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눈무지개
한마디로 감탄입니다
행운이 다가올 것 같은 느낌
기대해도 좋으리라
30. 연구원의 과제
연구 해역인 척치해(Chukchi Sea)는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기원한 따뜻한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분포와 경계면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해양물리학자는 이번 항해에서 대륙붕에서 대륙사면으로 단면을 따라 해수의 물리화학 성분을 측정해본 결과 태평양과 대서양 기원의 해수가 각각 다른 수심에서 유입되고 있다는 잠정 결론을 얻어냈다. 유입 해수는 수심 480미터에서 최고가 되었다가 천천히 낮아지는 것이었다.
날씨가 좋고 구름이 아름다우니 배 바깥을 구경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남자들 위주로 슬리퍼를 준비하다보니 여자들이 발보다 큰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것이 많이 보였다.
남성이 한마디 했다.
“페디큐어가 예쁩니다.”
여성이 반응했다.
“연구 종목에 발미용도 넣어주세요.”
연구 과제를 마음대로 변경해도 되나?
아침식사가 끝난 후 밑도 끝도 없는 선내방송이 나갔다.
“내일 오전 3시간은 남성께서 체육관과 사우나 사용을 삼가주세요.”
이어지는 설명은 한 번 정도 여성 연구원들만 사용할 수 있도록 기회를 배려함이 예의라는 것이다. 연구에는 밤낮이 없고 공휴일이 따로 없다. 제한된 항해 기간에 연구 자료를 많이 수집하고 제때에 연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날씨 나쁜 날이 쉬는 날이다.
상선대학 생활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학생들은 좋아한다. 아침 기상체조와 훈련을 생략할 수 있어서이다.
항구 놈을 출항한 지 열흘.
배는 어느덧 캐나다의 심해평원에 와 있었다.
위치 79N 156W, 수심 3,900미터.
“수심은 어떻게 측정합니까?”
생태 연구원이 궁금한 듯 물었다.
“와이어에 걸리는 장력으로 알지요. 장비가 바닥에 닿으면 장력이 감소하니까요.”
항해사 양외란이 대답했다.
물론 음향측심기가 있다. 음향이 반사돼 돌아오는 시간의 반에 1,500m/s(물속 음속)를 곱하면 수심이 된다. 수심이 깊으면 초음파는 에너지가 감쇠하므로 저음파(장파)를 사용한다.
해저에서 떠올린 퇴적물은 갈색 진흙이었다.
물과 생물과 퇴적물을 채취하고, 해류의 이동과 혼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쇄빙선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국이 쇄빙선을 보유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퇴적물을 채집하는 코어러(corer)는 수십 센티 채취기가 있는가 하면 20~30미터를 채취할 수 있는 자이언트 코어러도 있다. 아라빙호에는 이런 대형 채취기는 없다.
선교에 올라가서 배의 항적을 보니 지난 자정부터 오늘 저녁까지 20시간 동안 배는 지름 수십 킬로미터의 큰 반원을 그리며 표류했다. 해류와 조류, 바람에 따라 배가 떠돌아 다녔다는 뜻이다.
남극은 해류가 대륙 주위를 동쪽으로 흐르는 반면, 육지가 없는 북극은 해류가 단순하지 않다. 또 북극은 해류와 얼음이 얼 때의 압력 때문에 얼음끼리 들어붙어 남극보다 항해가 어렵다. 바닷물이 얼 때 부피가 팽창하면서 주위를 누르는 압력은 선체가 찌그러들 정도로 강하다.
작은 얼음 조각이 해수관을 막는 일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한 중국남성 연구원은 새벽 4시 잠이 깼다. 세 시간을 채 자지 못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갑판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배는 거의 얼음으로 덮인 바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얼음 속에 있는 배가 흔들릴 리가 없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고요한 바다는 좀처럼 보기 어려워 사진을 찍어놓고 싶었다.
그가 동료 여자 연구원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마침 그녀도 잠이 오지 않아 책을 보고 있었다.
“사진 기사 역할을 해줘요.”
남자의 요청에 동포여성은 슬리퍼를 끌고 갑판으로 나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갑판에 내려앉은 이슬 때문에 미끄러져 슬리퍼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똑같은 슬리퍼가 많이 있으니 아무거나 끼어 신으면 돼요.”
그렇지 않아도 배에는 삼선 슬리퍼가 많았다. 한 짝을 잃어도 남은 짝이 많아서 갖다 신으면 되었다. 같은 종류의 슬리퍼를 사둔 것은 하나의 지혜였다.
사진을 찍은 다음 그들은 갑판 벤치에 앉았다. 밤이슬을 맞으며 향수를 달랠 수 있는 것은 같은 언어를 쓰는 덕분이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근처에 얼음은 많지만 연구할 만한 얼음이 적어 배의 이동이 필요했다.
유빙항해사와 얼음공학자, 북극곰감시인을 태운 헬리콥터가 이륙하여 주위를 돌아보고 왔다. 쓸 만한 얼음을 찾았는데 한 시간 정도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를 움직인 아라빙호는 뱃머리를 얼음에 대고 멈췄다.
배에서 내려다보는 얼음은 평면이 불규칙했다.
얼음 위에는 종종 연못이 생긴다. 얼음 위 눈 사이로 도랑이 생기고, 도랑은 연못으로 이어진다. 깊이가 심하면 얼음을 뚫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얼음은 더 잘 녹을 것이다.
얼음의 시료에 따라 각 나라 사람마다 부여받은 업무가 달라 각양각색이다.
중국인들은 연구한 자료를 컬러로 복사한다.
미국인들은 특수한 업무라 일이 없을 때는 회의실에서 영화를 자주 본다.
러시아인들은 얼음 이야기를 빼놓으면 화재가 고갈된다.
한국인들은 연구자료를 두고 회의를 자주 하며 비교적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른 밤에 갑자기 눈이 내렸다.
추운 북극에 눈이 많을 것으로 상상되나 의외로 눈이 적다. 눈을 보는 것은 신기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사진 찍기에 바쁘다.
두 시간 정도 내린 눈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나왔다.
얼음 수평선 위로 눈무지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감탄사와 함께 담은 무지개 사진은 각자의 가족들에게 전송될 것이다.
감탄이 무색하게, 이날 오후 필리핀 여자 대학원생이 배를 안고 뒹굴었다.
특별히 잘못 먹은 게 없다고 하나 아픈 것은 현실이다.
선내 위생담당인 삼항사 양외란이 선의(船醫)에게 보고했을 때, 의사는 청진기를 몇 번 대보고 금방 진단을 내렸다.
“창자가 꼬였군요. 장중첩증은 간단히 치료할 수 있으니 염려 마세요.”
그러고는 항문을 열라고 했다.
부끄러운 표정도 잠시, 환자는 순순히 의사에게 항문을 맡겼다.
공기를 불어넣자 환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꼬인 문제점은 이렇게 푸는구나.”
양외란은 감탄했다.
일이 꼬일 때 이렇게 해결하면 되겠구나, 그녀는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기뻤다.
인천을 출항한 지 꼭 한 달째, 이 정도 환자가 생겨 치료한 것은 다행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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