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북극탐사 항해

북극 탐사 항해(상)

오선닥 2013. 6. 2. 21:27

2010년 여름

아라빙호의 최초 북극 탐사.

 

양외란 삼항사는

지난겨울 남극 탐사 항해에 이어

이번엔 북극 탐사에 참여.

 

그녀의 북극 탐사 과정을 지켜보자.

 

<첫 번째 연재>

 

 

 

 

 

북극 탐사 항해(상)

 

출항

 

“방선 중인 분들은 하선하십시오. 곧 출항하겠습니다.”

 

선장을 대신해서 양외란 삼항사는 선내방송을 보냈다.

 

배는 떠났다.

2010년 7월 1일 오후 5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을 출항한 것이다.

 

아라빙호는 북극 척치해를 향해 나아간다.

가는 도중 부산과 알래스카 놈(Nome)에 기항하여 필요한 장비, 선식, 인원 등을 탑재할 예정이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는 사람이 몇 배나 더 외로워진다는 말이 있다.

떠나는 사람은 목적이 있지만 남는 사람은 뭔가 상실감에 빠진다.

 

딸을 배 태워 보내는 전계린 박사는 쓸쓸하기 짝이 없다.

이별을 할 때 남는 사람은 억울하다.

인생이 갑자기 차포를 뗀 장기판 같기만 하다.

 

『내 재산 차포 다 떼고 니한테 주는 위자료야』

 

이혼할 때 남편이 위자료를 계산하면서 장기판을 인용한 비유는 어쩌면 적절했다는 생각.

장기를 약간 알고 보니 이해가 되더라.

 

출항 무렵 양외란은 엄마의 속도 모르고 제 할 말만 앞세웠다.

 

“엄마, 나 북극 배우고 올께.”

 

“얼마나 더 배우겠다고 야단이냐? 극지를 배워 거기서 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맨날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배움을 포기하는 순간 폭삭 늙기 시작한다는 말을 시집도 안 간 딸이 말했을 때,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기도 한 전계린 박사.

 

“그래 가라. 네가 좋아하는 걸 내가 어떻게 막겠느냐.”

말하고,

“어쨌든 건강하게 근무하다가 돌아오너라.”

손을 흔들어줬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모녀는 이별의 시선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배가 부두에서 떨어지는 거리만큼이나 시선은 늘어났다.

그들은 석별((惜別)을 나누었다. 저녁 무렵의 이별, 석별(夕別)인데도 눈물조차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서쪽의 황혼 빛은 슬픔을 삼켜버렸나.

 

지독한 모녀.

 

 

 

부산 기항

 

인천을 출항할 때 선원 25명 외에 탑승자 17명이 승선했다. 모두 42명이다.

탑승자는 연구원 12명과 지원인력 5명이다. 연구원 중에는 중국학자 3명이 포함돼 있다. 지원인력은 유빙항해 전문가인 러시아인 2명과 임시 요리사 3명을 포함한다.

 

알래스카의 놈에 도착하면 일부 대여섯 명은 하선하고, 대신 수십 명의 극지 탐사원이 탑승하게 될 것이다.

 

부산까지 이틀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도 체육관에서 몸을 푸는 사람이 있다.

운동중독은 어쩔 수 없다. 열흘 후쯤 알래스카에 기항한다는 걸 들었던지 긴 항해에 적응하기 위해 심신을 담금질하는 것이다.

 

해양탐사에 필요한 장비를 싣기 위해 부산에 기항(寄港).

장비 적재에는 반나절정도 소요됐다.

 

7월 3일 밤 부산 출항.

 

출항하여 아치섬(朝島)을 지날 때 섬의 불빛이 유난히 밝았다.

국제해양대학교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형설의 빛.

대한민국 해양발전을 위해 주야로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들이 눈에 선하다.

양외란의 동기 남학생 하나는 일찌감치 학문 쪽으로 진로를 택했다.

 

‘짜~식, 우리 반쯤 애인관계였는데…….’

‘문자 메시지라도 넣어볼까?’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를 모르겠네.’

‘뭐…… 새 애인 하나 생겼겠지.’

‘사랑은 닿기만 하면 삼월의 눈처럼 사라진다는데…….’

 

혼자 이모저모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투박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삼항사, 아직 연안 항해 중이야. 견시(전방 주시) 잘해!”

 

선장이었다.

정신줄이 팍 당겼다.

 

 

 

아르고 플로트

 

아라빙호는 부산항을 빠져나와 곧장 북동쪽을 향해 움직였다.

일본 쓰가루해협까지 직선으로 항해하면 되나 독도 남서 100킬로 지점(36.5N, 131.5E)으로 향했다.

무인해양기후관측기인 아르고플로트(Argo Float)를 바다에 던져 넣기 위해서다.

 

길이 1.2미터에 지름 20센티의 노란색 원통인 아르고플로트는 수심 2천 미터정도까지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면서 해수층의 수온과 염분을 측정해 위성으로 송신하는 장치다. 해수층의 상태와 해류를 알려주는 유용한 관측 장비다.

 

장비는 3~6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내장 프로그램대로 승강을 거듭하면서 측정한다.

 

“마지막 로프 조심조심 잡아주세요.”

 

기상연구원의 요청에 따라 장비를 물속으로 내리는 데 갑판원들이 동원됐다.

몇 년 전에는 어느 해운회사에 부탁했는데 잘못 내려졌던지 자료가 송신돼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장비는 동해에 8개, 캄차카반도 부근에 4개를 투하한다. 한 개 2천만 원 정도로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전세계에 3,200개 정도의 플로터를 띄운다고 한다. 한국은 100개 정도 부담한다니 20억원쯤 소요.

한국도 제법이네.

 

“유류사고, 해양쓰레기 등 해양오염의 실태도 파악할 수 있으니 바다의 암행어사군요.”

삼항사 양외란의 말.

 

“야간방뇨는 안 되겠네요.”

좀 뻥이지만 이항사의 말.

 

“선원들 좋은 시절 다 갔구려.“

해양오염 규제가 느슨했던 시절을 경험한 일항사의 말.

 

“그래도 바다 환경은 선원들이 지켜야죠.”

양외란의 말.

 

일항사와 이항사는 그녀를 모범적인 해양인이라고 추겨 세웠다.

 

여기저기 어선 몇 척이 보이고 흰색 혹은 빨간색의 부표가 보였다. 어선에서 설치해 놓은 것이다. 부표에 매여 있는 어망에는 물고기가 들어간다. 며칠 후 어선은 어망을 걷어 올려 어획고를 올릴 것이다.

 

 

 

애국심

 

우리나라가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격적인 일이다.

그동안 배를 빌려서 연구 활동을 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제 셋방살이에서 내 집으로 이사한 기분.

 

우리 손으로 만든 최신식 쇄빙선 - 대한민국의 자랑.

 

갈매기가 따라오다 갑판에 앉으면 한국의 새.

항해하다가 해수가 갑판 위로 올라오면 한국의 해수.

배가 가다가 만나는 바다, 구름, 수평선, 물결까지 한국의 것.

 

소유가 이렇게 자유와 기쁨을 동반한다는 사실에 양외란의 가슴은 뭉클했다.

 

대학에서 미생물과 고세균(古細菌)을 연구하는 한(韓) 교수는 일정한 시간마다 바닷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필터에 걸린 것을 냉동해 연구용으로 사용한다.

 

“한 바가지의 바닷물에서 귀중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의 감탄이다.

 

기상청의 류 연구원은 여러 해역의 바닷물의 수온과 염분을 측정한다.

지점 40N 136E, 수온 23.2℃, 염분 34.3‰. 꽤 짭짤하네.

그가 조사하여 기록한 내용이다.

 

아라빙호는 남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건조한 배이기도 하다.

25년전 남극에서 좌초된 아르헨티나 극지 운반선은 헬리콥터 격납고를 수동으로 열지 못해 150억 원짜리 헬리콥터 두 대를 잃어버렸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아라빙호는 격납고 문을 수동으로도 개폐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

 

실패는 발명의 어머니.

 

 

 

쓰가루해협 통과

 

선위(船位)를 체크해보니 42N 142E.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쓰가루해협을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드넓은 바다에 진입하니 너울이 커지고 배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나 여름의 태평양은 이름 그대로 태평하다.

 

태평한 바다에서 험난한 남극기지에 관한 특강이 현실감이 떨어질 것 같은 데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얼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냉각효과 때문일 것이다.

 

멀리 대형 컨테이너선 두 척이 지나간다.

한 척은 한진 컨테이너선, 다른 한 척은 에버그린 컨테이너선.

대한민국과 대만을 각각 대표하는 세계적 해운회사.

배는 국가의 자존심을 싣고 다닌다.

대양에서 바라보는 배는 나라의 영광으로 보인다.

 

“한진 나오세요. 여긴 아라빙호.”

“한진 롱비치호 나왔습니다. 채널 70으로 바꾸겠습니다.”

 

채널 70에서 나오는 목소리.

 

“아라빙호 삼항사 양외란입니다. 귀선 삼항사 부탁합니다.”

“한진 롱비치호 삼항사 박지은입니다.”

 

VHF 70에서 웃음소리.

약간은 예상을 했지만 반가운 목소리.

 

“지은아!”

“외란아!”

 

두 여자는 모처럼 하루 2만 단어를 소화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여성의 생리 때문인지 한없이 지껄여댔다. 대양에서 옛 친구를 만나는 것은 기쁨 중의 기쁨.

 

홋카이도 동남동 해역에서 배는 잘도 달렸다. 구로시오해류가 뒤에서 밀어주기 때문이다.

 

알래스카로 향해 북동쪽으로 침로를 바꾸었을 때 수온과 염분이 많이 내려갔다.

수온 13.7℃, 염분 32.7‰

 

 

 

식료품

 

식당 게시판에는 바둑알 같은 자석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밑에 눌려있는 A4 용지의 내용들.

⌜안전당번⌟ ⌜청소구역⌟ ⌜당직근무표⌟ 등등

‘쓰레기는 최대한 적게, 처리비용 줄여보세요!’

환경구호도 걸려 있다. 극지에서는 쓰레기를 버려서는 안 되고, 고스란히 본국으로 가져가야 한다.

 

“유제품 포장지나 통조림 용기는 속을 씻어낸 다음 버리세요.”

 

일항사의 설명은 유제품에 박테리아가 서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란다.

 

시 한 편이 게시판에 붙었다.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사기다

신까지를 완전히 속여야 예술이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이럴 때

내가 나를 웃긴다.

 

추신으로 ‘넘 심심하니까. 넘 정서가 얼어붙으니까’가 씌어 있다.

 

망망대해.

정말 심심할 것이다. 그럴 때 주전부리를 찾는다.

극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 팝콘 가격이 착하지 않다는 것이다. 9000원의 나쁜 가격.

그러나 연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손때를 섞어가며 맛있게 집어먹는다.

 

배에 기호식품이 잔뜩 실렸다.

건포도, 마른대추, 은행알, 생강포…… 300여 가지.

가격만 오천만원어치.

항해중 심심풀이 땅콩처럼 많이 소비될 것이다. 낮만 계속되는 북극에서 잠이 오지 않을 때 식당에서 소주 마시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고, 그러다보면 안주로 기호식품의 판매가 늘어날 것이다.

 

야식은 공짜로 줄까?

공짜는 야간 당직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야근자가 직접 조리해야 한다.

식비와 야식비는 각자 정산하는데, 달러로 지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외국인이 탑승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직 후 양외란이 시차 때문에 좀체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띠 동갑 오빠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열두 살 차이지만 그는 동안(童顔)이다. 그는 밤엔 눈이 멀뚱했다가 낮이면 졸음이 고문처럼 몰려온다고 하소연했다.

 

“오빠 소주 한잔 사 드릴까요?”

“삼항사가 웬일이야?”

“근데, 안주는 연구원님이 사세요.”

“무슨 안주?

“치킨 한 마리.”

“가만있자…… 얼마지…… 만이천원? 어쿠~”

“일단 술은 제가 사는 거니까, 안주만 책임지세요.”

 

술기운이 오른 연구원은 이제 방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덕분에 잠은 잘 잘 것 같다.”

 

“안녕히 주무세요.”

 

시차 극복이 힘든 한 사람을 구제한 양외란은 마음이 뿌듯했다.

덤으로 치킨 한 마리 얻어먹은 자부심.

 

 

 

비상훈련

 

부산을 출항한 지 일주일.

배는 많이 흔들리지 않지만 가끔씩 크게 출렁인다. 해무가 끼기 시작하면서 시야가 좁아졌고, 피칭(상하 흔들림)을 하기 시작했다.

 

캄차카 반도 남동 400킬로 바다를 지나가고 있다. 알래스카 놈까지는 1500해리 남았으므로 5일 더 항해해야 한다. 이틀 후면 베링해(Bering Sea)로 들어간다. 춥고,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은 바다로 알려져 있지만, 겨울에 그렇다는 얘기이고 지금 여름은 조용하다.

 

주위 바다는 안개로 이불을 덮은 듯 시야가 절망이다. 지팡이로 더듬어서 가야 할 지경이다. 레이더의 도움이 없다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오후 들어 안개가 걷히면서 햇빛이 북태평양의 바다를 비추기 시작했다.

해면이 수많은 잔주름을 만들며 반짝거린다. 하늘엔 흰 구름이 몽글몽글 떠다닌다.

 

갑자기 비상경보가 울렸다. 곧 ‘훈련’임을 알렸다.

모두들 헬리콥터 갑판으로 모였다.

러시아 사람과 중국 여자도 내려왔다. 특별한 영어 설명이 없어 놀랐다가 훈련임을 알고 안심하는 기색이다.

 

훈련을 마친 후 사람들은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즐겼다. 한국엔 절전을 호소하는 찜통더위가 계속되지만 북태평양의 여름은 선선한 바람이 감돈다.

 

기온 12℃, 수온 10.0℃, 염분 33.0‰

 

우측 선수방향으로 고래 한 마리가 힘찬 물줄기를 뿜었다. 또 한 마리가 수직으로 물줄기를 쏘았다. 부부인가 봐.

 

흑등고래의 힘자랑.

 

 

 

베링해

 

7월 10일(토) 아침

배는 베링해의 서쪽 관문인 아투(Attu)섬을 통과해 베링해로 들어갔다.

섬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점령당한 적이 있다. 미국은 독립 이래 처음으로 영토를 외국에 점령당했다는 불명예를 안았다.

 

베링해?

면적 230만㎢ 한반도 10배

호상열도(弧狀列島) 길이 2100km

덴마크 탐험가 비투스 베링이 캄차카와 알래스카와 알류샨을 유럽인으로는 처음 탐험했다. 그는 1741년 코맨더 제도의 베링섬에서 비타민C 부족으로 죽었다.

 

극지연구소의 지질학 전공 박사가 알류산열도의 궁금증을 많이 해소해줬다.

활화산의 연속인 알류샨열도는 태평양 지판이 북아메리카 지판 아래로 비스듬하게 들어가면서 바다가 깊어져 알류샨해구(海溝)를 만들었단다. 물이 섞인 자갈과 모래와 점토는 지판 아래로 들어가면서 녹고 녹으면 부피가 커지고, 부피가 커지면 가벼워 솟아오른다. 이런 곳을 따라 화산과 지진이 생긴다는 것.

 

베링해는 신선한 어류의 보고(寶庫).

수온 8.3℃, 염분 33.0‰

 

명태, 청어, 가자미, 킹크랩, 핼리벗(Halibut)...

넙치류인 핼리벗은 길이가 2.3미터. 무게는 어른 몸무게의 3배나 된다고 하니 사진 한 장 올려야겠다.

 

야간당직을 마치기 직전 바다에 물새 떼가 새까맣게 앉아 있었다. 아마 천 마리정도 되는 성 싶다. 새를 보는 것은 반가운 일. 육지가 가깝다는 뜻이기도.

 

비행기든 배든 태평양을 지나 미국으로 갈 때는 대권(大圈)을 취한다. 배의 경우 베링해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북태평양 항로의 대권이다.

 

길은 직선으로 가야 한다고 배웠다.

바다는 직선으로 그었다. 비행기도 직선으로 날았다.

그러나 때론 둘러가야 한다. 암초를 피하고 얼음덩어리를 피해서 항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갈 곳이 지척일 때도.

 

바다는 정말 넓었고, ⌜저항하니까 위대하다⌟는 알래스카 대지도 보였다.

구름과 하늘과 친해지는 시간이다. 스커틀 창을 통해 바다가 파란색으로 시선에 닿았다.

 

 

 

날짜변경선

 

날짜변경선을 넘자 7월11일(일) 밤 12시는 10일(토) 밤 12시로 바뀌었다.

하루를 벌었다고 만면에 미소.

 

빠른 세월에 나이만 자꾸 먹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돌아갈 때 되돌려 받는다는 걸 아직 모르겠지』

 

날짜변경선은 원래 경도 180도다.

그러나 국가별로 날짜를 조정하다보니 날짜변경선은 정확하게 180도가 아니다.

알류샨열도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러시아의 코맨더(Komandor)섬과 미국의 아투(Attu)섬은 지척에 두고도 날짜는 하루 차이 난다. 자기 나라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코만도르가 저기 보이는군요.”

 

러시아인이 당직중인 양외란 옆에 와서 소리쳤다. ‘코맨더’섬을 러시아 발음으로 호칭했다.

러시아 섬이 보이자 기분이 좋은 표정이다.

양외란은 오른쪽에 있는 아투섬을 가르켰다.

 

“저기 오른쪽 섬 보이나요? 아투섬인데.”

 

“미국 섬은 제 관심 밖입니다.”

 

웃음이 나온다.

애국주의자가 되는 것을 탓할 수 없다.

 

위도 57N에서 날짜변경선을 넘어 미국 영해로 들어서자 미국 서부지방 표준시 서경 120도에 맞추었다.

 

YTN 방송 화면이 사라져 한국 소식이 심심하다. 인공위성 수신 장치 성능이 따라가지 못하나 보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월드컵에서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1:0으로 물리치고 우승했다는 소식을 누군가가 전해줬다.

 

날씨는 보온복에 방풍복을 껴입어야할 정도로 추워졌다.

 

밤낮이 바뀌었으니 잠이나 자두라고 누가 말했으나 밤낮은 바뀌지 않았고 계속 낮만 있을 뿐이다. 또 잠을 잔다 해도 잠으로 이루는 것이 꿈 말고 무엇이랴.

 

정년을 앞둔 연로 연구원이 간밤에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당연하다. 노인은 꿈을 꾸어야 한다.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

바이블은 말하지 않았던가.

 

 

 

백야

 

7월 12일 60N 175W를 통과했다.

배는 이미 서반구에 들어선 것이다.

지구본을 바라보면 배는 나선식으로 북동으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기온 6℃, 수온 9℃, 습도 91%

 

해무가 생길 만하다.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가 해면 근처 공기에서 응결되기 때문이다.

태양열은 지면에서 더 많이 반사되고 기온이 낮아진다. 남극의 기온이 북극의 기온보다 낮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남극은 대륙인데 비해, 북극은 바다여서 태양열의 반사가 적어 기온이 높은 것이다.

 

밤 11시 30분경 양외란은 조타수를 시켜 중국인 여성 연구원을 선교로 불러들였다. 서쪽 하늘에 꽤 높이 걸려 있는 태양이 구름과 함께 아름다운 황혼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나이의 그녀는 감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댕큐. 외란!”

 

잠을 자지 않았는지 그녀는 선교에 들어서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름다운 서쪽 하늘을 열심히 사진에 담기도 했다.

 

태양이 수평선 가까이로 내려감에 별은 점점 선명해졌다. 달은 없고 고요했다. 새벽 1시쯤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몇 개의 별들이 가까스로 내뿜는 별빛들이 총총했다.

 

저 별은 언제의 빛일까?

별은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우릴 속인다. 몇 만 년 광년의 별은 수만 년 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여성이 가까이 왔다.

 

“백야는(White Night) 어떻게 정의합니까?”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는 것 같았으나 양외란은 대답이 가능한 거라 마음이 놓였다.

 

“한여름에 태양이 수평선 아래 18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을 때를 말하는데, 그러니까 위도가 48도 이하인 지방에선 생기질 않지요.”

 

‘항해사는 그런 것까지도 아는구나’ 하는 듯 그녀는 머리를 끄덕이며 만족해했다.

 

 

 

알래스카 놈(Nome)

 

육지가 가까워질수록 바닷물은 조금씩 싱거워졌다. 염분 31.0‰

유콘 강 등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해빙을 녹였기 때문일까.

 

7월 13일 저녁시간의 기온은 6℃, 풍속 17m/s.

북풍이 불고 파도는 2m까지 치솟았다. 몸이 가늘게 떨릴 정도의 한기가 스며든다.

 

흔들리는 수평선 위로 세인트로렌스 섬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베링해협 앞을 턱 막고 서 있는 큰 섬이다. 갑판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소리쳤다. 알래스카 대륙에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북위 62° 서경 170°의 하늘은 황혼에 젖었다. 뭉치 구름을 비집고 나온 태양은 붉고 눈부셨다. 자정에 피는 황혼도 있나.

 

황혼 구경에 잠을 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네.

늦게 자도 몸이 가볍다고 한다. 바다 공기가 깨끗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튿날 아침 빵 두 개와 우유 한 잔의 맛이 맑고 정갈한 것은 인간의 똥냄새가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알래스카대륙의 수어드(Seward)반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반도의 이름은 지구가 탄생한 이래 부동산 기획으로선 최대 작품인 알래스카 매입을 성사시킨 150년 전 미 국무장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다 색깔이 점점 진해졌다. 검푸른 바다가 육지와 가까이에선 진초록으로 바뀌는 것이다

항구의 해안 지역은 넓고 황량한 반면, 육지 안쪽으로는 험준한 산들이 시야로 들어온다.

 

7월 14일 오후 4시

배는 놈(Nome) 항내에 앵커를 내렸다.

해안에서 1해리 떨어진 지점(64°29'N, 165°25'W)으로 수심 8.4m쯤 된다.

 

작은 배로 여자 검사원을 비롯한 여섯 명이 승선했다. 큰 배를 보겠다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각자 맡은 임무가 있어 인원이 많은가 보다.

 

갑작스런 선내방송과 함께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훈련, 퇴선 훈련! 전 탑승원 갑판 집합.”

 

선박검사원이 선원의 안전훈련 점검을 시작한 것이다.

선박의 안전을 위한 당사국의 ⌜선박안전검사⌟.

 

점검이 끝나자 상륙이 허가됐다.

선원들에겐 선원수첩, 탑승자들에겐 여권에 6개월 비자가 첨부돼 있다.

아라빙호보다 더 큰 중국 쇄빙선(13,000톤)의 선원은 2년 전 입항했을 때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한 사람도 상륙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 국력이 더 커지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놈은 북극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웃의 작은 동네로 가는 방법은 비행기나 헬리콥터 혹은 겨울에는 개썰매 외에는 교통수단이 없다. 땅이 얼고 녹아 도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놈의 앞바다를 포함한 베링해는 6월부터 9월까지 여름에만 일한다. 그 외 기간은 1m 두께로 바다가 얼어버려 출입이 불가능하다.

 

 

 

놈(Nome) 상륙

 

상륙 하면 인천상륙작전 등이 연상된다.

아니다. 선원들이 육지로 외출하는 것을 상륙이라 한다.

 

『어서 발바닥을 땅에 대고 뛰어다니고 싶다. 미국도 짓밟고 싶다』

한 사람이 말했다.

『여긴 미국이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런데 믿기질 않는다.

문명의 첨단으로 달리는 미국이 이렇게 황량한가. 알래스카를 과연 미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게 만든다.

 

작은 어선이 짐을 잔뜩 싣고 왔다. 대부분 양파, 포도, 멜론 등 신선식료품들이다. 미국 본토에서 가져오는 것인가. 우유, 식빵도 들어 있고 킹크랩도 들어 있다. 짐을 푼 다음 이 배로 사람들이 상륙한다.

 

“삼항사, 알래스카 처음이지? 땅 한번 밟고 와.”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많이 가봤다는 일항사가 양보심을 발휘하여 양외란을 상륙시킨다.

이럴 땐 괜찮은 오빠다.

 

미국해군 출신의 어선 선장은 양외란을 자기의 막내딸 같다고 했다.

 

“여름에는 이렇게 일하지만 겨울에는 앵커리지나 시애틀에 있는 딸네들 집에 다니지요.”

 

그는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을 자랑한다.

왜 열 명이냐고? 손가락이 열 개밖에 안 돼서 그렇다나.

 

딸 하나밖에 없는 울 엄마는 손가락이 몇 개지?

양외란은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인생이 쓸쓸해지려 했다.

 

7월 15일과 16일 이틀간.

놈은 아라빙호의 선원과 탑승자들이 상륙함으로써 시내가 분주해졌다. 항구의 이름이 개떡 같지만 대리점은 Nome(놈)이 Name(이름)에서 유래된 좋은 뜻이라고 강조했다.

 

항구는 평온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이 도시로선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외국인을 대해보기는 처음일지 모른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아라빙호에 승선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북극탐사 관계자도 많아 시내는 분주해진 느낌이다.

 

낮고 편편한 곳에는 늪이 있고 작은 호수가 있으며 꾸불꾸불한 강이 있다. 강 주위에는 관목과 풀이 분포돼 있다. 높고 경사지며, 자갈과 모래가 있는 비탈면이나 바위산에는 나무와 숲은 없지만, 흘러내린 빙퇴석에는 수분이 있어 식물이 자란다.

 

지나가는 쥐가 꼬리를 세우고 멀뚱히 쳐다본다. 사람을 모처럼 보니 신기한가보다.

순록과 여우를 만나는 것은 먹을 것이 있다는 뜻이다.

사향소, 무스 등의 식용 동물이 있는가 하면 이들 동물에게 위협이 되는 늑대와 곰도 있다.

 

겨우내 얼었던 길은 봄이 되어 녹으면서 울퉁불퉁해진다. 포장은 시내 도로에만 한정된다. 자동차는 픽업이나 밴이 대부분이다. 눈길이나 자갈길은 고급승용차가 다니기에는 너무 험악하다. 겨울에는 스키가 더 유용할 것이다.

 

내륙 강에는 금광 채굴 장비와 광부 숙소들이 유령처럼 흩어져 있다. 한때의 영광이 누추하게 늘려 추억을 들춰낸다.

 

극지 식물이나 지질 탐사에는 여자 연구원들이 더 적극적인 것 같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여성에게서 묻는다.”

 

남자 연구원들이 추겨 세웠다.

 

“저온재배 식물을 개발한다면 대박이 되겠네요.”

 

극지생물 연구원 못지않게 양외란은 알래스카 곡류나 채소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극지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인구 3천명에 원주민은 75%가 넘는다. 주로 에스키모인 이누이트(Inuit) 족이다. 알래스카의 가장 북쪽 포인트 배로우(Point Barrow)는 위치가 71°23'N, 156°28'인데도 인구 5천명이 산다. 이들이 누리는 낮은 5월10일부터 3개월밖에 되지 않으니, 나머지 기나긴 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랄까.

 

툰드라 걷기 관광, 북극곰 수영대회, 개썰매 경기를 즐기는 것은 이들에게도 스포츠는 필요하다.

 

작은 도시에도 호텔은 있다.

‘호텔 오로라’

원주민 합동 소유이나 운영은 백인이 한다.

 

호텔은 게와 새우, 킹크랩 요리가 유명하단다. 극지식물과 지질을 연구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연구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요리다.

열 개의 다리를 가진 이들 시푸드는 잊을 수 없는 맛.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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