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회의 땅 러시아

기회의 땅 극동러시아(제22회)

오선닥 2016. 9. 10. 19:46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아름다운 매칭으로

동토의 땅이 희망의 땅으로


 

  


제22회

 

 

사할린 동포들

 

재래시장을 찾는 것은 방문 코스에서 빠질 수 없다. 점포에는 중국인이 많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러시아인 인구가 적으니 중국인이 자연스럽게 유입된 것이다.

 

극동 러시아 전체 인구 600만 중 사할린 주는 60만에 불과하다. 인구만 보면 보잘 것 없지만 광물, 산림, 어업 자원이 풍부해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극동 러시아의 인구를 늘리는 것은 푸틴 대통령의 정책 중 최우선 순위에 속한다.

 

“인구 늘리기는 누워서 떡먹기죠.”

 

사공박이 묘책이라도 있는 듯 쉽게 말하자 유 목사를 비롯해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사공박은 여전히 그건 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중국 동북3성 일억 인구를 풀면 당장 해결되지요.” 엉뚱했다.

 

사할린한인회 허 부회장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응을 보였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죠. 지금도 재래시장은 중국인이 거의 잡고 있어요. 푸틴이 중국과의 경제교류 확대를 꺼리는 것도 인구 문제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한국과 협력을 확대코자 하는데 북한이 걸림돌이라며 한국이 미적거리는 게 불만이죠. 일본은 쿠릴 영토 문제가 남아 있고요.”

 

“사할린 동포가 한국으로 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에서 사할린으로 이민을 많이 와야겠네요.”

 

방노찬 장로가 동조하는 말을 하자 허 부회장은 위로가 되었는지,

 

“그렇습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지만 더 와야 합니다. 지금 한국 기업이 짓고 있는 아파트는 아주 인기예요.” 하며 아파트 쪽을 가리켰다.

 

“말 나온 김에 아파트 건설현장에 한번 가보실까요?”

 

사공박의 제안으로 일행은 일정에도 없는 아파트 현장에 도착했다.

 

“내부시설 공사를 위한 인부는 제가 공급하지요. 그들의 숙소나 교통편도 주선하고요.”

 

사공박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업을 홍보하게 된 셈이다.

 

“온돌식 아파트도 있어요. 그리고 붙박이 가구도 있고요.”

 

온돌에 등을 눕혀본 사람이라면 러시아인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도한 몸무게로 관절과 신경통을 앓아본 중년 러시아 여성이 혹해 버린다고 한다. 아파트의 바깥 모습마저 한국의 것에 닮아 간다. 러시아 전통 아파트와는 전혀 딴판이므로 성공할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저녁식사는 허 부회장의 자택이었다. 동포들이 사는 모습을 한번쯤 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으로 초청한 것이다.

 

가는 길에 레닌 광장을 지나쳤다. 앙꼬(일본말 죄송) 없는 빵이 없듯 레닌광장에 레닌 동상이 없을 리 없다. 소련연방 해체 때 극동의 레닌 동상은 목이 붙어 있었다. 극동은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이었다. 동상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하면 방문은 확인되는 셈이다. 동상 뒤편에 기차역이 있고 앞에 시청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니 시내 중심에 다녀온 증명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사할린 곳곳에 이름 없는 돌무덤과 팻말로만 된 무명탑이 많다.

 

“일본인이 분풀이로 조선인 27인을 학살한 추모비도 있어요.”

 

허 부회장이 한 무명탑을 지나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에서 패망한 분풀이로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해를 입힐지 모른다는 이유로 한국인 27인을 학살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한인들은 희생당한 동포 영령들을 위령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추모비는 유즈노에서 홈스크로 가는 작은 마을에 있다.




허 부회장 댁에 도착했을 때 동포 주민들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들이 많다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동포 집에 잔치가 있을 때는 함께 일을 돕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동포들 모임에서는 역사에서 유난히 기억되는 일들이 대화에 오른다. 대화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이 확인되고 유대가 다져진다. 모이는 것을 즐거워한다. 아이들도 이런 모임에 끼이기를 좋아한다.

 

목재공장 사진을 펴 놓고 어른이 설명한다.

 

“이 목재공장에서 전쟁 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도끼로 살해했지. 소련이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일본인을 잡아 재판에 세워 총살형 시킨 것은 위안이 되긴 했지만…….”

 

끄덕이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한쪽 소매를 걷고 나섰다.

 

“전쟁 때 러시아인들은 먹을 게 없어 굶고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늘 뭔가를 먹고 있더라는 건디.”

 

“……?”

 

호기심 가는 이야기에 모두들 귀가 쫑긋했다.

 

“보아하니 문어, 명태, 다시마 등을 씹고 있는 거여. 물가로 가면 고기나 조개, 산으로 가면 산나물이 많은데, 러시아 애들이 배를 쫄쫄 곯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디.”

 

어느새 집안에는 이십여 명이나 모여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에 스스로 도취되어 다른 쪽 소매도 걷어 올린다.


“고려인은 바위 위에 갖다 놓아도 이끼 뜯고 살 사람들이여.”

 

“……!” 사람들의 호기심이 모아졌다.

 

“그 이후로 러시아인들이 한식 재료나 한식을 곧잘 먹게 되었디. 옛날엔 그냥 내버렸던 문어나 갑오징어, 고사리도 지금은 비싸게 팔린다니께.”

 

이 장면에서 사공박이 나선 것은 시의적절한 반응이라 할까.

할머니에게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때문에 쓸모없던 것들이 금값이 됐군요. 일본의 족발, 호주의 천엽, LA의 갈비, 뉴욕의 소꼬리 등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네요.”

 

사공박의 말이 끝나자, 다음 이야기가 한인회 총무의 입에서 나왔다. 모두들 숙연해졌다.

 

“근래 사할린은 두 가지 큰 사건을 겪었습니다. 1983년 대한항공기 격추로 269명 전원 사망과 1995년 지진 규모 7.5의 강진으로 2천여 명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동포들이 더 단합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대한항공의 위령탑은 사할린 남쪽 항구 네벨스크 근처에 있다.

허 부회장이 모임 분위기에 고명을 얹는다.


“한인들은 저승에서도 함께 있기를 좋아하죠.”

 

“……?”

 

“한인 공동묘지로 간다는 얘기죠.”

 

모처럼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굶어도 한국 땅에 살고 싶었는데…….”

 

안타까움을 표시하곤 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열심히 일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 없는 각오로 그들은 일했다.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의 병아리가 되지만 깨버리면 계란프라이가 된다는 교훈을 아는 사람들이다.

 

사할린 한인은 무국적을 고집했다. 러시아 국적이면 영영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염려해서다. 조국으로 가길 기다렸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자 교육과 취업을 위해 러시아 국적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었다.

 

꾹꾹 담아뒀던 설움을 참지 못했는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후르시초프가 소수민족학교는 없어야 한다며 조선어학교는 1963년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언어는 잊혔지만 예술학교가 있다.



 

 

일본은 한인을 버렸고, 이승만 정권은 재외 동포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걸 꺼려했으니 자연스럽게 낙동강 오리알.

 

대한민국 헌법 제2조 2항은 무색하다.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사할린의 추석은 양력 8월 15일입니다.”

 

허 부회장의 설명은 이랬다.

양력인 이유는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리는 '해방절'과 함께 한족의 대명절 추석을 쇠기 위해서다. 날짜는 다르지만 한국과 다름없이 씨름대회도 열린다. 추석 풍경도 한국과 꼭 닮아 있다.

 

1910년 강제병합 때 토지를 빼앗긴 한국인 일부는 국외로 나가게 됐다. 1930년대 전시강제동원체제는 일본 기업에 노동자를 조달하기 위해 탄광, 벌목장, 도로공사 등 위험 지역에 한국인을 데려갔다. 사할린도 그 중 하나였다.

 

“한 집에서 한 명은 가야 한다고 해서 둘째인 제가 왔지요.”

 

한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착취당한 임금은 일본 우정성이 확인한 액수만 약 2억엔으로, 현재가치로 따지면 한화 약 5조원에 달한다. 일본은 당시 쓰던 통장을 가져오라며 버텼다. 지금까지 통장을 보관하고 있는 자가 있겠는가. 분통 터지는 일이다. 그래서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는 것.

 

전쟁 후 사할린에서 처리돼야 할 모든 문제는 연합국 총사령부와 소련에게로 넘어가버렸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처우는 국제 정세나 상황 논리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졌다.

 

“어제는 승전국민, 오늘은 패전국민, 내일은 난민으로 돼 뺑뺑이 신세가 됐지요.”

 

“그럼 러시아인이 됐나요?”

 

젊은 한민희는 사할린 한인의 운명이 기구해 식사 중에도 질문을 계속했다.

허 부회장은 설명을 이어갔다.


“패전 직후 일본 당국이 조선인을 일본 공민으로 간주하지 말 것을 소련에 공식 요청했지요. 그래서 조선인은 무국적자로 소련에 영주하게 된 겁니다.”

 

나서야 할 한국 정부는 시간이 지나도 미적거렸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승만 대통령은 재외동포의 본국 출입과 국내 정치 참여를 극히 제한했다. 그러다가 일본은 1951년 사할린 한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해버렸다.

 

“우째, 이런 일이?”

 

방노찬 장로의 경상도 말이 나와 버렸다.

그들의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최근 수년간 징용 1세대는 영구 귀국이 추진됐지만, 사할린 현지에 남은 후손과 생이별을 견딜 수 없어 결국 다시 돌아가거나, 귀국을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또다시 이산가족이 될 수는 없잖은가.

 

“더 늦기 전에 그들의 눈물을 닦아줘야겠어요.”

 

한인들의 묘가 밀집되어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제1공동묘지가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일본인 위령탑 근처에 한인의 묘가 많다.

 

“한인문화센터는 일본 정부가 건립했다던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정부가 2005년 센터를 건립했다.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방 70년, 한일협정 50년, 러시아 수교 25년이 흐른 2015년 사할린 한인들에게 이렇다 할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지난 2005년 한국정부는 한일협정의 의제에 사할린 한인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한국 정부는 '일본이 책임지라'며 뒤짐만 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지금도 사할린에는 한인들의 무덤만 늘어가고 있다.

 

이제 이주 1세대는 단 천명도 남지 않았다. 냉전체제는 이들의 정체성을 빼앗고 군국주의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의 눈물이 닦이길 간절히 바라는데.



 

한인3세 옥사나 이(李)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사할린이었다.

 

“서울에 가면 러시아 사람, 모스크바에 가면 한국 사람이 됐어요."

 

근면 성실함으로 널리 알려진 한인들은 사할린의 무역과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사할린 섬 최초의 5성급 호텔을 비롯하여 섬의 내로라하는 기업들 상당수가 한인 소유이다.

 

현지 러시아인 사업가 안드레이는 말한다.

 

“한인들은 디아스포라를 형성해 상부상조하기 때문이죠."

 

이밖에도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에서 사할린을 찾아 온 한국인의 재정 지원도 무시할 수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사할린에는 지금 중앙아시아인들도 상당히 큰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나 한인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사할린 러시아인들의 관용과 수용의 정신을 높게 평가한다. 일부 러시아인들이 한인들에게 느끼는 시기심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구소련인의 삶을 개미에 빗댄 빅토로 최의 노래 '개미집'은 유명하다.

조부모가 고려인인 최는 록 가수로 작곡가이며 배우이기도 했다. 자동차 사고로 28세에 요절한 가수 영웅이다. 가창력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시대를 잘 표현하는 시와 작곡으로 동시대 젊은이들을 뒤집어 놓았다. 한국의 서태지와 같은 인물이다. 록 가수 한대수와 윤도현 밴드가 편곡해 부르기도 했다.

 

"우리 사할린 한인들은 어려울 때 잘 뭉칩니다."

 

허 부회장의 동포 자랑은 그치지 않는다.

 

러시아 본토의 스킨헤드들이 페리 호를 타고 사할린 섬으로 건너와 행패를 부리려 하자 한인들이 흠씬 패주고 본토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영주귀국하려는 1세대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산시 ‘고향마을’은 한국에서 사할린 동포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정착촌이다. 10층짜리 아파트 8개 동에는 오로지 사할린 동포만 산다. 1945년 8월15일 이전 출생자만 영주귀국이 허락된다. 일본이 사할린을 떠나면서 사할린에 남긴 조선인 4만여 명은 난민 신세가 됐다. 무국적자로 살다가 일부는 러시아 국적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

 

한일 적십자사 주도로 1997년부터 사할린 동포들 영주귀국의 길이 열렸다. 한국 정부는 국민임대주택과 기초생활수급비와·의료비를, 일본 정부는 귀국 항공료와 생활용품 구입비(140만원) 그리고 사할린 방문비용을 지급한다. 임대주택에는 2명씩 짝지어 1세 한인만 입주해야 하고 자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짝지을 사람이 없으면 영주귀국을 포기해야 한다. 한국에는 사할린 동포 4,300여 명(광복 70주년 2015년)이 25개 지역에 흩어져 거주 중이다.

 

영주귀국은 자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으니 마치 현대판 고려장과 같다. 외로움과 병마와 싸우던 몇몇은 견디다 못해 사할린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 동화되는 건지 사할린 러시아인들은 한인들의 음식문화에 동화했다. 얼마 전까지 못 먹는 음식이라 생각했던 미역이나 다시마, 고사리가 러시아인들에게 익숙한 음식이 됐다.

 

‘한류’의 영향으로 한식도 함께 주목받는 효과를 보고 있다. 그 결과 사할린에 한국문화와 관련된 여러 행사가 지속적으로 개최된다. 젊은이들도 모국에 대한 관심이나 모국어 학습의욕 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

 

일행이 출국하기 전날 오순절교회의 초청으로 예배와 더불어 만찬이 있었다. 학교 강당을 빌렸는데 인기 가수의 공연장을 방불케 했다. 모인 사람들이 많아 구름떼 같았다.

 

“세르게이 목사의 리더십이 이런 모습이었군요.”

 

유학준 목사는 그의 열정을 극찬했다.

 

“신축교회가 들어서면 한국 통일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세르게이 목사는 후원자인 박영진 원장에게 각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마중물 같은 후원이 러시아 기독교 부흥에 초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사할린 한인교회와 협력하여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기도하며 힘을 보태겠습니다.”

 

마침 사할린 한인 교회에서 온 목사 한 분이 옆에 서 있었다. 세르게이 목사와 친분이 좋은 목사이지만 한국 교회에서 러시아 오순절교회를 돕는 사실에 대해서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독주를 막는다는 뜻에서 결국 개신교회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 기꺼이 동의했다.

 

“한민희씨 사할린에서 와서 보고 느낀 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공박이 주제넘게 물었다.

 

“저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정말이지 희망을 빼놓고 나면 사할린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광수 생각이 아니라 사공박의 생각이요 방문 일행 모두의 생각이다.

듣기 싫은 이야기도 하수구같이 받아주는 착한 한민희가 빨리 시집을 가야할 텐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