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알래스카 항해

알래스카 항해(중)

오선닥 2012. 11. 26. 12:32

한국은 88서울올림픽을 한창 준비하고 있는데

오선덕은 한국과 알래스카를 왕복하면서

북태평양의 유빙과 황천을 만나며

힘든 항해를 한다.

그러면서 암모니아 수송을 위해

부지런히 알래스카 항구를 드나들며

현지에서 옛 친구를 만나고……

 

 

두 번째 연재입니다

 

 

 

 

   

알래스카 항해(중)

 

 

캄차카반도에 가까워질수록 유빙(遊氷)이 많이 눈에 띈다. 봄철 해빙기를 맞아 얼음이 쪼개져 저위도로 떠내려 오기 때문이다. 기상도는 유빙해역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걸쳐 있음을 보여준다.

 

“이항사, 유빙 만만하게 보지 마. 타이타닉 비극 알지?”

 

오선덕 선장은 겁주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선속을 올려 도착시간을 맞춰야 한다. 어선 유류 이송으로 인해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항로를 단축하고 동시에 유빙도 피해 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1912년 북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해 1500여명의 인명 피해를 내고 침몰한 초호화여객선 이름이 등장한 것뿐이다.

 

봄 날씨에 취해 멍하니 먼 수평선만 보고 항해하다간 유빙을 배 턱에 맞고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니까.

 

육지 쪽에서 바람이 불 때는 외해로 유빙이 뻗쳐 나온다. 레이더엔 5해리쯤 거리에서 포착되고, 육안으론 작업중인 어선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유빙이 떼거리로 바다에 몰려 있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선교에서 내려다보이는 백색의 수평선은 원처럼 보이고, 그때는 마치 배가 얼음덩어리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얼음에서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안경을 좀 써야겠습니다, 선장님.”

 

“이래서 항해사는 시력이 좋아야 돼.”

 

이항사는 조금 긴장하는 얼굴이다. 바다에 깔려있는 유빙이 뱃머리에 부딪치는 창량한 음향이 들릴 때마다 그 음산한 소리가 신경을 쑤시는 불안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선수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심각한 접촉이 아님을 확인하고 겨우 유빙해역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선수는 알류샨열도로 향해 놓여 있다.

 

북태평양을 항해할 때 폭풍이나 황천(荒天)을 만나면 알류샨열도의 섬 사이에서 살짝 쉬어가기도 한다. 경계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석간만의 영향을 받는 열도 통로의 유속은 12노트까지 관측된 일이 있어 이 특성을 잘 모르고 통과하다간 격랑을 만나 조류에 휩쓸리는 사고를 만날 수 있다.

 

파나마와 극동 간의 엄격한 대권항로는 알류샨 남단을 지나지만 해류와 저기압 진로를 감안한 기상학적 근사대권항로는 베링해로 들어가서 유니막패스(Unimak Pass)를 통과하는 항로이다. 베링해를 경유하는 서향 항로는 알류산 밑에서 조우하기 쉬운 선수탁월풍이나 황파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니막패스는 이제 북태평양항로의 관문으로 통한다.

 

“고속도로의 톨게이트와 같은 거네요.”

 

언젠가 일항사가 북태평양항로의 관문으로서 유니막패스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 실습항해사가 반응한 말이다.

 

“통행료만 안 받는다 뿐이지 그와 같은 거라구. 한 번에 대여섯 척이 부근에서 만날 때도 있지.”

 

일항사는 이 관문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아는 배를 만나 간혹 친구가 승선하고 있으면 농담을 주고받는다. 한꺼번에 서너 명이 통화에 끼어들 때도 있다.

 

“북한이 남한 단독 올림픽 개최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걔들 정신 나간 거 아냐?”

 

“미친개의 미친 짓이니 신경 쓸 거 없어.”

 

“그런 재미없는 얘기 말고……. 참, 휴가 갔을 때 정아의 고무신 안 바뀌었어?”

 

“뭐, 신 뒤꿈치만 약간 닳았을 뿐 그대로더라.”

 

“뭘 믿고 수절하는지? 네 크리스토발 홍등가 상륙은 모르는가 봐.”

 

“임마! 남의 가정사에 초 칠래?”

 

 

VHF 통신으로 젊은이들 간의 주고받는 대화는 지루한 선상생활에 재미를 양념 쳐준다.

 

울산을 출항하여 알래스카의 케나이(Kenai)항까지 3600해리. 항로는 쓰가루해협을 지나 쿠릴열도와 캄차카반도 연안을 따라 올라가 알류산열도의 서쪽 아투섬을 통과해 베링해로 들어갔다가 열도의 동쪽 유니막패스를 통과하기까지는 거의 대권에 해당한다. 신기하게도 해수온도의 등온선도 이 대권항로와 대충 일치한다. 겨울 베링해 항로 수온은 섭씨2도 정도 유지한다.

 

한국에서 알래스카로 향하는 항로상의 고위도 북태평양은 동계에 전반적으로 저기압이 통과하는 영역이어서 저기압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항로는 설정하기 어렵다. 그러니 대권항로가 추천항로라 하겠다.

 

동계 이 항로에서 조우하는 저기압은 대략 두 종류.

중국대륙과 시베리아에서 형성되는 그것들이다. 둘 다 동해쪽으로 와서 북동으로 꺾어 진행하다가 알류샨저압부에 달하여 폐색상태로 되거나 북미쪽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많은 저기압이 일생을 마감하는 베링해는 저기압의 공동묘지로 불린다.

 

북태평양 해상은 동계의 반은 풍력 7(초속 15m) 이상이다. 큰 나무 전체가 흔들리고 파도는 크게 일어 흰 물결이 생기는 바람의 세기에 해당한다.

 

일항사는 풍력7이 중요한 풍력계급이라고 강조하면서 항해일지에 기입하는 걸 잊지 말라고 부하 항해사들에게 강조한다.

 

“하필 풍력7일까요?”

 

새내기 삼항사의 질문으로는 일리가 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오선덕은 선장으로서 끼어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해난보고서 작성하기 위해서겠지. 화물관리는 일항사 책임이니까.”

 

해난의 상사과실을 항변할 수 있는 근거가 풍력7 이상이라는 일반적 판례 때문일지 모른다.

 

하계에도 저기압을 조우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태풍이 고위도로 북상하면서 한랭전선에 먹혀 온대저기압화한 것으로 상당한 강풍을 보이기도 한다. 해상상태는 폭풍으로 변하곤 하는데 하계 황천은 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동계 저기압은 연달아 발생하고 세력 영역도 광범위하다. 저기압이 미치는 영역은 워낙 넓어 폭이 한반도 길이의 두 배에 이르기도 하므로 항로상에서 조우했을 때 피항하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가능하다면 저기압 중심을 왼쪽에 둬 순풍을 받으면서 중심으로부터 빨리 탈출하는 것이 좋다. 만약 침로 유지가 어려우면 최소한의 속력을 유지해 선수우현에 파랑을 받는 ‘히브투’ 방법이 선체충격을 줄이고 기관 공회전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겨울 한국의 컨테이너선 한 척이 LA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 캄차카반도 남방에서 저기압을 만나 침몰했다. 당시 해상상태가 얼마나 나빴는지 상상이 가능하다.

 

컨테이너선의 사고 원인은 영구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황천에 의한 침몰로 결론지을 수 있으나

 

유빙인지,

과적 전복인지,

과속 선체파괴인지

 

원인은 오리무중이다. 과속은 정기선의 입항스케줄을 준수하기 위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과속일 때 특히 조파저항이 커져 선체가 받는 충격이 커진다.

 

항공기처럼 블랙박스가 부착된 것이 아니어서 원인 규명이 쉽지 않다. 이게 동기랄 순 없지만 얼마 후 선박에도 ‘항해자료기록기’라는 블랙박스 설치가 의무화됐다.

 

 

오선덕을 아끼는 한 친구는 태평양을 마냥 왕래하는 그가 안타까워 위로한 바 있다.

 

“매번 위험한 항로가 불안하지 않아?”

 

알래스카 항로는 이미지가 주는 선입견도 있지만, 사실 위험한 항로로 간주되어 동계 항해에는 할증보험료가 부과된다.

 

그러나 해상상태가 위도에 비례하여 거칠 거라는 개념은 적용하기가 곤란하다. 위도가 높은 베링해가 때때로 조용한 휴게소가 됨을 지나가는 배들은 잘 안다. 베링해를 두르고 있는 진주목걸이 같은 알류샨열도가 북태평양의 거친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천 해리나 길게 병풍 모양으로 늘어 서 있는 섬들이 바람막이를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엄청나게 늘려 놓기도 했다.

 

 

 

지난 2월 알래스카를 출항해 한국으로 복항(復航)하는 중 홋카이도 동쪽 먼 해상에서 940밀리바 저기압을 만났다. 그 때 겪은 생사의 갈림길은 오선덕의 해상생활 역사상 가장 혹독한 순간으로 기록된다.

 

하루 밤사이 항로상에 독 오른 살모사처럼 저기압이 똬리를 틀었다. 덩치를 키우며 폭풍을 일으켜 나갔다. 바다는 뒤집혀 하얀 거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선체가 좌우로 흔들리고 격렬한 말타기를 시작하는 순간 탁음이 터졌다.

 

“와 당 탕!!”

 

미처 체인을 채우지 못한 식당 의자가 좌우로 나뒹굴다가 벽을 사정없이 때렸다. 벽이 움푹 들어가고 의자 다리 하나가 부러져 떨어져나갔다. 바닥은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선원들은 네 다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선교에서도 쌍안경이 날아가고 섹스턴트가 떨어졌다. 바다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순간이다.

 

배는 가끔씩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곧추세운 파도는 선장실 창까지 밀어닥쳐 요란하게 부서져 내렸다.

 

심상치 않다. 순간 풍속계가 초속 오십 미터를 넘어섰다. 파도는 뱃머리 바로 밑에서 머리를 쳐들고 있었고, 배는 거대한 폭풍의 벽에 싸인 채 헐떡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이때 일항사가 오 선장에게 다가왔다.

 

“선수갑판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아마도 마스트가…….”

 

“뭐라고?”

 

오 선장이 반응을 마치기 전에 선수에서 거대한 물보라와 함께

 

“우 지 직!!”

 

뭔가 넘어졌다.

 

비스듬하게 쓰러진 것은 전봇대가 아닌 항해등이 달린 마스트였다. 확인이 필요하나 밀려오는 파도 때문에 갑판으로 나갈 수 없다. 마스트가 뿌리 채 뽑혀 넘어간 게 틀림없다.

 

항해등에 불을 켜봤다. 전선 케이블은 끊어지지 않았는지 불은 들어오고 있었다.

 

뱃머리가 파도에 밀려 세 시 방향으로 돌아갔을 때 또 한 무리의 파도가 덮쳤다. 선체가 급격히 기울더니 배의 경사를 표시하는 클리노미터가 사십 도를 가리켰다.

 

오 선장의 긴장은 등뼈 안의 척수를 당기고 있었다. 손아귀에는 식은땀이 흥건하고, 두 다리는 뻣뻣했다가 갑자기 맥이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선수 화물창이 침수라도 되어 화물 온도가 올라간다면 최악이다. 사람이 아닌 배가 영원히 누워버리는 것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가 불공을 드린다는 갑판수는 눈을 감았다.

“오마니, 손바닥이 아프시더라도 빌어주세요.”

 

누나가 전도사인 삼항사는 목에 건 십자가를 만졌다.

“누나, 쉬지 말고 기도해주세요.”

 

누군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정화수 떠다가 신령님께 기원해주세요.”

 

선체 진동이 너무 심해 의지할 곳이 없다. 기댈 곳은 오직 각자의 신뿐이다. 오늘따라 그 신은 스핑크스의 머리보다도 더 크게 느껴진다.

 

파도로부터 스트레이트 펀치를 얻어맞은 선체는 피로가 누적돼 녹다운 일보직전이다. 선체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이 급선무다.

 

“뒷바람 받도록 키를 돌려보자구!”

 

선수를 돌리는 중에 선체가 몇 번 크게 갸우뚱거렸다. 뒤에서 받는 바람으로 선수가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배가 육지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통 허옇게 뒤집어져 날카로운 이빨들을 드러내던 바다가 냉정을 찾은 것은 최악의 상태에서 네댓 시간이 지난 후였다.

 

저기압은 조금씩 중심에서 벗어났다.

낮이 지나고 밤이 오고 다시 낮이 되매 파도의 산과 골은 얕아졌다. 그러나 무언가 삼키지 못해 아쉬운 듯 바다는 아직 긴 파장을 울렁거렸다.

 

선수 마스트 상태를 점검했다.

일항사의 일차 보고는 마스트 뿌리가 뽑혀 상갑판이 찢어져 배 안으로 해수가 침입한 것이 확인됐다. 해수가 침입한 곳은 격벽탱크여서 선박의 안전에 큰 지장이 없어 다행이었다.

 

쓰러진 마스트를 시체처럼 선수 하우스에 비스듬히 눕혀 한국까지 왔다니, 무사귀한을 비는 여자의 기도 덕분인지 모른다.

 

 

 

해류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지구를 일정한 방향으로 돌아다닌다.

 

북태평양 항로에선 아무래도 쿠로시오(Kuroshio) 해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쿠로시오는 원래 난류로서 최대 유속 5노트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북미동안의 걸프류와 함께 대양의 주요 2대 해류이기도 하다.

 

쿠로시오는 북적도해류에서 출발해 적도부근에서 편동풍의 무역풍에 의해 서류하다가 필리핀 동쪽에서 북류해 대만 동쪽으로 흘렀다가는 일본 남쪽에서 북동으로 진행해 북위 35~50도에서 동류하면서 북태평양해류가 되어 긴 여행을 한다.

 

한편 쿠로시오의 지류가 대마도를 거쳐 동해로 흘러 쓰가루해협과 오호츠크해로 각각 나뉘어 흘러 들어가기도 한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중 캄차카반도와 쿠릴열도에 연해서 흐르는 서류의 오야시오(Oyashio) 한류를 타면 강한 쿠로시오 동류의 영향을 적게 받겠지만 무리한 연안항해는 안전상 좋지 않다. 특히 동계에는 유빙이 해안 먼 남방까지 산재해 있어 위험하다.

 

쿠로시오로부터 연장된 북태평양해류는 북위50도 이남에서 동류하다가 알류샨열도 바로 남쪽을 서류하는 반류와 만나 와류를 형성하고는 열도의 각 통로(Pass)를 북류하여 베링해로 들어간다.

 

북태평양은 동계 바다가 거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계 바다는 너무 평화롭다.

그래서 태평양이라고 했던가.

 

안개는 죽은 사람처럼 넓은 해역에 드러누워 며칠 동안 꿈적하지 않는다. 주로 이류무(移流霧)로서 선박의 항해사들에겐 귀찮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상선과 어선이 충돌한 사고가 있었다.

 

“이 넓은 대양에서 충돌?”

 

말이 안 되는 사고가 말이 안 되는 곳에서 발생한 것이다.

대권항로 상에서 항행하는 상선과 조업하는 어선이 충돌했다. 농무 속에서는 몇 십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넓은 대양이라 어느 쪽 선박도 레이더 견시(Lookout)에 크게 집중하지 않았다.

 

모래밭에서 좁쌀 찾는 확률보다 낮은 사고가 발생했다고 놀라기도 했다.

충돌좌초사고의 6할이 악시정(惡視程)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상기해봤는가. 시정은 해류의 상태에 많이 좌우된다.

 

해류는 어떤 지형과 위치를 만나면 갈라지기도 한다.

해류는 말한다.

 

“이쯤에서 우리 헤어지자.”

 

동류하는 북태평양해류는 미국과 캐나다의 경계선인 북위48도 부근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북류하는 알래스카해류와 남류하는 캘리포니아해류로 이별했다.

 

알레스카해류는 난류로서 알래스카 남쪽 해안에 위치해 있는 항구들을 겨울에도 부동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동계 해수온도 영상6도 정도를 유지하여 상대적으로 위도가 낮은 홋카이도 부근보다 높다. 해수의 빙결은 보통 기온 영하 2도, 해수표면온도 영상 5도 이하에서 일어난다. 기온 영하 18도 이하로 되면 해수는 튀자마자 빙결이 돼 선박에 닿지 않아 상부구조물의 빙결은 이뤄지지 않는다.

 

 

 

유니막을 통과한 배는 알래스카반도를 왼쪽으로 끼고 알래스카 만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큼직한 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섬이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로서 1784년 러시아 모피 사냥꾼이 들어선 코디액(Kodiak) 섬이다. 바다표범, 담비, 밍크 등 동물이 이때부터 인간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알래스카 남동쪽 해안은 작은 암초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파도에 씻겨 세암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아 부근에 자주 보이는 고래의 숨줄기와 혼동되곤 한다.

 

태평양에 접한 알래스카와 캐나다 해안에 적도해류가 해안선을 따라 상승함으로써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여 솔송나무, 왜전나무 등의 침엽수림대가 펼쳐진다. 연안 크루즈선이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데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알래스카 반도 동안을 따라 항해하는 중에는 기이한 광경을 본다.

하얀 물보라가 솟아오르고 천천히 가까이 오는 무엇이 있다. 바닷물을 뿜어내는 고래를 보면 알라스카에 가까이 온 것을 느낄 수 있다. 미국 바다가 살기 좋아 많은 고래들이 모여드는가 보다. 잠수함 같은 등을 보이며 헤엄치다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도 하고 물속으로 머리를 내리박기도 한다. 가까이 오는 배에게 마치 인사라도 하듯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서녘 수평선 아래 태양 빛을 받아 고래와 바다와 노을은 아름다운 화폭을 만들어낸다.

 

알래스카 연안의 수많은 바위섬은 세계 최대의 바닷새와 물개 서식지로서 태고의 자연 속에 간직되어 있는 바다동물원이나 마찬가지다.

 

“해구신이 이러코롬 많담?”

 

늑대와 갈색곰, 바다수달에게도 천국이다. 랭걸세인트엘리아스 국립공원은 남한 면적의 반을 능가해 항공기를 이용해야 둘러볼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알래스카 매니아로 만든다.

 

미국 시애틀에서 여객기를 타고 알래스카로 가면서 로키산맥에 뒤덮인 빙하를 내려다보라. 오른쪽에는 만년설(萬年雪)에 뒤덮인 죽음의 세계와도 같은 로키산맥, 왼쪽에는 해안가에 펼쳐 있는 전형적인 피오르드(Fjord: 峽灣)와 짙푸른 태평양.

 

스튜어디스의 애교 떠는 설명은 제쳐두고 비행기 아래의 조감도를 보고 있노라면 바다의 시인(詩人) 워즈워스와 바이런도 태평양의 바다를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과거 빙하시대에 침강으로 이루어졌다는 피오르드의 자연적인 선(線)은 매우 예술적이다. 알래스카에는 크고 작은 빙하(glacier)가 10만 개정도 있다. 이중 컬럼비아대빙하는 추가치(Chugach)산맥 남쪽에 있는 매우 큰 빙하이다. 얼음 두께가 일천 미터가 넘는 것도 많다. 이 빙하의 연령은 일만 년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빙하 앞바다에는 바다표범, 범고래 등이 빙하 위나 수면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태평양 연안의 알라스카와 캐나다는 아름다운 해안과 작은 섬들을 가지고 있다. 조각칼로 깎은 듯한 바위와, 그 아래 펼쳐진 물은 신비를 자아낸다. 피오르드 지형을 이루고 있어 섬이 많고 풍경이 아름답다.

 

연안 크루즈선이 사람들을 태우고 근접 항해하면서 아름답고 황홀한 세상을 보여주곤 한다.

 

“인간들이여! 이곳을 보고 가면 천국에 갔다 왔다고 자랑하리라.”

 

누군가 소리친다.

 

 

 

배는 쿡만(Cook Inlet)으로 들어섰다. 쿡만은 1778년 캡틴 쿡이 지나갔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호머(Homer)항에서 도선사를 태워 80해리를 들어간 후 목적항인 케나이에 도착했다.

 

북위 61도에 위치한 항구는 앵커리지에서 그리 멀지 않다.

겨울바람을 주위 섬과 산이 막아주어 좋은 항구의 입지를 지니고 있다. 일본은 LNG선 두 척으로 이곳 케나이와 도쿄 간을 상시 왕복하면서 천연가스를 수송하지만, 한국은 여수와 울산에 있는 비료공장을 위해 암모니아를 수송한다.

 

농민에게 값싼 비료를 만들어 공급하기 위해 배는 똥냄새를 마다하고 암모니아를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것이다. 그러니 똥 푸러 오는 것 자체가 상스럽지 않다.

 

“암모니아 화물을 자꾸 똥이라고 하면 우린 정말 똥독 올라요.”

 

선원이 뭐라 해도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 암모니아는 똥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선원의 밸브조작 등의 부주의로 외부로 누설되면 온 선내는 고약한 냄새로 가득 찬다. 그 옛날 국회에서 김두환 의원이 뿌린 오물의 냄새를 능가할 것이다. 오선덕 학생이 아치섬 상륙작전 중 맞닥뜨린 섬 처녀가 뒤집어쓴 오물의 냄새보다 진하게 코를 자극할 것이다.

 

몸속에서 단백질을 분해하고 에너지를 얻고 나면 노폐물로 만들어지는 암모니아는 독성물질이라 몸속에 오랫동안 머물면 위험하다. 그래서 독성이 없는 요소라는 물질로 바꾸어 신장에 저장해 두었다가 소변이나 땀 등의 형태로 몸 밖으로 내보낸다.

 

 

접안하자마자 입항수속관 한 명이 승선했다. 혼자서 세관, 입국 및 검역(CIQ: Custom, Immigration & Quarantine) 수속을 담당한 그는 팔방미인 격이다. 단숨에 세 가지 업무를 다 마쳤다. 입항수속은 일반적으로 관리들이 떼거리로 올라와서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간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실례로 보여준 셈이다.

 

관리의 말은 통신장이 눈치 있게 통역을 잘한다.

이태원에서 물장사하던 누나 댁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가게에 자주 드나들던 미군들의 발음이 귀에 익을 대로 익었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박 기관수는 비자가 없으므로 외출하면 안 돼요.”

 

한국 출항 시 긴급 승선한 기관수는 미국비자를 받지 못해 상륙이 허락되지 않았다. 부두 울타리가 그가 다닐 수 있는 한계선이다.

 

알래스카 해안은 대체로 청정하나 내륙 깊숙이 들어가면 빙하 진흙으로 매우 탁하다. 해수펌프 등에 손상을 준다.

 

케나이항은 조석간만의 차이가 심해 10미터에 이르기도 한다. 마치 인천항에 들어온 기분이다. 유속이 최고 8미터에 이른다.

 

간밤에는 부두에 매어 둔 밧줄 하나가 끊어졌다. 조석 높이에 맞춰 밧줄 길이를 조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끊어지는 순간 주위에 사람이 없었던 것은 천만다행이다. 사람을 낚아채 내팽개칠 만큼 치명적이다. 끊어진 밧줄은 팽이채처럼 휘둘러 선용품을 올리는 소형 기중기를 쳐서 부러뜨리고 말았다.

 

인천이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이유는 서해가 대체로 수심 일백 미터 내외의 얕은 바다이고 복잡한 해안선과 경기만의 독특한 해안선 형태에 기인한다. 넓은 바다에서는 평상시 낮은 파도가 해안에 접근하면서 조수로서 가속도를 얻게 되고, 이것이 경기만의 좁은 만내에 몰려들면서 단번에 큰 상승을 일으킨다. 내항의 수심과 폭이 좁아지는 효과도 가세하여 인천항이 타 지역보다 큰 조석이 발생된다.

 

 

 

알래스카에는 오선덕이 언급해야 할 두 명의 한국계 보헤미안이 살고 있다. 한 명은 그의 학교 친구이고, 다른 한 명은 유명한 권투선수 홍수환이다.

 

두 사람은 일단 방랑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고, 낙천적으로 살기로 작정한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자 문제로 아픈 머리를 얼음찜질해줘야 하는 상황에서 알래스카를 도피지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위하는 면에서도 유사하다. 친구는 소희가 마음에 걸렸고, 권투선수는 옥희가 마음에 걸렸다.

 

“비정상적 사랑이었으나 ‘소설적 사랑’으로 승화하고 싶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인생에서 이렇게 죽이 맞는 친구를 객지에서, 그것도 동토의 알래스카에서 만나다니. 서로 감격했다. 두어 살 차이의 나이는 프렌드로 호칭하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

 

친구는 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여학생을 잊지 못해 결혼 후에도 계속 만나다가 부부싸움을 밥 먹다시피 했는데, 결국 가정 평화를 위해 가족을 데리고 유랑 이민 왔다. 택시기사, 악세사리 가게, 세탁소 등 여러 직업을 가졌다. 권투선수보다 나이 차이만큼 먼저 앵커리지에 와서 이민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권투선수에 대해선 좀 자세하게 이야기할 게 있다.

 

홍수환은 가족과 함께 미국 알래스카로 이민을 와 택시 운전을 했다. 앵커리지 시와 공항 간을 오가며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마약 운반책으로 누명을 쓰기도 했다. 다른 장사를 하면 좀 나을까 싶어 알래스카 5년 생활을 마감하고 로스앤젤레스로 가 신발 장사를 하기도 했다. 10여 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홍수환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홍수환이 온 국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세계 정상에 서면서부터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수환아, 대한국민 만세다."

 

그때의 대화는 두고두고 국민의 가슴에 애국심과 효심을 불어넣어주곤 했다.

일등병 군인이었던 홍수환은 경기가 열린 더반까지 비행기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고 갔음에도 피로를 모르고 일 회부터 강하게 몰아붙여 결국 승리했다.

 

나중에 타이틀 방어전에 실패한 그는 주니어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려 파나마의 헥토르 카라스키야와 타이틀 매치를 가졌는데 4전5기 끝에 승리했다.

 

파나마에서 금의환향했지만 이후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로 홍수환은 이겨도 져도 팬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결국 타이틀 2차 방어전이 실패로 끝나자마자 한국권투위원회는 홍수환에게 2년 동안의 출전정지 징계를 내렸다. 그리고 홍수환은 1980년 은퇴했다. 그의 나이 딱 서른이었다.

 

홍수환은 링에서 내려와 제2의 삶을 준비했지만 그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헤미안의 삶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알래스카가 첫 유랑지가 된 것이다.

 

4전5기의 신화가 지금 홍수환을 먹여 살리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귀국한 뒤 방송 해설과 강사 그리고 지도자로서 다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옥희와 16년 만에 재회해 소설 같은 사랑을 실현하고 있다.

 

“복싱 선수에겐 임자가 있어. 수달이 악어의 힘을 다 빼놓고 악어의 꼬리를 잘라 먹는다고 하니 임자는 다 있어. 그래서 복싱이 재미있는 거여.”

 

홍수환의 단골예화에 들어가는 말이다. 복싱이 인생을 닮아서 재미있고, 늘 이기라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늘 지라는 법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학교 친구는 세탁소 일을 잠시 접고 오선덕을 만나러 일부러 앵커리지에서 케나이로 왔다. 몇 년 동안 한국 친구를 만나지 못하다가 일 년 전부터 오선덕이 자주 케나이에 입항하자 그는 친구 만나는 재미로 새삼 인생의 맛을 느낀다고 말했다.

 

“작년에 수환이가 LA로 가고부터는 영 적적해서 재미가 없어졌어. 건데 너라도 이렇게 자주 와주니…… 고맙군.”

 

홍수환을 못내 그리워하는 그를 위로할 방법은 없을까.

오선덕은 옛 추억을 끄집어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희는 결혼해서 여행사 근무하는 것 같더라. 소식 듣고 있지?”

 

“그 정도는 들은 바가 있는데, 더 이상은 나도 몰라.”

 

보이지 않으니 친구의 마음이 멀어져갔는가 보다고 오선덕은 생각했다.

 

“이런 말도 있잖아. ‘Out of sight, out of mind’.”

 

“미국에 사는 나보다 영어 더 잘하네. 역시 훌륭한 선장은 다르군. 건데 사자성어로는 거자일소(去者日疎)라고 하나?”

 

“야, 한국에 사는 나보다 한자 더 잘한다. 그 정도면 국위선양 지장 없겠다.”

 

서로 칭찬하는 자리가 됐다.

칭찬할 때마다 와인 잔이 교환됐다.

 

 

친구는 이틀 동안은 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면서 골프 치기를 제안했다.

앵커리지와 케나이 사이에 있는 골프장이다. 홍수환도 골프를 좋아해 둘은 자주 거기에 가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이튿날 친구와 오선덕은 무스와 순록이 노는 초원을 지나 침엽수 숲으로 싸인 골프장으로 갔다.

 

이른 오전의 골프장은 손님이 두 팀밖에 없다. 다른 한 팀은 로스엔젤리스에서 온 동양인 부부였다. 홍콩계 남자와 한국계 여자의 부부였다.

 

친구는 여자와 말을 걸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여자가 소희를 닮았기 때문이다.

애인 생각 때문인지 그의 골프 스코어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끝내 친구는 단어를 바꿔 오선덕에게 속삭였다.

 

“Into sight, into mind."

 

“알갔다. 좌우지간 넌 못 말려. 향수병이 아니라 상사병이군.”

 

오선덕이 무슨 말을 하든지 친구는 그린피 10달러로 옛 애인을 만나게 됐다고 내내 좋아했다.

 

따뜻한 남풍을 몰고 오는 봄을 무시하고 알래스카의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오선덕은 친구를 이해할 것 같았다.

 

“알래스카는 바람조차 향수를 불러 오는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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