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압류는
과연 가능할까?
더구나 한국에서~
간이 배 밖으로?
궁금하기만~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2회
번개작전
시코여행사는 무척 바쁘다.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항공기 가압류 판결문을 받아든 박태훈 과장은 변호사 사무실 직원과 함께 법원 집달리 사무실을 찾았다. 판결문을 훑어본 집달리는 경계의 눈빛으로 박태훈을 쳐다봤다.
“뭐? 비행기를 압류한다고?”
누구라도 놀랐을 것이다. 법원공무원 30년에 비행기를 압류하는 일은 처음이다. 판사의 결정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만 딱지를 붙이는 집달리 입장에서는 생소한 일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튿날 4월 21일 화요일
번개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시코여행사 직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황지명 사장은 초조한 나머지 모토로라 무전기로 공항으로 가고 있는 박태훈 과장을 불렀다.
“집달리한테서 연락 왔어?”
“예, 공항공단에 곧 도착한답니다.”
“곧 도착이 몇 시를 뜻하는 거야?”
“11시에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
수시로 보고할 것을 지시하고 황 사장은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미심쩍어서 또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TU기가 9시 20분에 김포에 착륙했다고 하니까 잘 지켜보라고.”
박 과장의 대답을 듣고 황 사장은 팔뚝만한 무전기를 무겁다는 듯 내려놓았다. 전화를 오래하다 보니 무전기 들기도 힘들다는 표정이다.
한국공항공단 본사는 김포공항 내 있다. 박 과장은 공단 로비에서 집달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 시간과 항공기 간의 관계가 뭔지 피부로 느껴 나가야 한다.
집달리팀 두 명이 시간 맞춰 공단 로비에 도착했다. 엄밀히 말하면 5분 늦었지만.
“공단 사무실로 가시죠.” 박태훈은 서둘렀다.
“참 당황스럽네요. 자동차도 아니고 비행기에 딱지를 붙이려니.”
집달리는 채무자에게는 포도청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집행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니 어딘가 어색하다.
판사의 명령에 따라 채무자의 재산을 압류하는 법원의 관리를 집달리라 부른다. 명칭은 얼마 후 집달관으로 바뀌었다가 이것마저 권위가 부족하다고 해서 다시 얼마 후 집행관으로 바뀌었다. 집행관은 10년 이상 법원주사보 또는 검찰주사보 이상의 직에 있던 자 중에서 지방법원장이 임명한다. 수수료와 체당금으로 먹고 사므로 공무원은 아니지만 업무 특성상 실질적 의미의 국가공무원에 속한다.
박 과장이 앞서고 집달리가 뒤따르며 공단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시선들이 집중했다. 판결문이 공항 운영팀장 책상 위에 놓이자 팀장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항공기를 압류한다고요?”
팀장은 ‘이게 가능한 일이냐’고 덧붙이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한다.
“판사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우리도 처음이라…….”
“이 문제는 이사님 보고사항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팀장은 안절부절못하며 집달리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하고는 곧장 이사실로 달려갔다.
박태훈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달리는 응접실에서 대기할 것이 아니라 비행기로 달려가서 딱지를 붙여야지 지금 찻잔을 들고 있을 계제(階梯)가 아니라는 것.
비행기는 예정대로 오전 9시 20분 김포공항에 착륙하여 10시부터 화물을 내리고 있다. 화물을 내린 다음 러시아로 갈 화물을 싣는다. 화물을 다 실으면 기내용품과 연료공급을 받고 오후 3시 노보시비르스크로 향해 출발한다. 이런 작업은 모두 대한항공이 대행한다.
운영팀장은 보안팀장에게 가서 귓속말을 하고는 부리나케 다른 테이블로 갔다. 시설팀장과 항무팀장이 합류하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사상 초유의 사건에 공단은 벌집이 돼버렸다.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사건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긴급회의는 결론을 내렸다 .
사건 내용은 지체 없이 건설교통부에 보고됐고, 안전기획부에도 통보됐다. 안보문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항공기를 붙잡아 두면 러시아 군대를 잡아두는 것이라고 엄포 같은 의견도 있었다.
보고 받은 지 20분이 지나지 않아서 건교부는 발칵 뒤집혔다.
“도저히 있을 수 없어. 이건 외교적 문제야!”
항공국장은 스프링처럼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쳤다.
보고한 과장은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일단 집달리가 항공기 접근을 못하도록 공단에 조치해 놓았습니다.”
도대체 채권자가 어떤 작자야? 비행기를 압류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 아냐? 이게 말이 되는 거야? 국장의 고함소리는 두서없이 커졌다.
공항 비상사태 발생 후 30분이 지나지 않아 안기부 직원이 공단 사무실에 들어섰다. 가죽점퍼에 검은 안경을 쓴 그는 집달리 앞으로 가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조용히 물었다.
“법원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집달립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다음 연락할 때 오십시오.”
“판결문 집행 보류는 제 맘대로 하기가…….”
“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곳에 다 연락해 놓았습니다.”
검은 안경은 계속 공손하고 낮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목소리의 일관성을 지켰다. 집달리의 대답이 자석에 끌리듯 낮아졌다.
“채권자의 양해도 필요합니다만…….”
“그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집달리는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시코여행사 박태훈 과장을 바라보며, '이쯤 되면 어쩔 도리가 없는 거 아니냐'는 표정을 짓고 사무실을 나갔다.
검은 안경의 안기부 직원이 박태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이 잘못되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일은 이쯤에서 끝내시고 건교부와 상의해서 원만하게 해결하십시오.”
시코여행사 사무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두 번 울렸을 때 황지명은 수화기를 들었다.
“사장님이신가요?"
황지명은 들고 있던 커피를 두 모금 마시고 나서,
“그렇습니다. 황지명입니다.” 대답했다.
“건교부 항공국장입니다. 긴급한 일이라 간단하게 말씀드립니다만, 항공기 압류를 보류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외교부까지 비상입니다.”
시베르항공은 압류 사실을 공항공단으로부터 전해 듣고 곧 러시아 대사관에 알렸다. 러시아 대사관은 한국 외교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외교부는 건교부에 문의했고, 결국 범정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할 따름입니다.”
황 사장의 답변은 원칙에 충실했다.
수화기를 통해 상대방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꼭 일을 크게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시죠?”
어딘가 협박 냄새가 나는 말이다. 벌집을 쑤셔놓은 장본인은 당신네들이니 책임지라는 뜻으로 들린다. 압류를 당장 멈추라는 묵언의 압력.
그런데 황지명이 어떤 사람인가.
‘국민의정부’에서 이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잖아. 사법부 결정에 정부가 개입해도 되나. 비행기는 화물 싣고 연료유 실으면 러시아로 도망가 버리는데 그냥 놔 두라고? 속에서 궐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그는 다짐했다.
“우리가 취할 최소한의 권리로 이해해주십시오.”
수화기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와 의논하는지 작은 목소리가 섞였다.
수화기의 짧은 침묵시간을 이용하여 황 사장은 여직원에게 커피 한잔을 더 시켰다. 얼굴 없는 싸움이라 더 피로를 느꼈다.
잠시 후 상대방은 링의 시작종을 울리듯 튀어나왔다.
“항공기 압류가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것 생각해보셨나요?”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하더니 상대방은 하던 말을 이었다.
“일단은 가압류 푸시고 채권 문제는 항공사와 협의하십시오.”
항공국장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아서 황지명도 까칠해지려는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황 사장은 일단 조건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공탁금이 이미 들어갔지만 오늘은 집행을 보류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기항 시에는 압류가 불가피합니다. 이해하십시오.”
공탁금은 채권금액의 10퍼센트가 소요된다. 보증보험에 가입하므로 당장 현금으로 지불하는 돈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항공사에 채권자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긴박하게 돌아가던 사태는 일단락 지었다. 비행기는 녹색딱지가 붙일 뻔했으나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다. 압류는 빨간딱지, 가압류는 녹색딱지로 구분하는데 이번 절차는 가압류에 해당한다.
시베르항공은 기습공격에 깜짝 놀라 화물과 기내용품을 싣는 둥 마는 둥 이륙 예정시각보다 1시간이나 빠르게 도망치듯 달아나 버렸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날개가 파르르 떨릴 정도로 혼쭐이 났다.
시코여행사 사무실은 여전히 긴장된 분위기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압력이 숨은 장애물로 등장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만 항공사에게 따끔한 경고를 준 것만은 확실하다.
긴장된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아서인지 조은정 차장과 박태훈 과장이 퇴근시간을 넘기고도 사무실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황 사장은 두 사람을 옆자리에 앉혔다.
“좋아. 며칠 동안 다들 수고했으니 오늘 사무실에서 만두파티나 하자.”
만두 주문을 끝냈을 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박 과장이 넘겨주는 전화의 목소리는 오늘 공항에 나온 안기부 직원이었다.
“사장님 오늘 좋은 방향으로 처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하실 때는 귀띔이라도 해주십시오. 제가 보스한테 얼마나 까인 줄 아십니까. 저도 먹고 살게 해주십시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어려우나 안기부라는 국가 정보기관이 조그만 여행사에 신경을 쓴 것은 사실이다. 변호사가 사건 맡기를 주저한 이유를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안기부와 통화가 끝나기 바쁘게 또 전화벨이 울렸다.
아태여행사 태철수 사장이다. 내일 시베르항공의 한국주재 감독이 황지명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들이 이제 움직이는군!’
황지명은 웃음을 머금었다. 행동이 가장 좋은 협상 전략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실감했다. 내일이 어떻든 간에 오늘은 직원의 노고를 위로해주는 시간이다.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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