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항공기를 압류하라

항공기를 압류하라(제 3회)

오선닥 2015. 7. 1. 12:27

비행기 압류는

일단 피했으나

재압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어떤 협상이 진행될까?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3회

 

 

협상 돌입

 

시베르항공 본사는 온통 패닉상태를 맞이했다. 최대주주가 바뀐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항공기 압류 사태를 당했으니 임원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지난 5년 동안 한국 취항은 무난하게 진행돼 왔다. IMF 금융위기만 없었더라면 한국은 그야말로 좋은 항로임에 틀림없다. 신임 회장 알렉산더 그리고렌코는 기업 전문가가 아닌 모스크바가 내려 보낸 실세 정치인이다.

 

보고를 받은 회장은 운항책임 부사장 예프게니 루프소프에게 말했다.

 

“서울주재 대사관의 도움이 컸다지요?”

 

“그렇습니다. 상무관이 백방으로 노력했답니다. 계속 핫라인을 유지하겠습니다.”

 

“일단 비행기가 풀려났으니 한국 지점의 보고부터 받아보는 게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서울주재 감독이 문제 여행사와 만날 예정으로 돼 있습니다. 현황 파악되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문제의 여행사는 시코여행사를 말한다. 5년 동안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자들이 트로이목마처럼 튀어나와 문제를 일으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소국 한국이 대국 러시아를 향해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무모한 짓을 저지르다니 황당하고 괘씸하다는 것이다. 소련연방이 붕괴하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보고하는 부사장은 화가 나면서도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신임 회장에게 찍히면 그의 운명은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다.

 

회장이 자리를 뜨자 부사장은 운항부장을 불렀다.

 

“서울에서 연락 올 때가 되지 않았소?”

 

“네, 조금 전에 연락 왔는데 내일 저녁 당해 여행사와 미팅한답니다.”

 

“현황을 자주 체크해 보세요. 회장님께서 비행기 압류 문제만큼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시니까.”

 

항공기 투입과 편성을 담당하는 운항부장 미하일 야코벤코는 곧바로 서울주재 감독 안드레이 포포프에게 연락했다. 노보시비르스크의 본사는 초긴장 상태에 있으며, 협상에 전력을 다해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튿날 63빌딩 45층 나폴레옹 레스토랑에서 고소인 측과 피고소인 측이 만났다.

 

고소인 측: 시코여행사 사장 황지명(48)

피고소인 측: 시베르항공 서울주재 감독 안드레이 포포프(38)

 

황 사장이 통역 목적으로 조은정(36) 차장을 대동한 것에 대해 안드레이가 사전 양해를 했다. 63빌딩에서 만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여의도는 공항이 김포로 이전하기 전에 비행장이었고, 지금 김포공항을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다는 장소의 상징성 때문이다.

 

충실한 협상을 위해서 양쪽의 변호사와 시베르항공의 한국 총판대리점인 아태여행사가 동석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으나 오늘은 우선 양쪽의 입장을 듣는 자리로 하자는 데 동의했다.

 

“사전 경고 없이 비행기를 잡으시다니…… 당황했습니다.”

 

안드레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을 때 먼저 말을 꺼냈다. 자리를 마련한 측에서 대화를 여는 것쯤은 알고 있었던가 보다. 테이블 맞은편에 황지명과 조은정이 나란히 앉았다. 황지명은 그의 말이 당연하다는 듯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경고가 없었던 게 아니지요. 5년 동안 협상을 요청했는데 귀사에서 응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베르항공의 회장이 바뀐 것은 아시죠?”

 

안드레이가 말하고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귀사의 변화에 대해선 우린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다만 시베르항공이 건재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황지명은 딴청을 부렸다. 시베르항공의 회장이 바뀌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모르는 척했다. 지금부터는 표정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러시아인의 머릿속에는 크레믈린궁이 몇 개나 들어 있을지 모르니까.

 

“항공기 압류는 철회해주십시오. 외교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고요. 러시아와 한국이 국교를 맺은 후 외교관계가 아주 좋아진 마당에 …….”

 

안드레이는 러시아 외교관처럼 말했다. 정치와 경제를 같이 데리고 가는 걸 보니 아직 사회주의 물이 빠지지 않았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창하는 러시아도 이제 민간의 일은 민간에 맡겨야 합니다.”

 

안드레이는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개혁과 개방을 의미하는 어려운 러시아어를 황 사장이 알고 있다니. 그러나 조은정은 통역이 쉬워졌다는 눈치다.

 

안드레이가 자세를 고쳤다.

 

“개인적으로는 고르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련연방을 붕괴시킨 사람이지요.”

 

협상이 곤란할 때는 가능한 외부로 핑계를 돌린다. 국가 시스템의 차별성을 언급하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죠. 상업적 문제에 국가가 관여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이번 경우는 러시아와의 우호적 관계를 고려해 우리 회사가 한국 정부에 협조한 것뿐입니다. 확대 해석은 오해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예민한 부분으로 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던지 조은정은 통역의 신분을 떠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자 두 사람 앞에 놓인 와인을 가리켰다. 황지명이 눈치를 채고 건배를 제의했다.

 

“또스트!”

 

러시아를 수없이 드나든 황 사장으로서는 영어 같은 러시아어는 잘 기억한다. 안드레이가 건배라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용해 마음에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은 협상으로 해결하도록 하시죠. 본사에도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린 협상을 피할 뜻은 없습니다. 계약을 위반한 측은 귀사라는 것만 기억해주십시오.”

 

“협상의 관건은 배상액의 수준인데……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금액 42억원은 계산근거가 충분합니다. 검토하신 후 협의하시죠.”

 

“물론 본사에서 결정합니다만 시코여행사의 뜻을 전하는 것이 제 임무이기도…….”

 

메뉴가 차례로 테이블에 놓였으나 모두가 그다지 입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바싹 튀긴 새우처럼 분위기가 건조해져 가는 중에 황지명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 왔다.

 

“다음 기항하는 항공기는 압류되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한국 법원 명령대로 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은연중에 여기는 한국 땅이고 한국 법이 미치는 곳임을 강조하는 모양새가 됐다. ‘법원이 하는 일을 난들 어떻게 하랴’ 의미도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암시 또한 협상전략에 속할 것이다.

 

어려운 말을 쓰는 데도 조은정은 무난하게 통역을 해내는 것 같다. 젖가슴이 약간 패인 블라우스와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샴푸 냄새 같은 것이 안드레이에게 부담을 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미인계와 무관한 통역일 뿐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안드레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일어섰다.

그의 부재 시간을 이용해 황 사장은 조 차장에게 앞으로 협상전략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조 차장, 잘 들어요.” 황지명은 목에 침을 삼키고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동대문 방면에 안드레이가 잘 가는 러시아 바가 있어요. 오늘 거기까지 동행해줘요. 그가 2차하는 습성이 있다는 걸 들었어. 적당한 분위기에서 우리 뜻을 살짝 비치기만 하면 돼. 배상액의 반은 무조건 현금, 나머지 보상은 대리점계약으로 협의하자는 식으로 슬쩍 던져놔 봐요.”

 

“사장님은 거기까지 생각해두셨어요?”

 

조은정은 심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리 조사를 해뒀지. 회사의 생사 문젠데 그 정도쯤은.”

 

동대문 방면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몰려 있다.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이나 유흥업소가 많은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안드레이의 동선 파악은 박태훈(27) 과장이 이미 해뒀다. 아태여행사의 신입사원 연가람(25)의 도움이 있었다. 그녀가 박 과장의 여자 친구라는 점은 행운이 우리 편으로 기울고 있다고 황지명이 생각할 정도다.

 

아이 둘의 엄마인 조은정이 야간에 외국 남자와 동행하기가 어색하긴 하지만 이건 시코여행사의 명운을 좌우하는 일이라 협조를 구했다. 러시아어를 잘하는 그녀가 한두 시간을 투자하면 그 후의 일은 사장이 응분의 대우를 책임지겠다는 뉘앙스를 남긴 것을 보더라도.

 

안드레이가 테이블로 돌아오는 걸 보고 황지명은 결론을 서둘렀다.

 

“시베르항공의 조속한 보상이 상호 유익할 것입니다.”

 

공을 안드레이에게 던져 놓은 셈이다. 시베르항공이 한국 영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다음 스케줄을 조은정에게 맡기기 위해 황지명은 일부러 저녁 자리를 빨리 끝내려 했다.

 

“조 차장이 택시로 바래다 드려요.”

 

동대문에 가서 한잔 더 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 차장이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장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데 안드레이가 순순히 협조할 것으로 믿고 있다.

 

택시로 바래다주고 그대로 집으로 오려던 조은정을 안드레이는 붙잡았다. 예상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들과 딸을 둔 조은정과 딸과 아들을 둔 안드레이의 가정사가 비슷하다는 것은 후의 대화에서 알게 된 것이다. 안드레이가 협상의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베르항공 본사가 협상으로 문제를 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수확이다.

 

조은정은 황 사장이 지시한 대로 조건을 제시하고 상대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다.

 

“러시아 재정이 어려워 현금 타결은 좀 힘들겠지요?”

 

대국 러시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그녀의 실수가 아니라 평소 황지명이 강조해 왔던 협상술의 일부분을 그녀가 원용한 것뿐이다. 그러면서,

 

“시베르항공은 진취적인 회사라 한국을 동북아의 거점으로 이용하면 크게 성장할 수 있겠지요.”

 

뚱딴지같지만 올려 세우기도 했다. 먹혀들어갈 수 있는 칭찬이었다.

 

자존심을 건드려 놓고 상대방에게 매력적인 것을 제안하는 ‘병 주고 약 주는 수법’이 보드카로 옮겨갔다.

 

“보드카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술이잖아요. 맑고 투명하고 팍 쏘는 맛이 일품이죠.”

 

조은정은 보드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냥 러시아인이 자부심으로 여기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안드레이가 결국 러시아인의 술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으려 했다. 그녀는 점잔하게 그의 팔을 풀고 마지막 잔을 권하고 그를 일으켰다. 컥 하고 테이블에 쓰러지려는 것을 겨우 부추겼다.

 

그가 거주하고 있는 레지던스호텔은 7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택시를 불렀다. 술 취한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침대로 옮겨 놓는 데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제 발로 걸어간 것은 고마웠다.

 

‘오늘 제시한 조건을 내일 자기네 본사에 보고하는 데 지장이 없어야 할 텐데.’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고 스파클 생수를 꺼내 컵에 부어 그에게 줬다. 벌컥 삼키고는 “소냐, 댕큐.” 그는 자기 부인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물을 준 사람이 누군지 기억하려고 애쓰겠지만.

 

조은정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을 때 남편이 TV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고마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