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더 세월

더 세월(제 8회)

오선닥 2014. 9. 25. 23:07

팽목항이 울기 시작

시신으로 돌아와 주기만 해도 감사

 잠수부 투입에

해경의 꺼림칙한 행동

 

 

 

 

더 세월

(The Sewol)

 

제 8회

 

 

비보 소식

 

사고의 비보를 듣고 가족들이 팽목항에 속속 모여들었다.

구조돼 살아온 사람은 가족 품에 안겼고 부상자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승객으로 가장한 선원들은 해경의 안내를 받아 신변이 처리되었고.

 

살아오리라는 희망의 끈은 놓지 않고 있으나 바다로 향하여 흐느끼는 소리는 바람과 물결을 타고 진도 앞바다로 퍼져나갔다.

진도실내체육관에서는 긴 이름의 위원회가 구성됐다.

이름하여 ―

 

⌜세월호사고희생자·실종자·생존자가족대책위원회⌟

사람들은 ‘세월호가족대책위’라고 간편하게 불렀다.

승객의 희생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제세실업 이팔봉 회장이 진도실내체육관에 도착한 것은 사고 이튿날 17일 오전 10시경이다. 제세실업 이순애 실장의 아버지, 그는 홍콩 출장 중 머린컨설팅의 서정민 사장으로부터 장녀의 비보를 듣고 급히 날아왔다. 2년 전 상처한 후 혼자 사는 그는 일 년의 반은 서울 집, 반은 제주 별장에 머무르는 외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가진 돈이 없었더라면 고목나무의 매미 정도로 동정을 받아도 무방하다.

 

이 회장은 숨도 제대로 돌리지 않고 먼저 서정민을 만났다.

 

“서 사장, 그날 저녁 순애한테서 문자가 왔어. 같이 있었다는데…… 어찌 자네만 혼자?”

 

손수건을 꺼내며,

 

“……이건 아니잖아?”

 

눈물을 훔쳤다.

이팔봉 회장은 화를 내고 있었다. 함께 있었던 남자만 살고, 자기 딸은 죽었으니 분노가 치밀었다.

 

67세의 나이에도 건장한 체격에 열 살은 젊어 보였던 풍채였지만 장녀의 죽음으로 하루 사이에 열 살을 도로 까먹어버린 얼굴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한 그는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옆으로 돌아서서 핸드폰의 폴더를 열며 서 사장에게 보여줬다.

 

“이것 한 번 보게. 이러니 내 맘이 어떡겠어.”

 

서정민은 문자메시지를 읽었다.

 

“지금 물류창고 설계도면을 앞에 놓고 서 사장과 검토 중에 있어요. 잘 되고 있으니 걱정일랑 마세요. 낼 정오 제주 도착할거에요. 아빠~ 안녕♡”

 

이순애는 엄마 없는 아버지를 늘 측은하게 생각하면서, 집을 떠나 있을 때는 자주 아버지에게 안부를 물으며 애정 표현을 하곤 했다.


서정민은 갑자기 죄책감으로 몸이 오싹해졌다.

그는 이팔봉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순애 씨를 구하지 못해……. 제가 살아서는 안 되는데.”

 

“……”

 

“죽여주십시오. 살 자격이 없습니다.”

 

“어른 앞에서 망측한 소릴! 일어나게. 나도 내 정신이 아녀.”

 

서정민은 일어섰다.

 

그는 사고 당일 구조하느라 다친 손목이 자꾸 아파 왔다. 소화호스를 잡아당기느라 손목이 뒤틀렸다. 손의 뼈는 몸 전체 뼈의 사분의 일을 차지한다고 하는데 그 중요한 부분에 통증이 가중됐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나 이 회장을 안내하기 위해 체육관에 남아 있는 것이다.

 

무거운 죄책감으로 차라리 이순애의 아버지에게 ‘딸과 함께 술을 마셨고 침대에서 키스를 했습니다’를 포함해, ‘그래서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모든 심정을 토로하고 싶었다.

 

이 회장은 딸의 생존을 믿고 싶었다.

 

“에어포켓이라는 게 있다던데, 사흘은 생존 가능하다면서?”

 

“지금 해경 잠수사가 배에 진입해서 구조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켜봐야 합니다만.”

 

현장 상황은 기적을 기다리는 정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서정민은 희망의 빛을 보여야만 했다.

 

이 회장은 멍한 상태로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겠지.”

 

힘없이 말하는 이팔봉 회장은 ‘우리집 여자들은 팔자가 이리도 사나운가?’고 한숨을 내뿜었다. 아들 없는 딸 둘이 아버지 삶에 절반의 의미를 주었고, 더구나 장녀는 많은 믿음을 주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외손녀 홍소라를 엄마 없는 아이로는 생각조차 하기는 싫었다. 사위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그건 안 돼. 무책임한 그런 놈에게 맡길 수 없어!”

 

만약, 만약의 경우, 외손녀는 이 할아버지가 키운다는 각오가 섰다.

 

그의 골칫덩어리 35살의 차녀는 시집도 가지 않고 파리 유학 중이다. 디자인 공부를 위해 ‘이 목숨과 이 순정’을 바치겠다고 파리로 떠날 때 각오가 대단했다. 아버지는 ‘이순정’이라는 딸의 이름을 잘못 지은 탓이라고 한숨을 쉬곤 했었다. 아직 그 딸에게는 언니의 비보를 알리지 않았다. 당분간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마음먹고 있었다.

 

사고 첫날 이후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나흘이 지났는데도 선내에서 시신을 수습했다는 뉴스도 없다.

 

 

 

수색 독점

 

해경 잠수사들의 구조작업 지연에 실종자 가족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이젠 우리가 하자”

 

정부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확산돼 갔다. 해경 잠수사들이 입수 10분 후 선체에 도달했으나 객실 진입에 실패했다. 산소통에 산소가 부족했던 탓이다. 그들의 해명은 정조(停潮) 때 물살이 느렸지만 부유물이 많아서 전방 10센티도 안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걸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선체만 만지고 돌아온 거냐고 울부짖었다. 물살이 얼마나 빠른지, 앞이 얼마나 안 보이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고 우르르 일어섰다.

 

가족들은 “민간 잠수사는 시신을 봤다고 하는데 왜 해경은 못 봤다는 거냐? 해경이 안 되면 해군으로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당신 자식이 바다에 있어도 그렇게 할 거냐?”

 

어떤 이는 해경의 멱살을 잡았다가 놓았다.

해경은 수동적 방어만 취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엔 학부모대표가 나와 영상을 보여주면서 설명해 나갔다.

 

“민간잠수부가 카메라 2대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화면 보셨죠? 통신장비로 녹음해 온 겁니다. 머구리 작업 같은 거 아시죠.”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시야가 10센티도 안 된다고 했는데 5미터이상이나 되더라구요. 꽤 보였다는 이야깁니다.”

 

물때가 하루에 네 번 있는데 나흘 동안 시야가 계속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면서 울분을 토로했다.

 

“잠수사가 올라오는 도중에 4층쯤에서 애들을 봤답니다. 살아있는 건 아니지만 봤다는 겁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팔봉 회장은 눈이 번쩍했다. 딸이 4층에 있었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간 잠수사가 그들의 입고 있던 옷, 모양, 색깔을 상세하게 얘기했을 때 그는 실망했다. 어른들이 아니고 학생들이었다는 데 허탈해졌다.

 

나중에 경찰청장이 4층쯤에 3명 있다고 직접 말했을 때 가족들은 분노를 표출했다.

 

“들으셨죠? 알고 있으면서도 구조하지 않은 겁니다. 이건 백주의 직무유기 아닙니까?”

 

해난사고의 규정상 해경이 구조수색을 총괄하지만, 정작 선체수색에 필요한 심해잠수장비나 인력이 없어 해경은 능력 부족을 보였다. 그러나 해경의 구난업체 명단에도 없던 언딘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첨단장비를 보유한 해군에게도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다.

 

문화재청에서 사고 이튿날 시뮤즈호를 현장에 파견했다. 안전설비인 감압챔버와 잠수사 공기공급장치를 갖췄지만 해경의 비협조로 사흘간 기다리다가 돌아갔다.

 

해경이 소개한 경험과 능력이 뛰어난 구난업체 12곳 명단 중에 언딘은 없다. 명단에 포함된 알파잠수마저 제외하면서 준공승인도 얻지 못한 언딘의 바지선을 불러와서는, 이미 도착한 다른 바지선을 계속 대기만 시키다가 돌려보낸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언딘과 계약하라고 지시를 내린 사람이 누구일까?”

 

밝혀질 리가 없다. 그림자 행세만 하기 때문에 그림자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알파잠수의 다이빙벨 이야기만 나오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국내 민간기업 잠수사로는 최초로 120m 잠수에 성공한 알파잠수의 대표는 국제공인기관인인 국제심해저잠수협회 관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산소탱크만 짊어지고 단독잠수를 감행, 수심 120m에서 15분간 머물다 올라온 경력이 있다.

 

사고현장까지 갔음에도 해경의 방해로 결국 철수했다가 그로부터 5일 뒤 소조기에 가족들의 요청으로 다시 불려가 작업을 시도했지만 역시 크고 작은 방해를 받았다.

 

다이빙벨의 성능을 입증하던 날 잠수사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아 결국 자진 철수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이빙벨은 사기꾼 촌극으로 알려졌다.

 

과연 진실이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 그래? 다시 한 번 해봐요.” 할 만한데 오히려

 

“다이빙벨 소용없어, 현 상황에 안 맞아.”

 

해경은 부리나케 구조를 막기에 급급했다.

 

사고 사흘째 18일 오전 11시 해경이 선체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보해서 배에 공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정오 무렵 선내 진입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아들딸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오후 3시 무렵 진입에 실패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실망하여 쓰러져 실려가는 어머니들이 보였다.

 

또다시 오보로 말썽이 나자 중앙대책본부는 '우리도 뉴스를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현주소를 도로명으로 쓰면 '한심 1로'라 해야 하나.

이팔봉 회장의 실망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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