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바나나 쟁탈전

바나나 쟁탈전(제1회)

오선닥 2013. 9. 9. 18:17

1991년은 대한민국에 특별한 해.

 

바나나를 가득 실은 배가

물밀 듯이 항구로 들어왔다

 

바나나 수입개방!!!

 

치솟았던 가격은 곧 곤두박질

많은 수입상들이 도산

~~

혹은 생을 포기?

(수회 연재)

  

 

 

 

바나나 쟁탈전

제 1 

 

 

1. 밀물

 

1991년은 잔인한 해로 기억된다. 처음부터 잔인했던 것은 아니다. 연초 바나나 전면수입 개방이 되자 실바람 살랑대는 봄부터 사람들은 특별한 과일 향기에 취해 가기 시작했다. 코리언은 코를 마사지하는 바나나 향기에 점점 중독되어 갔다. 혀를 감싸는 맛은 환상적이다.

 

오래 사니 이런 때를 만나구나.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행복해했다.

 

수입개방 전인 작년 여름 오선덕은 바나나 한 손을 17,000원에 샀었다. 지인의 집 방문에 이만한 고급선물을 찾을 수 없다. 과일바구니에 조심스레 담은 바나나는 보물단지처럼 지인 앞에 놓여졌다.

 

“아니. 이 비싼 과일을?”

 

지인은 오선덕의 통큰 선물에 입이 일자로 벌어졌다. 오선덕도 기분이 좋았다. 바나나는 선택된 사람만 먹는 것으로 은근히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지인은 가락시장에서 대형 과일점포를 여러 개 갖고 있는 배순욱 사장이다. 현금 뭉치를 항상 옆에 두고 있는 그가 바나나 수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한국해운의 영업상무 오선덕은 이런 면을 알고 찾아갔었다.

 

“바나나 수입이 내년 초 개방됩니다. 국내 유일한 냉동운반선사인 저희 회사는 바나나 운송을 하려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바나나 이야기를 직접 운송회사로부터 듣자 배순욱 사장은 호기심이 당겼다.

 

“바나나 수입 사업이 괜찮을까요?”

 

예상한 대로 배 사장이 깊은 흥미를 보이자 오선덕은 기분이 좋았다.

 

“배 사장님의 경우는 현금 능력이 계시니까 초기 순발력으로 수입하시면 괜찮을 겁니다. 물론 장기적으론 조심해야겠습니다만.”

 

바나나 수입을 하면 운송은 한국해운에 맡겨달라는 뜻으로 오선덕은 바나나 선물을 하고, 그리고 바나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런 바나나가 수입개방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가격이 곤두박질한 것은 결과론이다. 철옹성 같은 성벽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상황. 무너진 성 안으로 바나나는 화려한 브랜드의 날개를 달고 밀물처럼 들어왔다.

 

델몬트, 돌, 치키타, 자연왕국……

 

한반도는 온통 바나나 천국으로 변해갔다. 산천이 황달로 변해갈 정도다. 바나나 쟁탈전의 이야기는 탐욕의 사다리를 타는 사람들이 어떤 결말로 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 수입상

 

수입자유화를 앞두고 바나나 수입계약이 우후죽순처럼 체결됐다. 부산항에는 지난 연말부터 바나나 운반선들이 입항해 접안 차례를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

 

한국해운의 냉동운반선 성일호도 그중 한 척. 수입개방 후 바나나 수송선으로서 세 번째 하역순서를 지정받았다.

 

수입상 대붕의 김 대두 사장은 세 번째 순서에 크게 만족했다. 앞의 두 선박이 물량을 먼저 풀어도 바나나 수요가 워낙 많기 때문에 좋은 가격이 보장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 상무님, 이번 4천톤 하역하면 대박입니다. 하역 후 무조건 한턱 쏠게요.”

 

성일호는 시장 운임의 두 배를 받고 운송계약을 맺었다. 물론 페루 오징어 선적해역으로 보낼 냉동운반선을 바나나 운송으로 돌린 것이지만 곱빼기 운임은 파격적이다. 수입상들이 서로 배를 빌리겠다고 경쟁하는 사이에 운임이 껑충 뛰었다.

 

한턱을 쏜다면 오히려 오선덕 쪽에서 쏘아야 하지만, 대붕의 김 사장은 기분이 붕 떠 있는 상태라 쌍권총이라도 쏘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 좋은 과일을 왜 일찍 수입개방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노랗고 맛이 좋아 누구나 즐겨 먹는 바나나. 김 사장은 오 상무의 응접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견본 바나나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바나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높고 가장 많이 재배되는 과일이다. 밀, 쌀, 옥수수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을 정도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구상 수억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리고,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수백만 명의 생사를 좌우하는 주식이기도 하다.

 

오선덕은 김 사장에게 신뢰를 보이고 싶었다.

 

“사과 배 등 국내 과일농업 보호를 위해 수입개방이 어려웠지요. 지금은 제주도에서도 바나나를 생산하는데 연간 2만5천톤이나 되어요. 수입개방 전에는 연간 5만톤이 소비됐는데 수입개방 이후론 20만톤 소비를 예상하더라구요.”

 

신문에 실린 내용을 오선덕은 이야기했을 뿐이다.

김 사장의 마음은 고무풍선을 타고 있다.

 

“바나나 수입상과 운송사는 상부상조해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김 사장의 생각이다. 운송사는 운임만 좋으면 누구의 화물이라도 실어준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겠지. 그래도 상부상조는 듣기 싫은 말은 아니다.

 

수도권의 잔챙이 도매상들이 신규로 바나나 수입업체로 등록했다는 소문이 김대두 사장의 귀에 들어왔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졸부 사장들이 너나할것없이 바나나 수입에 뛰어든다고 해도 선견지명을 가지고 발빠르게 뛰어든 자신은 다르다고 자부한다. 백 년 전 알래스카 골드러시 때도 돈 번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데.

 

부산 감천항에서 성일호의 바나나 4천톤이 드디어 하역을 마쳤다. 우선 부산과 양산의 보세냉장창고로 옮겨졌다. 여기에서 전국 바나나 도매상에게 몇십톤씩 냉장컨테이너로 넘겨졌다. 도매상에게 일차 배분 후 남은 바나나는 2천톤 정도다. 이 물량은 김 사장이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와도 같은 것이다.

 

“오 상무님, 바나나는 제 자존심입니다. 배분에 신경을 좀 쓸까 합니다.”

 

김 사장의 머릿속에는 바나나 배급망이 파리 중심가 도로망처럼 방사선으로 그려졌다.

 

가방끈이 짧다고 평소에 자기를 무시한 방 사장에게는 바나나 한손도 가지 않을 것이고, 일전에 급전을 빌렸을 때 달러이자를 받아갔던 천 사장은 노란 영양식 과일을 눈요기 정도로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묘한 윙크를 보내곤 했던 여사장 박춘희에게는 그녀가 원한다면 몇톤은 주고 싶다. 사장들이 그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은 생각할수록 기분 좋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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