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항공기를 압류하라

항공기를 압류하라(제 1회)

오선닥 2015. 6. 13. 22:13

1998년 봄은 냉정했다

한국의 한 여행사가

러시아의 한 항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준비하는데?

 

 

 

 

항공기를 압류하라

 

 

제 1회

 

 

작전 계획

 

황지명(黃之明) 사장은 오늘만큼은 결딴을 내겠다는 각오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변호사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다음 주 김포공항에 기항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이제 압류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황지명은 의자를 엉덩이 밑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의자까지 긴장을 했는지 바닥 긁는 소리를 내었다. 마주보고 앉은 법무법인 서광의 김유현 대표변호사는 특유의 무표정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항공기를 압류한 선례가 없는데, 조금 더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변호사의 반응은 어렵사리 준비한 남성의 기를 팍 꺾어 놓는 거와 같다. 그동안 협의해 온 것들을 원점으로 돌려놓자는 건가. 성공사례금으로 제안한 5퍼센트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겠지. 황지명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상담은 빨리 진행해야 한다.

 

“물론 선례가 없지요. 있다면 이렇게 주저할 필요도 없고요.”

 

“압류는 최후 수단입니다. 한 번 더 외국 사례를 조사해서 결정하면 어떨까요?”

 

변호사의 말에 황지명은 답답함이 가슴에 뭉친다.

벅 벅, 심장에서 피가 엉키는 소리.

 

“변호사님, 전에 선박 압류해 보셨죠?”

 

“해봤지요. 5년 전에 사장님과 함께 압류한 선박도 있고요.”

 

“그때 성공하셨죠?”

 

“그랬지요.”

 

“그럼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는 거 아네요?”

 

“지금의 경우는 좀…… 항공기라서…….”

 

김유현 변호사는 S법대를 졸업한 후 워싱턴대학에서 해상법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해운전문 변호사다. 그런 경력을 높이 사서 황지명은 해운회사 임원 재직 시 그를 변호사로 선임하여 홍콩 선박 한 척을 압류해 채권 15억 원을 회수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오늘 쫄아 있는 모습은 그답지 않다. 자신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의뢰인이 하자는 대로 따르면 되는데 꿈쩍 않고 뜸만 들이고 있으니 죽을 맛이다. 뭐가 겁이 날까.

 

황지명은 몸을 테이블에 바짝 붙였다.

 

“물론 선박과 항공기는 다르죠. 그러면 양쪽을 비교해 보죠.”

 

황 사장의 말에 변호사는 몸을 펴고 귀를 모았다. 어떤 말이 나올까 아주 궁금해 하는 모습이다.

 

“변호사님, 선박 용선계약과 항공기 임대차계약을 비교해보셨습니까?”

 

“근본적 용도와 성격은 같다고 봐야죠.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간의 권리 의무 계약이니까요.”

 

“그럼, 선하증권과 항공화물운송장의 비교는요?”

 

“항공화물운송장이 유가증권이 아닌 것만 빼고 대충 같은 거죠.”

 

김유현은 해상법을 전공한 사람답게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선하증권(B/L)이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화물인수증이요 운송계약서이며 유가증권 역할을 해왔다면, 항공화물운송장(Air Waybill)은 유가증권이 아닌 물품수령증일 뿐이다. 이는 항공화물이 서류보다 더 빨리 도착하는 현실을 감안한 제도일 것이다.

 

“그럼 결론이 나왔습니다. 항공기를 선박으로 간주해서 우리가 전에 했던 대로 진행하시자구요.”

 

“……”

 

변호사의 망설임에 지쳐 황지명은 다른 변호사를 쓸까 생각도 해봤으나 그가 이미 내용을 파악하고 있고, 지금 변경한다는 것은 시간적 여유가 허락하지 않는다.

 

시베르항공이 처음 김포공항에 기항했을 때는 몰랐었다. 이번이 두 번째 들어온다. 전광석화 같은 작전이 필요하다.

 

“상대가 눈치 채면 완전 도루묵예요.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사장님의 심정은 알겠습니다만…….”

 

“시코여행사의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5년 동안 협상해 오길 기다렸지만 그들은 먹튀만 생각했던 겁니다. 비열한 자들예요.”

 

황지명과 시베르항공과의 인연은 우연하게 이뤄졌다. 평소 업무상 잘 알고 지내던 러시아 극동해운의 한 임원이 시베르항공의 극동노선 담당 임원을 소개시켜 준 것이 계기가 됐다. 마침 소련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도 독립국가 체제로 돌입하자 각 기업들이 앞다퉈 독립적 운영에 들어갔고, 이때 시베르항공도 한국 진출을 위해 파트너를 찾고 있던 중 황지명을 만났다.

 

한국의 총판매대리점 회사로 ㈜시코여행사가 서울에 설립됐다. 사명은 시베리아와 코리아의 이니셜을 땄다. 황지명이 대표이사로서 항공기임대차계약과 총판매대리점계약을 체결하여 5년 전 초기 6개월간 잘 운영해 오는데 시베르항공이 사전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 알고 보니 한국의 아태여행사와 따로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손해배상소송을 차일피일 미뤄오는 중에 IMF 금융위기로 인하여 여객과 화물이 감소하자 시베르항공도 작년 10월에 한국 취항을 일시 중단했다. 그러자 금년 여름 성수기를 겨냥하여 운항재개를 시도한 것.

 

“사장님, 정말 결심을 하신 겁니까?”

 

“당연하지요. 그들이 한국시장에서 시코여행사를 밟고 갈 순 없습니다.”

 

단단한 결심을 보여주듯 황지명 사장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변호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의 이런 모습은 좋게 말하면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너는 신중함이요, 나쁘게 말하면 손님 놓치기에 딱 알맞은 태평함이다.

 

“잠시 쉬었다가 이야기 하시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변호사는 일어났다. 황지명은 커피 한잔 더 마시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머리가 카페인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자꾸 보내고 있으니.

 

혼자 회의실에 남은 황지명은 방안을 두루 쳐다보았다. 완벽한 방음장치에 색조 짙은 벽이 기무사나 안기부에 있을 법한 엄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문을 열지 않으면 웬만한 고함소리는 바깥에 들리지 않을 것 같다.

 

한 개의 긴 테이블에 일곱 개의 의자는 법무법인 변호사 일곱 명의 숫자와 동일하다. 중요한 회의는 여기 특별회의실에서 열린다. 여섯 명의 변호사를 거느리는 김유현은 부친의 지원으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성공한 케이스다.

 

회의실로 돌아온 변호사 뒤에 여직원이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못 보던 여직원이었다.

 

“처음 보는 직원이네요. 미인을 채용하셨군요.”

 

“제 비섭니다. 황 사장님께서 의뢰하셨던 선박압류 사건 수임료로 뽑은 직원인데, 벌써 5년이 되었네요.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다가 3개월 전에 비서실로 왔습니다.”

 

“아, 그런 좋은 인연이 있었군요.”

 

“사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비서가 황지명에게 인사를 하자 변호사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아직 미혼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사건이 성공하면 결혼할 수 있겠군요. 하 하.”

 

황지명은 호방한 웃음을 지었다. 변호사도 멋쩍게 웃었다. 비서는 자기 때문에 웃는 줄 알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나갔다.

 

변호사가 또 돌다리를 두드리고 싶은 모양이다.

 

“압류에 문제가 있는 항공기는 아니겠지요?”

 

“현재 임시운항편으로 확인됐습니다.”

 

항공기 가압류에 관한 통일협약에 따르면 정부 용도나 정기운항 항공기의 가압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그럼 손해배상액은 얼마로 하실 겁니까?”

 

황지명이 준비된 배상청구 서류를 봉투에서 꺼냈다.

서류를 본 변호사의 표정이 긴장했다.

 

“42억? 생각보다 큰데요. 구체적 근거가 확보됐습니까?”

 

“지난 5년 동안의 정기 여객기와 화물기, 임시 전세기 운항을 기본으로 하고, 반년 공백기를 감안하여 계산한 거지요.”

 

“그동안 왜 압류를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물론 생각했었지요.”

 

항공사에서 협상해 오길 기다렸는데 IMF 위기가 닥쳐 그들도 한국시장에서 철수했다가 금년 여름 성수기를 맞이하여 운항재개하게 돼 소송을 서두르게 된 것이라고 황지명은 설명했다.

 

항공기는 비수기 주1회, 성수기 주2회 정규 운항하고, 필요시 전세기를 투입하는 걸로 돼있다. 총판매대리점계약에 따라 시코여행사는 정규 서비스의 티켓판매 총판 역할을 하고, 항공기임대차계약에 따라 전세기 임차료는 계절별 요율에 의거 지불한다.

 

“사업의 수익구조가 색다르군요. 사장님은 역시 사업가다우십니다.”

 

칭찬은 그다지 반갑지 않고, 무엇보다 소송 착수에 동의해준 점이 고마웠다.

 

“이런 사업구조는 해운업에서 원용한 건데 공동운항 형태로 리스크가 적다는 것이 특징이지요.”

 

아이디어를 황지명에세서 배운 시베르항공은 몰래 동일한 사업 내용을 다른 파트너와 유리하게 계약한 것이다.

 

“저와 사장님과의 인연은 참으로 질긴 것 같습니다.”

 

“좋은 의미의 질김은 좋은 거 아니겠어요. 이번에도 성공했으면 좋겠네요.”

 

황지명은 해운회사를 경영하면서 여행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다. 해운과 항공 사업을 이루겠다는 꿈은 부풀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꿈은 철도로 달려갈 것이다. 도로운송에 대한 뜻은 없지만 철도만큼은 그의 꿈을 확장시키는 좋은 방편이기도 하다. 통일시대에 북으로 이어지는 철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 꿈은 시베리아횡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번 소송 건은 그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