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운항사 제도

운항사 제도를 만들라(상)

오선닥 2013. 1. 25. 20:10

88올림픽이 지난 무렵

 

2년 6개월 동안 승선한 배를

갑자기 하선하는 오선덕 선장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육상에서 일하라는 특명

그것도 연구소에서.

 

<선원선박 근대화>를 연구하라는 것

본래 직업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건데

이게 「운항사 제도」의 기초가 될 줄이야……

 

세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운항사 제도를 만들라(상)

 

 

 

깜짝 놀랐다. 예견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오선덕 선장은 짧은 전보문을 이미 세 번이나 읽고 있는 중이다.

 

「울산항 도착 즉시 선장 교대 예정. 인계인수 준비 바람」

 

울산항 도착을 일주일 앞두고 날아온 전문이다. 통신장이 모스부호를 받아 타이핑해서 전해준 전문을 받아든 오 선장은 통신실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읽고 있다. 아랍어로 써놓아도 이처럼 해석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선에 관해서 회사가 언급한 것은 한 마디도 없었는데.

 

“그래도 회사에서 귀띔이라도 줬었을 거 아닙니까?”

 

전문을 자꾸 들여다보고 있는 선장이 딱해 보였던지 통신장은 자신이 되러 미안하다는 듯 안절부절한다. 오 선장도 회사의 태도가 좀 불쾌하다.

 

“글쎄 말여. 아무리 배를 오래 탔더라도 이렇게 취급하면 안 되지.”

 

“장기 승선에 상을 줘도 모자랄 판인데 말입니다.”

 

통신장이 덩달아 흥분하자 오 선장은 오히려 멈칫거려진다.

 

2년 6개월 동안 승선해 온 배는 친할 대로 친해져버렸다. 배 귀신이 되든 말뚝을 박든 하려 했는데……. 아, 철판에 말뚝을 박을 순 없지.

 

10개월의 의무 승선기간이 지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배를 자기 집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가. 베트남이나 태국의 강에 띄워 놓은 보트하우스쯤으로 생각했다는 건가. 이런 장기 승선은 기네스북감이다. 요모조모 생각해봐도 오선덕 자신은 미련한 놈이 아니면 신기한 놈이다. 더 기가 찰 노릇은 장기 승선을 위해 침대까지 까발려 햇볕에 바싹 말려놓았다는 점이다.

 

창피하게시리.

스스로 하선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고삐에 끌려 강제 하선당한 꼴이다.

미운 사람 창피를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 일류선장을 삼류 취급하다니.

온갖 심사가 교차한다.

 

부두에 배가 접안하자 지사장과 교대선장이 함께 승선한다.

 

“본사에 가시면 회사의 특명이 있을 겁니다. 지사로선 그 이상 아는 바가 없습니다.”

 

혹시 있을 질문을 미리 막으려는 듯 지사장은 말을 줄였다.

 

하선하는 봇짐이 무겁지는 않다. 육상의 이삿짐이라면 10톤 트럭분은 되었을 텐데 그에겐 트렁크 두 개밖에 없다. 그동안 동거동락하다가 함께 내리는 가방들이다.

 

하늘엔 뭉텅이 구름이 눈이나 비를 안고 금방 쏟아질 것만 같다. 구름조차 자꾸 서두르는 느낌이다. 인계인수는 하룻밤 사이 해치워버렸다. 회사는 빨리 상경하라고 미리 항공권을 준비해 놓은 상태다.

 

트렁크 두 개를 든 채 바로 서울 본사에 들어서는 오 선장.

오후 7시인데도 사장은 퇴근하지 않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단김에 용무를 말한다.

 

“좀 궁금했지요? 내년 1월 1일부로 선원선박연구소에 파견근무하게 됐소. 급히 하선을 주선한 것도 이 때문이오. 너무 오해하지 말아요. 태스크포스 팀 신청서류에 본인 서명이 급히 필요해 부득이했소.”

 

연구 활동 기간은 일 년이란다.

 

K사의 사장 송호걸은 선주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협회는 신년 핵심 사업으로 ‘선원선박 근대화 연구’를 설정하여 일사천리로 밀고 나갈 계획이다. 그는 아이디어가 번뜩이면 즉각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승선했는데 가족여행도 못하게 돼 미안하구려. 연구 마치면 휴가 실컷 줄 테니 그때 쉬어요.”

 

송호걸의 인간적인 면이 보이는 부분이다.

 

 

 

 

1월 3일 연구소에 첫 출근하는 오선덕.

차를 몰고 가는 것이 마치 배를 몰고 가는 듯 울렁거림을 느낀다. 운전석 의자가 파일럿 의자처럼 흔들거리는 착각도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는 마치 피칭하는 느낌. 가끔 차가 좌우로 흔들릴 때는 롤링을 타는 기분.

 

연구소 직원에 대한 소개는 송 회장이 직접 한다.

 

“내가 말한 오선덕 선장이오. 일 년 동안 함께 연구소에서 일하게 될 사람이오.”

 

자기 회사 소속 선장을 소개하는 데 뿌듯함을 느끼는 송 회장이다. 전문 연구원만 있는 연구소에 선장을 합류시킨 것은 자신의 탁월한 판단이라고 만족해한다.

 

연구소는 선주협회 사무실의 바로 위층에 있다. 같은 층에 협회장의 사무실이 붙어 있어 연구의 진행 상황을 회장이 수시로 체크해 보기가 편리하다.

 

서로의 인사가 끝나자 여성 연구원이 무릎을 세워 일어난다.

 

“오 선장님, 커피 한 잔 끓여드릴게요.”

 

여성은 붙박이 주방으로 간다. 나중에 단체 소개가 있겠지만 그녀는 전계린 박사다.

 

옆의 연구원들이 그녀에게 의미 있는 눈웃음을 보낸다. 설마 커피 한 잔만 가져오지는 않겠지 하는 눈치들이다. 기대에 부합되게 커피 네 잔과 유자차 한 잔을 가져와서 내려놓는다. 유자차 한잔은 그녀의 것이다.

 

팀장 박기용 박사가 먼저 커피잔을 받아들고,

 

“고마워요.”

 

감사 표시를 하자, 오선덕의 ‘감사합니다’는 인사의 존재감이 위축돼버렸다.

 

연구실 분위기 괜찮네. 원래 연구실이라는 게 이런 거군. 선박보다 분위기가 좋은데.

오선덕은 신기한 느낌으로 커피 향을 즐겨나갔다.

 

선원선박연구소는 선주협회가 운영하는 연구기관이다. 연구소엔 네 명의 연구원과 한 명의 원장이 있다. 모두 박사 출신이다. 태스크포스(T/F) 팀에는 원장을 제외한 연구원 네 명 모두 동원됐다. 여기에 오선덕 선장이 추가된 것이다.

 

박용기관: 박기용 박사 52세 팀장

해사법학: 이해출 박사 48세 연구원

해운물류: 류승운 박사 42세 연구원

전자기기: 전계린 박사 31세 여성 연구원

선원선박: 오선덕 선장 40세 연구원

 

연구원 중에 여성이 포함된 것이 특이하다. 전계린 박사는 여성 선원 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그녀는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선박의 자동화에 전자기기의 역할에 대한 연구도 하게 된다. 대통령 딸도 전자공학과 출신임을 늘 강조하곤 하는 여성이다.

 

동양의 풍토에서 여성 선원 도입을 검토한다는 것은 혁명에 가까운 시도다. 연구 과제인 「선원 및 선박의 근대화」는 선주협회가 최우선 추진하는 중점사업으로 일 년 안에 끝내야 한다. 그러므로 연구원 모두 워밍업을 줄이고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운항사제도의 실현성에 대한 연구다.

 

운항사란 자동화선박에서 선박의 운항, 기관의 운전 및 선박의 통신 등 선박운항에서 복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다기능 해기사를 말한다.

 

운항사는 면허등급에 따라 1급에서 4급 운항사까지 구분하지만, 선박 내 직무에서 1등 운항사에서 3등 운항사까지로 구분한다.

 

연구 단계에서는 복수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했으나 현실적으로 걸림돌이 많아 결국은 통신사를 없애고 항해사가 업무를 대신하도록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세계적으로 인원 감축의 필연성 때문에 선박자동화의 강화를 통해 운항사 제도가 점진적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현재의 1급∼6급의 항해사·기관사 면허 제도를 유지해 나갈 것으로 생각된다.

 

시대는 바뀌어 통신사들의 손때 묻은 모스 키는 역사의 유물로 남게 됐다. 유무선 모두가 직접 음성 전달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구태여 돈(‧) 쓰(-) 하는 식의 부호가 필요 없는 것이다.

 

범세계적으로 선원직 기피 현상은 선박시설을 근대화시키고 선원제도를 합리화시켜야 하는 환경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운항사 제도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운항사를 채용하는 곳은 일부에 그치고 있다.

 

50만톤짜리 큰 배를 선원 20명 정도로 어떻게 운항하는가는 기술적인 문제보다 고독의 문제라는 엉뚱한 장애요소가 거론되기도 했다. 야간 순찰은 어떻게 하며, 비상시 선수미 450미터에 달하는 배를 어떻게 왕래하며, 또 수리는 어떻게 할 건지…… 온갖 문제점이 노출된 바 있다.

 

현실감각을 살리면서 연구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정부와 상의한 끝에 대학 실습선을 일시적 연구소로 사용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달은 연구소에서, 두 달은 실습선에서, 나머지 아홉 달은 연구소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이 확정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연구가 끝난 4년 후 1993년 상선대학에 여학생 입학이 허용됐다.

뉴스감은 오선덕의 생질녀 장세빈이 국제해양대학의 최초 여성 입학생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모부의 마도로스 모습이 그녀의 입학에 영향을 줬다는 것.

 

제1회 졸업생의 프레미엄은 참으로 대단하다. 총장이 직접 여성 졸업생의 취업에 발 벗고 나섰다. 여성졸업생의 백퍼센트 취업이 달성됐음은 물론이다.

 

“너는 씩씩하고 미인이니까 앞으로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야.”

 

오선덕은 마구 추겨 올렸다.

생질은 전적으로 동의하려 하지 않는다.

 

“외삼촌, 미인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씩씩하다는 말은 빼세요.”

 

진정한 여성다움이 씩씩한 기상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여자들은 스스로 포기한다고 생각하는 오선덕.

 

“여성에게도 인생은 어차피 도박이야. 프레미엄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건가? 지금부터 결심을 다지고 올인하라구.”

 

“어떤 진로가 전망이 좋을 것 같은데요?”

 

조카는 조금 마음이 내켰던 모양이다. 오선덕은 자신의 세대가 주지 못하는 근사한 미래상을 추천하고 싶다.

 

“궁극적으론 크루즈선 선장이다. 일만 명이 승선하는 20만톤짜리 대형 크루즈선의 여성 선장! 상상해봐. 얼마나 멋있어. 드라마 러브보트에 출연할 수도 있다니까.”

 

오선덕의 솔직한 감격 발언이었다.

조카는 반응이 신통찮다.

 

“동양에서 크루즈선은 아직 먼 나라 얘기예요. 다른 여학생 추천하세요.”

 

외삼촌의 기대와는 달리 결국 조카 장세빈은 의무 승선기간 3년이 종료하자 곧 해양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업하고 말았다.

 

“아까운 여성, 미래의 크루즈선 선장을 놓쳤군.”

 

조카란 삼촌에겐 실망 덩어리인가.

 

 

 

 

선주협회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한 지 3주째 되는 날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한강 쪽으로 불었고, 이윽고 한강 유람선을 타며 한강을 배경으로 저녁을 먹자는 신선한 발상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선원 및 선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실제 승선 경험이 중요하다면서.

 

“배의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지요. 유람선의 구조도 한번 보자는 거지요.”

 

해운물류가 전공인 유승운 박사의 해괴한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람은 본인 외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강드림호 뷔페에 다섯 명은 모였다.

저녁을 럭셔리하게 체험하자. 가난한 연구원도 한 번쯤은 고급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던 끝이다.

 

88서울올림픽을 기해 한강은 잘 정비되었고 수량은 풍부하다. 유람선이 허리 깊게 잠겨도 배의 항해에는 지장이 없다. 템즈, 센느 강도 이와 같을 거야.

 

여의도-잠실-양화대교를 순항(巡航)하는 두 시간의 항해는 와인 두 병을 소비하기에는 적당하다. 창을 옆에 두고 물 냄새를 안주 삼아 마시는 분위기도 색다르다.

 

한강의 야경은 총천연색. 올림픽 관광객의 혼을 빼놓은 바 있는 분수, 폭포, 다리 난간의 곳곳에서 화려한 무지개 불빛을 뿜어낸다. 외국의 어느 강에서도 좀체 보기 힘든 광경.

 

각자 와인 잔을 들고 선교로 올라간다. 유람선 선장에게 와인을 권하는 해사법학을 전공한 이해출 박사를 오선덕이 급히 만류한다.

 

“근무 중인 선장님에게 음주 운전시키면 곤란합니다.”

 

유람선 선장은 비시시 웃는다. 알래스카 해역에서 대형 기름유출을 일으킨 엑손발데즈호의 좌초사고도 선장의 알코올중독이 원인이었음을 설명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들은 습관적으로 연구과제가 하나 더 생겼다고 신기해한다.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유람선 안에서 라이브 공연과 마술쇼조차 일행에겐 관심 밖이다. 결혼기념일, 프로포즈 등 행사를 하는데도 신경을 끈다. 연구의 목적을 위해 유람선을 탔을 뿐이라고 강조하는 연구원들로 인식되고 싶어서인지.

 

마리나 선박들에는 승조원과 법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도 그들의 연구과제에 포함된다. 종류도 다양하지. 모터보트, 고무보트, 요트, 윈드서핑, 수상오토바이, 호버크래프트, 카누, 카악, 유어선, 유람선…….

 

특색에 따라 선박의 구조와 선원제도의 합리화가 요구된다. 연구원들의 연구 과제로서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포도주가 주는 얇은 취기를 한강 바람에 비벼 날리며 유람선을 떠나 여의도 선착장에 내리는 그들. 아쉽지만 택시에 나눠 타고 귀가하기로 한다.

 

부두에서 부른 택시 두 대가 도착했다.

강북 방향 세 사람, 강남 방향 두 사람.

강남 방향 택시에 전계린과 오선덕이 오른다.

 

오선덕이 전계린을 택시 뒷좌석으로 안내하고 자신은 앞쪽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방배동에 먼저 내려드리고 서초동으로 가세요.”

 

방배동 아파트 앞에서 택시는 얌전히 섰다. 여성을 하차시킬 때는 브레이크도 부드럽게 밟는가 보다.

 

그런데 전계린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린다.

 

“오 선장님, 포장마차에서 한잔 더 하실래요? 저기 저희 단골이 있어요.”

 

오선덕이 멈칫했다. 처음 받는 여성의 호의에 신사는 순순히 따라야 하나.

 

택시 안에서 전계린은 자신의 신상을 간단히 소개한 바 있다. 세 살짜리 딸이 있는 이혼녀라는 것. 회사의 여성 직원과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콕 잡아내 이혼장에 도장을 찍게 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여자다.

 

“아이가 기다린다면서요.”

 

“괜찮아요. 외할머니가 돌보고 계시니까요.”

 

대답의 유무에 관계없이 그녀가 앞장서 가더니 깔끔한 포장마차에 머리를 들이밀어 넣는다.

둘은 포장마차 아주머니를 마주보고 나란히 앉았다.

 

“꼭 물어볼 게 있어요. 어떻게 2년 반 동안 한 배에서 지내셨습니까? 전 이혼한 지 10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외로워서 못 견디겠어요. 오 선장님은 네 식구의 가장 맞으세요?”

 

심각한 질문에는 부드럽게 대답하는 습성이 오선덕에겐 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쯤 한국에 오니까 괜찮았어요. 옛날 외국선 승선했을 때는 일 년 반 동안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요. 거기에 비하면 해피한 거지요.”

 

“지독하시다.”

 

그러고 소주 한 잔 들이키고는

 

“바람 많이 피웠겠다……?”

 

상대방을 보지 않고 그녀는 혼자 말했다.

 

“그런 걸 바람피운다고 하지 않아요. 불가항력이랄까…… 그런 겁니다.”

 

상황에 따라 표현은 달라야 한다. 가령 살림에 필요한 돈을 생활비, 생계비 혹은 생존비로 호칭하듯, 동일한 사건일지라도 ‘불가항력’이 들어가면 책임을 면한다. 선박 사고에서 불가항력은 면책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그녀가 알 턱이 없다.

 

“맞아. 우리 남편, 아니 포머 허즈번드(former husband), 아니 그 개자식처럼 눈뜨고 코 빼먹는 외도(外道) 같은 게 바로 바람이지…….”

 

그녀의 입이 이렇게 험악해지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선덕을 쳐다본다.

 

“원래 선장은 핸섬해야 하나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의도인지 모르는 듯 그녀는 술잔에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오선덕은 그녀의 주량이 여기까지임을 감지했다. 일어서야 할 땐가 보다.

 

“쇠주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술값 지불도 핸섬하겠습니다.”

 

오선덕이 일어설 구실로 그렇게 말하자, 이때 손을 휘젓는 그녀,

 

“여긴 제 구역예요. 과부 얕보지 마세요. 위자료 톡톡히 받아놨거든요.”

 

일어서려는 그녀의 발이 약간 꼬이기 시작했다. 오선덕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고, 그도 따라 앉았다. 펄썩 했는데도 의자는 튼튼하다.

 

“외란이가 이 엄마의 외로운 심정을 알 턱이 없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딸 이름을 잘못 지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오선덕도 그 이름은 운명적인 냄새가 나서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명가한테 가져가도 같은 구실을 붙일 거라는 느낌.

 

여자는 옆에 있는 남자에게 잔을 권하지 않고 혼자 홀짝인다. 남자도 자기 잔을 비운다.

 

“외란이를 위해서 다시 합치시죠?”

 

생각할 여유 없이 여자가 바로 받아친다.

 

“합칠 걸 왜 이혼합니까? 그 자식도 똑같은 소리해요. 아이를 위해서라면서…… 진절머리 나요.”

 

“남편이 배라도 타고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 같군요.”

 

“그럼 감지덕지. 왜 그런 놈 골라서 배 태우지 않는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오 선장님 같은 분은 육상에서 근무하시고…….”

 

전계린이 잔을 든 채로 아파트 쪽을 가리킨다.

 

“저기 아파트 불이 보이죠? 맨 왼쪽 맨 위쪽 말예요. 저희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지 않고 계시는가 봐요.”

 

밤은 늦었다. 남편이 위자료로 남겨두고 간 아파트로 여자는 벌써 들어갔어야 하는데 계속 미적거린다.

 

중심 잃은 여자를 아파트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는 오선덕, 앞으로 연구 사항에 바람둥이 남편을 배 태우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판.

 

 

 

 

한 달 후 연구팀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한누리호에 승선했다.

국제해양대학교의 원양실습선 한누리호에 짐을 풀었을 때 그들은 마치 학생인 기분을 느꼈다. 수업하고 실습하는 학생 120명의 틈에 끼어 선원 인턴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실습선 한누리호 길이 117m, 총톤수 6700톤, 최대 탑승인원 250명.

 

배는 구 실습선 누리호를 대체해 1975년 취항했다. 선원선박 근대화 연구를 위해 그들이 두 달 간 머물게 될 장소다. 여기에 머물면서 학교 및 산업체의 선박관련 실험실이나 선원양성소 등을 방문해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하며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

 

참고자료와 옷가지가 든 짐은 2인1실의 방에 풀었다. 전계린은 혼자 방을 사용한다. 연구실은 선내 교수사무실을 쓰기로 했다.

 

선원선박 합리화와 근대화가 절실하다는 것은 부산의 현장에서 목격했다. 두 차례의 유류파동에 의한 해운불황은 조선불황으로 이어져 해운과 조선 양쪽에서 나타난 비용절감 경쟁은 핏방울이 튀길 정도다. 80년대 후반의 원화절상과 노사분규 발생 등이 겹쳐 결국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십 년 가까이 이어지던 장기불황은 1988년 전후해 회복기에 접어들고, 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결과로 해운업계는 정상화를 되찾아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해운업은 규제완화, 자유화, 개방화를 통해 정부의 보호 우산에서 나와 무한경쟁시장을 구축했다. 또한 1990년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해운시장을 발견했다. 즉 북방해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STX팬오션이 글로벌 선사로 도약해 나갔다.

 

“해운과 조선의 회복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빨리 선원선박의 근대화 및 합리화를 추진해 국가 경쟁력을 도모해야겠습니다.”

 

박기용 팀장은 연구를 다그쳤다.

 

“연구를 위해서는 선박구조를 익혀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선박이 마냥 생소하기만 한 전계린이 먼저 제안했다.

 

여객선 형태의 실습선은 내부가 화려하다.

이해출 박사에겐 이런 배는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배가 이렇게 화려해도 됩니까? 호텔 뺨치네요.”

 

“호텔은 이미 뺨쳤어요. 여기 선장실 보세요.”

 

선장실을 본 전계린은 자지러지는 감탄을 보내면서, 그만

 

“여기서 살래요. 연구고 뭐고 이젠 끝났어요.”

 

주저앉으려 한다.

 

 

 

 

연구원은 주 5일 근무를 원칙으로 했다. 평일 배에서 24시간 체류하는 것을 감안한 결과다. 주말 이틀간을 쉬지만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비가 만만찮다. 때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연구원들이 부산에서 뭉개곤 한다.

 

오선덕은 배에서 머무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시간 나는 대로 서울 집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셋째 주는 상경하지 않고 부산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전계린이 부산 구경을 시켜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부산이라면 한 시절 오선덕이 휩쓸었던 곳이다.

 

그들은 태종대 자살바위와 등대가 있는 신선암에서 파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자살과 타살의 구분을 애매하게 할 만한 장소라는 점에 둘의 생각은 일치한다. 부부사이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약간의 거리를 둔다든지, 딴 방향으로 경치를 감상한다든지 하는 현명함을 보인 것은 지식인답다. 발을 헛디뎌 쓰러질 뻔한 그녀를 오선덕이 잽싸게 허리를 낚아챈 것은 불가피한 상황에 속한다.

 

순직선원위령탑 앞에서는 바다가 삼킨 선원이 이렇게 많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나중 2012년경엔 9000위의 위패가 안치될 줄이야.

 

돌아오는 길에는 섬이 다섯 갠지 여섯 갠지 애매한 오륙도를 보았고, 그 앞에 우뚝 솟은 섬에 얹혀 있는 학교를 보았는데, 전계린은 그냥 지나치기를 거부하고,

 

“오 선장님의 모교인가요? 빠삐용의 감옥 같네요.”

 

농담을 섞었다.

오선덕도 기분 좋게 보조를 맞춘다.

 

“감옥치고는 고급 감옥? 학생들은 갇혀서 공부만 하면 되지요.”

 

택시기사로 하여금 아리랑고개를 넘어 동삼동의 구 캠퍼스 쪽으로 가게 한다. 봉래산 허리를 두르고 있는 가파른 도로를 달리면서 해변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중에 두 사람의 어깨가 밀착됐다. 아찔한 광경에 놀란 탓이라고 변명하려 한다.

 

젊은이 데이트코스로 자주 이용되던 에덴공원과 성지곡수원지는 추억을 회상하는 필수코스. 해운대의 동백섬에서 부산갈매기의 날개 짓을 지켜보고 바다와의 친밀감을 배운다.

 

용두산에는 꼭 올라가봐야 한다. 부산항을 근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언제 봐도 든든하다.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 한 컷을 찍어 놓으면 항구를 손아귀에 넣은 기분을 막지 못한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 남포동과 광복동 거리에 맞닥뜨린다.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간 두 사람은 유리창 채색이 진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함께했다. 저녁을 얻어먹은 쪽이 영화 티켓을 산 것은 자연스럽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해적>은 공동체 연구에 조금 참고가 될 거라면서 튀니지 해안에서 벌어지는 해적 화면에서 스릴을 느꼈다.

 

“설마 해적선까지 근대화하진 않겠지요?”

 

여자는 옛날 해적선을 지금의 상선으로 착각할 만큼 어리석은 박사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소말리아 해적은 21세기 이야기로 알 턱이 없을 테고.

 

영화관을 나오는 두 사람은 마음이 바쁘다.

 

“통선시간에 맞출지 모르겠네요.”

 

어느 쪽이 초조함을 나타냈는지 알 필요 없이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겨우 몇 분을 남기고 통선장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 파랑주의보로 통선 운행이 중지됐다는 것. 다른 배 선원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부득이 부근의 관광호텔에 들어갔을 때 전계린이 어색함을 나타냈다.

 

“기혼 남녀가 한 호텔에 머문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오선덕은 그녀가 걱정하는 게 뭔지 짐작했다.

 

“부산에 아는 사람이 많으신가요? 여긴 보는 사람 없어요.”

 

“제 문제가 아니라, 오 선장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까 걱정돼서요.”

 

“양심에 부끄럼 없으면 됐습니다. 여성 선원이 승선했을 때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그는 일부러 웃음을 보였다.

 

“뭐든지 연구와 관련시키려 하시니 이것도 문제네요.”

 

전계린이 먼저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 객실은 같은 층이었으나 한참 떨어져 있다.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항구는 구름과 바람과 파도가 뒤섞여 험악하다. 저 해상 상태에서 통선이 운항할 순 없지. 여자는 바다가 우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무서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인터폰이 울렸다.

 

“지하 바에서 워커 한 번 신어보실래요?”

 

오선덕의 말을 전계린이 알아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눈치도 박사다.

 

 

 

 

바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서슴없이 주문한다.

 

“전 블랙 언더락스로 하겠어요.”

 

자니워커 블랙이 혀끝을 따뜻하게 하자, 그녀는 이어서 궁금한 걸 묻는다.

 

“바다 울음 맞죠? 방에서 들었어요.”

 

아이 같은 질문인데도 너무 진지하게 들려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오선덕은 과학적 대답으론 그녀를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합치면 그렇게 들려요. 사방을 먹구름으로 감싸면 바다울음으로 들립니다.”

 

“망망대해 큰 배에서 혼자 있으면 무섭겠네요.”

 

“선원수를 계속 줄여나가면 선원들은 무인도의 고독을 느낄 겁니다. 이런 심리적인 면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할까…….”

 

결코 농담이 아니다.

간혹 몸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울 때가 있다.

 

두 사람이 선원의 고독을 주제로 알코올에 취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둘은 동시에 움칠했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연구원님들도 통선이 없어 호텔에서 머무는 신세가 되셨군요.”

 

한누리호의 최승호 선장이다. 그 역시 배로 들어가려다가 같은 신세가 된 꼴. 집은 울산이었으나 궂은 날씨에 왔다 갔다 하기가 귀찮아 호텔에 머문다는 것. 술 한 잔 생각이 나서 내려왔다고 한다. 오선덕이 그를 옆자리로 안내했다.

 

“같은 처진데 한 잔 하시죠.”

 

“그럴까요. 저도 심심하던 차에…….”

 

최 선장은 몇 달 전 해사대학 3학년 학생을 데리고 순회 실습을 마치고 돌아왔다.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 순으로 50일간의 항해를 마쳤다. 현지 교민들의 초청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동문들을 초청하여 선상리셉션을 열어주기도 했다.

 

“선원 감축이 선원합리화라고 하면 결국 무인선으로 가는 게 아닌가요?”

 

전계린은 두 선장이 들으라는 식으로 SF소설보다 앞서가는 질문을 했다.

 

“그게 문젭니다. 기술적인 문제 외 법적문제, 책임문제, 정서문제 등이 발생할 수 있지요. 특히 국제법을 어떻게 정비하는가는 국제해사기구의 과제이기도 하겠지요.”

 

최 선장은 의견을 이어나갔다.

 

“소수 인원 선박에서는 인간 고독의 심각한 고민이 탄생합니다. 이 때문에 무인선이 해법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요.”

 

술자리에선 문제점만 나열하고 해결은 연구과제에 붙이기로 했으나 오선덕은 무인선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4만 킬로나 되는 지구 원주를 무인선이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네요. 혹시 실수로 유조선이나 가스선이 서로 충돌한다면 그 결과는?”

 

최 선장이 고약한 쪽으로 말꼬리를 돌려본다.

 

“배들이 술 취한 사람처럼 돌아다닌다? 교통경찰이 오토바이로 따라다닐 수도 없고…….”

 

“글쎄, 무섭기까지 하네요.”

 

전계린의 떨림이었다.

오선덕은 여성 선원 문제가 궁금해 최 선장에게 물었다.

 

“실습생들의 여성선원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다들 찬성하지요. 성의 고독을 해소하는 방편이 될 수 있고…….”

 

“폐쇄된 공간이라…… 남녀 혼승으로 인한 스캔들 같은 것은?”

 

“있을 법하지요. 그런데 스캔들이란 속성상 인간 세상의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 아닌가요? 솔직히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네. 현대의 자유분방한 시대에.

정박 시 가족이 승선하도록 출입국관리소와 세관, 검역소 등에서 적극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밀수 방지를 위해 가족 승선을 금지했던 때는 이미 지났다는 것.

 

화제는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오선덕이 말머리를 틀었다.

 

“선박자동화로 인해 선교에서 집중 제어가 가능해 기관실을 무인화하고, 아파트 13층 높이 아래의 기관실에 당직서려 내려갈 필요가 없으니 어느 정도 정원을 줄이는 데는 문제가 없네요.”

 

“입출항이나 하역작업 시 소수인원이 선수미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지요. 평면적이 축구장의 다섯 배나 되는 배를 걸어서 다니기에는 시간이 걸리고.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은 안전문제가 따르지요.”

 

최 선장의 현실감각이 두드러진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었다.

 

“선박자동화로 인한 정원 감축 가능성은 전 박사님께서 결론을 잘 만들어 보십시오.”

 

실습선 선장이 전계린의 전공을 알아채고 주문한다.

 

술자리가 어느덧 연구실 냄새가 나서 오선덕이 분위기를 전환하기로 한다.

 

“연구는 월급 받는 시간에 하도록 하고 이제 술맛에 집중하시죠.”

 

적응력이 빠른 건지 금방 주류매상 분위기로 전환했다. 바깥의 험악한 날씨에 비해 지하 바의 공기는 취기로 따뜻해졌다.

 

“이 따뜻한 기분을 안고 자고 싶으니, 절 방으로 좀 데려다 주세요.”

 

전계린이 갑자기 벗었던 코트를 들고 일어났다.

열쇠를 쥐고 호텔 방 문을 여는 그녀의 손이 부자연스럽다. 취했는지 취한 체를 하는 건지 약간은 애매하다.

 

“주세요. 제가 열어드릴게요.”

 

오선덕이 열쇠를 받아들었다.

 

“코트 거기 좀 걸어주실래요?”

 

호텔 웨이터처럼 부려먹는 전계린을 탓하지 않고 얌전하게 옷걸이에 옷을 거는 오선덕은 자신이 대견스럽게 여겨진다. 그녀는 여자란 원래 술에 약하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같이 보인다.

 

“이럴 때 남자가 필요한 거군요.”

 

혼자 사는 티를 너무 낸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말을 계속한다.

 

“고마워요. 이젠 돌아가셔도 돼요. 굿나잇!”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어. 녹차라도 한 잔 권하지 않고?

아니, 그럴 만하지.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

오선덕은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전계린은 바다 울음을 또 들어야 했다.

이 밤을 견뎌내는 것은 기적이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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