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랜드 하우스

그랜드 하우스(X)

오선닥 2014. 6. 17. 07:55

그랜드 하우스

마지막 회

 

큰집은 이제 끝내고

작은집에서 살렵니다

 

 

 

 

그랜드 하우스

제10회

 

 

명예회복

 

해가 바뀌면서 법원과 검찰의 인사이동이 시작된다. 새로 임명된 판검사는 사건을 처음부터 검토하려 한다. 자연히 재판의 횟수가 늘어나고 심리가 지연된다. 피고의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은 급할 게 없다는 게 법원의 자세다.

 

검찰은 명예를 걸고 재판을 끌고 나가는 것 같다. 징역 7년과 벌금 3억원씩 먹였어야 하는데 피고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니 자존심이 폭삭 상한 상태다.

 

고등법원에서 여러 번의 재판을 거쳐 거의 1년 반이 지났다.

이윽고 항소심 선고공판 날짜와 장소가 결정된다.

 

1997년 2월 19일 오전 10시

고등법원 401호

 

법정에 출석하기 전 이영숙 변호사와 장우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커피로 긴장을 다독거리고 있다.

 

“변호사님, 가슴 뛰는 소리 들어보셨어요?”

 

“많이 긴장되시죠. 저도 긴장됩니다. 낙관은 하지만 변수는 항상 있는 거라서…….”

 

“지금까지 덤덤했었는데 현재 기분은 진정이 안 되네요.”

 

시험시간에도 좀체 떨지 않았던 장우는 이 시간만큼은 심장이 쿵덕쿵덕 방앗간이다.

변호사는 가볍게 장우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을 체크해보는 듯한 그녀는 마치 의사 같다.

 

“유사한 상황을 대비해서 비치해둔 상비약이 있습니다.”

 

그녀는 소파 옆 서랍을 열고 사탕만한 은박지 봉지를 꺼내고는,

 

“우황청심환입니다. 씹으시면 진정이 될 겁니다.”

 

장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섬세함과 배려심이 돋보이는 여성.

 

이영숙 변호사가 사건을 낙관적으로 보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한 달 전 결심공판에서 재판장은 피고에게 의미 있는 질문 하나를 던졌었다.

 

“당해 선박은 사건 후 한국에 재입항한 적이 있었습니까?”

 

“두 번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재판장의 그 한 마디에 변호사는 ‘감 잡았다’로 접수했다.

 

오전 10시 개정 시간

세 명의 판사가 입장하자 방청석은 일제히 기립했다. 오랫동안 지켜온 재판부에 대한 일종의 예의 표시이나 장우는 진심으로 재판부에 존경심을 보냈다. 사람의 예감이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마이크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장우의 심장이 뜀박질한다.

뛰는 심장을 멈추게 하는 재판장의 말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피고 장우와 SH해운은 무죄를 선고합니다.”

 

그리고 재판장은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는 이 사건 선박의 화물운송에 관한 포괄적인 권한, 즉 용선계약에 명시된 권한을 취득하였을 뿐 그 소유자 또는 점유자가 아니므로 이 사건 선박의 수입으로 인한 관세납부의무자라고 볼 수 없어 피고인이 납세의무자임을 전제로 한 이 사건의 공소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므로 무죄를 선고한다.”

 

이쯤에서 멈추고,

 

“나머지 판결문은 송달로 대신합니다.”

 

재판장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피고에게 혹은 변호사에게 향하는 건지, 아니면 양쪽에게 향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피고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로의 표시라면 고마울 따름이다.

 

“정말 여성 변호사 선임이 도움이 되었나?”

 

집에 있는 여자에게 할 말이 생겼다고 장우는 생각했다. 이래서 인생은 BCD의 C라고 하는구나. 탄생(Birth)과 사망(Death)의 사이에는 선택(Choice)이 있다는 것.

 

인생의 긴 여정이었다. 쏟아 넣은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명예와 신용의 상처가 아물기에는 그 깊이가 너무 크다.

 

“장 사장님, 편안한 맘으로 술 한 잔 받으세요. 그동안 맘고생 많으셨습니다.”

 

영도의 영선동 가파른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산비탈에 목장갈비가 있다. 거기서 두 남녀는 승리의 축하 잔을 든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맥주가 이렇게 시원하게 느껴본 적이 없는 장우.

 

“변호사님의 노력이 크셨습니다. 제 잔도 받으시죠.”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점심은 오후 3시까지 갔다.

 

“검사는 반드시 상고할 겁니다. 상고심에는 국선변호사를 쓰셔도 되고요. 상고이유서는 제가 써 드리겠습니다.”

 

변호사의 입술이 촉촉해졌다.

약속한 성공사례금을 생각하면 그녀는 벌써부터 흥분에 젖는다.

 

 

 

상고심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규정대로 소송기록 접수 통지서를 받은 날로부터 20일 안에 상고이유서를 제출한 것이다.

 

장우는 검찰의 상고이유서 부본을 송달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이영숙 변호사가 작성해준 답변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답변서의 요지

 

SH해운은 중개수수료로 운임의 10%를 받기로 한 정도에 불과한 바, 이는 국제운송주선료로서 정액요율인 5 내지 15%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피고인은 사건 선박의 소유나 점유를 주도적으로 할 의사가 없고, 공동운항으로 인한 이익 내지 손실의 귀속 범위를 10%로 제한한 파트너에 불과하며, 사건 선박이 내국물품이 되었거나 국내에서 자유유통상태에 놓인 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관세납부의무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은 정당하므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해주시기 바랍니다.

 

대법원이 법리를 검토하여 판결을 내리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길고 긴 법정 싸움은 2년 2개월이 지난 후에야 결론에 이른 것이다.

 

1997년 9월 20일 오후 2시

대법원 제1호 법정

 

최종 공판이 있는 날 피고인 장우 대신 이영숙 변호사가 법정에 출석했다.

일부러 상경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판결문 사본을 받아든 그녀는 서울역 그릴에서 장우를 만났다.

 

그녀가 전달한 두 페이지의 판결문은 이렇게 마무리돼 있었다.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고, 거기에 관세법상의 수입에 관한 법리를 잘못 해석한 것이 없으므로 상고를 기각하기로 하여 관여 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판결한다.”

 

장우의 입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가 터져 나올 뻔하다.

 

4명의 대법관이 서명한 것을 눈여겨봤다.

서명은 광채를 발하고 새벽의 어둠을 깨는 느낌이었다.

 

무죄 판결에 이영숙 변호사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이걸 받기 위해 2개여 성상이 지났군요. 이제 법하고는 적당한 거리를 두세요. 그리고 너무 오기부리지 마시고.”

 

악수를 청하는 여성의 손이 부드러웠다.

장우의 얼굴이 왜 갑자기 화끈거릴까.

 

“저도 많이 꺾였습니다. 옛날의 장우가 아녜요.”

 

품위로 포장한, 만족한 웃음이 입가를 돌았다.

 

미결구금 손해배상 문제에 대해 변호사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구속기간 95일에 대한 손해배상을 국가를 상대로 청구할 수 있고, 더하여 변호사 비용을 포함한 지출비용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허위 고발이라면 고발인에게도 손해보상을 청구할 수 있고요.”

 

“이제 모든 걸 잊고 싶습니다. 구금 손해배상만 청구하고 지금부터는 사업에만 열중하렵니다.”

 

결과가 좋은 마당에 모든 걸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누구한테 원망할 일도 없었다.

 

구속 기간에 대한 보상액 한도는 하루 5만원이다.

95 일 x 5만원 = 475만원

 

고등법원 제2형사부의 결정은 검찰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했다.

 

<국가는 청구인에게 금 475만원을 지급한다>

 

95일 동안 미결구금을 당하였음이 명백하므로, 국가는 형사보상법과 그 시행령이 정하고 있는 바에 따라 청구인에게 구금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돈 받으려고?”

 

씁쓸한 웃음이 장우의 입가를 흘러나왔다.

 

구금 중 회사 직원의 수억 원대의 횡령과 소송에 소요된 변호사비용은 어리석은 자에게 맡기고, 이제는 미래로 향한 삶을 위해 현명한 자를 초청할까 한다.

 

 

<끝>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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