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29.얼음과 안개

오선닥 2020. 12. 4. 20:01

 

얼음 바다에서

조사할 일이 많은데
다국적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팀의 역할이 크다

 

 

 

29. 얼음과 안개

 

2010년 7월 23일(금) 놈을 출항한 지 일주일째다.
간밤에 목적지로 가다가 안개가 심해 배가 멈춰 섰다.
안개는 북극해에서 종종 얼음 다음으로 문제가 된다. 다행히 자욱한 안개는 곧 비로 변했다. 북극에서 눈을 보기 전에 비를 볼 수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그러나 비는 한 시간을 못 채우고 그쳐버렸다.
북극 얼음은 작지만 남극 얼음보다 더 단단하다. 염분이 적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는 말한다. 얼음이 많으면 파도가 얼음에 눌려 바다는 덜 사나와진다.
배는 여기저기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얼음을 깨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 갑자기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세 시간 동안 배는 겨우 20킬로미터도 움직이지 못했다.
쇄빙선이 나갈 만한 길을 찾으려고 헬리콥터가 떴으나 5분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바다가 온통 얼음으로 둘러싸였습니다.”
유빙항해사의 탐사 소감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날씨의 호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에 몇 팀이 얼음 위로 내려가서 작업하고, 북극곰감시인은 갑판 위에서 감시업무를 했다.
안개 사이로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에 반원형의 무지개가 생겼다. 누군가가 눈 무지개(snowbow)라고 불렀다.
“환상적이네요.”
기상 연구원은 특별한 체험에 감동했다.

배는 다시 전진을 시작했고 이젠 선체의 흔들림이 적어졌다. 유빙해역을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얼음은 해면의 70%정도 되는 것 같았다.
배의 앞쪽에 장착한 감지기는 충격과 변형의 정도를 측정한다. 얼음의 두께와 강도, 비중, 온도 등에 따라 측정치는 달라질 것이다. 수치는 쇄빙선 설계에 반영된다.
배의 좌현에 색다른 얼음이 포착되었다. 쌍안경에 들어온 얼음은 진한 갈색의 고운 진흙과 모래가 섞여 있었다. 동시베리아 대륙붕에서 생긴 얼음이라고 얼음 연구원은 설명했다. 얼음이 얕은 대륙붕 밑바닥에 닿았다가 모래와 진흙이 묻은 것이다.
선미갑판에 새떼가 모여들어 유심히 보니 세가락갈매기들이 배의 스크루 회전 물살에서 떠오른 작은 물고기를 건져 먹고 있었다. 오랜 경험에서 습득한 노하우가 아닐까.
해무가 오래 끼었으나 해가 다시 나타나고, 바람이 적은 맑은 날씨로 변했다.
푸른 하늘과 유빙으로 덮인 파란 바다가 맞닿아 세상은 파란색이었다.
얼음과 구름과 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뱃놀이 기분에 버금갔다.
머릿속에는 옛날의 조각난 기억이 까치놀처럼 빛을 발하며 사라졌다.

 

배는 어느덧 얼음 바다를 지나 물이 많은 바다에 이르렀다.
위치 75N 160W, 수심 2,000미터 지점 도착.
아침부터 채수(採水)장치를 1,800미터까지 내리는 작업이 시작됐다.
부착된 장비는 수온, 염분, 밀도, 용존산소, 광투과도, 전도성, 산성도를 포함해 무려 15가지의 정보를 알려준다.
채집된 물은 불활성원소와 메탄성분, 미생물을 분석하는 데 쓰인다.
“아, 정보를 보내오는군요.”
연구원들의 탄성이 나왔다.
그럴 만한 것이 지난번 채수기를 올렸을 때는 정보를 보내오지 않아 당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인을 알고 보니 2킬로미터 가까운 케이블의 어느 한 부분에 누전이 있었던 것이다.
채수기에서 받은 바닷물을 조사하는 데는 식물팀도 바쁘다. 얼음이 없는 해역에서는 채수를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세 번 이상 채수해야 정밀도가 증진되어 연구가 원만하다.
수심 500미터에서 들어 올린 봉고 네트에는 작지만 경이로운 생명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간 촉수의 투명 생물, 납작하면서 머리 양쪽에 눈이 있는 것들, 갈색 해파리 등.
차고 깊은 바다에서 살아가는 대자연의 창조물들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권리라고 했던가.
『약간의 심미적 추구를 게을리 하지 마라』
어느 시인의 말이 가슴에 닿았다.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미를 창조할지 모른다. 작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마음이 인간을 본원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미세한 네트를 이용해 동물플랑크톤과 식물플랑크톤을 채집했다.

 

아라빙호의 쇄빙능력시험은 1미터 두께의 다년빙 바다에서 실시한다.
목표지점에는 자정 무렵에 도착했다.
도중에 두꺼운 얼음을 피해 돌아가느라 1시간 거리를 3시간 만에 이르렀다.
“최 박사님은 얼음하고 친하게 된 이유라도 있으세요?”
양외란은 한국 최초의 얼음공학자인 최 박사의 학문 동기가 몹시 궁금했다.
최 박사는 멋쩍은 웃음을 띠었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정복할 것은 얼음이 아닐까 생각했지. 북극, 남극, 고산의 만년설…. 자원이 무궁무진하고 지구온난화로 접근도 쉬워졌으니, 한국에 얼음전문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의기양양하게도 그는 한국의 유일무이한 얼음전문가로 자처했다.
얼음 관련자는 모두 대단해 보이는 걸까.
김연아도 여기에 포함될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양외란은?
이른 아침부터 중국 사람들이 뱃전에서 연구에 한창이었다.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한 연구원의 지시를 따라 다른 연구원은 막대기를 내밀고 있는데, 모니터에는 복잡한 파형이 그려지는 걸로 봐서 쇄빙연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오후 2시 무렵
탑승자들은 갑판으로 나와 배가 얼음을 깨는 광경을 구경했다.
뱃머리에 닿은 얼음이 먼저 깨지고 얼음의 안쪽 약한 부분이 깨어지면서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먼 곳에 있는 부분이 깨어지는 것은 이미 힘이 전달된 결과일 것이다.
남극과는 달리 북극 해빙은 얼음 능선을 가지고 있다.
모양도 작은 산, 완만한 능선, 거북 모양, 뾰족한 산 모양 등 여러 가지이다.
얼음 능선은 바다가 녹으면 함께 사라지는 운명이라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다.

 

아침 식탁에 모처럼 세 사람이 자리를 같이했다.
선장과 양외란, 그리고 북극곰감시인.
보통은 모닝커피와 토스트 등으로 방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곤 하는 선장이 오늘 식당에서 합석한 것은 의외이다. 쇄빙능력시험 중이라 선장은 선교에서 바로 식당으로 내려왔다.
북극곰감시인은 선장과 아침식사를 같이하는 게 마냥 신나는지 이야기를 풀었다.
“북극곰은 8미터를 점프해서 갑판으로 올라올 수 있어요.”
북극곰감시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 양외란은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감시인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간혹 그물사다리를 타고 올라오기도 한답니다. 아마 선실 문 정도는 쉽게 때려 부술 걸요.”
더욱 오싹해졌다.
곰이 그렇게 무서우니 자기와 같은 감시인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것 같았다.
선장이 옆에서 겁주기에 동조했다.
“곰이 느린 것 같아도 3, 4미터를 한걸음에 성큼 뛰어 아주 빠르다고 하던데….”
“그러기 전에 우리가 다 예방하지요. 만약 곰이 10미터 이내로 다가오면 겨자 스프레이를 뿌려도 효과가 있지요.”
곰 감시인의 역할은 충분히 부각됐다.
양외란의 두근거리는 가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한마디 할 여유가 생겼다.
“그래도 북극곰 한번 보고 싶어요.”
곰은 초식 위주 잡식성이지만 북극곰만은 육식동물이다. 갈색곰이나 흑색곰은 모두 10만 마리 정도 알래스카 등에서 볼 수 있지만, 그린란드와 캐나다에 주로 사는 북극곰은 알래스카 북쪽 해안과 연안에 5천 마리 정도 있다고 한다.
“대장님은 추운 데서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합니다.”
곰 감시인을 대장으로 부르며 그의 생활이 궁금해서 양외란이 물었다.
대장은 알래스카 중부의 패어뱅크스에서 작은 통나무집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영하 50도에 연료가 얼려고 하면 자동 히터가 작동해 연료를 녹인다고 한다.
무스 한 마리 잡으면 살코기만 400킬로 이상 나오므로 혼자서 일 년은 먹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
“부수입으로 무스의 뿔이 돈이 되지요. 뿔 두 개면 200달러정도 되죠.”
석유회사나 고래연구선에서 감시 업무를 부탁 받으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쇄빙선 설룡호는 2008년 여름에 북위 85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그땐 운이 좋아 얼음이 많이 녹았다. 거기서 북극곰을 만났다고 감시인은 말했다.
7월은 얼음이 녹기에는 아직 이런 계절이라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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