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바나나 쟁탈전

바나나 쟁탈전(제6회)

오선닥 2013. 10. 25. 16:44

1991년 바나나 수입자유화

결국 사건을 만들어내고 마는데...

 

수입업자가 인수를 포기한 바나나를

선원들의 손으로 해상에 투기

 

수입업자와 선주가

동시에 망가지는 모습

 

 

 

   

바나나 쟁탈전

제6회

 

 

12. 야전침대

 

배의 입항을 앞두고 한국해운의 9층 회의실에서는 주요 임원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사장을 비롯해 부사장, 전무, 상무, 그리고 기획이사가 참석했다.

 

사장은 듣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의자 팔걸이에 왼손으로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회의 주재는 자연히 부사장에게 넘어갔다. 분위기를 측정한 전두강 부사장은 형식적인 인사말을 끝낸 후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

 

“대붕의 운임을 최우선 수금하세요. 반드시 하역 전에.”

 

그의 시선이 테이블을 한 바퀴 돈 후 조종채 전무의 눈동자에 꽂혔다. 그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오선덕 상무는 원만한 회의 분위기를 위해 자신이 나서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대붕은 1억2천 결제했습니다. 나머지는 현재로선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대신 회초리 맞을 각오로 종아리를 내보인 격이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오선덕의 기대와는 다르다. 부사장의 시선집중은 조 전무 쪽으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쏠리고 있었다.

 

“조 전무, 대붕의 미수운임이 도대체 얼마나 돼요?”

 

맹금류 같은 부사장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회사는 이미 영업의 책임자가 조 전무임을 묵시적으로 정해놓은 상태다.

 

“현재 5억인데, 어음을 받아둔 상탭니다.”

 

“그럼 바나나 시장가격은요?”

 

“수입원가에 통관 운송비 등 부대비용을 더하면 시장가격보다 많습니다.”

 

“그럼 바나나 팔아도 운임회수는 어려운 것 아녀요? 어음은 휴지조각……. 짐을 푸지 않아야 하는 거, 맞죠?”

 

“그래서 대붕은 방편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

“화주만 믿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배는 어디 있나요?”

 

이 장면에서 오 상무가 끼어들어 대답하는 게 좋다. 전무가 쩔쩔 매고 있는 상태에선 대화는 없고 취조만 있을 따름이다. 다섯 살 차이의 부사장과 전무 간의 긴장을 풀어줄 적당한 기회라는 생각.

 

“부산 남항 앵커리지에 있습니다. 3천5백톤이 그대로 실려 있고요.”

 

부사장은 들으나마나하는 표정이다.

 

“오 상무, 그럼 뻔하잖아요. 일단 바나나를 실은 채 출항시켜야죠. 사 갈 사람도 없는 판에.”

 

“대붕과 협의해서 조속 출항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사장은 슬그머니 턱걸이를 풀고 일어섰다. 그리고 부사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이 어려울수록 단순하게 생각해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할 수 있으니까. 잘 의논들 하고……. 나,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가요.”

 

기획이사가 따라 나갔다. 사장은 바나나 영업의 손익이 어떤지 기획이사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어쩌면 바나나에 관해서 소상하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체하는 것이 사장의 주특기이기도 하니까.

 

바나나를 재수출하든 해상투기하든 배는 출항해야 한다. 지금은 북태평양 명태잡이 어선들이 어획물 운반을 위해 냉동운반선 도착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대붕 김 사장은 바나나 바이어를 찾기 위해 극동 러시아로 어제 출발했다. 러시아는 이미 수입 바나나 풍년을 만나 더 이상 수입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지만 김 사장은 무턱대고 간 것이다.

 

운임 수금에 비상이 걸리자 조종태 전무는 자기 방에 야전침대를 준비했다. 영업부 홍미라가 시트를 깔아준 것은 어디까지나 전무가 측은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어른에게도 모성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전무는 지난 보름 동안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비록 회사 사무실을 나갔다 하더라도 단골 양주집 블루베리에서 시간을 뭉개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조 전무는 야전침대에 걸터앉았다. 갓 깔아놓은 시트만 빳빳할 뿐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다.

 

“오 상무, 자넨 집으로 가게. 가는 길에 홍미라 씨 좀 바래다주고. 괜히 직원들 고생만 시키는군.”

 

“전무님, 몸부터 챙기세요. 바나나 수입 초창기에 많이 벌어둔 운임이 있잖습니까. 결과적으로 조금밖에 손해 본 게 없습니다.”

 

오 상무의 위로가 그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

 

“그래도 지금 미수운임이 2백만불이나 되잖아. 못 받은 것은 못 받은 거니까.”

 

전무는 끝까지 자기 책임으로 묶어두려 한다. 영화에서도 십자가는 예수 혼자서 지고 가더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홍미라가 조 전무에게 다가왔다.

 

“전무님, 시트는 쉬시라고 깔아드린 거지 주무시라는 뜻은 아녀요. 쉬셨다가 댁으로 가세요, 아시겠죠?!”

 

“알았다. 고맙다. 빨리 가서 쉬어라.”

 

여름이 지나간 9월 초의 저녁은 더운 바람이 약간 남아 있지만 조 전무의 등에 깔린 시트는 차갑게만 느껴졌다. 2녀1남 대학을 끝내려면 10년은 더 남았다. 가장으로서 몸을 추슬러야 하는 이유는 더 있다. 동창회에서 씀씀이를 자랑하는 마누라의 자손심도 살려줘야 한다.

 

바나나가 그대로 실려 있는 울레니엄호는 러시아로 출항하기 위해 앵커를 올렸다. 선장에게 항해지시를 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간 오선덕은 본선에 방문했다가 배의 출항을 지켜보았다.

 

통선에 내려서 배의 선수갑판으로 올라가는 앵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오선덕의 눈에는 초점을 찾기 힘들다. 오늘따라 앵커가 왜 저렇게 무겁게 올라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선수 앵커파이프를 통과할 때는 체인이 긁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앵커마저 분위기를 아는 모양이다.

 

서울 사무실은 점점 침울해져갔다.

전무는 초조한 표정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붕에서 아무 연락 없단 말이지?”

 

전산실로 들락날락해도 도착한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로 출장 간 김대두 사장은 끝내 바나나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러시아 재수출은 물 건너갔다. 비지 사러갔다가 두부 사오는 사람도 있는데 김 사장의 소식은 뚝 끊겼다.

 

수입자유화 초기의 행운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행운은 빌린 것이지 소유가 아니다’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만 자꾸 조 전무의 머리를 스칠 뿐이다.

 

 

 

13. 책임자

 

한국해운 서울본사는 비상상황에 돌입했다. 야전침대의 효과는 미미하다. 전쟁은 있었으나 전리품이 없다. 조 전무와 오 상무의 엉덩이는 응접실 의자와 야전침대 간을 왔다 갔다 했다. 좋은 소식이 들리면 의자에 앉고 나쁜 소식이 들리면 야전침대에 걸터앉았다. 의자에 앉기를 바랐으나 야전침대만 자꾸 삐걱거렸다.

 

“대붕에게 최종 통보하겠습니다.”

 

오선덕은 조 전무에게 말하고 말았다. 금일 오후 6시까지 화물인도(Delivery Order) 요청이 없으면 화물을 임의 처분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보낼 작정이다.

 

예상했던 대로 대붕은 사장 유고 사태를 맞고 말았다. 회사의 직원도 보스의 행방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제 오선덕에게는 명태 어획물 운반이 중요하다. 전무의 결심을 재촉해야만 한다.

 

“다음 항차를 위해서 바나나를 조속히 해상 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캄차카 남쪽 공해상에 투기할까 합니다만……….”

 

“선원들이 작업에 잘 응해줄까?”

 

보고를 받는 전무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특수상황을 이해시켜야죠. 경험 많은 그리스 선장이니까 이해할 겁니다.”

 

“작업비를 조정해서라도 잘 설득해 봐요.”

 

조 전무는 어깨가 폭삭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화물을 담보로 한 외상 운임은 전혀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네 개의 선창에 실려 있는 바나나는 박스 채로 바다로 투하되었다. 선원들은 피로한 몸으로 작업을 해냈다. 작업비는 시간당 10달러로 조정했다. 작업은 나흘이 걸렸다.

 

“얼마나 비싼 바나난데……. 차라리 북한에 거저 줄 수 있었다면?”

 

조 전무의 아쉬움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기분이 이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수입자유화 이전에는 금덩어리 같은 바나나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각오는 바다에 매골’

상선대학에서 부르짖던 구호였는데 엉뚱하게 바나나가 매골하고 말았구나.

 

고양이는 쫓아오는데 도망갈 구멍이 없는 쥐의 최후는 막장 투혼뿐이던가.

조 전무는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오 상무, 오늘 한잔 하지 않을래?”

 

“그러시죠. 블루베리 들르신 지도 오래되었고요.”

 

조 전무는 속으로 멋쩍어했다. 요즘 그곳에 자주 들르는 것을 오 상무가 알 턱이 없지. 40대 중반의 마담이 입심 좋은 화술로 그의 우울한 마음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주곤 하는 것을 알기란 쉽지 않을 거야.

 

“김대두가 철저히 우릴 망가뜨렸군.”

 

블루베리의 테이블에 앉았을 때 조 전무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오선덕은 술자리에서 바나나 이야기를 피하고 싶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차라리 마담의 귀밑에 있는 좁쌀만한 점이 매력적이고, 콧날에 파리가 앉으면 낙상하기 십상이라는 둥, 그런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바나나가 80퍼센트 이상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위스키가 몇잔을 주고받고는 화제가 바나나로 돌아왔다.

 

“김대두 자신도 망하고, 우리도 동반 피해자가 아닌가.”

 

조 전무는 그렇게 말하고 긴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 사장과 배 사장은 용케 멈춰 그나마 다행이군.”

 

“그러게요.”

 

오선덕은 둘만 있는 게 어쩐지 허전하고 불편했다. 조 전무의 고독을 혼자서 떠받치기가 너무 힘겨웠다.

 

“정 사장과 배 사장이 동석하면 어떨까요. 불러볼까요?”

 

“연락이 되려나?”

 

다행히 연락이 됐다. 배순욱 사장이 도착한 지 10분 후 정다남 사장이 들어섰다. 그들이 이곳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조 전무와 두서너 번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층 블루베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잠실 석촌호수는 불빛에 파랗게 반사되어 신비로웠다. 블루베리의 홀 내부 인테리어도 코발트블루의 불빛에 파랗고 아담하게 은은했다.

 

“오늘은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두 분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도착한 정 사장이 조 전무 옆에 앉더니 발렌타인 17년산의 잔을 들며 오늘의 스폰서로 자임했다. 그녀의 얼굴은 파란 불빛에 반사되어 가부키 화장처럼 딴 분위를 만들었다.

 

배 사장은 멜로드라마 분위기가 어색하다고 느꼈다. 사업은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는데 오늘은 사람이나 불빛이나 왜 모두 블루라이트인가.

 

“한국해운을 위하여!”

 

배 사장은 일부러 건배를 제안했다. 이것조차 분위기를 업 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조 전무와 오 상무의 잔은 돌을 넣은 것 마냥 무거워 보였다.

 

조 전무의 손이 떨렸다. 그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나 더 이상 못 마시겠어. 속이 메슥거려. 오늘 술 안 받아.”

 

조 전무의 어색한 모습에 모두들 의아해했고, 특히 정 사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칵테일로 해드릴까요?”

 

조 전무는 사양했다. 술을 별로 사양해본 적이 없는 그였기에 더 이상하다. 비싼 술인데, 마다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며 그는 의자 손잡이를 밀고 일어섰다.

 

“먼저 가야겠어. 내려오지 말아요. 나 혼자 갈 수 있어. 택시 잡으면 돼.”

 

조 전무는 일어서면서 네 문장을 한꺼번에 말하고 금방 사라졌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불빛만 감지했을 따름이다.

 

“쿠 당 탕”

 

갑자기 계단 아래층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덕이 반사적으로 놀랐다.

 

“주인 마담, 저게 무슨 소리죠?”

 

“제가 내려가 보고 오겠습니다.”

 

곧장 내려간 마담.

계단 밑에 어떤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조 전무님이 쓰러졌어요. 오 상무님 빨리 내려와 보세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조 전무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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