 본사에 갈 일이 생겼어요.”

 

시코여행사와 관련된 일이라 거기 직원들과는 비밀로 하여 출국수속을 당부했다.

여권을 주면서 재촉했다.

 

“항공편은 어제 도착한 우리 회사 비행기로 예약해줘요. 오늘 오후 2시 30분 이륙 예정이니 서둘러요.”

 

가해자가 출두하지 않자 경찰서에서는 강제 동행하겠다고 열을 올렸다. 시코여행사는 초상집이다.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화마저 불통이다. 조은정의 사정이 더 절박하다. 각서를 쓰고 피의자를 빼온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황지명 사장이 안드레이의 신병확보 각서를 썼다. 조은정이 이를 소지하고 직접 경찰서를 찾았다. 다행히 오후 2시 출두 연기를 허락받았다.

 

조은정이 나타샤에게 안드레이의 행방을 물었으나 그녀 역시 연락되지 않는다고 거짓 대답했다.

 

오후 2시에도 가해자가 출두하지 않자 경찰은 조은정을 다그쳤다.

얼마 후 나타샤한테서 연락이 왔다.

 

“안드레이가 지금 시베르항공기에 탑승한답니다. 곧 이륙한대요.”

 

안드레이의 도피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지금 시각은 오후 2시 25분.

항공기는 오후 2시 30분 이륙이다.

 

“비행기를 붙잡아라!”

 

담당 과장은 부하 직원에게 지시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부족하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소를 통해 출국금지의뢰를 신청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 것이다.

 

비행기는 김포를 이륙해서 노보로 떠났다.

황 사장과 조 차장이 경찰 앞에 섰다.

황 사장이 사죄를 표명했다.

 

“가해자를 입국시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분이 다 각서를 제출하셨습니다. 아시죠?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수사 경찰이 물었다.

 

“어떤 형태든 시코여행사에서 책임지겠습니다.”

 

“지금 피해자가 옆에 계십니다. 우선 피해자와 상의하시고 나중에 조사 받으세요.”

 

조은정은 피해자 여성을 따로 만났다. 아가씨는 가해자가 외국으로 도피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상황을 설명해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더구나 나이 열 살이나 많은 아주머니와 자기를 혼돈했다는 점에 자존심이 상했다.

 

“고의가 아니고 외국인이 착각한 것인 만큼 이해해주세요.”

 

“옷 색깔만 비슷하다뿐이지 닮은 점이 없잖아요.”

 

아가씨는 자신의 우월성을 계속 내세웠다. 조은정의 사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안드레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히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아가씨와 가까스로 타협을 보았다. 약간의 피해보상액과 위로여행을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여행지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이르쿠츠크 세 도시다.

 

피해자와 합의를 감안하여 경찰은 성추행 사건을 종결했다.

 

사건은 안드레이 개인 사건이었지만 모든 비용은 시코여행사에서 지불했다. 안드레이가 시코여행사의 재탄생에 큰 공을 세운 보답으로 황지명 사장이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한 달 후 안드레이를 대신해서 다른 주재원이 부임했다.

 

항공기는 쉽게 압류되는 것이 아니구나.

압류하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윈윈이로다.

 

 

<끝>

더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