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한미합작

한미합작(VII)

오선닥 2014. 3. 5. 14:57

1994년

옥동자는 산고 끝에 태어난다

 

한미합작

성공과 화합의 상징

SH해운 출발!

 

태어나서는 건강하게 자라기만

정성들여 화초에 물을 주자

 

창립식에 참석한 분들에게 감사

열심히 달려라!

 

 

 

 

 한미합작

제7회

 

 

창립식

 

 

테헤란로 강남역 사거리.

에메랄드빛 유리가 유난히 많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1월 15일 영하의 겨울 날씨에 유리는 더욱 파란빛으로 추위를 느끼게 한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11층에서 우르르 내린다.

이 층에서 무슨 일이 있나.

복도에 화환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다.

 

<창립을 축하합니다>

 

SH해운 창립식이로구나.

 

출입문 양쪽으로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손님을 안내한다. 직원 부인들과 여직원들이다. 한복 모습이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든다. 특히 외국인 손님들은 옷의 컬러에 감탄한다.

 

바깥 공기는 차가우나 사무실 안은 손님들로 후끈거린다.

 

걸대가 굵고 풍채 좋은 초로의 남성이 젊은이 둘을 양쪽에 대동하고 출입구로 들어선다.

그는 오선덕의 손을 꼭 잡았다.

 

“오 사장, 축하하네.”

 

중견기업 동우실업의 조 회장이다. 해운계의 대선배요, 트럭운송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해운대리점업을 하면서 트럭을 60대나 보유하고 있다. 해운과 육운으로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호탕한 경영을 하고 있는 걸로 소문나 있다.

 

그의 갈색양복이 양쪽 젊은이의 검정양복과 어울리지 않지만 차별성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안다면 이런 대조는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오선덕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사장 호칭에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사장?

 

호칭이 사람을 헤까닥 바꾸어 놓는 두 번째 경험이다. 첫 번째는 물론 첫 아이가 태어나 아빠의 신분이 되었을 때였다. 묘한 기분에다 아버지로서 양 어깨에 걸리는 책임감의 무게는 세상의 저울로는 달 수 없을 것 같았었지. 그리고 오늘 두 번째 경험. 책임감의 무게가 그때와 못지않다.

 

속속 들어서는 손님 중에 마치 공이 굴러 들어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

작달막한 체구지만 건강미가 넘치는 50대 후반 사장이 팔자걸음으로 다가온다.

오선덕은 깍듯이 그를 맞이했다.

 

“형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님, 축하해요. 선의의 경쟁은 지금부터여!”

 

냉동운반선 회사의 선두주자 보성수산 김 사장은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동종 사업자로서 한판승부는 이미 시작됐다고 제스처까지 부렸다. 그가 보낸 대형화환은 축하의 표시인 동시에 경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거드름을 피운다. 마피아 대부 꼴레오네가(家)를 닮으려고 하는 것 같다. 상호를 해운이 아닌 수산으로 붙인 이유는 어획물 운송에서 어선회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의도일지 모른다.

 

“형님, 롱 펀치로 시도해볼 테니 슬슬 준비해주세요.”

 

오선덕도 농담을 마다하지 않았다.

 

극동러시아에서 손님이 왔다.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극동해운의 카르펜코 회장이다. 보통 키의 회장은 키가 유난히 큰 여성 한 명을 대동했는데, 그녀는 나중에 운항부 차장이라고 영어로 소개했다. 보스들은 보편적으로 자기 외모와 상반되는 동반자를 선호하는가 보다.

 

회장은 러시아어로 간단하게 인사했다.

 

“파즈드라비띠! 미스터 오.”

(축하합니다. 미스터 오)

 

“즈드라스트부이쩨. 도브로 뽀잘로바찌 브 까레유!”

(안녕하세요.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선덕은 엉겁결에 조금 아는 러시아어로 인사를 받고 말았다.

 

모국어 인사를 받은 극동해운 회장은 만족한 듯 크게 웃었고, 대동한 여성은 섰던 키에서 시선을 낮춰 미소를 띠었다.

 

극동해운은 냉동운반선만 100척 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영업은 뉴욕 회사에서 담당하고, 블라디보스토크 본사에서는 운항과 관리를 맡고 있다.

 

이어지는 축하객 속에 외국인이 눈에 많이 띈다. 합작회사의 특징은 축하 손님을 보면 안다.

 

“헬로우. 콘그레츄레이션(Congratulation)!”

 

뉴지에서 온 제임스는 축하 인사와 함께 키위 운송에서 저렴한 용선지원을 부탁했다. SH해운이 냉동운반선 시장의 다크호스로 등장했다는 걸 눈치 챘는가 보다.

 

호주에서 소고기와 양고기를 수출하는 헨리가 참석한 것은 비즈니스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몰디브 섬나라에서 온 이스마엘은 150센티 키가 형편없어 보여도 참치 무역 상담에 들어가면 상대방은 주눅이 들고 만다. 영국에서 유학한 그는 유창한 영어로 상대를 압도한다.

 

평소 교류가 있었던 MO라인의 곤도가 유일한 일본인 축하객임을 은근슬쩍 비치면서 오선덕에게 다가온다.

 

“곤니치와(こんにちは)!”

 

이번엔 얼굴이 둥글고 눈이 동그란 중년 남성이 곁으로 와서,

 

“닌 하오(您好)!” 어깨를 포옹했다.

 

대만의 카오슝에서 온 쟝성(张盛) 사장이다. 오선덕의 선장 시절부터 친구로 친해 왔었다. 바나나 실으러 갔을 때 잘 휘어진 노란 바나나 하나를 주면서 바나나킥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불필요한 설명까지 한 사람이다.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는 데 이 이상 크면 불쾌감을 준다고 부가설명을 했던 장난꾸러기.

 

“봉주흐(Bonjour)!”

 

어장의 입어권을 관장하던 모로코 관리 마히옹이 축하객으로 방문해줘서 고맙다. 그는 한국 수산회사에 출장 왔다가 창립식에 들렀다고 한다. 아프리카인의 의리에는 예의를 샌드위치로 넣곤 한다.

 

“올라(Hola)!”

 

주한 페루대사관에서 온 마테오 상무관은 너무 크게 말해 주위의 시선을 흡입했다. 페루 오징어 어장에 진입하려면 이 친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에는 공사다망함에도 불구하고 해운항만청 차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참석만으로도 SH해운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평소 오선덕과 개인적인 유대관계가 작용한 점은 분명한 것 같은데, 국가정책이 해외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시기에 축하를 위해 공적인 시간을 할애한 것은 의미가 깊다.

 

그는 창립 축사에서,

 

“오랫동안 외교가 단절된 러시아가 수교국이 되어 한국 투자에 눈을 돌린 것은 커다란 변화입니다.”

 

고위 관리로서 국제관계의 변화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뉴욕에서 두 사람이 참석했다. 사장인 레오나르도 레프와 부사장인 알렉산더 사치코프다. 의전상 레프 사장이 먼저 축사를 했으나 3분 스피치로 간단히 끝내고, 부사장인 사치코프가 10분간이나 축사를 했다. 합작설립이 한국은 물론 동북아 지역 해운시장에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합작 당사자로서 감회를 피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강조했다.

 

“우선 서울과 뉴욕은 경쟁하지 않아야 하고, 그다음, 이익을 내어 배당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합작은 일석이조(killing two birds with one stone)의 효과를 내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논리를 폄으로써 좌중의 분위기를 탱탱하게 했다.

 

동우실업의 조 회장에게는 3분 이내의 축사를 부탁했으나 10분이나 걸렸다. 오선덕 사장과의 유대관계가 10년 이상 지속되었으므로 10분 정도의 축사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사전에 청중의 양해를 구하는 바람에 웃음으로 양해를 받았다.

 

극동해운의 카르펜코 회장은 전직 주중 러시아대사답게 주한 러시아대사관에 대해서 3분간 의견을 피력했다. 러시아어 통역은 알바학생이 맡았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885년 정동에 7,500평 부지를 가졌다. 1990년 한러 재수교 시 러시아는 고종의 아관파천 때 매입계약서를 들이대며 러시아가 소유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한러 협상을 통해 현시세의 10%인 250억원 정도로 합의하고, 정동제일교회 옆 대지 2,500평을 내놓았다. 이와 물물교환으로 한국은 모스크바에 같은 평수의 한국대사관 부지를 제공받았다.

 

회장은 구소련보다도 재정러시아에 대한 향수가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2002년 개관했다. 대사관 사무실과 아파트, 학교가 함께 들어선 복합단지는 경비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곳으로 서울 속의 크렘린 궁이다. 러시아답다고 해야 하나.

 

 

 

  뒤풀이

 

창립식 마무리 단계에서 주인공 오선덕 사장의 인사말.

 

“세 나라가 관련된 회사로서 책임의 무거움을 통감합니다. 러시아와 미국, 한국은 비즈니스 이웃이 되었습니다. 회사의 이름 그대로 성공과 화합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이때 빨간 코트를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권유선.

그녀의 옷 색깔이 화려하지만 훤칠한 키가 사람들의 눈에 확 들어왔다.

인사말을 멈추고 오선덕은 그녀를 소개하고 말았다.

 

“합작을 준비하는데 공헌한 권유선 씨를 소개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여성을 소개하자 시선이 한꺼번에 빨간 코트로 집중했다. 빨간 코트의 비밀을 다른 사람은 알 턱이 없지. 그녀가 적당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을 때 사람들은 모델로 착각하려 한다.

 

참석자의 산만한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 오선덕은 인사말을 끝내고 곧 케이크 절단의 순서를 선언했다.

 

긴 칼 옆으로 늘어선 사람들.

오선덕 부인도 칼자루를 함께 쥐었다. 한복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촬영을 위해서 포즈를 취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은 색상에 감탄하여 한복의 브랜드가 ‘원더풀’ 쯤으로 생각할 지경.

 

폭죽이 터뜨려지고, 케이크 크림 조각이 누군가의 얼굴에 던져졌다. 두 사람의 얼굴에만 붙었다. 오선덕과 알렉산더. 합작의 양대 주주에게 가한 벌칙이다. 곧 여직원이 화장지로 닦아내 일시적인 이벤트로 끝났지만 예상치 못한 장난이다. 장난끼 있는 직원이 회사에 있다는 것은 경계대상이면서 흥밋거리다.

 

창립식이 끝난 이튿날.

 

극동해운 회장을 모시는 자리가 마련된다. 한국에 처음 온 선주이니 신경 써서 모셔달라는 알렉산더의 부탁은 오히려 당연한지도.

 

오선덕이

“그럼 임금님 메뉴로 모시겠소.”

라고 하자,

 

그는

“카르펜코 회장더러 허리띠는 풀지 말고 드시라 해요.”

엉뚱한 부탁을 했다.

 

남산의 ‘한국의집’.

러시아 회장에겐 운항차장 소냐가 동행했고, 오선덕 사장에겐 A해운의 총무차장 권유선이 동행했다. 두 남성과 두 여성의 밸런스가 좋았고, 기혼 나이에도 스타일이 세련된 두 여성의 교양미가 돋보였다.

 

어진정찬이 들어오자 카르펜코 회장의 입이 쩌~억.

구절판은 섬세한 손맛이 그대로 살아있는 느낌. 대한민국 최고의 한식솜씨가 이런 거로구나.

 

“마치 해바라기 같아요.”

 

구절판을 보고 소냐가 러시아 국화(國花)인 해바라기에 비유했다.

 

고급 안동소주가 등장하자 오선덕이 건배를 제의했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건강 무궁토록 꽃 피우세요.”

 

무궁화(Sharon)에 비유하여 말한 것인데, 통역이 잘된 것 같다. 영어를 모르는 카르펜코 회장이 소냐의 통역을 듣고는 크게 웃었다. 무궁화가 한국의 국화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회사 컨테이너선이 한국에 자주 입항하므로 두 여성이 협조했으면 좋겠어요.”

 

회장은 권유선 차장의 업무 내용을 전해 듣고 두 실무자의 만남이 앞으로 좋은 협조의 기회가 될 거라고 하면서 격려했다.

 

권유선은 오선덕 사장의 배려로 미래의 러시아 파트너를 알게 되어 흐뭇.

 

“오 사장님,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다 하셨어요?”

 

“내가 비즈니스맨 아녀요? 기회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러시아 회장님 눈에 들어오면 좋은 일이 팍팍 터질 겁니다. 오늘 저녁은 한국의 전통을 보여주면 충분해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물론 한국말 대화다.

 

일인당 15만원 음식가격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임금님의 일상 음식이 가격으로 평가할 게 아니잖은가.

 

한편, 같은 저녁 시간.

뉴욕에서 온 사장과 부사장은 SH해운 상무의 안내로 워커힐호텔 아이스쇼를 관람하고 있다. 극동해운 회장의 안내는 오선덕 사장이, 뉴욕 손님은 상무가 안내하기로 역할 분담한 셈이다.

 

늘씬한 러시아 여성 댄서가 줄을 이어 등장하자,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저들이 벌써?”

 

레프 사장의 눈빛이 당황스럽다. ‘저런 몸으로 한국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가’에 미치자, 빨리 무기수출로 돈을 벌어서 러시아 여성 인격을 회복해야 되겠다고 결의를 하는 것 같다. 알렉산더는 발레리나인 부인이 쇼 댄서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듯 10만원짜리 스테이크를 열심히 자르면서 이야기한다.

 

“한국이 올림픽 이후 몰라보게 발전했군요. 러시아가 한국 차관 30억 달러를 빨리 상환해야 하는데.”

 

러시아가 어려울 때 한국이 도와준 걸 그들이 알긴 하는가 보다.

 

“헬리콥터 가격이 올라가야 하는데…….”

 

무기 수출업자는 늘 무기거래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가 보다.

 

SH해운의 서울 본사 사무실은 웬만큼 구색이 갖추어져 가는 것 같다.

책상마다 컴퓨터를 놓고, 인터폰 장치를 하고, 이메일 계정을 직원마다 마련하고, 비록 팔뚝만하지만 휴대폰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첨단의 사무실이다. 20년 후와 비교하면 모두가 골동품에 불과하겠지만.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믿음이 직원들 가슴에 팍.

 

손님이 떠나고 난 사무실은 업무 상태로 변한다.

오선덕 사장의 어깨가 무거워진다. 부산항에는 벌써 러시아 냉동선 세 척이 들어와 있다.

부산 사무실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할 판이다.

 

합작 설립에 쏟은 정력 때문에 수명이 2년은 단축된 것 같다. 열심히 사업을 꾸려나감으로써 2년을 도로 보상 받아야지. 희망은 바라는 자에게만 주어진다고 했던가.

 

 

<끝>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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