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회의 땅 러시아

기회의 땅 극동러시아(제21회)

오선닥 2016. 8. 30. 20:27

슬픈 역사를 딛고

사할린 동포는 일어섭니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제21회

 

 

사할린 시내탐방

 

일행은 호텔을 나섰다. 호기심을 가득 안고 밴에 올랐다. 눈길과 빙판길이 자주 나타나 불편한 승차감을 주는데도 모두들 눈앞에 전개되는 유즈노 시내의 이모저모에 흥미를 놓치지 않았다.

 

“거대한 설원 동토의 한가운데 도시가 자리 잡았군요.”

 

유학준 목사가 도시의 조감도를 보듯 말했다.

 

시내는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해 보인다. 러시아 어느 도시에 가도 흔하게 만나는 예쁜 돔의 러시아정교회는 보이지 않고 사회주의식 아파트와 회색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 모습이 어딘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일행에는 사할린한인회 부회장 아나톨리 허가 동석했고, 통역 알라가 시내 관광 안내를 맡았다.

 

“그렇습니다. 설원의 겨울을 마음껏 느껴보십시오.”

 

허 부회장이 유목사의 표현에 동의했다.

 

“사할린 사람의 적응력이 강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덧붙여 설명했다.

원래 사할린 섬의 북쪽은 퉁구스계, 남쪽은 아이누계가 살았다.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리적 특징이 종족의 분포를 달리했다. 한반도보다 약간 짧은 950킬로미터의 사할린 섬은 1월 평균기온이 남단의 코르사코프에서는 영하 6도이나 북단의 오하에선 영하 20도에 달한다. 이런 기온의 차이가 사할린 동포의 환경 적응력을 높였는지 모른다. 영토의 지배권이 자주 바뀐 것도 그들을 변화에 강하게 만든 이유가 될 것이다.

 

청 ⟶ 러시아(아편전쟁 후 1860년) ⟶ 일본(러일전쟁 후 1905년) ⟶ 러시아(2차대전 후 1945년)

 

기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쿠릴열도와 함께 사할린 섬 전체가 완전히 러시아의 영토가 돼버린 것이다.

 

일행을 태운 밴은 시내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낡은 공장 건물 앞에서 멈췄다. 사공박이 방문을 추천한 곳이다. 고철 구매계약을 했다가 해약한 바 있는 공장이다.

 

“저게 석탄 발전소였는데 소련 붕괴와 더불어 멈춰버렸죠. 폐공장의 고철 구매 계약이 거의 성사 단계에서 접어야만 했죠.”

 

이유는 갑자기 주지사가 바뀌어 계약을 취소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관이 관여한 것이라 소송하기가 마땅찮았다. 비슷한 경우로 폐 제철공장의 고철 구매마저 포기했다. 쇳덩어리를 모으면 돈이 됐을 뻔했는데 아쉬움이 많았다.

 

“이제 목재공장 견학을 할까합니다.”


사공박이 앞장서서 들어간 공장 마당에 목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고, 여러 동의 공장에서 원목이 다듬어지고 있었다. 각목으로 제작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통나무로 재단되었다.

 

공장장은 잠재적인 한국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열심히 설명했다. 고객으로부터 주문받아 공장에서 재단하여 내수 혹은 수출용으로 보낸다.

 

“강남 학여울역 광장에 통나무 주택 전시회가 종종 열리곤 하는데, 거기에 가보셨나요?”

 

사공박이 일행의 시선을 모으면서,

 

“통나무 견본주택을 선보인 사람이 바로 저랍니다. 제가 그런 사람이에요.”

 

말하며 실패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온갖 것을 다하네’ 일행은 그를 희한한 사람으로 쳐다보기도.

 

한때 통나무 주택 보급에 열을 올린 적이 있는 그는 마치 실패하기 위한 수순을 맹렬히 따라가는 사람처럼 옆도 보지 않고 달렸다. ‘빨리빨리’에 익숙해 있고 간편함을 좋아하는 서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데 실패하여 통나무 사업은 끝내 내리막길로 굴러가고 말았다.

 

여행이란 피곤하다. 돌아다니다 보면 먹고 싶고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사공박의 오픈형 가게에 들어가서 잠시 쉬기로 했다.

오리온 초콜릿을 하나씩 돌렸다. 한국에서는 별로 쳐다보지도 않던 것인데도 다들 잘 먹었다. 특히 한민희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었다.

 

“사장님은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오셨나 봐요.”

 

자신이 배고픈 줄 알아채고 적시에 내 놓았다며 그녀는 좋아했다. 하나를 더 챙겨 유학준 목사에게 주었다. 먹고 싶지 않은데도 기꺼이 받아먹는 그는 “시장이 반찬이네요” 하면서 센스 있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식당에 갈 필요 없이, 여기서 컵라면 어떠세요?”

 

한민희가 대뜸 제안했다. 어쩐 일인지 모두들 주저 없이 동의했다. 한국산 컵라면이 진열장에 수두룩하다. 추운 겨울에 적합한 요기에 손색이 없다.

 

사공박이 일행에게 보여주고 싶은 특색 있는 공장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가는 길이 만만치 않음이 아쉽다.

 

“연어 부화 공장을 가보셔야 하는데, 아무래도 여름철이 돼야겠네요.”

 

연어 부화공장은 견학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사공박은 생각했다. 연어 알을 부화하는 것은 온도 조절이 까다로워 어려운 공정에 속한다. 사할린이 자랑하는 기술을 한국이 배워도 좋을 만하다. 강 상류 공장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러시아는 운이 좋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의 체결 5년 전인 1870년 북 사할린에서 노천 유전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이런 사실을 몰랐고 석유 따위에 관심도 없었다.

 

석유와 가스가 사할린 공업 생산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한 덕분에 실업률이 2퍼센트로 줄어들어 경제는 계속 활황이고, 향후 50년의 채굴을 예상하는 원유 18억톤, 가스 약 20억톤에 이를 정도로 사할린은 다국적 에너지 기업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한국의 연간 원유 소비 1억톤을 감안하면 대단한 양이랍니다.”

 

사공박은 이런 데이터에 비교적 익숙해 있다. 석유가스 운반선을 승선한 바 있는 그의 이력을 모르는 일행은 쓸데없는 내용으로 머리 메모리 용량을 허비한다고 염려할 법하나, 숫자에 유난히 밝은 그를 다시 보는 눈치이기도 하다.


 


이제 러시아 수산업에 크게 투자한 그의 행적을 점검해볼 때다.

일행은 명태 상자가 산더미같이 쌓인 수산 부두에 도착했다. 겉만 보고 러시아에 투자하면 독박쓰기 쉽다는 교훈을 그는 보여주고 싶었다.

 

“수산업을 위해서 군인과 손잡았지요.”

 

군인이 수산업에 관여한다? 이상하게 느낄지 모르나 그 군인은 현대 러시아 군인이 아니고, 옛 러시아 공국의 지탱과 러시아 영토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바 있는, 용맹의 대명사인 카자크(Kazak) 군을 말한다.

 

카자크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 중앙부에서 남부 국경지대로 이주하여 자치적인 군사공동체를 형성한 민족이다. 투르크계 슬라브 민족으로 러시아어를 쓰고 러시아 정교를 믿는 특이한 민족이다. 특히 전투력이 뛰어나고, 애국심과 충성심이 강한 민족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역대 러시아 왕조에서 대부분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해왔고 2차 대전 때는 독일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지금 그 카자크군 대장을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어떻게 그분을 알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박영진 안과의사가 호기심을 보였다.

 

“여기 허 부회장님의 소개로 알게 됐죠. 두 분의 친분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사공박이 성공하지 못한 사업이라 허 부회장은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도록 특별한 대우를 한다. 그 일환으로 일부 수산업 허가권을 부여했다. 한국 수산회사를 많이 알고 있는 허 부회장이 연결 고리가 되어 사할린 카자크 대장과 사공박 간에 어선 합작회사가 설립되었다. 사공박은 20만 달러를 투자했다.

 

수산 부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카자크 대장의 사무실이 있다. 붉은색 지붕에 노란색 벽돌집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거기다가 초록색 현관문은 너무 어색한 조화다. 막무가내로 돋보이기를 좋아하는 카자크인의 취향을 알 수 있다.

 

“하이, 사공 사장님! 추운 날씨 방문 감사합니다.”

 

일행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카자크 대장 레베드의 환영은 유별났다. 카자크군 정통 제복을 입은 그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제복에는 국경방위군의 용맹성이 옷 전면에 주렁주렁 달린 훈장에서 풍겨 나올 정도다. 사실 훈장은 시내 골동품점에서 모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사무실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절도 있고 위엄 있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그의 책상 위에는 세 개의 깃발, 예컨대 러시아 국기와 카자크 기, 그리고 태극기가 꽂혀 있다. 태극기는 사업 파트너에 대한 예의의 표시라고 나중에 설명했다. 테이블 뒤 벽에 걸려 있는 옛 군복 사진과 전투 그림이 사무실 분위기를 엄숙하게 만든다.

 

절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또 하나의 이유.

군복을 입은 여성이 부동의 자세로 맞은편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아, 미처 소개하지 못했군요. 저의 비서입니다.”

 

대장 레베드는 그녀를 일행의 앞에 세워 소개했다.

거수경례하는 여성을 바라보며 일행은 깜짝 놀랐다. 키가 유난히 크고 카키색 군복이 잘 어울리는 모습에 일행은 탄성을 지를 뻔했다. 재미있는 민족이구나, 생각들은 비슷한 것 같다.

 

러시아 정식 군인은 아니지만 카자크인은 일상 근무 중에 군복 입기를 즐겨한다. 군복은 카자크족의 자부심을 상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군복의 여비서가 따르는 러시아 전통차 찻물이 일직선으로 부어지는 느낌이어서 사공박은 찻물 줄기에 자꾸 시선이 갔다. 어쩌면 화포를 쏘는 느낌 때문에.

 

투자비 회수에 미련을 갖지 않는 사공박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레베드의 도움으로 지방 관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다른 사업으로 확장하는 데 그의 도움은 꾸준했다.



 

 

공원 근처 노천카페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만났다. 박영진 부부가 추위를 무릅쓰고 의자에 앉았다. 안과의사라고 했더니 눈을 강조하여 캐리커처를 그렸는데 코믹이 극에 달해 한바탕 웃었다.

 

“병원 홍보용으로 인터넷에 올릴까 합니다만.”

 

주인공은 병원 벽에 꼭 걸어놓을 거라고 말했다. 그림에 만족하여 샤슬릭 꼬치를 간식으로 일행과 화가에게 대접했다.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양념하여 꼬치에 끼워서 바비큐한 간식이 여행의 피로를 싹 씻어주다니.

 

한인문화센터에 들르는 것은 필수 코스이다. 사할린동포위령탑 앞에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묵념했다. 강제징용으로 광산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이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넋을 위로하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사할린에서 가장 높은 일천여 미터의 산에 올라가서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내를 조망하는 대신 일행은 시내에서 한 시간 가량 차로 달려 거대한 호수로 향했다. 봄에는 고니떼들이 몰려와 하늘을 하얗게 물들이는 장관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잔잔한 호수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한 폭의 수채화와 같다고 한다.

 

일행은 호수 근처 식당에 들러 연안에서 잡은 킹크랩과 새우 등을 쪄서 먹었다.

안내인 알라는 호수의 겨울 정취를 경험할 시간이 없음을 아쉬워한다.

 

“지금은 얼음낚시가 멋있는데…….”

 

시베리아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손끝으로 느끼는 낚시의 즐거움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는 것이다.

 

여름철이라면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호수에서 조금 더 동쪽으로 달리면 오호츠크해를 만나고, 거기에 늦은 여름 연어 떼가 올라와 물 반 연어 반의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

 

섬 전체의 3분의 2가 삼림으로 덮여 있다 . 포로나이 강에 침엽수림대가 집중 분포되어 있어 임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북부지방은 낙엽성의 타이가 늪의 평원이요, 남부지방은 침엽수림 숲과 관목 덤불이 사할린 땅을 풍성하게 한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에서 추방된 죄수와 혁명가들이 이주해 살던 사할린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표현대로 ‘슬픔의 틈새’였다. 그러던 이곳에 석유와 가스 덕분으로 봄꽃이 피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산 대게와 명태, 보드카 정도를 빼면 특별히 내다팔 것도 없는 사할린에 석유 개발 자본이 몰려들어 사업가와 관광객이 객실을 점유하고 있다. 모든 호텔이 만실이라 하더라도 미치코의 스위트룸은 사공박의 비상 숙박을 위해 준비돼 있으려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