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그랜드 하우스

그랜드 하우스(IX)

오선닥 2014. 6. 9. 21:47

합계 추징금 94억원

 

해당 밀수품을 찾든지

판결의 부당성을 밝히든지

 

싸움은 지금부터~

 

 

 

 

  그랜드 하우스

제9회

 

 

항소심 준비

 

누군가가 말했다. ‘진실은 무거운 것이라 힘 있는 사람만이 옮길 수 있다’

이제, 그 진실을 옮겨 놓아야 할 과제가 장우에게 남아 있다.

 

3년 징역 5년 집형유예, 합계 추징금 94억원

 

재판장은 한 인간으로서 판결에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자유의 몸으로 한 번 제대로 싸워보라는 뜻이라면 인간적 냄새가 나는 판결일 수 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는 인생.

적어도 진실을 옮길 때가지는 이슬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

 

변호사 사무실

앤티크한 마호가니 가구가 풍겨내는 은은한 분위기.

변호사와 의뢰인이 마주 앉았다.

 

장우는 상황을 설명하는 데 한 시간을 소비했다.

 

“변호사님, 이제 맥을 짚으셨습니까?”

 

“조금은 이해할 것 같네요.”

 

변호사가 여자가 아니고, 얼굴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지 않고, 콧날의 높이가 적당하지 않았다면 한 시간의 대면은 정말 지루하고 짜증스러웠을지 모른다.

 

이영숙 변호사는 6개월 전 부장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부산 바닥에서 가장 오래된 여성판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여성 변호사 선임에 장우의 여자는 처음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까다로운 사건을 왜 하필 여성 변호사에게 맡기는 거예요? 해운이나 선박 지식이 많은 분인가요?”

 

“그렇진 않아. 어떤 면에선 오히려 지식이 적은 게 장점일 수 있어요.”

 

“당신 생각을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이 사건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좋아. 아는 체하는 사람보다 내 설명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변호사가 필요해. 사건에 임하는 자세도 유연해야 하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여자는 한발 물러섰었다.

 

이영숙 변호사는 장우의 사건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사건을 대하는 자세도 그녀의 낭창한 허리만큼이나 유연해 보였다. 신들린 사람처럼 거침없이 말하는 장우에게 간혹 홀린 기분을 느끼는 그녀.

 

‘참 특이한 남자네. 이 사람하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으니, 이상해.’

 

그녀는 변호사 개업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삶에 대한 변화를 주었다. 덤으로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성공사례금을 제시한 의뢰인에게 자꾸 호감이 갔다.

 

잠시 대화에 쉼표를 찍은 장우.

 

물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호사의 무릎 피부와 가구 색깔이 너무 비슷해 조화의 신비를 느꼈기 때문이다. 앞에 놓인 유리 탁자가 없었더라면 시선이 그녀의 무릎에 꽂혀 버렸을는지도.

 

장우는 흩여진 정신을 정돈했다.

 

“변호사님, 밀수를 했다면 밀수품인 선박을 붙잡아 그것을 팔아서 추징금으로 충당하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배를 풀어주었다면 추징금은 당연히 정부가 내야 하고요.”

 

업무 이야기로 돌아온 것은 다행이다.

누가 들어도 빈틈없는 논리이지만 장우의 음성이 커서 싸우는 걸로 착각할 정도다.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법정에서 그렇게 논리를 펴도록 하죠.”

 

여성 변호사의 불리한 점을 장우는 잘 알고 있다. 평소 술자리 친분에서 남성 법조인에 비해 불리하다.

 

의뢰인의 불안을 짐작이라도 한 듯 그녀는 나름대로 작전을 구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말뚝에 묶어둬야 할 배를 왜 검찰 측에서 풀어줬냐, 이 점을 공격 포인트로 물고 늘어지겠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담당 재판장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라 우리의 설명이 가능할 것 같네요.”

 

장우의 호기심에 성냥불을 댕긴 상황.

 

“잘 아시는 사이신가요?”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이랄까…….”

 

“사법연수원 동기?”

 

“연수원은 그분이 한 해 위시고…… 실은 저희 아버지가 그분 대학의 학장이었는데, 결혼 주례를 서기도 했지요.”

 

“혹시 아버님이 따님의 주례를 설 뻔한 상황?”

 

“장 사장님은 상상력도 풍부하시군요.”

 

어둠에서 작은 빛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재판부가 사실을 들어만 줘도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항소는 피고와 검찰이 동시에 제기했다.

한쪽은 형량이 많다고, 다른 쪽은 적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법리의 어느 부분이 문제였는지 알아보기 위해 1심 변호사를 찾았다.

뉘앙스를 던지는 우희준 변호사.

 

“중고선 밀수를 하지 않았다는 심증은 가나, 파나마 회사를 불법 페이퍼컴퍼니로 간주한 것 같습니다.”

 

이영숙 변호사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만하면 족하다’는 듯 다른 해운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장우로부터 설명을 듣자 해운 전문변호사의 꿈도 생겼다. 선박용선, 관리운항, 해상보험, 해운중개, 해운무역, 선원관리 등은 생소하면서도 호기심을 갖기에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다만 해사영어에는 고개를 흔든다.

오십을 앞둔 처지에 너무 부담스럽다. 온통 영어로 된 계약서나 서류가 힘겹기도 하다.

국내회사 간 계약까지 영어로 써야 하는 불합리성에 장우의 설명이 필요했다.

 

“재보험회사가 로이드 등 대부분 외국이고, 해운중재재판도 주로 런던이나 뉴욕에서 하기 때문에 영어로 해둬야 법리 해석에 혼돈을 줄이고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영어가 몸살 하겠네요.”

 

“빵 안에 있을 땐 영어 쓸 일이 없어 좋더라구요.”

 

“장 사장님답지 않네요.”

 

그러고는,

 

“참 식사가 괜찮던가요?”

 

그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렇게 살이 피둥피둥……. 먹는 것은 돈캐어(don't care) 입니다.”

 

“나오시니까 또 영어를 쓰시네요.”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 헷갈립니다.”

 

최근 부일신문에는 ‘선원의 국제화’에 관한 시리즈 기사가 게재되었다.

 

“ITF가 뭔데 그렇게 위력이 대단합니까?”

 

파나마에 등록된 편의치적선의 선원문제가 나오자 이영숙 변호사가 궁금증을 나타냈다.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입니다. 만약 선원들의 근로조건이 국제기준에 미달하면 항만노동자 들이 하역이나 접안 등을 보이콧합니다. 선주는 부득이 ITF규칙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고요.”

 

“ITF의 활동이 선원들에겐 좋은 일이네요.”

 

“저개발국가 선원에게는 오히려 불리한 점도 있지요. 고임금으로 국제경쟁력이 떨어져 고용불안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요.”

 

아파트 경비원이 임금상승을 마냥 좋아하지 않는 거와 같은 맥락이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선박의 등록과 선원고용에 관해서 그녀는 좀 더 알고자 했다.

 

선박은 등록된 국가의 국기를 선미에 단다. 가령 파나마 등록 선박이 부산항에 입항한다면 선미에 파나마 국기, 선교 위에 한국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

 

한국적 선박은 의무적으로 한국인 사관을 승선시킨다. 외항선 부원에 한해서 6명까지 외국인 선원을 승선시킬 수 있다. 내항선의 경우에는 더 까다로워 외국인 부원 3명까지 승선 가능하다. 만약 외국인 사관을 희망하면 척당 2명까지 할당허가를 받아 승선시킬 수 있다.

 

“왜 한국 선주가 파나마에 선적(船籍)을 둡니까?”

 

“파나마는 자국의 선원 승선에 관한 어떠한 의무조항도 두지 않고, 또한 등록세 등 세금도 저렴하기 때문이지요.”

 

“해운이 워낙 국제경쟁에 노출되다보니 그런가 보군요.”

 

머리가 좋으니 설명을 잘 주워 먹는 이영숙 변호사.

재판 관련 이야기가 해운 이야기로 확대돼도 두 사람은 지루한 줄 모른다.

 

 

 

항소심 재판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법정에 서는 모습이나 마음가짐이 1심 재판 때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지 않은 게 오히려 부자연스럽기까지.

 

양복 입은 모습을 판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빳빳하게 각을 세운 양복을 선택했다. 인간의 존엄을 외형으로라도 보여주고 싶어서.

 

구부려 옆문으로 들어갔었는데 이제 앞문으로 꼿꼿하게 서서 법정에 들어간다.

똑같은 피고인 신분이지만 그 차이는?

 

하늘↔땅.

 

판사는 온화한 모습의 둥근 얼굴을 했다.

해부학상 목소리도 얼굴 윤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던지.

 

“검찰에 묻겠습니다. 밀수된 선박을 풀어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나요?”

 

1심 재판과는 다른 검사가 일어섰다.

 

“배를 오래 잡아두면 외국 선사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일단 출항시키고 사후 필요하면 외국항에서 압류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가압류 조치라도 했나요?”

 

“조치하지 않았습니다.”

 

“당해 밀수품이 피고인의 소유와 점령에서 벗어난 걸 인정합니까?”

 

“출항했으므로 지금은 그렇습니다. 필요시 외국항에서도 법적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담보 확보가 확실하지 않군요.”

 

판사는 중심을 잡은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다음 재판은 3주 후에 있겠습니다.”

 

당일 재판을 끝냈다.

 

장우와 변호사는 일주일 후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영숙 변호사가 의미 있는 웃음을 짓는다.

 

“재판장에게 우리의 논리가 전달됐어요.”

 

술자리에서, 찻집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전달된 장소는 물을 필요는 없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엄밀한 대화도 필요할 것이다.

 

“아무래도 러시아 선주 측의 증인을 세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재판부를 확실하게 설득시킨다는 의미에서…….”

 

변호사는 선박의 실소유주가 누군지 법정에서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증인을 초청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재판부에 신청해주십시오.”

 

증인은 두 사람으로 정했다. 선주의 사장이 모스크바 장기출장 중이므로 부사장을 부르기로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운항담당 직원으로 했다.

 

부사장 알렉스와 운항차장 소냐가 가을 단풍이 진하게 물든 11월 초 한국에 왔다.

 

“하이! 미스터 프레지던트 장, 정말 보고 싶었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미국 대통령을 호칭하듯 소냐는 요란스럽게 인사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소냐!”

 

그녀와는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포옹은 자연스러웠고, 뺨에 키스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같이 보인다. 장우가 극동 러시아에 갈 때마다 그녀는 친절한 안내자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전쟁기념 포대 앞에서 찍은 사진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이 너무 많이 열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겸연쩍은 듯 옆에 서서 미소만 머금고 있는 부사장의 손목을 잡은 장우.

 

“알렉스,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더 잘할 수 있었었는데…….”

 

구속으로 인해 회사 일에 차질을 많이 빚었다. 더구나 새로운 사업이 진행되는 중이라 더욱 그러했다.

 

“장 사장님, 한국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아무렇게나 사람을 구속하다니요. 앞으로 협력은 더 잘 될 겁니다. 남아있는 재판이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지구 땅덩어리 8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는 이 작은 토끼만한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튿날 법정의 증인석에는 부사장만 섰다.

재판부에서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선박을 SH해운에 매각한 적이 없다는 것은 보증합니까? 위증하면 외국인도 처벌 받습니다.”

 

재판장의 말은 위엄이 있었다.

 

“보증합니다. 선주를 대표해서 진실을 말합니다.”

 

“파나마 운항회사는 누가 설립했습니까?”

 

“선주인 러시아 극동해운이 설립했습니다. 자본금도 러시아에서 송금했으며, SH해운과는 무관합니다.”

 

재판부에서 지정한 통역은 부산외대 러시아어 교수가 맡았다.

 

법정을 나오면서 장우는 알렉스 부사장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증인의 답변에 변호사도 만족했다.

 

“사장님, 러시아어는 언제 배웠어요? 좀 통하는 것 같던데.”

 

변호사의 호기심은 장우가 러시아 선주와 언제 만나, 어떻게 뉴욕에 합작회사를 설립하게 됐는지, 호기심의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나 러시아 미인과 친하게 된 이유는 묻지 않았다.

글쎄, 여성의 질투심이 드러나면 변호사의 체면이 좀…….

 

저녁식사를 위한 장소 선택은 부산소장 맹달호에게 맡겼다.

 

“맹 소장, 가는 길은 잘 알겠지?”

 

“부산 갈매기가 그 동네를 모를 리가 있겠십니꺼. 잘 모시겠습니더.”

 

맹 소장이 운전하는 차는 해운대 달맞이동네에서 멈췄다.

 

가을 하늘 맑고, 별 총총하며, 바닷바람 싸~ 하니 분위기는 괜찮다.

소냐가 그동안 모아둔 감탄사를 터뜨렸다.

 

“부산 바다 정말 멋져요. 그리고 저 보름달 보세요!”

 

여기가 달맞이 마을

오늘이 보름날

동녘 수평선에서 떠오른 둥근 달을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소냐의 얼굴이 저 보름달 같군요.”

 

장우 표현은 결코 인사치레가 아니다.

 

러시아 미녀들은 대체로 얼굴이 둥글다. 보름달에 비교할만하다. 더구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미인이 많다. 러시아의 극동함대 사령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하고 있어 많은 유럽 러시아 미인들이 이곳 해군장교들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관광홍보지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그럼 저 달과 함께 사진 찍어 주세요. 닮았는지 보게요.”

 

모두들 달을 배경으로 해서 나란히 섰고, 보름달은 소냐와 장우 머리 사이에 걸렸다.

알렉스 부사장의 질투가 발동할만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증인을 거부하는 건데 ㅎㅎ.”

 

“지난여름 석 달을 보름달 보지 못했습니다. 모처럼 기분 좀 내려는데…….”

 

이미 과거가 된 3개월을 회상하면서 장우는 말했다.

 

저녁의 자유와 낭만.

괜찮은 느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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