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회의 땅 러시아

기회의 땅 극동러시아(제 3회)

오선닥 2016. 2. 6. 12:54

고려인에게 ‘어머니의 도시’
우수리스크
뿌려진 피의 흔적
답사단의 반응은?


▲우수리스크 시 전경




제 3회



우수리스크 항일유적지


일곱 명의 답사단을 실은 합승은 자루비노항에서 3시간가량을 포장과 비포장의 길을 번갈아 내달려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에 도착했다.


항일 독립운동의 메카 우수리스크.
고려인들에게는 지금도 이곳이 ‘어머니의 도시’로 기억된다.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극동평화연대 연해주 대표 김연동이다. 일행이 연해주에 체류 하는 동안 안내를 맡는다.


작은 역을 지날 때 그가 일행의 시선을 환기시켰다.


“저기 역이 보이시나요? 라즈돌리노예역이어요.”


왜 작은 역 하나에 감탄하는가.
고려인 최초 강제이주 한인을 태운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처음 출발한 곳이다. 지금은 열차가 잠시 서가는 간이역에 불과하지만 고려인의 아픈 역사가 담겨진 역.


▲라즈돌리노예 역


저만치 멀리 보이는 초소에 높이 세워진 러시아 국기는 이곳이 러시아연방임을 말해주나 땅 위에는 고려인의 혼이 흐르고 있다.


우수리스크는 고려인 이주 150년의 역사를 함께한다. 인구는 비록 16만밖에 되지 않지만 아담한 도시다. 현대적 미를 뽐내는 건물도 없고 부를 상징하는 높은 빌딩도 없다. 고풍의 교회당과 나지막한 아파트가 줄지어 섰을 뿐이다. 건물마다 모양이 다르고 오색이 영롱하다.


이주 전 가장 많은 고려인이 정착한 곳으로 많은 고려인 지식인이 처형됐다. 소련 비밀문서는 7,500여명에 이른다고도 한다.


“왜 유독 지식인이 많이 죽었나요?”


시민단체 대표 박경석의 질문에 통일연구원 이동일이 답변에 나선다.


“일제에 항일운동, 소련체제에 간첩행위로 의심받았기 때문이죠.”


“항일운동 땐 소련이 도와줬는데?”


“그들이 필요할 땐 그랬습니다. 나중에 강제이주를 시킨 것 보세요.”


“결국 고려인은 일본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셈이로군요.”


수필가 정은숙이 그렇게 수긍하고 수첩에 적었다.


▲우수리스크 시내


우수리스크 시내의 한 옛집에 붙어 있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색 벽돌집 입구에는 ‘최재형의 집’이라는 안내판.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 하나에 만족해야 하니 허탈함이 밀려온다.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던 최재형(崔在衡)이 죽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 러시아인 살림집으로 사용되니 말이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을 위해 사재를 털었다. 소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유학까지 보냈다. 1920년 ‘4월참변’에서 일본군에 납치된 뒤 총살을 당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재무총장까지 지낸 그는 좌익이라는 이유로 독립운동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죠.”


역사학자 육해수의 양심이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생가


약간 떨어진 곳에 건물 하나가 보인다. 러시아 혁명 이후 한인들이 자치권을 인정받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전로한족중앙총회’ 건물이다. 최초의 해외 임시정부라고 할 만하나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문창범이 회장을 맡아 연해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우수리스크 외곽에 흐르는 라즈돌리노예강(江)의 강변 부근 비석 하나가 차를 멈추게 한다.


“이상설(李相卨) 유허비(遺墟碑)로군요.”


사공박이 한글로 써 있는 걸 보고 크게 말했다.

정은숙이 낭창한 목소리로 비문을 읽는다.


<나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1907년 일제 침략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하라는 고종의 특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독립운동가 이상설은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유해는 강물에 뿌려졌다. 그러나 라즈돌리노예 강은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는 이준(李俊), 이위종(李偉種)과 함께 파견되었던 사람이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


시내 곳곳에서 고려인의 흔적과 항일 독립운동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연자방아도 종종 보이고 한인들이 이주해서 벼농사를 지었던 흔적도 보인다. 조금 가니 커다란 비석 하나가 나타난다.


“그럼, 저 큰 비석은 뭐죠?”


코끝이 찡해진 정은숙이 물었다.


어떤 비석인지 사공박이 궁금했는데 현지인답게 김연동이 설명해줬다.


“4월참변 추도비입니다.”


3.1운동 이후 1920년 4월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240명의 연해주 동포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 중에는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포함돼 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한인거주 지역에서 많이 습격당했다.

▲4월참변 추모비


민족작가 조명희(趙明熙) 선생이 1930년대 교편을 잡았다는 푸칠로브카(Putsilovka) 마을을 지날 때는 그를 쏘았던 총성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후학을 육성했다. 일제의 농민 수탈과 이에 저항하는 지식인 운동가의 삶을 그린 <낙동강>과 <짓밟힌 고려인>등 작품은 친구인 러시아 문호 파제예프가 높이 인정한 바 있다.


푸칠로프카 마을의 원래의 이름은 육성촌(六城村). 라즈돌리노예강 주변 6개 지류에 정착한 마을을 의미한다. 한인들 200여 호가 살았다고 하나 이제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강제이주 70년이 지나면서 거의 파괴되고 잊혔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주인도 바뀌었지만 산천은 의구(依舊)하고 조명희가 교편을 잡았던 그 학교 건물도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인들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폐교가 된 후로 러시아인들의 주택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다시 빈집이다.


“러시아인들은 여기에 살만큼 끈기가 없나 봐요.”


농협 대표 노무성이 한마디 했다.
강제이주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고려인의 낭랑한 글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김연동이 안내하면서 왼편 산을 가리킨다.


“저 뒷산에 당시 육성촌의 공동묘지가 있어요. 가 보시렵니까?”


“그럼요. 무덤은 역사를 말해줄 겁니다.”


육해수의 즉답에 모두들 발걸음을 공동묘지 쪽으로 옮겼다.


마을 뒷산마루 잡목이 우거진 숲 속 여기저기에 묘비석들이 널려 있다.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봉분은 평지나 다름없이 가라 앉아 있고, 기석에서 뽑혀서 여기저기 쓰러진 묘비석에 새겨진 이름자와 무덤 속 고인의 생졸년월일을 미루어 땅을 개척한 분들과 그 시대의 맥을 짚어볼 수 있다.


묘지의 주인공은 분명 이주민 1세대이다. 80년 전 묘지들로 분명 이 마을에 살던 고려인들이다. 바로 옆에 러시아인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인 후손들이 다녀가면서 얹어둔 생화묶음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한꺼번에 묻힌 지 10년 후 고려인 후손들은 우즈베크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작가 조명희도 희생자 중 한 사람이다. 후손들이 재이주하기 전에는 조상무덤에 꽃 한 송이 얹어놓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저평가돼 온 건 아닌가요?”


시민운동가 박경석이 육해수에게 따지듯 물었다.


“다행히 최근 그분들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우수리스크 시내의 최재형 고택과 전로한족중앙회 개최지 등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이 2010년 늦게나마 기념 동판을 부착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대학엔 독립운동가 장도빈의 아들 장치혁 고합그룹회장이 1995년 한국어학과 건물을 건립한 뒤 대학에 기증하여 고려인들에게 모국어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고려인 육성촌 공동묘지에 남겨진 흔적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