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이 어려울 때는
술자리를 만드는 게 좋은데
한잔하면서 나누는 농담이 재밌고요
28. 시차 적응
고문 중에 가장 고통스런 것이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잠으로 고생해본 적이 없는 양외란은 오늘은 불면으로 고문을 당하고 있다.
배는 진동하고, 밖은 훤하고….
새벽 4시가 됐는데도 눈이 멀뚱멀뚱하다.
머리맡에 있는 형광등마저 오늘따라 유난히 떨고 있었다.
책상 위에 걸어놓은 엄마의 사진이 자꾸 웃으면서, 오늘은 제발 이야기 좀 하자고 눈꺼풀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너 맘대로 배 탔으니 오늘 내하고 대화 좀 하자.’
엄마는 그렇게 태클을 거는 자세로 비쳤다.
양외란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뒤척이며 잠을 설쳐본 경험이 없다.
정말이지 엄마가 지금쯤 저녁 밥상을 차려놓고 딸과 대화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외로운 사람끼리 인생 좀 논하자 하면서.
식당에 갔더니 여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필리핀 여학생과 중국 여성 과학자.
역시 밤이 없는 여름 북극 밤은 적응이 잘 안 된다고 호소했다.
“지금이 4 AM예요. 안 주무실 거예요?”
양외란이 말을 걸자, 필리핀 여학생이 웃으면서 반응했다.
“전 2PM을 좋아해요. 그들의 팬이라요. 4AM은 싫어요.”
잠을 못 자서 헛소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세 여성은 합석하여 죄 없는 와인을 삼켰다.
와인 덕분에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몽롱한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식사에 참석한 인원은 2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잠을 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젊은 연구원들이 아침 먹기를 포기하고 대신 잠을 선택한 것이다.
북극 탐사를 하는 데는 특별한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유빙항해사와 북극곰감시인이 바로 그들이다.
러시아인 유빙항해사는 축적된 경험이 많았다. 북극항해 경험만 43년이라고 했다.
유빙항해연구소에는 70년 된 자료가 있다고 한다.
그는 다년빙의 구분을 얼음의 두께와 색깔로 가능하다고 했다. 일 년 된 얼음의 색깔은 초록색이지만, 2년 된 얼음은 새파란색을 띤다는 것이다.
“이 부근의 얼음은 8월이 돼야 녹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채수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하면서, 얼음 연구와 해수 연구는 시기를 달리하는 게 좋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세워둔 배는 바람과 물결에 따라 표류한다.
아라빙호는 원래 위치(73N, 168W)에서 상당히 많이 움직였다.
해양지질조사팀에서 찍은 사진이 북극곰인 줄 알았는데 해표였다. 물속을 드나드는, 회색에 검은 점으로 알 수 있었다.
북극곰 감시인은 키가 190센티, 몸무게가 100킬로에 가까운 거구이다. 독신으로 혼자서 먹다보니 무제한으로 컸다고 농담했다. 지금까지 흑색곰과 갈색곰을 30마리가량 잡았는데 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란다. 원주민 이누이트는 북극곰을 잡을 권한이 있으나 자신은 생명이 위급한 경우에만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가지고 있는 총에는 3발이 장전돼 있고 4발이 호주머니 안에 있다. 유효사정이 200미터이상이다. 동시에 8마리가 달려들면 한 마리는 태권도로 제압하겠다고 엉뚱한 포즈를 보였다.
알래스카, 알류샨, 캄차카의 대자연을 촬영해온 일본 사진작가가 북극곰에게 공격당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알래스카대학교박물관에서 남아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저녁식사 후 사람들은 케이지(Cage)를 타고 얼음 위로 내려갔다.
“사다리로 내려가면 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사다리는 얼음이 배에서 멀어지면 위험하다.
사람들은 길이 300미터의 얼음 위에 올라와 있었다. 얼음 두께는 1~3미터 정도.
해빙(海氷)은 기온이 올라가면 녹고, 어떤 곳에는 작은 연못이 생기기도 한다.
하트 모양을 보면 사랑할 징조라면서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얼음 위는 갑판 위보다 더 춥다.
해양시스템안전연구소는 계속 얼음 위 실험을 해나갔다.
연구와 관계없는 사람도 나들이 겸 얼음 위로 내려갔다.
양외란은 얼음 위에서 선체 주위를 훑어보았다.
“아이, 불쌍해라. 선체가 온통 찰과상이네!”
선체는 초콜릿색 페인트가 벗겨져 회백색의 금속살이 보였다. 얼마나 날카로운 얼음에 긁혔으면 저럴까. 여기까지 견뎌온 것이 찡하기만 했다.
그런데 바다의 얼음에서 붉은색을 보았다. 처음엔 바다표범의 피라고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얼음이 선체 페인트를 갉아먹은 것이다.
북극곰 감시인은 바람이 부는 반대쪽 먼 위치에서 외롭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곰은 후각이 아주 좋아 바람 따라 흘러간 냄새를 잘 맡기 때문에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감시업무는 매우 지루하지만 신나는 일입니다.”
그는 자기 직업에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얼음 위는 평탄하기 때문에 바람이 세고 추위를 더 느낀다. 그럼에도 연구원들의 생명을 지킨다는 의무감에서 곰을 노려보고 위험 거리까지 온 곰을 잡을 때는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저녁 메뉴로 참치, 멍게, 주꾸미 등이 나오자 사람들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주방장은 금방 눈치를 채고 소주를 가지고 와서 모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 술은 서비스로 드리겠습니다. 초복이고 하니 즐겁게 드십시오.”
주방장은 소주병을 들고 엉덩이를 흔들어 보였다. 개그맨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소주는 ‘처음처럼’이었다.
“여러분, 이효리처럼 흔들어주세요.”
웃음이 그치기 전에, 술이 따라졌다.
마시든 말든 각자 앞에는 한 잔씩 놓였다.
이번엔 누군가가 건배사를 제의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나이 많은 해양연구원이 지목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이다.
갑자기 건배사를 제의받고 그는 망설였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처음처럼 살지 말고 마지막처럼 사십시오! 건배!”
말의 뜻도 모르고 모두들 건배를 했다.
“종말론적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가 해석을 붙이자 역시 기도교적인 건배사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외국인들은 뜻도 모르고 웃기만 했다. 통역을 듣고 그들도 크게 웃었다.
소주를 유난히 좋아하는 기관장이 한마디를 건넸다.
“참이슬을 좋아하는 사람은 건배사를 어떻게 하지?”
그러자 얼굴이 갸름한 여성 연구원이 반응했다.
“이슬을 먹고 사는 매미처럼 울어야죠.”
“매미는 이슬을 입가심으로 나무진을 먹고 산답니다.”
생태연구원이 바른 전문지식으로 설명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네 명이 맥주 테이블을 구성했다.
헬리콥터 조종사 두 명과 필리핀 대학원 여학생, 그리고 양외란.
맥주 안주로 새우깡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맥주안주로 새우깡과 고래밥이 인기라고 양외란은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라고 덧붙였다.
“새우와 고래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요?”
양외란의 엉뚱한 질문에 외국인들은 머쓱해했다.
아이들에게 물으면 즉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겐?
외국인이 알 턱이 없었다.
“새우깡에 고래밥이니 고래는 새우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외란이 이유를 말하자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무릎을 쳤다.
자신들은 고래를 이기는 새우깡을 먹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고향에 대한 향수가 술로밖에 구체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쑥스러워했다.
<계속>
'소설 > 극지 탐사 항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연구원의 과제 (0) | 2020.12.20 |
---|---|
29.얼음과 안개 (0) | 2020.12.04 |
27.중간기지 출항 (0) | 2020.11.11 |
26.알래스카 항구 놈 (0) | 2020.10.23 |
25.베링해로 들어서다 (0) | 2020.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