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극지 탐사 항해

24. 쓰가루해협 통과

오선닥 2020. 9. 26. 17:11

 

 

 

태평양에서 다른 배 친구와
통화가 가능하다고?
친구 그녀들은 행복했다
수다를 떨 수 있어서…



24. 쓰가루해협 통과

 

선위(船位)를 체크해보니 배는 42N 142E를 통과하고 있었다.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해협을 통과했음을 알 수 있다.
드넓은 바다에 진입하니 너울이 커지고 배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자 여름의 태평양은 이름 그대로 태평했다.
태평한 바다에서 험난한 남극기지에 관한 특강이 있었던 것은 특이하다.
북극 항해를 위해 남극에 갔다 온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요청 때문이었다. 현실감이 떨어질 것 같은 데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얼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냉각효과 덕분이다.

 

멀리 대형 컨테이너선 두 척이 지나갔다.
한 척은 한진 소속 컨테이너선, 다른 한 척은 에버그린 소속 컨테이너선.
대한민국과 대만을 대표하는 세계적 해운회사로서 이들은 각각 국가의 자존심을 싣고 다닌다고 볼 수 있다.
대양에서 바라보는 배는 나라의 영광으로 보인다.
“한진 나오세요. 여긴 아라빙호.”
“한진 롱비치호 나왔습니다. 채널 70으로 바꾸겠습니다.”
채널 16은 긴급용이라 계속 대화할 수 없어 다른 채널로 바꿔야 한다.
채널 70에서 나오는 목소리.
“아라빙호 삼항사 양외란입니다. 귀선 삼항사 부탁합니다.”
“한진 롱비치호 삼항사 오지은입니다.”
VHF 70에서 웃음소리.
약간은 예상을 했지만 반가운 목소리다.
동기생 선박명부를 보면 현재 누가 무슨 배를 타고 있는지 대충 안다.
“지은아!”
“외란아!”
반가움이 큰 것은 둘은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쓴 적도 있기 때문이다. 오지은과 양외란은 어순으로 이웃이다.
두 여자는 모처럼 하루 2만 단어를 소화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여성의 생리 때문인지 한없이 지껄여댔다. 대양에서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기쁨 중의 기쁨인데 보이진 않지만 마주보고 대화하듯 그칠 줄 몰랐다.
“외란아, 너 남극 갔다 왔다면서?”
“그랬지. 언제 들었어?”
“롱비치 입항해서 들었지. 얼어 죽지 않고 살아왔구나.”
“펭귄도 잘 살던데 사람이 못 살겠냐.”
“펭귄은 뱃살이 두꺼워서 괜찮은 거야.”
“나도 뱃살 많이 붙었어. 추운 지방에서 초콜릿 많이 먹어서 그런가봐.”
펭귄이 추운 지방에서 살 수 있는 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 네 다리로 걷는 것보다는 유리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렇게 지껄이다 보면 식욕이 좋아진다.
양외란은 저녁을 많이 먹었다. 낮에 있었던 오지은과의 대화가 양념이 되었던가 보다.

 

홋카이도 동남동 해역에서 배는 잘도 달렸다.
쿠로시오해류가 뒤에서 밀어주기 때문이다.
알래스카로 향해 북동쪽으로 침로를 바꾸었을 때 수온과 염분이 많이 내려갔다.
수온 13.7℃, 염분 32.7‰
선박 식당 게시판에는 바둑알 같은 자석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밑에 눌려있는 A4 용지의 내용들.
⌜안전당번⌟ ⌜청소구역⌟ ⌜당직근무표⌟ 등등
‘쓰레기는 최대한 적게, 처리비용 줄여보세요!’
환경구호도 걸려 있다. 극지에서는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되고, 고스란히 본국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유제품 포장지나 통조림 용기는 속을 씻어낸 다음 버리세요.”
일항사의 설명은 유제품에 박테리아가 서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란다.
표어 같은 시 한 편이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사기다
신까지를 완전히 속여야 예술이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이럴 때
내가 나를 웃긴다.

 

추신으로 ‘넘 심심하니까. 넘 정서가 얼어붙으니까’가 밑에 씌어 있었다.
망망대해.
정말 심심할 것이다. 그럴 때 주전부리를 찾는다.
극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 팝콘 가격이 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구천 원은 나쁜 가격.
그러나 연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손때를 섞어가며 맛있게 집어먹는다.
배에 기호식품이 잔뜩 실렸다.
건포도, 마른대추, 은행알, 생강포…… 300여 가지.
가격만 오천만원어치.
항해 중 심심풀이 땅콩처럼 많이 소비될 것이다. 낮만 계속되는 북극에서 잠이 오지 않을 때 식당에서 소주 마시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안주로 기호식품의 판매가 늘어날 것이다.
야식은 공짜로 줄까?
공짜는 야간 당직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야근자가 직접 조리해야 한다.
식비와 야식비는 각자 정산하는데, 달러로 지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외국인이 탑승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식은 된장찌개가 최고다. 선원들의 한결 같은 경험담이 이를 증명한다.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냐고?
멸치와 통계란, 마늘은 빠질 수 없다. 캔 꽁치가 들어가면 금상첨화다. 마늘은 쓸데없이 정력을 부추겨 불필요하지만 찌개 맛을 내는 데는 효자다. 풋고추의 야릇한 자극도 괜찮다. 야식은 남자의 손맛에서 더 식욕이 나고, 두 사람 이상 먹어야 제 맛을 느낀다고 말해주고 싶다.
양외란이 항해당직을 설 때는 어땠을까.
적정할 필요가 없다. 남자 조타수가 끓여 와서 같이 먹으면 멋진 야식을 즐길 수 있다.

 

당직 후 양외란이 좋은 일을 했다.
시차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띠 동갑 오빠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열두 살 차이지만 그는 동안(童顔)이다. 그는 밤엔 눈이 멀뚱했다가 낮이면 졸음이 고문처럼 몰려온다고 하소연했다.
“오빠 소주 한잔 사 드릴까요?”
“삼항사가 웬일이야?”
“근데, 안주는 연구원님이 사세요.”
“무슨 안주?
“치킨 한 마리.”
“가만있자… 얼마지… 만이천원? 어쿠~”
“일단 술은 제가 사는 거니까, 안주만 책임지세요.”
술기운이 오른 연구원은 여자 항해사의 배려에 감동하여 “함께 자리해줘 고마워” 하고 두 번이나 말했다. 태평양의 고요한 밤이 어둠을 잔뜩 빨아들였을 무렵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원이 비틀거리자 양외란은 그의 겨드랑을 메고 그의 침대까지 안내했다.
“덕분에 잠을 잘 잘 것 같다. 고마워.”
“이젠 고마워 그만하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그녀는 그의 방을 나왔다.
시차 극복이 힘든 한 사람을 구제해준 양외란은 마음이 뿌듯했다.
덤으로 치킨 한 마리 얻어먹은 자부심이 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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