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항공기를 압류하라

항공기를 압류하라(제 6회)

오선닥 2015. 7. 26. 19:49

시코여행사 이전

시베르항공 주재원 합류

항공업무 재개

직원들의 잡다한 이야기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6회

 

 

항공업무 재개

 

시베르항공의 여객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압류의 위험이 사라진 비행기는 사뿐히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시코여행사가 시베르항공의 대리점업무를 재개한 후 처음 기항하는 비행기다.

 

“입국 여객 62명 무사히 도착해서 입국수속 중입니다.”

 

김포공항 현장에 나가 있는 박태훈(27) 과장이 무선으로 사무실에 있는 조은정(36) 차장에게 보고했다. 조 차장은 황지명(48) 사장에게 전반적 상황을 보고한다.

 

입국 여객은 노보시비르스크대학 교수 20명과 학생 25명, 나머지 17명은 동대문 보따리장수와 관광객이다. 입국 화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입국여객 중에 티켓을 사지 않은, 젊은 여성 승객 한 명이 포함돼 있다.

 

“미스터 박, 저는 나타샤예요.”

 

목에 명찰을 달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태훈 과장을 알아보고 나탈리아 푸가(28) 양이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시베르항공의 한국주재원으로 안드레이(38)와 함께 근무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애칭으로 나타샤로 불린다.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의 둥근 얼굴을 했으나 키는 한국 여성의 평균에 가깝다.

 

“안드레이가 오고 있는 중예요. 도착하면 함께 회사로 가도록 하세요.”

 

박태훈 과장이 그녀가 기다릴 장소로 안내했다.

 

입국여객과 입국화물의 수속이 끝났다.

기내 청소를 하고 연료를 공급받으면 출국 여객과 화물을 싣는다.

 

여권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연가람(24) 사원에게 조은정 차장이 다짐을 준다.

 

“출국여객 110명의 여권 잘 챙겨요.”

 

연가람은 러시아로 여행하는 여객의 서류를 꼼꼼히 챙겼다. 특히 비자발급이 정상으로 돼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자발급료는 6만원에서 23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급행료는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러시아 대사관은 비자발급 수입으로 재정을 꾸려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국여객은 주로 관광객이고, 노보 대학의 과학아카데미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국의 교수와 연구진 20명이 포함돼 있다. 관광객은 노보 및 이르쿠츠크 등 시베리아 도시들을 돌아볼 예정이다. 바이칼호수 관광은 필수 스케줄에 포함된다. 세미나 시간을 줄여서라도 세계 제1의 담수호를 보아야 한다는 것. 화물은 동대문시장에서 구매한 의료 품목이 많은 부피를 차지한다.

 

단체 여행객이 많을 땐 여권을 일괄적으로 여행사에서 보관했다가 출국 시 공항에서 돌려주곤 하는데 오늘이 그런 상황이다.

 

출국자들에게 여권을 나눠주고 있는 연가람.

갑자기 옆에서 다가오는 톤 높은 음성에 당황한다.

 

“가람 씨, 어쩐 일이여? 여기서!”

 

“도준 선배, 선배가 여기…… 어떻게?”

 

불쑥 나타난 사람 때문에 여권 전달을 잠시 멈췄다가,

 

“선배, 이것 끝내고 잠시 봐요.”

 

하던 일을 끝낸 연가람은 커피숍에서 기다리는 양도준(27)을 만났다. 대학의 같은 과였던 이들은 남자가 군복무를 마친 후 복학하여 같이 강의를 듣는 기회가 많았다. 박태훈이라는 애인이 없었더라면 양도준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확률이 높다. 러시아어를 전공한 결과 러시아관련 회사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양도준은 노보에서 열린 에어로플로트 극동지역 직원회의에 다녀오는 길이다.

 

  “에어로플로트는 어때, 괜찮아요?” 연가람이 물었다.

 

“요즘 러시아 회사들이 다 그렇지 뭐. 연료비를 지불하지 못해 베를린에서 억류된 비행기도 있어.”

 

“시베르항공과 막상막하! 우린 경쟁 상대자로군.”

 

“우린 항상 경쟁자 아니었어? 연애도 그렇고. 네 남친한테 졌지만.”

 

“선배는 이렇게 만나서까지 농담이네.”

 

그는 선의의 경쟁으로 물러났지만 앞으로 술자리에는 그녀의 남친 박태훈을 동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인이 없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아직까지 가람 씨 같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능청을 떨었다.

 

강남역 부근으로 이전한 시코여행사는 직원 5명이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로 업무량이 증가했다. 그러나 옆방에는 시베르항공 직원 안드레이와 나타샤가 만나자마자 대화에 바쁘다. 항공 화물과 여객 유치에 관한 협의보다 한국생활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시간을 더 할애하는 것 같다. 안드레이는 한국생활을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술잔 사양하기가 러시아보다 더 어렵다고 실토했다.

 

 

화제의 밑천이 떨어질 무렵 나타샤는 깊이 숨겨뒀던 프라이버시를 털어놓고 말았다. 노보의 레스토랑에서 남자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 무선전화를 대신 받았는데 “우리 아이 병원에 입원했어.” 급하게 말하는 전화 속의 여자 목소리를 듣고는 놀라 이후 미련없이 헤어졌다는 것이다. 한국 근무 지원도 그 남자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나.

 

항공기가 들어오고 여객 티케팅을 하며 항공화물을 주선하는 중 일주일이 쉽게 지나갔다. 조은정이 어제저녁 여고 동창회에 갔다가 구반포 아파트에 사는 친구로부터 색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은정아 넌 러시아어 전공이잖아. 우리 아파트 옆집에 러시아 아가씨 둘이 사는데 아주 싹싹하고 재밌어. 한번 만나볼래?”

 

단짝이던 친구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목소리는 연마되지 않았다. 쓰레기봉투를 치우면서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러시아어와 영어를 참 잘하더라는 것이다. 러시아어를 잘한다는 말은 불필요한데. 그런 말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다. 이웃집의 이야기를 옮겨와서 키우는 능력이 넘쳐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화제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덕길을 달려서 내려올 때처럼 가속이 붙어 아가씨들의 직업 이야기에 이르러 더 빨라졌다.

 

“한 명은 일 년 전 한국에 온 러시아어 학원 강사이고, 다른 한 명은 일주일 전 한국에 와서 항공사에 근무한다더라. 나중에 온 아가씨는 얼굴이 둥글고 키도 우리만한데 똘똘하게 생겼어.”

 

가만히 듣고 보니 나탸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은정이,

 

“그럼 한번 만나볼게.” 말했다.

 

“그래, 어디서 만날래? 내가 주선해줘?”

 

“아냐. 적당한 때 내가 말할게.”

 

“쇠뿔도 단김에 빼. 제부쉬까로 부르면 아가씨들도 좋아해.”

 

제부쉬까는 아가씨라는 뜻인데 러시아어를 통역까지 하는 조은정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다.

 

친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확인도 할 겸 한날을 잡아 조은정이 나타샤와 점심 약속을 했을 때 모른 척하고 물었다.

 

“반포 아파트 살기가 어때요? 이웃은 괜찮고?”

 

“아주 좋아요. 옆집 아주머니가 참 친절해요.”

 

그렇군, 맞구나. 참 희한하다. 친구와 옆집이라니. 인연이 만들어지는 데 서울이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구나. 조은정은 여러 잡다한 생각을 했다.

 

“그 여자가 내 친구에요.”

 

조은정이 말했을 때 나타샤는 ‘그런 인연도 있구나’ 깜짝 놀랐다.

 

“막내동생이 러시아어를 전공했는데 핸섬하다고 자랑까지 하더라고요.”

 

나타샤는 아주머니의 말을 전했다. 아주머니는 자신은 러시아와 인연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시베르항공이 배상하기로 한 20억원 중 10억원은 이미 입금이 되었고, 나머지 10억원은 두 번째 항공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모든 작업을 마치고 한국을 이륙한 후 바로 지급하기로 했다.

 

자금 회전이 좋아진 시코여행사는 활기가 돌았다. 두 명의 직원이 추가로 입사하여 사무실 분위기가 밝아지고 생기가 돌았다.

조은정과 안드레이가 옆방 벽을 두고 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간혹 만나면 인사가 어색하다. 그날 술 취한 안드레이를 레지던스호텔에 데려다준 사건은 이후 마주칠 때마다 묘한 웃음을 짓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에어로플로트의 양도준이 연가람을 만나러 시코여행사를 찾았다. 자연히 안드레이 및 나타샤와 통성명하고 러시아 국적 항공사에 근무하는 사람으로서 페어플레이를 다짐하는 술자리를 갖자고 약속했다. 술에 관한 한 약속을 미루지 않는 이들은 일주일도 안 돼 자리를 마련했다.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총 6명이다.

 

시코여행사: 조은정, 박태훈, 연가람

시베르항공: 안드레이, 나타샤

에이로플로트: 양도준

 

빈병의 수가 늘어나자 어디에 사느냐가 화제에 올랐다. 카풀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지만 거주하는 집을 알아둠으로써 개인의 궁금증을 하나씩 덜어 나가자는 의도가 숨어 있다. 나타샤의 거주지가 알려지자 양도준이 되물었다.

 

“반포아파트에 사신다고요? 저희 누나집도 그쪽인데.”

 

“아, 그러세요. 단지가 아주 크더라고요.”

 

두 사람은 몇 동 몇 호에 사는지는 서로 물어보지 않았다. 그것만은 개인사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러시아어로 대화가 가능하다. 최근 러시아어의 열공 중에 있는 박태훈과 연가람이 약간 부족한 정도지만 대충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처음처럼’의 소주가 중간을 지나 마지막처럼 취해갈 때 양도준이 느닷없이 질문했다. 모두들 당황했다. 멀뚱한 눈들이 모아지자 양도준은 말을 이었다.

 

“왜 하필 오늘 술을 마시냐고요? 오늘이 6.25 아닙니까?”

 

함께 마신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어이없기는 하지만 연장자인 조은정은 순국선열에 대한 경건함을 보이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금은 미안해했다.

 

양도준의 입에서 6.25전쟁을 사주한 사람이 스탈린이라는 걸 학교에서 배웠다고 나타샤를 향해 말하자, 그녀는 양심이 찔리는지,

 

“저희 부모는 스탈린을 싫어했어요. 우릴 원망하면 안 돼요.”

 

반응하자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웃음을 신호로 모임은 끝났으나 각자 헤어지는 모습은 마치 짝짓기 게임을 하듯 질서정연했다. 두 명씩 짝이 이뤄졌다.

 

박태훈은 물론 연가람을 데리고 나갔다. 양도준이 나타샤에게 눈길을 자주 주는 것이 예사롭지 않더라는 말을 하면서 데리고 나갔지만 실은 동갑내기 양도준이 옆에 있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은정과 안드레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갔고, 양도준은 나타샤에게 데려다줄 테니 같은 택시를 타자고 권했다.

 

반포아파트 단지 정문에 내려두고 사당동 집으로 향하는 양도준은 나타샤가 누나집의 옆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그들이 이곳 아파트에서 맞닥뜨리라고는 작가만이 알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