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회의 땅 러시아

기회의 땅 극동러시아(제 6회)

오선닥 2016. 3. 4. 22:21

연해주의 고려인 농장
러시아인이 버리고 간
마을에서 시작했다


▲고려인 농장




제 6회



고려인 농장


지금 2007년이 사공박에게 어떤 해인가? 단순히 연해주 방문?


스티브 잡스가 세 가지 제품을 단 하나의 기기에 압축 장착한 해 아닌가. MP3와 휴대폰과 인터넷을 아이폰 하나에 몰아넣은 혁명적인 사건. 대단한 혁신. 사공박은 무심코 독백했다. 불현 듯 연해주에서 무언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20세기 연해주는 동서 문명이 충돌했던 피의 현장이었다.
한 세기 유량생활에서도 고려인은 울지 않았다.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는데 왜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나요?”


통일연구원 이동일 수석연구원이 궁금한 나머지 묻자 김연동이 대답한다.


“조선자치령을 세우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스탈린에 의해 동포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거죠. 카자흐스탄에 있는 장군의 비석은 한인회에서 관리하고 있답니다.”


독립군의 총재였던 이범윤 장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연해주에서 눈물겨운 일생을 마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정농장이 얼마나 큰지 보러 가겠습니다.”


김연동이 앞장서며 일행은 농장으로 나갔다.

우즈베크에서 연해주 우정마을로 재이주 정착한 김()발레리 부부를 만났다. 그들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비행기 값 치르고 2천 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반짝이는 눈빛에서 희망이 보였다.


"연해주 정말 잘 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조금 늦었지요."


돌아온 것에 실망하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 땅은 말타기에서 보는 몽골 초원과는 다르다. 그토록 광대한 몽골의 대초원도 저 멀리 높고 낮은 언덕으로 둘러져 끝이 보였는데, 연해주 땅은 아무리 둘러봐도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아 있는 지평선뿐이다. 콩밭은 더 장관이다. 눈앞에 펼쳐진 게 땅이 아니라 초록 바다 같다.


“한국에서 가장 좋은 콩 종자를 가져와 심어놓기만 하면 비료도 농약도 없이 잘 자랍니다.”


김연동이 설명하면서 한국농협에서 좋은 종자를 공급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바다보다 더 넓어 보이는 땅이 딴 세상 같기만 해서 사공박이 농장의 크기를 물었더니 놀라운 대답.


“농장 하나가 126제곱킬로미터쯤 됩니다.”


“크기가 감이 안 들어와요.”


정은숙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노무성이 대신 설명해준다.


“서울 면적의 20퍼센트, 김해평야만하지요. 이제 감 잡으셨나요?”


“아, 그렇군요.”


넓이를 골프장과 잘 비교하는 사공박이 나선다.


“18홀 골프장 하나가 30만평 즉 1제곱킬로미터쯤 되므로, 골프장 몇 개의 크긴지 알겠군요.”


러시아에서 살면서 골프장 구경을 못한 김연동은 그런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아직은 사회주의 체제여서 땅을 개인이 소유할 수는 없지만, 1제곱킬로미터 10만원이면 족해요. 이것도 50년간 임대입니다.”


러시아에서 주택 등 건물은 자기 소유 등기가 가능하다. 텃밭 500평 정도가 무상으로 함께 주어진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먹을 감자 정도를 심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해, 고려인들은 비닐하우스 등을 만들어 최대한의 농업 성과를 올린다. 연해주의 농가 중에서 비닐하우스가 보이는 집은 거의 모두 고려인의 집이라고 보면 된다.


“지독한 민족.”


이렇게 열심히 하다보면 수익이 많아 일손이 부족한데, 이 때 러시아인이 고용된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에서 기른 실력이다. 고려인들이 농업에서 '슬라브인'을 리드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잠깐이나마 주객이 전도됐다는 말이 스쳐간다. 그러면서 이 땅이 과연 진정한 주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핍박의 운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7백만으로 잡는다. 5천만이 해외에 나가 있는 중국 해외동포들에 비하면 적은 숫자지만 인구 비례로 이스라엘 다음이요, 진출 나라로는 172개국으로 세계에서 단연 1위이다.


“배를 타고 오지에 들어가도 코리언은 볼 수 있었으니까.”


사공박의 가슴에 뿌듯함이 솟는다. 아프리카의 후미진 나라에서도 한인 10여 가정이 진출하여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거나 사진관, 식당, 옷가게 등을 운영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다른 침투력과 개척정신, 그리고 진취성과 개방성을 지닌 국민.


한 나라 경제력의 5분의 1을 담당하는 한국인 디아스포라. 주머니에 겨우 몇 백 달러만 넣고 외국에 도착하여 맨몸,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현지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하여 별다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이제 서서히 목소리를 내십시오.”


전원채 회장이 김연동의 어깨를 잡고 격려했다.


“고국에서 이렇게 도와주시니 힘이 납니다.”


김연동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부언한다.


“재이주한 이후 연해주 정착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자립하기까지 중국 조선족과 생산품 유통 활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르줌 중국시장에는 조선족과 고려인이 공존한다. 중국시장은 한국인공동체가 차지하고 있다. 이곳 인구 6천 명 중 40퍼센트가 조선족이다.


우정마을에서 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싱카이호(興凱湖)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국경에 있는 담수호이다. 우수리강의 상류에 위치한 싱카이호의 건너편은 중국 헤이륭장(黑龍江) 성의 밀산이다. 마치 바다를 연상케 하는 호수는 맑고 푸르고 일망무제하다.


우정마을에서 호수로 가는 연도의 중간쯤에 대평원의 농장이 보인다. 고려합섬에서 마련한 끄레모바 농장이다. 무려 골프장 40개 정도의 크기다.


광활한 규모의 끄레모바 농장은 연해주 농업개발을 위해서 확보해둔 땅이다. 그것을 극동평화연대에서 위탁을 받고 우정마을과 함께 제2의 농업정착 기지로 만들고 있다. 주변엔 400여 호씩 되는 규모의 꼴호즈(집단농장) 형태의 마을들이 있다. 소련 시절 연해주의 주요한 농업지구 중 한 곳이다.


“우즈베크나 카자흐에서 재이주해온 고려인은 살 집을 어떻게 마련했었나요?”


“처음에 그것이 어려웠습니다. 러시아인들이 떠난 마을은 마치 유령 마을 같았으니까요.”


정은숙의 질문에 대한 김연동의 대답이었다.


러시아인들이 버리고 간 농가와 집은 헐값으로 150만원에 살 수 있지만 돼지 축사는 500만원이나 된다. 한국 기부자가 구입해서 무상으로 재이주자에게 공급했는데, 끄레모바 농장이 그 중 한 예다.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목조 집은 비좁고 허름하지만 그에 딸린 농토는 축구장을 방불케 한다.


“할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이사 와서 살았는디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우즈베크로 잡아갔으매. 아버지도 죽고 손자가 다시 돌아왔는디 이렇게 도와줘서 발을 붙이게 되었꾸마. 농사도 하고 가축도 치면서 이제 한 2, 3년만 지나면 살기가 좋아지겠꾸마.”


이주하면서 버려두고 간 조상의 묘지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일행의 말에 최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버려진 묘지들의 임자를 되찾게 되겠꾸마. 러시아인의 묘지처럼 이쁘게 꾸미람디.”


마을 주민 강씨의 러시아인 부인은 러시아 빵과 스프와 닭고기 볶음채로 점심 초대를 했다. 소금을 넣어서 짭짤하고 빵은 질긴 오징어를 씹는 기분이었으나 눈물의 빵이 이런 것이라는 느낌으로 일행은 먹었다.


일일이 악수를 청하는 그의 거친 손이 닿는 순간 코언저리가 찡한 것은 해외에 사는 동포의 어려운 삶이 피부로 전해졌기 때문일까.


계획대로 우정마을이 1000여 호의 농장으로 성장하고, 끄레모바 농장이 두 번째의 우정마을로 부상하는 그날이면 처음 개척의 괭이를 박았던 묘지 속 주인공들도 웃음을 보일 것이다.


공산주의 아래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적 같기만 하다. 사상 교육을 열심히 시켰는데도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계란에도 사상을 재우면 바위를 깰 수 있다고 독재자는 말하지만 깨지는 것은 바위가 아니라 인민들이다.


“지금 한국에도 고려인이 많이 산다지요?”


김연동이 한국으로 간 고려인이 궁금해서 물었다.


“그렇습니다. 약 3만 명 됩니다.”


다문화 가정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박경석 시민단체가 대답했다.
안산 뗏골 카레이스키 마을과 광주광역시 고려인 마을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씩씩하게 현실과 마주하면서 언제든 찾아 쓸 수 있는 적금 같은 가족을 이루고 있다.


한국은 그들을 후원할 의무가 있다. 그들 대부분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 고려인마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