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운항사 제도

운항사 제도를 만들라(하)

오선닥 2013. 2. 7. 20:57

작은 역사가 큰 역사로 바뀌는 세상~

다섯 명의 연구원이 ‘운항사 제도’라는

큰 역사를 만들어냈다.

 

전계린 박사의 딸 양외란이

극지 쇄빙연구선의 2등 항해사가 됐는데

그녀로부터 북극과 남극 탐험의 비화를 들어보자

 

두 번에 걸쳐 연재하고

계속 이어지는 스토리는

‘극지 탐사 항해' 제목으로 연재됩니다.

 

두 번째 연재입니다

 

 

 

 

 

운항사 제도를 만들라(하)

 

 

두 달 간 실습선에서 연구를 마치고 상경한 연구팀은 선주협회로 돌아와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부산에 머무는 동안 학교, 선원양성소, 조선소, 기술연구소 등에서 수집한 자료가 너무 많아 미리 서울로 탁송해 놓은 상태다.

 

팀장 박기용 박사가 연구 아이템을 하나씩 정리해나가자고 한다.

 

“선원직의 매력이 상실돼가는 이유를 뭐랄까……?”

 

“실습선에서 선원들과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한테서 많이 들어봤잖아요.”

 

팀장한테는 전계린이 애교 있게 말대꾸를 잘하는 편이다.

그렇다. 가족과 떨어진 생활, 급료의 매력 상실, 문화생활 기회의 박탈, 정보 접근성의 부족 등 여러 이유가 나열된다. 마치 시베리아횡단열차만큼이나 이유가 길어진다.

 

70년대 초 해외취업선원 급료가 엄청 좋았다고 이해출 박사가 들은풍월을 이야기했을 때도 오선덕은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때가 있었지요. 선원직의 매력을 유지하려면 급료가 육상의 것보다 두세 배는 돼야 할 겁니다.”

 

팀장은 다음 주제로 가정생활의 영향에 대해 거론했다.

각국의 법 사례를 조사한 바 있는 이해출 박사가 대답하는 게 적합하다.

 

“현행 10개월 의무승선기간은 너무 길다고 하겠습니다. 유럽에선 부부가 6개월만 떨어져 있어도 이혼사유가 되지요.”

 

듣고 보니 유승운 박사는 오 선장의 사례가 궁금했다.

 

“오 선장님은 마지막 배 얼마나 타셨지요?”

 

유 박사는 대충 알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이럴 때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게 예의라고 오선덕은 생각했다.

 

“부끄럽네요. 2년 6개월이나 돼서…….”

 

여기에 전계린이 가만히 있어도 좋은데 끼어든다.

 

“그럼 이혼 다섯 번은 가능하네요. 전 한 번밖에…….”

 

“전 선생, 40세 불혹의 애처가한테 그런 말을……?”

 

박기용 팀장이 엄숙하게 개입했는데 이미 박장대소 장면으로 바뀐 후였다.

연구실이 코미디 녹화실로 바뀌어도 괜찮은 수준이다.

 

제야의 종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연구의 방향과 내용이 정리돼 갔다.

 

선원제도 합리화 연구는 운항사제도, 외국선원 혼승, 여성 선원 허용, 가족 동승, 해륙 교호 근무, 조기 유급휴가, 선원복지 향상, 선원교육 강화, 관련법 정비, 국제협력 등의 세목으로 정리됐다. 한편 선박설비 근대화 연구는 기관실 무인화, 육상지원 강화, 선박자동화 확장, CCTV 확충, 부품조달 체계화, 비상시설 강화, 보수정비 시스템화 등의 세목까지 언급됐다. 선원교육제도 개혁 연구는 선원제도와 설비자동화의 변화 추세에 맞춰 각국의 교육제도 및 국제기구와 공조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근간이 잡혔다.

 

그리하여 세 권의 연구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선원제도 합리화>

<선박설비 근대화>

<선원교육제도 개혁>

 

모두 다 귀중한 성과물이다. 제도 개혁의 머릿돌이 될 것이다.

 

운항사 제도는 항해, 기관 및 통신 분야를 통합하는 게 원래 목적이었으나 항해와 기관을 전적으로 통합하기는 아직은 이르고 점차적으로 추진하는 쪽으로 견해가 모아졌지만, 항해와 통신은 지금 당장 통합해도 좋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송호걸 회장은 만족해했다. 선원선박의 근대화가 한국 해운을 지속가능케 하는 길이라고 찰떡같이 믿는 그에게는 이번 연구의 의미가 컸다.

 

정원 감축으로 인한 선원들의 직무 과부하의 대가로 급료 인상을 제시하나, 소수 정원에서 야기되는 정신적 고독과 사회적 고립성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는 큰 과제로 남는다.

 

 

 

 

영화 벤허에 나오는 대사 하나.

「삶은 기적이다」

 

‘삶은 계란이다’라는 유머와 질적으로 다른 표현이다. 삶은 운명의 파도를 탄다. 전계린 박사의 외동딸 양외란이 갑자가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부산의 유명 일간지에 그녀의 기사가 오르고부터다.

 

“양외란, 니 진짜 떴더라.”

 

양외란의 학교 친구는 그녀를 부러워했다. 한국 쇄빙연구선 아라빙호의 최초 여성 항해사로서 남극과 북극을 항해한 활약상이 대서특필됐기 때문이다.

 

양외란 1985년생. 2004년 해사대학 항해학과 입학.

2008년 삼등항해사. 2011년 이등항해사

 

2012년 초여름 한날 B신문사의 고득종 기자가 아라빙호를 방문하여 선내 사무실에서 양외란 이항사와 인터뷰했다.

 

“남성도 아닌 여성으로서 어떻게 쇄빙연구선 항해사의 꿈을 키웠나요?”

 

고득종 기자의 질문에 양외란의 대답은 간명하다.

 

“네 살 때부터 어머니께서 항해사의 꿈을 키워주셨습니다.”

 

“그럼, 어떤 동기라도?”

 

“선원선박연구소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23년 전 연구소에서 함께 연구 활동한 선장님을 거울삼으라고 하신 말씀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혹시 그 선장님의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오선덕 선장님이라고 들었습니다. 해양박사를 뜻하는 오션닥(Ocean Doc)이라고 자주 언급하셔서 그 이름이 항상 제 기억에 남아 있었고요.”

 

“그렇군요. 당시에는 여성 선원이 없었는데 어머니께서 특별한 생각을?”

 

“어머니께서는 언젠가 여성 선원시대가 온다는 걸 확신하셨던가봅니다. 그 방면 연구를 하신 탓인지…… 아니면 그 선장님 영향인지 모르지만요.”

 

“둘 다 영향을 줬었을 수도 있겠네요.”

 

기자는 삶이란 기적 같기도, 한편 운명 같기도 한 느낌이 들었다.

 

양외란은 태어날 때 바로 똥오줌을 쌌다. 그것부터 남달랐다. 이혼녀 어머니는 딸을 여자와 남자의 몫을 다하도록 키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때로는 팔씨름을 해서 남자를 이겨야 한다고 가르칠 정도였다

 

어머니는 딸에게 해양을 지배한 역사적 인물을 백과사전을 뒤져가면서 알려주곤 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보다 제임스 쿡(James Cook)이 더 존경스런 인물로 생각하게 한 것도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쿡은 최초로 남극과 북극을 탐험하려고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바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섬과 육지의 이름을 짓기도 했던 영원한 선장이요 탐험가였다. 캡틴 쿡은 선원들의 괴혈병을 막기 위해 매질을 해가면서 야채를 먹이기도 한 일화를 남겼다. 쿡보다 2세기 전 콜럼버스나 마젤란의 선원들이 거의 대부분 비타민 부족으로 죽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영국 해군성으로부터 ‘남극 대륙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라’는 명령을 받고 1774년 1월 사상 처음으로 남극권 남위 71°10′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남극대륙을 불과 120km를 남겨두고 유빙 때문에 돌아서야만 했다. 그 후 그는 북극권에도 관심을 두어 베링해에 들어가 북위 70°33'까지 진출했다.

 

이때부터 남극과 북극은 탐험가들의 탐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쿡 선장은 남자로서 바다 정복의 야망을 가졌지만 이항사님은 여성으로서 바다가 너무 넓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기자가 양외란을 계속 붙잡고 인터뷰하는 이유는 그녀가 여성 항해사가 되기까지 어릴 적부터 극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은 바답니다. 그러나 바다보다 더 넓은 것은 하늘이고,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가르쳤어요.”

 

“영혼을 탐험정신으로 의역해도 되나요?”

 

“적어도 제 경우엔…….”

 

양외란, 정말 대차네.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는 맹모의 후손쯤이라도 되나.

고득종 기자는 그렇게 생각하니 기가 팍 죽는다. 다른 질문으로 남자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아라빙호가 북극에 갔었지만 최초 북극점 탐험은 미국인 피어리 아닙니까?

 

“그렇지요.”

 

“배로 갔다가 얼음 위를 어떻게 갔을까요?”

 

“에스키모인 30명과 개 300마리를 데리고 갔다나요. 소수정예 팀으로 마지막 북극점을 정복했고요.”

 

그녀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북극점은 육지가 아닌 얼음 위의 고지다. 북극점(북위 90도)을 가장 먼저 밟은 로버트 피어리(Robert Peary)는 이전에 두 차례에 걸쳐 그린란드 북극권 2000km 이상을 왕복 탐험했다. 1905년 모금으로 제작된 '루즈벨트호'를 타고 뉴욕을 떠났지만 북극점을 300km 남겨두고 식량과 연료 부족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피어리는 1856년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지리학과 측량학을 전공했지만 30세부터 23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북극점 도달의 꿈에 모두 바쳤다. 1903년 해군에 복귀하여 ‘피어리 북극클럽’을 결성했다. 세 번이나 그린란드에 갔었다. 동상에 걸려 8개의 발가락을 자르기도 했지만 1908년 7월 피어리는 대원 23명과 함께 군중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출발했다. 52세가 된 그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1909년 4월 9일 오전 북극점에 도달했다.

 

전진기지에서 얼음산과 골짜기, 살을 찢는 추위, 빙산사이 바닷물이 출렁이는 험난한 코스 660km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발가락을 잘리고도 포기하지 않은 정신은 과연 미국의 영웅답네요.”

 

“대단하지요. 극점을 밟은 후 그는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도전으로 만들어진다’고 한 말은 유명하지요.”

 

“마지막 북극점 정복이 궁금하네요.”

 

“정상 정복대원의 대부분을 지원대로 하고, 본대는 될 수 있는 한 적은 인원으로 하는 극지법을 사용한 것은 그의 특이한 방법이지요.”

 

피어리는 북극점에서 245Km 떨어진 곳에서 마지막 지원대를 돌려보내고 본대 5명과 함께 진행했다. 5명에는 흑인 한 명과 네 명의 에스키모인이 포함됐다.

 

피어리는 아내가 만들어 준 국기와, 15년의 극지탐험동안 가지고 다녔던 국기를 북극점에 꽂았다. 30시간 동안 얼음을 깨어 그 밑의 바다의 깊이를 재고, 기상 관측을 한 다음 귀로에 오른 것은 해군 측량장교답다.

 

“한때 북극점에 누가 먼저 도달했느냐에 대한 추잡한 논쟁이 있었지요?”

 

“논쟁을 건 사람은 자신의 거짓말을 사과했고 결국 감옥까지 갔지요.”

 

한편 피어리가 37일 만에 북극점을 밟았다는 기록은 오랜 논란거리였으나 2005년 영국의 탐험대가 동일한 탐험 경로(765㎞)를 36일 만에 완료함으로써 논란은 종식됐다.

 

“피어리가 에스키모 여자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던데 진실인가요?”

 

“고 기자님은 별것 다 알고 계시네요. 소문 때문에 다른 대원이 키웠다고 하데요. 오랜 탐험 생활을 고려한다면 남자들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생각보다 남녀관계에서 너그러우시네요.”

 

“저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여성입니다.”

 

“극 공감~!”

 

맞장구를 치면서도 기자는 입 대신 이마에 손을 대고 웃었다. 마치 수화라도 하는 듯.

양외란은 보란 듯 입에다 손을 대고 ㅎㅎ 웃었다.

 

피어리는 해군 소장으로 특진했고, 1920년 63세로 엘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기자는 한국인의 북극탐험이 궁금했다.

 

“북극점을 탐험한 한국인이 있다는데 누구죠?”

 

“허영호의 오로라탐험대가 1991년 5월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았지요. 허영호 대장은 끓는 물에 화상을 입어 최종렬 대원과 신정섭 대원이 밟았다지요. 11번째 국가였고 18번째 팀이었다고 하네요.”

 

양외란의 상세한 설명에 고득종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엉뚱한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양외란이 어떤 질문에도 주눅 들 이유가 없다.

 

“뭔데요?”

 

“만약 북극점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날짜변경선을 기준으로 북극점을 원심으로 해서 여덟 바퀴 돈다면 날짜는 8일 갔을까요?”

 

“여덟 바퀴가 아니라 수백 바퀴를 돌아도 지구 자체가 돌지 않는 한 시간은 절대로 음직이지 않지요. 시간이란 지구가 자전한 만큼 움직이니까요.”

 

이론이 체계화돼 있으면 대답은 간명하다.

<극지 탐험>이라는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는 궁금한 게 많다. 당돌하게 생긴 여성 이항사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니 인터뷰가 흥미를 더해간다.

 

“그럼 남극 쪽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계속 사진까지 찍으시면서 특별한 주문을 하시고 그러네.”

 

“인터뷰를 멋있게 하기 위해서 그럽니다.”

 

“준비됐고요.”

 

사진 찍을 포즈다. 기자도 옷매무새를 고친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김치’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선원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마치 약혼사진이라도 찍는 것처럼 피사체는 다정해 보인다.

 

 

 

 

 

 

사진 찍기를 마친 두 사람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자료를 보고 대화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양외란 이항사는 고득종 기자의 질문을 기다린다.

 

“남극점 탐험에는 두 명의 인물이 경쟁했다지요. 아문센과 스콧의 얘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실은 남극 항해를 하기 전에 남극탐험에 대해 공부를 좀 했지요. 굉장히 치열한 경쟁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 승자 독식의 냉혹한 승부세계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요. 패자는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고…….”

 

죽음의 단어가 숙연한 분위기를 만들어서인지 인터뷰는 숨을 죽여 나갔다.

기자로선 궁금한 게 더 있다.

 

“북극은 오래전부터 탐험이 시도됐습니다만 남극이 북극보다 탐험이 늦은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요?”

 

양외란은 상식을 물어보는 것 같아 기자를 옆눈으로 살짝 보았다.

 

“남극은 대륙이고 북극은 바다란 거 아시지요. 땅이 물보다 훨씬 더 춥고 더 더워 그만큼 환경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거죠.”

 

기자는 상식 하나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결국 아문센이 승리했지요?”

 

“아문센은 피어리가 먼저 북극을 탐험하자 기수를 남극으로 돌려 결국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 됐지요.”

 

기자가 보는 이등항해사 양외란은 항해와 관련해 많은 주변지식을 갖고 있었다.

양외란은 준비한 자료들을 보여주며 설명해 나간다.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은 1872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15세 때부터 북극탐험을 꿈꾸며 난센과 함께 북극해를 탐험한 일이 있었고 25세 땐 벨기에 탐험대원으로 남극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1906년 작은 배로 처음 북서항로를 개척하고 자북극(磁北極)을 발견하여 탐험가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미국의 피어리에게 북극점의 정복을 빼앗긴 후 남극탐험 준비를 시작했다.

 

1910년 6월 3일 노르웨이를 떠난 아문센은 공식적으론 북극으로 출항한다고 발표했다. 경쟁자인 스콧을 방심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11년 1월 14일 남극점으로부터 1300km 지점인 남위 78°30′에 전진기지를 세웠다. 아문센이 이끄는 노르웨이의 탐험대가 개썰매로 55일 동안의 목숨을 건 행군 끝에 1911년 12월 14일 인류 사상 최초로 남극점을 밟는 데 성공했다.

 

한편 로버트 스콧(Robert Scott)은 아문센보다 13일 후인 6월 16일 영국을 출항했다. 스콧은 아문센보다 4일 늦은 1월 18일에 남극대륙 바닷가에 상륙하여 기지를 건설했다. 아문센보다 남극점에서 100km 더 먼 곳이었다.

 

북극점의 정복을 미국에 빼앗긴 영국으로서는 국가적인 자존심이 걸린 경쟁이었다. 남극은 제임스 쿡 선장이 처음 발견한 이후 웨들, 비스코, 로스, 새클턴 등의 영국인들이 개척해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스콧은 1868년 영국에서 태어나 1880년에 해군에 들어갔으며 1901년부터 4년간 디스커브리(Discovery)호를 이끌고 떠난 1차 탐험에 참가하였는데, 이 때 동참했던 새클턴은 자남극(磁南極)을 밟고 남위 88°23′까지 나아갔으나 식량 부족으로 남극점을 155km 남기고 되돌아온 일이 있었다.

 

“출발부터 아문센은 스코트를 크게 앞질렀군요. 거기다가 속임수를 써서 신사답지 못하게…… 바이킹족의 기질이 다분히 있군요.”

 

“그게 다는 아니죠. 그래도 철저하게 준비한 것은 존경할 만하지요.”

 

“남극탐험 경쟁은 흥미진진한데 아문센이 승리한 것을 요약하면?”

 

“제가 정리해둔 자료를 보여드릴게요.”

 

양외란이 보여준 자료에서 아문센의 장점이 이렇게 요약돼 있었다.

 

① 아문센의 탐험대는 스코트의 탐험대와 여러 모로 달랐다. 우선 숫자 면에서 스코트의 탐험대가 55명인 데 비해 아문센의 탐험대는 9명으로 소수 정예였다.

 

②스콧처럼 로스 해로 향했으나 로스 섬에 정박하지 않고 더 안쪽의 빙붕(바다가 얼음으로 덮여 있는 곳)으로 배를 정박시켜 스코트보다 남극점에 100킬로미터 더 접근했다.

 

③ 조랑말에 주로 의지한 스코트와 달리 북극 에스키모들이 이용하는 개썰매를 물자 수송수단으로 이용했다. 늑대와 교잡종인 허스키들은 추위에 매우 강했다. 개를 식량으로도 이용해 썰매무게를 가볍게 하기도 했다. 개는 바다표범이나 펭귄 고기도 먹을 수 있어 개 사료를 절약할 수 있다.

 

④ 열 개의 저장소를 마련했고 주위에 깃발을 많이 꽂아 찾기 쉽도록 했다. 썰매 무게를 75kg에서 22kg으로 대폭 줄이고, 썰매에 바퀴를 달아 이동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

 

⑤ 대원 네 명과 함께, 썰매 4대를 끄는 개 52마리를 데리고 1911년 10월 19일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기지 인근을 탐사하고 기지를 지켰다.

 

⑥ 동물의 가죽으로 된 털옷을 입고 스키를 탔다. 그러나 스콧은 합성섬유로 된 방한복을 입었다. 탐험 당시 남극의 온도는 평균 영하 40도 정도로 방한과 보온에 있어 천연섬유가 인조섬유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아문센의 개들은 썰매를 몰고 사람은 스키를 지치며 일행은 전진했다. 크레바스에 사람이나 개가 빠지면 자일로 구조하기도 한다. 위도 1도씩 전진할 때마다 식량저장소를 만들어 표시를 해두고, 가는 도중 개 몇 마리를 잡아 식량으로 이용하고 남은 고기는 저장소에 두기도 했다. 나중에 매체는 탐험을 위해 동물을 그렇게 죽여도 되느냐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지만 탐험은 현실이었다.

 

경쟁심리가 아문센의 지친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1911년 12월 14일 오후 관측기 바늘과 썰매의 거리계가 남위 90도를 가리켰다. 영국 탐험대가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노르웨이 국기를 꽂고 3일간 남극점에서 머물렀다. 기지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1월 25일이었다.

 

“패자인 스콧은 남극점을 밟고도 돌아오는 도중 사망했는데, 그의 일기가 증명하는 불굴의 용기는 인정해줘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콧에 대해서 정리해 놓은 것도 있는데 보세요.”

 

양외란의 자료는 이렇게 요약돼 있었다.

 

1910년 6월 1일 스코트의 탐험대는 테라노바 호를 타고 영국을 출발해 호주에 정박했다. 이 때 스코트는 북극 탐험을 위해 떠났던 노르웨이의 아문센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남극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전보를 받는다. 스코트로서는 남극 탐험의 강력한 도전자가 생긴 셈이다. 스코트 탐험대는 긴장했고 영국인들은 아문센을 맹렬히 비난했으나 세계는 이 세기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스코트의 탐험 행로는 몇 갑절 험준했다. 뉴질랜드에 입항해 조랑말 19마리와 개 34마리, 자동썰매 3대를 실었으나 자동썰매와 말썰매는 개썰매보다 추위에 약하다는 것이 증명됐다. 조랑말은 남극점으로 향할 때 이미 8마리밖에 움직일 수 없었고 그나마 추위에 약해 곧 다 쓰러지고 말았다. 눈보라로 날씨도 좋지 않아 거의 진행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밟은 그 순간에도 스코트 일행은 사력을 다해 빙벽을 넘고 있었다. 개썰매를 잘 다룰 줄 몰라 개들을 돌려보내고 남은 조랑말도 너무 지쳐 사살한 데다 자동썰매마저 고장나버려 결국 사람이 무거운 썰매를 끌어야 했다. 예정보다 전진이 느렸고 그만큼 식량 문제가 심각해져갔다. 지친 상태에서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34일 전에 아문센 일행이 노르웨이 깃발을 세운 뒤였다.

 

낙담해 돌아가는 길은 더욱 가혹했다. 대원들은 동상과 피로에 시달렸고 일부는 설맹(雪盲)이 되었다. 마침내 동상으로 죽고, 눈보라 때문에 천막에서 꼼짝을 못하다가 연료와 식량이 모두 바닥나 남극점 도달 후 2개월 만에 제1 저장소 근처에서 모두 숨을 거두었다.

 

반년 후 수색대에 의해 시신과 함께 스코트의 일기가 발견되었고, 일기에 드러난 탐험대원들의 고통과 인내, 용기, 애국심과 희생정신에 감동하며 스코트를 다시금 높이 평가했다.

 

“사람들은 왜 목숨 건 경쟁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셔요?”

 

이번엔 양외란이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웅심 때문일까요?” 기자가 되물었다.

 

“개인의 영웅심에다 국가가 부추긴 점도 있지요. 극지탐험은 원래 항로개발과 포경개척 등이 목적이었는데, 나중에 군사 목적과 영토 야심이 노골화됐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1958년 세계는 연구 또는 스포츠 목적으로 이용하도록 했고요.”

 

양외란은 마치 세계평화주의자인 듯 설명했다.

 

“남극탐험에도 한국인은 빠지지 않지요?”

 

“빠지면 섭섭하지요.”

 

그녀는 설명을 이었다.

 

“세계에서 4번째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 바로 한국의 허영호 대장입니다. 그것도 도보로 만년설을 헤쳐서 말입니다. 결국 44일 만인 1994년 1월 남극점에 도착한 거지요.”

 

설명이 맞는지는 한국산악협회에 물어봐야 할까.

 

긴 인터뷰로 질문자나 답변자나 지칠 만한데 둘은 여유 있어 보였다. 이를 계기로 혹여나 남녀관계로 발전하는 거 아닐까. 그거야 작가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일.

그러나 사전에 여자의 어머니 전계린 박사에겐 알려야 할 텐데.

 

어쨌든 다음 회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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