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더 세월

더 세월(제 7회)

오선닥 2014. 9. 13. 21:26

 우왕좌왕 거짓말

무능한 지휘부

취재경쟁과 무리한 인터뷰

사실보도에 소홀한 언론

  이래저래 유족의 분노

극에 다다르고...

 

 

 

   

    더 세월

(The Sewol)

 

제 7회

 

 

전원구조?

 

희소식은 빨리 전하고, 희망은 자꾸 가져다주고 싶은 게 우리네 마음이다.

 

전 국민이 침통한 분위기에 젖어 있는 중에 언론은 속보경쟁에 혈안이 됐다. 안산 단원고 학부모들은 여럿이 모여 온갖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희망적 소식은 작은 소리라도 크게 들린다.

 

갑자기 한 학부모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

 

단원고에서 현장 취재를 하던 MBN 기자가 이를 듣고 MBN 서울지방경찰청 출입 기자에게 보고했고, 그 출입 기자는 이 같은 내용을 타사 기자들과 공유했다. MBC 기자의 경우는 단원고에서 취재하던 MBC 기자에게 ‘맞는 것 같다’는 확인을 거쳐 보도국 사회부 기자에게 전달해 자막이 방송됐다.

 

지상파를 통해 전국적으로 전파된 것은 4월 16일 오전 11시였다.

 

전원 구조 소식에 학교당국은 흥분했고, 5분 후 학부모들에게 문자로 전원 구조를 알렸다.

 

약 두 시간 후 구조학생이 75명이고 나머지는 실종자로 발표되자 다시 침울해졌다.

또 30분 후인 오후 1시 30분 중앙대책본부는 구조 368명 사망 2명을 발표했다.

부모들은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했다.

 

얼마 후 구조소식이 방송사의 오보로 밝혀지자 부모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속보경쟁에 몰입한 언론들의 무분별한 보도로 부모들은 울고 웃고 다시 울었다.

 

중앙대책본부는 5차 브리핑에서 탑승자 459명, 구조 164명, 사망 3명, 실종자 292명 발표했다. 이제 이런 숫자를 믿는 사람은 없어졌다. 숫자는 바꾸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송 3사는 확인되지 않는 것도 기정사실화해서 뉴스를 내보내곤 했다. 사실과 다른 희망적인 보도만을 내보내고, 앞으로 시도해야 할 구조조치인데도 이미 성공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구조대원이 식당칸에 들어갔다고 보도했으나 현장에선 선체 안에 들어간 대원은 없었다. 공기를 넣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공기주입장비는 도착하지 않았다.

 

현장 해경측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기에 학부모들의 분노는 극에 다다랐다. 정보를 총괄하는 곳이 없으니 유언비어는 외양간을 뛰쳐나온 송아지처럼 마구 돌아다녔다.

 

“대통령이 듣고 국민들이 듣고 있는데 방송이 이런 식으로 보도해도 되나요?”

 

거짓말 하는 방송에 책임자가 누군지 알 수도 없는 현장은 고성이 오갔다.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 부두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혼란에 빠졌다.

 

 

 

    길 비켜라

 

참사 당일인 4월 16일은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긴박한 순간이다. 그런데 구조 지휘를 책임지고 있는 안전행정부와 해양수산부 장관들의 의전이나 참관을 위해 귀중한 시간과 장비가 동원돼 오히려 구조를 지연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후 2시 지나 항구에 도착한 안전행정부 장관의 격려 행사가 민간 잠수사들이 탄 배의 출항이 무려 20분이나 늦어졌다.

 

“당시 30초 정도 잠수사와 악수를 한 것뿐인데.”

 

안전행정부는 해명했으나 현장의 목격자들의 말은 달랐다.

 

“한시가 급한데 무슨 격려차 배를 타냐. 잠수사들 배를 빨리 출발 시켜라.”

 

주민들은 불만을 드러냈다.

 

한편, 해양수산부 장관은 사고 당일 해경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오후 12시40분 전남 무안에서 해경의 헬기를 타고 사고 해역에 있던 지휘 함정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후 헬기는 함정에서 한 시간 이상을 대기했다.

 

이 시각, 잠수특공대 16명은 헬기가 없어 배를 타고 현장에 가야 했다. 신속한 사고 수습을 위해 배 타고 갔다는 해수부의 이야기를 어떻게 믿어야 하나.

 

“구조가 먼저인가 의전이 먼저인가?”

 

“관료사회를 잘 알면서 새삼스럽게…….”

 

누군가 한마디씩 했다.

 

뱃머리 일부만 남긴 세월호에서 승객들이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의 1분1초는 금싸라기 같은 시간이다.

 

사고 이튿날 오후 대통령이 방문한다고 하자 엄청난 방송 차량과 경찰 차량으로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119구급대도 못 들어오고, 현장으로 가려는 구조장비를 싣기가 힘들었다.

 

기자가 마이크를 학부모 앞에 들이대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학부모는 흥분상태에 돌입했다.

 

"아, 이거 방송에 내보낼라고? 니들 맘대로? 사람 구하는 게 먼저야. 알겠어?"

 

다른 방송 마이크가 구조된 여학생을 좇아갔다. 그녀의 아버지가 카메라 렌즈를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소리쳤다.

 

"너도 찍으려고? 카메라 치우라고!"

구조장비를 차에 실으려는 구조대원은 자기들 나름대로 불만이었다.

 

"출발할 수 없어. 모든 도로가 개떡이야! 이 징한 놈의 차들!"

 

체육관 유가족 앞에 나타난 대통령은 현장의 심각성을 눈으로 확인했다.

여성 대통령은 현장 복장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자원과 인력을 동원해서 수색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부를 믿어주십시오.”

 

학부모가 손을 들고 질문을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사고현장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실은 장례식장이 아닙니다."

 

연이어 여기저기서 질문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배가 현장에 나갔을 때 해상구조원이 구조를 하는 걸 못 봤습니다."

 

"기자들 오니까 구조중이라 하고, 잠수원들이 30명이 투입됐다고 하는데 현장에는 잠수하는 인원이 한명도 있지 않았습니다. 딴 사람들만 가서 쇼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대통령이 조난자로 보이는 한 중년 남자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눈치 빠른 해수부 간부가 마이크를 그에게 넘겼다.

 

“저는 조난자 서정민입니다. 입원을 마다하고 유가족에게 도움을 주고자 자리를 같이했습니다. 구조 진척이 너무 미진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중앙부처에서 많이 내려오셔서 소방서나 해경에게 교통편의를 요구하곤 하는데 지금 저희들이 바라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하는 것입니다. 현장 시찰을 늦추더라도 구조대원이나 구조장비 하나라도 더 공급해주었으면 합니다."

 

‘조난자’라는 말에 대통령은 눈시울을 붉혔다.

 

“구조에 더 집중해 달라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대통령이 떠난 후의 지휘본부는 질서가 잡히기는커녕 더 어수선해졌다. 방송뿐만 아니라 구조대원 투입여부에 대해서도 계획이 없었다. 유언비어는 날개를 단 듯 공기를 타고 날아다녔다. 심지어는 사고 원인이 잠수함 충돌설, 폭발설, 좌초설 등 여러 말이 나돌고, 의문은 꼬리를 더 달았다.

 

실행에 대한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학부모는 침몰선 근처로 가는 배를 태워 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거부당하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어선을 빌려 타고 현장으로 갔다.

 

 

 

  분노의 목소리

 

배를 빌려 타고 현장에 다녀온 어머니는 방송 인터뷰에서 분노했다.

 

“잠수부가 들어갔다가 장비가 없어 바로 나오더라구요. 그러면 민간 잠수부들이라도 들어가게 해야 하잖아요. 근데 구조단들이 난리 피워서 민간잠수부에게 허락을 안 해준대요. 면책동의서까지 다 써 줬는데도 안 된다는 거요.”

 

분노는 이어졌다.

 

“방송에선 허락해줬다고 보도가 나가던데 이런 거짓말이 어딨어요?”

 

서정민은 불편한 몸으로 팽목항에 머물렀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흔들리고 있었다. 구조 여부보다도 현장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 지휘부와 언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도 정부가 하루 종일 한 게 없어요. 여기저기 우왕좌왕. 이대로 죽으라는 겁니까? 언론이 제대로만 보도했어도 이런 문제는 안 생겨요.”

 

이제 학부모들은 해경 관계자들에게 막말을 쏟아댔다.


“야, 이 개새끼야. 너는 살인마야.”


절규에 가까운 음성은 항구를 가득 울렸다.

 

오후 9시 30분쯤 팽목항 상황본부에 나타난 서해해경청장은 의자에 올라가면서까지 인사를 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다” 라며 핀잔만 들어야 했다.

 

사고 이틀째.

단원고 실종자 학부모는 지휘부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그대로 성토했다.

 

“방송과는 전혀 달라요. 정리도 안 돼 있고 지휘체계도 없어요.”

 

구조단은 한 번 잠수해서 5분을 넘기지 못했다. 장비가 없으니 성과가 날 리가 없다. 최근의 성과들은 대부분 민간잠수부들이 어려운 여건에서 이뤄낸 것뿐이었다.

 

방송에서는 조명탄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현장에 투입된 민간인 구조사는 조명탄이 없어서 작업을 못했다.

 

가족들이 책임자한테 요구했지만, 조명탄 허가받는데 20분이 걸렸고, 40분 후에 조명탄이 터뜨려졌다. 그때까지는 경비정 탐조등으로 힘겹게 작업했을 뿐이다. 영화계에서 발전차, 크레인, 조명탑차, 조명기 등등의 장비들을 최대한 동원해서 진도까지 싣고 왔으나 현장 지휘부가 거부했다.

 

학부모들은 경비정마다 3~5명씩 동승을 해서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저희끼리 통화했다. 오히려 여기 책임자들한테 현장 상황을 알려주고 있을 정도다.

 

“애들 다 죽고 시체 꺼내려고 우리가 여기 와서 기다리고 있느냐?”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릴 자녀들을 생각하면, 학부모들은 극에 달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다가 선장의 신병처리 문제가 학부모들의 귀에 들어갔다.

 

피의자인 선장과 선원을 유치장이 아닌 아파트와 모텔에서 잠을 재운 사실에 그들은 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아파트의 CCTV 기록이 2시간가량 삭제됐다고 하는 것은 뭔가 구린내마저 풍겼다.

 

해경도 할 말이 있었다.

 

"초기에 선장 신병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사를 위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방송에서 인터뷰한 일이 상황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녀의 이름은 홍가혜였다. 방송에 나와 ‘해경이 민간잠수사들의 구조를 막고 있다’고 말해버렸다. 그녀는 세월호와 관련한 발언과 행동으로 첫 번째 구속된 사람이다.

 

‘이제부터 근거 없는 말을 나불대다가는 홍가혜 꼴이 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듯했다.

 

‘배안에 생존자가 존재한다’는 카톡 내용이 허위사실 유포로 조사받기도 했다. 승객의 절반도 못살려 놓고 전원 구조라고 오보한 사람들은 그냥 두냐, 비아냥도 있었다.

 

“차라리 어업지도선이 먼저 도착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해경이 45도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선내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어업지도선은 늦게 왔어도 선내계단까지 가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어업지도선도 해경에서 구조협조 요청을 해서 온 겁니다. 해경을 미워하는 마음은 잘 알겠는데 목숨 걸고 해양 주권을 지키는 해경을 물매 짓만 하지 마십시오.”

 

해경은 울고 싶었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은 통곡을 해도 모자라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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