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회의 땅 러시아

기회의 땅 극동러시아(제 5회)

오선닥 2016. 2. 25. 21:47

밤하늘은

한과 혼을 품고…


▲우정 마을




제 5회



연해주의 밤


연해주의 여름 해는 길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서쪽 지평선 위에 해가 발갛게 걸려 있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답사단은 우정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짙은 황토색 벽돌로 된 거의 같은 모양의 집들이 반듯반듯, 옹기종기, 깔끔하게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사공박과 정은숙은 마을 뒤쪽으로 밤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지 않아 아직 밤은 아니다. 석양빛에 비춰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노을이 비치고 있다. 정은숙이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킨다.


“저기 길 간판 좀 보세요.”


우정로, 새마을로, 아리랑로 등의 한글로 만들어진 길 간판.


아직 적은 수이지만 정착한 고려인들은 부지런함과 끈질김으로 안정감 있는 생활을 만들어가고 있다. 2004년 중앙아시아에서 보았던 절망감이 이제는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이어서 사공박에게 질문한다.


“넓은 벌판을 보며 사공 사장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무공해 농산품을 한국으로 수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역시 사업가로시군요. 저는 발해인들이 말을 타고 종횡무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글 쓰시는 분의 그침 없는 상상력이로군요.”


극동평화연대는 NGO 단체이다. 이곳에 자주 와서 고려인들을 위해 마을을 만들고 재이주 정착을 위해 봉사 헌신하고 있다. 희망이 성큼 자리하고 있다. 고려인의 희망, 연해주의 희망, 한민족의 희망.


도도하게 흐르는 우수리강 건너 높은 언덕에 옛 솔빈부 성터가 보인다. 중국 동북 삼성 내에 남아 있는 발해의 성터들과 똑같이 닮았다고 육해수가 말한 적이 있다.


대체로 발해성이 그러하듯 성터는 토성이지만 보존상태가 좋다. 성벽은 높고 해자 자리는 깊다. 많이 훼손된 중국의 발해성들에 비하면 솔빈부는 원상태에 가깝다.


“할아버지 세대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과 더불어 연해주의 광활한 땅에도 민족의 씨를 뿌렸네요.”


정은숙이 감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강제이주 전 이 벌판의 논이며, 밭이며 산언덕 모두가 조선인들이 피땀으로 개발한 것이라는데…….”


역사의 어떤 부분을 더듬고 있는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옆의 무엇을 잡고 말았다. 사공박의 손이었다. 그의 손은 얼떨떨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어떤 것이 예의인지 모르면서 온기를 그대로 느낄 뿐이다. 서로 눈을 마주하자 노을이 불그스레 물들어가는 것만큼 그들의 얼굴도 홍조를 띠었다.


우정마을 이튿날 밤은 고려인 집에서 민박이다.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상추를 뜯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식사를 함께하며 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 텃밭, 살아가는 이야기들.


모처럼 한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방 두 개를 내주고 고려인 주인 내외분은 거실을 택했다. 그들의 진정한 마음을 거절하지 못하고 일행은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간단한 담소를 나누는데, 전원채 단장이 좌석의 한가운데서 먼저 말을 꺼낸다.


“연해주는 우리 한민족에게 다시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대가 더 관심을 가질 때라고 봅니다.”


말을 마친 그는 시선을 연해주 대표 김연동 쪽으로 주었다.
김연동은 말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해주는 거의 자연의 땅이고, 관심만 가지면 땅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 이유를 나열한다.
깨끗하고, 비옥하고, 저렴하며, 자연그대로 무한대의 가능성이 있는 땅으로서, 이미 일본, 중국, 독일 등이 광업권이나 인프라를 선점한 몽골과는 달리 연해주는 오로지 한국만이 역사적인 아픔과 땅을 품고 관심을 보일 자격이 있다는 것. 농가와 건물 가격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어 관심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빨리 돈 가지고 와서 투자해야겠네요.”


시민단체 대표 박경석이 한마디 던졌다.
 
“글쎄, 고려인과 함께 큰 농장을 하고 싶은데요."


농협 대표 노무성이 거들었다.


이렇게 일행은 한마디씩 하면서 의견을 취합해 나갔다. 함께 협력하고 교육하여 좋은 농산물을 만들어내면 희망이 있다는 의견에 도달했는데 그중 하나가 콩이다.


한국인의 기본 식품인 두부, 된장, 청국장 등에는 늘 콩이 사용된다. 비료는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작물은 무공해다. 이미 연변 최고의 전문가가 자연농법으로 실험하여 성공을 거둔바 있다. 식량은 미래 무기의 대안이다.


“민족적 차원으로 접근하면 어떨까요?”


역사학자 육해수의 제안이었다.


“러시아나 인근 국가의 불안을 자초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 수석연구원 이동일의 전문가적인 의견이었다.
사공박은 본능적으로 경제성을 강조하는데.


“아무래도 중국 콩과 경쟁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러시아는 무서운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서로 역사적 상처를 잊고 시너지를 내면 한러 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농장 조성에는 아무래도 관심을 많이 갖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근데 광활한 지역을 개척하자면 집단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노무성이 질문을 해놓고 김연동의 대답을 기다린다.


“노동의 질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한국인이 한 달이면 끝낼 공사를 러시아인은 3개월이 되어도 절반 수준에 그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일당은 200루블로 심지어 북한 동포의 일당 1000루블에도 훨씬 못 미칩니다.”


김연동은 말을 이었다.


“통일 후 북한 동포들이 먹거리를 위해 진출할 수 있는 땅이 바로 연해주입니다. 그들의 노동력도 필요하고요.”


소련정권 와해 후 활동하기 시작한 한인회 덕분에 한인 사회는 급속하게 신장해 왔다. 총영사관의 지원과 협조 아래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려 자생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한인 사회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전원채 회장이 김연동에게 질문했다.


“한국문화원 설립, 사료관, 영화, 드라마 등을 상시 보여주는 공연실, 한글 교육실, 세미나실 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려인 가슴에 한국문화를 심어 한류를 확산하고 한국과의 교역, 교류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한인회의 역할이 크겠군요.”


회장은 내일 일정을 위해 담소를 마무리 지었다.


일행은 깨끗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 누웠으나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주인은 오랜 고된 삶의 짐을 버리고 새로운 희망의 터전인 우정마을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며 제2, 제3의 우정마을이 계속 생겨나길 기대해 본다.


▲연해주 벌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