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치섬 이야기

아치섬 이야기

오선닥 2010. 11. 6. 23:59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그리고 첫 봄이 왔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김영삼은 응수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2000년 전에 예수는 이미 중요한 선포를 했다.

유신은 초지일관 뜻을 밀고 나갔다.

그러나 부산 앞바다 아치섬에는 작은 로망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오촌끼리 데이트하던 두 쌍이 섬 꼭대기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 스토리가 더 깊어지고…

 

 

 

 

 

 

아치섬 이야기

 

 

해변의 찬바람이 아치섬 등성을 타고 올라가 첨봉(尖峰)에서 흩어지고 있다.

봄이 겨울을 밀어 올려 섬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계절은 역지(逆止)밸브를 달고 있는지 거꾸로 돌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춘하추동이 순서대로 돌고 돈다. 작년에 왔던 제비가 중도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온다.

 

누구보다도 송대길이 봄기운을 피부로 먼저 느낀다. 목자가 양떼를 지키듯 섬 왕국 사령관은 학생들을 잘 지켜야 한다. 그래서 계절의 변화에도 민감해야 한다.

 

왜냐고?

 

피가 끓는 학생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대학 일년생들이라고 하지만 고등학생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망아지가 마구 뛰는 것 봤지? 그렇다니까. 그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축구하다 다리 부러지고,

절벽 타다 허벅지 긁히고,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 터지고,

통선타고 오가다 물에 빠지고,

……. 

 

섬에는 밤낮으로 별의 별 사고가 다 있다. 학생들 안전이 항상 노심초사에 걸려 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섬을 자주 순회하는 것은 직무의 우선순위다. 사고 방지는 예방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응급을 요해도 앰뷸런스가 통선에 실려 올 수 없다. 헬리콥터는 비용이 무거워 처음부터 뜨지도 못할 것이다.

 

봄의 첫 전령사는 남쪽 해안 언덕의 봄나물 새싹이다. 시선이 많이 간다.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다고 해서 식탐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봄이면 어머니들이 열심히 기다렸던 나물이 기억되는 탓이다. 소화 기능을 좋게 하는 씀바귀, 머리를 맑게 하는 두릅, 냉증(?)을 완화해주는 쑥… 이런 것들을 보기만 해도 생명의 힘을 느낀다.

 

‘주영에겐 두릅나물이 좋겠군.’

 

여고생 주영에겐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머리가 나쁜 건지 머리가 무거운 건지 도무지 책과 친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얘다. 슈퍼모델 같아서 고등학교 3학년인 줄 알았는데 본인은 아직 2학년이라나.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머리 안에 기름칠이 덜 돼가지고 약간은 문제로 남아 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얘다. 국민 생활수준이 북한보다도 못한데도 이 땅의 얘들은 잘도 큰다.

 

뭐, 비만 와도 커가는 ‘우후죽순’이라는 말도 있으니.

 

오늘 오후는 주영과 금정산 공원에서 ‘식물생태탐방’을 하기로 약속했다.

생태탐방이란 게 별 것 아니다. 식물원에 가면 식물생태탐방이고, 동물원에 가면 동물생태탐방이요, 다운타운으로 가면 인간생태탐방이다. 언젠가부터 송대길과 주영은 자기들끼리 만남을 이런 식으로 지칭하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약간의 어색한 고민이 하나 있다. 대길과 주영은 오촌 아저씨와 조카 사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생태탐방에 차질이 생겼다.

 

겨우내 잦은 고장으로 골탕을 먹이던 남쪽 해안 펌프실의 해수펌프가 또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걸 고쳐 놓아야 한다. 펌프가 말을 듣지 않으면 기숙사 화장실은 냄새로 진동할 것이다. 펌프 두 대 중 한 대는 항상 가동상태로, 다른 하나는 대기상태에 둬야 한다.

 

민물이 아닌 해수를 퍼 올리다 보니 고장이 잦다. 소금 찌꺼기가 기계에 붙고 녹도 많이 슨다. 해풍으로 인해 기숙사 문손잡이 등 쇠붙이 종류는 쉬이 녹슨다. 해풍을 많이 받는 건축물엔 방식(防蝕) 재료를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어가 망가져 부품을 사가지고 와야 되겠심더.”

 

설비기사가 부품 사러 국제시장에 갔다 와야 되겠다고 육지로 나갔다. 펌프는 중요한 설비로 고장난 상태로 두고는 책임자인 송대길로서는 섬을 한시도 떠날 수 없다. 해변에서 지대가 높은 숙소까지 해수를 올리려면 기어펌프가 적합하고, 부족한 힘은 중간에 부스터 펌프로 기력을 보태야 한다. 파이프라인이 긴 만큼 펌프에 걸리는 부하도 커서 자주 고장으로 말썽을 부린다. 기사가 펌프수리를 마칠 때까지는 어차피 섬에 주둔하는 신세다.

 

대신 주영이 섬으로 오기로 했다.

그 애가 오는 동안 좀 쉬자.

 

송대길은 펌프실의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몸이 찌부덩한 건지 의자가 찌부덩한 건지 피곤이 비스듬히 몰려온다. 피곤한 토요일 오후가 마구 눈꺼풀을 잡아당긴다.

 

기숙사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섬을 더욱 외롭게 한다. 노래가사와 더불어 지나간 날들을 생각하며 막 졸음에 목이 기웃할 무렵 의자 밑으로 쥐새끼 한 마리가 획 지나간다. 겨울 추위를 피했던 것들이 이제 봄기운을 타고는 몸놀림이 번개다.

 

갑자기 바깥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으아악! 저…, 저기, 쥐가?”

 

펌프실 뒤에서 한 여자가 소스라치듯 놀랬다. 바위에 걸터앉아 남자와 데이트에 몰두하던 아가씨의 발밑으로 쥐새끼 한 마리가 지나간 것이다. 쥐는 펌프실에서 빠져나가 데이트 남녀를 혼내주고 줄곧 해변으로 종횡무진 뛰어 나갔다.

 

섬의 휴식은 펌프가 망칠 수 있고 쥐가 망칠 수도 있다. 섬에서 조용한 낭만을 즐기겠다고 찾은 남녀는 잠시 놀라긴 했지만 곧 섬 꼭대기 등대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손을 꼭 잡고 가는 모습이 쥐로 인해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듯.

 

토요일의 섬은 학교건물 신축공사장에 불도저 소리가 없다. 섬을 찾는 시민들, 학생들을 면회 오는 가족들을 위해서 공사를 쉰다.

 

공사장 옆 간이농구장엔 학생들이 농구에 한창이다. 다른 운동 시설이 없으니 농구장은 인기 장소에 속한다. 모두가 신동파 선수라도 되는 듯 몸이 훨훨 나는 것 같다. 오늘은 공사판의 먼지가 없어 마음 놓고 운동하기에 좋다. 공보다 몸이 더 높이 뛰는 것 같은 상쾌한 날이다. 그리고 신나는 시간들이다.

 

평일 섬의 한쪽은 공사를 하고, 다른 한쪽은 강의가 이루어지곤 한다. 소음 때문에 공부가 어려울 텐데도 학점을 잘 극복한다. 배의 거대한 엔진 소리에 적응해야 하는 학생들은 이런 소음쯤은 평소 견뎌내야 한다.

 

 

 

 

***

 

육지 쪽 통선 부두.

 

“이만하기 다행이여. 더 깊이 빠졌더라문 우찌할 뻔 했을 꺼여.”

 

설비기사가 시내에서 부품을 사가지고 섬으로 돌아오는 길에 통선부두에서 바다에 빠진 한 여학생을 건져 올리고 있다. 그 학생은 파도에 흔들리는 통선을 타려다 발을 헛디뎌 실족한 것이다.

 

설비기사는 여학생을 간신히 통선 위로 올렸다. 머리만 빼놓고 전신이 흠뻑 젖은 여학생은 그 와중에서도 부끄러움을 가리기 바쁘다. 빠진 자도 놀랐지만 건진 자도 놀라고 당황한 상황이다.

 

"학생은 시방 섬으로 갈 꺼여, 집으로 돌아갈 꺼여?"

 

겨우 여학생을 건져 통선에 올려놓고 설비기사는 난감한 나머지 다그친다. 건져 올릴 때 옷을 너무 잡아당겼던지 학생의 배꼽이 드러났다. 학생은 부끄러운 듯 교복 웃옷을 끄집어 내린다.

 

그런대로 정신이 돌아왔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시내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섬으로 데려다 주세요. 죄송해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여학생은 폐 깊숙한 데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설비기사도 학생의 모습이 계속 걱정이다.

 

"근데, 섬에 뉘라도 있는 거여? 혹시 학교에라두? 내가 학교에 근무하는기라."

 

"예, 있어요. 그럼 송대길 중위님 아세요?"

 

"그라문. 시방 내가 송 중위한테 가는기라."

 

아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설비기사는 기쁨이 매구 오라비다. 그의 얼굴에서 만면의 웃음이 활짝 한다.

 

그는 여학생이 송 중위와 어떤 사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통선장을 떠나 펌프실로 향해 앞서 가는 자신의 발걸음만 재촉할 따름이다.

 

학생은 따라가기에 숨이 찬다. 물에 젖은 옷이 유두의 윤곽을 더 뚜렷하게 한다.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피부의 선이 드러나기는 마찬가지다. 치마 밑으로 드러난 다리는 푸르죽죽해 잔인할 정도로 추워 보인다.

 

펌프실 앞에 도착하자 설비기사는 소리쳤다.

 

"송 중위님, 손님 왔슈. 난로에 불부터 피우슈."

 

허름한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던 송대길이 갑자기 설비기사의 헐떡이는 소리에 급히 문을 열었다.

 

"아니, 주영이…. 옷이 이게 뭐야?"

 

송대길은 상황 파악보다 물에 젖은 주영을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대책이 서지 않아 숨만 가쁘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기는 주영도 마찬가지다.

 

설비기사의 대답이 앞선다.

 

"통선을 타려다 바다에 빠져부맀당게. 이유는 나중 알아보시구 불부터 피우슈."

 

기사는 난로용 석유통을 확인한 후 펌프실을 나갔다. 특수한 상황이므로 두 사람이 이제 알아서 하라는 눈치다.

 

난로에 불이 피워지고 펌프실에 온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정신이 가다듬어지는지 주영은 일어난 일이 너무 어처구니없다는 듯 불평한다.

 

“아저씨, 오늘 내 골탕 먹이려고 이리로 오라고 했지?”

 

“어쨌든 내가 미안하다. 시비는 나중에 하고 옷부터 말리도록 해라.”

 

송대길은 펌프실에 빨랫줄을 설치했다. 주영의 정신이 출구전략에 돌입했는지 말을 하고 싶어 한다.

 

"막 통선에 오르려는데 배가 밀려버렸어."

 

"그러니까 배란 게 만만찮아. 우리 뱃놈도 타고내릴 땐 엄청 조심한다구."

 

"조심했는데도 그랬어. 아저씬 앞으로 배 안탔으면 좋겠어. 배는 위험해. 육지에 살아, 응?"

 

"나도 그랬음 좋겠다. 육지에 있으면 누가 밥 먹여 준대?"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다. 남자만 사는 섬이라 여자 옷이 있을 턱이 없다. 송대길은 그의 방으로 올라가 자신의 캐비넷에서 옷가지 몇 벌을 가져왔다. 갔다 오는 동안 주영은 젖은 옷가지를 말리고 있었다. 옷의 크기가 어떨지 궁금하다.

 

"셔츠 위에 스웨터를 걸쳐봐. 그래도 모양이 괜찮아. 옷걸이가 워낙 좋아서."

 

"몸이 크기는 큰가 봐. 아저씨 옷이 맞는 걸 보니…."

 

"무엇을 걸쳐도 어울리는 모델이야. 너는 영원한 글래머야."

 

"자꾸 크다고 하지 마. 싫어. 작아 봬야 돼."

 

"그래도 얼굴과 스타일이 받쳐주잖아. 미스월드 몸매다."

 

이야기만 할 순 없다. 주영이 좀 바빠졌다.

 

"옷 갈아입을 동안 자리 좀 비켜줘."

 

"볼 것 다 보았는데…."

 

"그래도 싫어.

 

송대길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들어왔다.

남자 옷을 걸쳤지만 여성으로 보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이젠 춥지 않아?"

 

"워낙 많이 떨어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 물에 빠진 생쥐 같지 않아요?"

 

"물에 빠졌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건 당연하지. 그렇지 않아도 쥐새끼 한 마리가 펌프실 안을 지나갔어."

 

"뭐? 난, 쥐 정말 무서워. 쥐 나오면 싫어."

 

"쥐는 째그만한데 키 큰 애가 왜 조그만 것을 무서워해."

 

"자꾸 크다는 쪽으로 몰고 가지 마. 난 울어버릴 꺼야."

 

"넌 이럴 때 매력이라니까."

 

주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송대길은 웃을까 말까 한 표정을 지었고, 주영은 다소 행복한 표정이다. 그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려 본다.

 

“여기, 색다른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넌 워낙 후각이 좋아 벌써 봄 냄새를 맡았나?”

 

주영이 대답은 하지 않고 한 바퀴 빙 도는 흉내만 낼 뿐이다.

그러곤,

 

“아니. 이건 아저씨 냄새야. 분명히.”

 

걸쳐준 옷을 쓸어 만지면서 주영은 코를 헉헉거린다. 미소가 비집고 나온다.

시집가서 남편 단속 잘할 애다.

 

빨랫줄에는 겉옷과 속옷이 함께 걸려 있다. 영화에서 뉴욕 슬럼가도 이런 풍경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주영은 다시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자리 좀 비켜 달라고 한다.

 

“뭐 이렇게 절차가 복잡하냐?”

 

송대길은 명령대로 바깥으로 나갔다. 한참 후 안에서 신호가 왔다. 들어와도 좋다는 것이다. 어전 앞에서 대기하던 신하처럼 대령하다가 들어가는 기분이 어쩐지 어색하다.

 

빨랫줄에 널려 있던 상하 내의 하나씩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 말라 옷 주인이 챙겨 입었다는 뜻이다.

 

"아, 늘씬하다. 이 코트 걸쳐 봐. 따뜻해질 거야."

 

원양 실습 나갔을 때 홍콩에서 구입한 런던포그 바바리를 어깨에 얹어줬다. 런던 패션 명품이 걸쳐지니 스타일이 꽉 잡힌다. 완벽한 여성 원형 복구다. 남자용 여자용 구분은 이런 때는 무의미하다. 옷맵시가 어떤지 궁금했던지 주영은 거울 대신 아저씨가 봐주길 원했다.

 

"그래, 완벽해. 학생에서 완전히 숙녀로 변신한 모습이야. 이런 모습이 숨어 있었군."

 

자신을 얻었는지 주영은 아저씨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쥐 나올까봐 여긴 무서워. 우리 바다 쪽으로 나가요, 아저씨."

 

송대길은 설비기사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가 밖에 나가니 이제 펌프 수리를 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손님의 옷은 다 말랐는가, 하는 기사의 질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학생과는 어떤 관곈지 여전히 묻지 않았다. 물었다면 오촌 조카라고 대답 못할 이유가 없다.

 

눈치가 빠른 건지, 예의가 바른 건지, 어쨌든 인품이 좋은 양반이다.

 

해변의 낚시바위에 둘은 걸터앉았다. 과업 후 송대길이 종종 저녁 낚시를 즐기던 곳이다. 바이블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구절이 기억나자 오늘은 물고기 대신 ‘조카’를 낚았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삐져나온다.

 

하춘화가 작년 열여섯 살 때 ‘물새 한 마리’를 불러 대한민국 바닷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곤 했다. 이제 두 마리의 물새가 앉은 격이 되어 위로가 되는 셈이다.

 

주영의 침수 사고는 반쯤으로 다행이다. 머리까지 물에 잠겼더라면 위험했을 뿐만 아니라 옷과 몸을 말리는 절차도 더 복잡했을 것이다.

 

젖은 몸이 거의 완벽하게 마르자 섬 꼭대기 등대로 가자는 데 동의했다. 아치섬을 찾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등대를 찾는다. 캄보디아에 가서 앙코르와트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비행기를 도로 돌려서라도 방문해야 하는 것과 같은 필수코스다.

 

  

 

***

 

펌프실 뒤 해변 바위 위에서 쥐새끼에 놀라 산꼭대기 등대 쪽으로 자리를 옮긴 어떤 아베크 남녀 한 쌍은 지금 등대 전망대에 올라 북쪽 부산항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국 제일의 항구답다고 감탄한다.

 

마침 방파제 입구로 커다란 배 한 척이 들어간다.

 

저 배를 보고 남자는‘배의 갑판에서 쌍안경을 들고 있는’ 미래의 자기 모습을 상상하고, 여자는 ‘배에 자기 남편이 타고 있는’ 미래의 가족을 상상하기도 한다.

 

여자는 갑자기 발아래를 유심히 내려다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을 솥뚜껑 보고 놀라는 모습이다. 아까 해변에서 스쳐지나간 쥐의 형상이 자꾸 마음에 걸쩍댄다.

 

“설마 쥐가 여기까지 올라오진 않겠지?”

 

여자의 끈질긴 쥐의 기억에 남자는 신경질이 날 정도다. 남자의 집에는 여자 가족이 많다. 여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쥐라는 동물에 취약하다. 보기만 해도 우선 피해놓고 본다. 물론 밥그릇 위로 뛰어다니는 쥐는 혐오의 대상으로는 으뜸이다. 그런데 쥐는 잘 잡히지 않는다. 쥐 박멸 기간 동안 한 마리의 쥐꼬리도 학교에 갖다 주지 못할 때가 있었다.

 

“고모는 진짜 겁쟁이야. 쥐는 생명력이 강해서 지구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놈이야. 난 쥐보다 호랑이가 나올까봐 더 걱정돼. 주위 숲이 얼마나 울창하니?”

 

“넌 자꾸 고모 고모 하지 마. 바깥에선 누나라고 불러. 오촌 고모는 고모도 아냐.”

 

“엄연한 촌수는 무시할 수 없어. 두 살 차이에 고모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겨.”

 

“넌 날 여기로 불러들였을 땐 누나로 부르기로 약속했잖아. 정 이러면 나 가버릴 꺼야?”

 

“알았어. 누나, 아니 누님! 제발 있어줘. 원하면 공주로라도 불러줄께.”

 

남자는 졌다.

 

남자는 순검시간에 졸았던 탓으로 지도관한테 과실점수를 부여 받고 일주일간 외출금지를 당했다. 졸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코를 골고 자버렸다. 상황 참작이 전혀 불가능해 과실점수를 왕창 얻었고, 결과적으로 벌점에 의해 외로운 주말을 섬에서 보내야 하는 불쌍한 국제해양대학 일학년생이다.

 

외로우니 고모더러 면회 좀 와 달라 해서 이렇게 데이트를 하고 있다. 이쯤에서 여자는 몽니를 부릴 만하다. 수틀리면 통선 타고 육지로 가버리는 것.

몇 시간의 행복을 제공받은 대가로 남학생은 뱃놈이 아는 상식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쥐라는 것은 섬뿐만 아니라 배에도 올라가. 어떻게 올라가는지 알어? 부두에 매어둔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놈이야. 그래서 밧줄에 양철 깔때기(Rat Guard)를 거꾸로 달아 놓는 거야. 정기적으로 구서(驅鼠) 약으로 선내 소독을 하곤 하지. 소독증서가 없으면 항구에 입항도 못해.”

 

“그렇군. 넌 상선대학 학생이라고 제법 아는 체 하는구나. 어쨌든 아까 그런 쥐가 여기까지 오진 않겠지?”

 

“염려 접어. 쥐 다시 보이면 내가 밟아줄 테니.”

   

대학 삼년 여학생은 만족해하는 모습이다. 조카와의 만남이 별로 무익한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녀는 아치섬이 외부인에겐 관광지로 개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치섬 등대 주위는 언제 봐도 절경이다. 오늘은 휴일이라 절경을 보러 육지에서 온 사람들도 제법 있다. 외부인에겐 휴일만 섬을 개방한다. 바위틈에서 개나리 싹이 비집고 나온다. 절벽 밑에 부서지는 파도가 마치 폭포수 같다. 등대 옆 가파른 남쪽 절벽에 올라가서 멀리 태종대 등대를 바라보면 친구를 상대하는 느낌을 갖는다.

 

아까 학교 탁구장에서 조카가 재미나게 놀아준 것이 좋았고, 더욱이 그가 흔쾌히 몇 점 져 준 것에 대해 고모는 기분이 업 되어 있다. 그게 결코 접대용이 아니길 바란다. 섬의 기억은 좋은 인상으로 쌓여가고 있다.

등대 옆 절벽을 돌아갈 무렵 고모는 조카의 팔을 꼭 잡았다.

 

“태조야, 여긴 낭떠러지야. 날 놓치지 마!”

 

“꽤 가파른데. 낙화암보다 더 아찔해. 고모, 아니 누나 꼭 잡어. 조심해!”

 

고모는 박쥐처럼 조카의 몸에 꽉 붙어 절벽을 돌고 있다.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몸을 날리기 전 논개가 왜장(將)을 안았을 때도 이처럼 힘줘 붙잡았을 것이다.

 

막 절벽을 돌아 나올 무렵 그들은 마주 오는 어떤 데이트 한 쌍을 우연히 만났다.

 

 

 

***

 

“아! 지도관님?”

 

“어, 태조 학생?”

 

섬 정상에서, 그것도 가파른 절벽 위에서 두 쌍의 데이트 족이 마주쳤다. 상대를 바라보는 눈들이 놀라움의 극치다.

 

학생이 지도관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만, 지도관이 그 많은 학생들 개개인을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두 남자는 서로를 쉽게 알아본다. 특징 있는 학생은 쉽게 기억될 수도 있다. 가령 공부를 썩 잘한다든지, 혹은 말썽을 부려도 치명적인 족적을 남긴다든지 하면 말이다.

 

태조 학생은 이름에서 한 점 먹고 들어간다. 태조 왕건이나 이성계의 사극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태조라는 두 글자가 태종대(太宗臺)와 조도(朝島)로 연상되어 학생들 간에도 유명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태종대는 조선 태종이 아니라 신라 태종무열왕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 걸 알아둬야 한다.

 

여자 둘은 영문도 모르고 각각 남자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송대길은 직분에 맞는 몸가짐으로 되돌아왔다.

 

“태조 학생, 학생복을 입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

 

은근슬쩍 지도관의 질책을 듣고 하태조 학생은 할 말을 잃었다. 사복을 입었으니 겹치기로 당황해진다. 이곳 학생은 학교 안은 물론 바깥에서도 제복을 착용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과실점수 감이다.

당황해지니 데이트 상대의 소개가 급하게 나온다.

 

“고모, 인사드려. 우리 학교 지도관님이셔.”

 

“하지해입니다. 태조는 제 오촌 조카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송대길 중윕니다. 반갑습니다.”

 

엉겁결에 인사가 이뤄져 서로 당황이 지나쳐 황당할 지경이다. 하태조와 하지해는 다른 사람 앞에서 누나 동생으로 호칭하자는 불문율도 졸지에 잊어버렸다.

 

송대길은 학생 앞에 위엄을 갖출 시간조차 없이 인사에서 빠진 주영을 소개했다.

 

“이 얘는 내 오촌 조칸데…. 송주영. 인사해.”

 

주영이 얌전하게 인사했다. 어깨에 걸쳐있는 런던포그가 새로 유행하는 패션처럼 우아하게 보인다. 패션의 모든 스타일과 디자인을 감각 있게 소화하는 모델 같다. 아무도 물에 빠진 얘가 걸친 옷이라곤 상상 못할 것이다. 더구나 고2년생이라곤 짐작도 못할 것이고.

 

오늘 아치섬의 만남은 오촌간을 짝으로 해서, 두 성(姓)의 상견례가 돼버렸다.

즉, 공식을 쓰자면

송대길 + 송주영 = 송씨 가문(5촌)

하태조 + 하지해 = 하씨 가문(5촌)

따라서 송씨와 하씨의 가문간 만남이다. 그렇다고 둘의 합이 10촌이라는 뜻은 아니다.

 

서로가 예사롭지 않은 묘한 만남이라고 고개를 갸웃둥 한다. 살아가는 동안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고모, 우리 지도관님 미남이지? 학교에서 인기 짱이야.”

 

복장위반 과실점수로 또 외출금지 당할까봐 하태조는 인사치레로 선수를 쳤다. 미인계 전략 냄새도 풍긴다. 이렇게 나오는 판에 학교에 돌아가 학칙을 엄격히 적용하기도 민망할 것이라는 계산도 들어있다.

송대길은 상대 여학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이름이 지혜라고 했나요?”

 

“아뇨. 지해입니다. 땅 지, 바다 해 말예요. 흔한 이름이 아니죠. 육지와 바다를 주름잡을 이름이라나요. 저희 아버지도 마도로스인데 저더러 마도로스와 결혼하라나요. 요즘은 마도로스가 인기라고 하면서.”

 

지해는 달변가처럼 말한다.

글쎄 그녀의 말이 현실에 부합되는지는 모를 일이다. 송대길은 항상 반대로 생각해 왔던 터라 듣고 보니 자신의 사상이 흔들린다. 상선학교를 지원한 것도 엥겔지수를 낮추기 위한 것이었고, 졸업 후에도 동일한 견해라는 것에 변함이 없는데.

 

산꼭대기에서 넷은 더 이야기를 나눴다. 해발 140m 산 정상의 기온은 계산상 해변보다 1℃가량 낮지만 계산치보다 더 쌀쌀한 것 같다. 해풍이 섬을 계속 몰아붙여서 그럴 것이다. 해변에서 쥐를 만나 기분이 상해서 등대 쪽으로 아예 올라와 버렸다는 것도 송씨와 하씨들의 공통된 이유임을 서로 알게 됐다. 이 우연의 현상에 감동한 사람이 있다면 박수칠 만하다.

 

대화는 자연히 상대가 바뀌어져 갔다.

하태조가 송주영에게 은근슬쩍 접근하는 것이 노골적이다. 스타일이 너무 좋다니, 여고생인 줄은 몰랐다니, 언제 한번 만날 수 있는 거니, 등등 하면서.

주영은 그럴수록 말수가 적어진다. 오늘 사건 기억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주영과는 대조적으로 달변가 하지해는 대화의 내용이 육지와 바다를 넘나든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전공인 사회학을 넘어 철학까지 섭렵한다. 그리스 신화 부분에서는 해신(海神)인 포세이돈까지 디테일하게 설명하면서 바다 전공자 송대길을 부끄럽게 한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는 데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다소 유익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

 

산에서의 만남을 우연 혹은 운명 내지 숙명으로 생각하면서 두 쌍은 헤어졌다.

갑자기 운명과 숙명의 차이가 생각난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을 맞는 것은 운명이고, 뒤에서 날아오는 돌에 맞는 것은 숙명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운명은 피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물결 따라 운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조종하는 항해사가 돼야겠다고 송대길은 다짐한다.

 

그는 주영을 데리고 섬 서쪽 바닷가 해변으로 갔다. 서쪽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바위에 앉으니 엉덩이 닿는 부분이 따뜻해 온다. 바다 건너 영도에는 봉래산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둘만 있을 때는 너무 이야기를 맵시 있게 잘하는 주영이 더디어 본격적인 토크쇼에 들어간다.

 

“아저씨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

 

갑자기 뜬금없는 주영의 질문이다.

등에 해를 지고 있는 송대길의 눈은 주영과 마주쳤다.

 

“무슨 말이야?”

 

“그 대학생 언니한테 왜 자꾸 관심을 보내?”

 

“오해야. 그 여학생은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는가봐. 모른 척하고 그냥 들어줬어.”

 

“아저씬 미남 아니라 할까봐,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애.”

 

“주영보다 더 예쁜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 해!”

 

“이제부터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을래요. 오빠라고 부를 꺼야.”

 

창세기부터 주영은 그를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송대길은 엄연히 오촌 당숙인데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달랬다. 오촌오빠도 있지 않으냐고 예를 들었으나 그건 코미디언들이 웃기려고 하는 말이라고 설명 아닌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주영은 오빠 호칭이 더 매력적이고 친근감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양반가문에 법도가 있고 해서, 그러면 대신 자주 데이트해주는 걸로 타협을 보았다. 이후 일단 아저씨 호칭은 얌전히 지켜왔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오빠 유령이 덤불에서 나왔는지 재방송이다.

이럴 땐 제법 이론적으로 말해줘야 한다.

 

“오빠의 호칭은 촌수가 짝수가 돼야 해.”

 

“촌수가 뭐 중요해. 나이 많으면 오빠라고 할 수 있지. 아니 요즘은 나이가 적어도 오빠라고 하더라구.”

 

“그래도 우린 촌수가 너무 가까워. 먼 친척 같으면 모르지만….”

 

“우리 촌수에 세 개만 더 보태요. 팔촌은 어때? 짝수이니 오빠라고 부를 수 있고….”

 

“팔촌까지는 친족으로 민법상 결혼도 불가해. 이왕이면 다섯 개를 보태 십촌 어때?”

 

“그러면 결혼해 주겠어? 아저씨?”

 

“비약은 금물이야. 피도 안 마른 게.”

 

그러면서 알밤 하나가 주영의 옆머리로 날아갔다. 송대길의 알밤이 형편없었는지 주영은 혀를 내밀고 웃는다. 물에서 건져 올린 이후 진정한 웃음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좌우지간 지금부터 오빠라고 부를 거야. 아저씨는 퇴출됐어.”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하라고, 송대길이 손을 들고 말았다.

 

 펌프실에 들러 수리한 펌프를 확인했다. 수리한 펌프가 잘 작동되고 있다는 것은 파이프 소리만으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해수 통과하는 소리가 선명하다. 오늘 설비기사의 노고가 감사할 따름이다.

 

 

 

***

 

송대길과 주영은 펌프실을 나와 섬을 휘감고 있는 바윗길을 더듬어가고 있다. 아래에는 제법 높은 낭떠러지가 사다리를 탄 형국이라 다리가 바들바들해지기도 한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있는 주영이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땀도 함께 베여 있다. 놓치면 안 된다는 본능이 둘을 세게 잡아당긴다. 혹시 실수하여 다이빙이라도 하는 순간에는 아저씨와 조카 관계는 망각하고 처녀 총각 귀신으로 사람들이 포장해버릴 것이다. 그래야만 주간지 한 권이라도 더 잘 팔릴 테고.

 

한숨 돌릴만한 길을 걷고 있을 때 슬쩍 질문을 던져본다. 아저씨 쪽에서.

 

“주영은 결혼상대로 어떤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 키 크고, 근육 있고, 핸섬하고… 그 외?"

 

“그렇게 여러 조건 달 것 없어요. 그저 오빠 같으면…."

 

여기서 헷갈린다. 오빠 호칭은 합의에 의한 것이지만, '같으면'이 무슨 의민지 약간의 사고력을 요한다.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다. 좀 커서부터는 아저씨를 많이도 따르는 조카다. 크면서 이성으로 섞어보는 바람에 당혹해할 때도 있지만 이만한 나이에는 보통의 일로 여길 수 있다. 더구나 제복 입은 오빠나 아저씨에 취약한 여고생들이 많으니까.

 

어느덧 준비된 장소에 이르렀다. 편편한 바위가 뒷마루를 방불케 한다. 옆에 조카를 앉혀놓고 송대길은 갑자기 생각하는 로댕으로 변했다.

 

군대를 마치고 나면 좋든 싫든 바다로 진출해야 한다. 취직자리가 변변치 않은 육지보다는 바다가 인생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해로(海路)로 행진하는데 앞장섰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총장이 후진양성에 힘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도 바다로 향한 일편단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송대길의 포부는 좁은 육지에서는 해결이 되지 않고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바다에서 풀어야 한다는 신조다.

 

바다가 낭만으로 곱게 모셔둘 그러한 처지는 아니지만 이 순간에는 바다와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젊은 군인은 발아래 펼쳐진 바다가 친근하게 느껴져 온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바다는 위대하다고 한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아득한 수평선, 백사장에 와서 부서지는 흰 파도, 갈매기 떼가 오락가락하는 푸른 섬, 보기만 해도 시원한 파란 물결, 인간의 가슴을 풍족하게 적셔주는 시원한 바람….

 

바닷가에 가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철학자가 된다.

바닷가 백사장의 하얀 은모래가 유혹하는 상상의 그물에 갇힌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전라의 알몸이 되어 사해 위에 떠있는 것도 얼마나 멋진가?

 

  지용(芝溶)도 바다를 노래했고,

  무애(无涯)도 바다를 읊었고,

  춘원(春園)도 바다를 예찬했다.

 

누군가가 잘 인용했다.

대지가 우리의 인자한 어머니라고 하면 바다는 정다운 애인이라고 잘 비유했다. 바다로부터 용맹을 배우고 포용력을 배우자고 한다.

 

주영이 옆에 있을 때,

송대길은 평생 바다를 품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갈매기의 혜안도 가르쳐주고 싶다. 부산갈매기는 높은 하늘에서도 바다 속의 멸치를 분간할 정도로 밝은 눈을 갖고 있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밝은 눈을 갖고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라.’

존 메이스필드가 노래한 시를 읽고 그는 바다로 갈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바다로 가야겠네

  바다와 하늘만이 있는 곳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은 큰 배(船)와

  그것을 인도하는 별, 뱃머리의 저항이며

  해풍의 노래, 흰 돛배의 파닥거리는 소리

  그리고 바다 표면에 끼어있는 회색안개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여명의 새벽이거늘,

  아무래도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네.

 

살짝 주영의 머리카락이 그의 턱에 걸렸을 때 그는 '옆에 사람이 있었구나'의 현실로 돌아온다. 너무 성숙한 향기가 접근한다. 천지창조 엿새 만에 사람을 빚은 이유를 충분히 알 만큼 아름다운 느낌이다.

 

섬 꼭대기에 대형 스피커는 언제 설치하려나?

이 시간만큼은 크게 소리 좀 질러줬으면 좋겠다.

'아리랑'을 들려주고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러주면 부산항을 출항하는 배들은 뱃머리를 항구로 도로 돌릴까?

 

부산항을 오가는 배들을 바라보며 미래가 뱃길 따라 뻗어나간다. 먼데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에 주영의 어깨가 시선 밑에 왔다. 이 애가 커서라도 저 바다를 생존의 전쟁터로 보지 않길 바란다. 대신 꿈이 실현되는 유토피아 광장으로?

 

사춘기의 사랑을 세상의 방정식에 대입시켜야 답이 나오는 줄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 좋아하는 마음은 좋아할 뿐이지 사랑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

후배 한 명 소개시켜 달라는 주문은 오도간 데 없고 아저씨와 둘의 시간을 즐기는 깍쟁이!

 

등대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둘의 발걸음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러면서 부산항 부두 뒤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있는 산기슭에 늘려있는 허름한 집들로부터 불빛이 피어나오기 시작한다. 저 낮은 집들 안에서 남편이나 애인을 바다로 보내고 돈뭉치보단 건강을 꼭 쥐고 오길 기다리는 여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흐르는 눈물이 무릎을 다소 적시긴 하겠지만….

 

“바다는 사람을 너무 멀리 떼어놓는 것 같애.”

 

주영의 말이다. 바다를 두고 많은 이별의 노래가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고 하는 말일까?

 

“통선 시간이 되었을 텐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 육지 쪽에서 통선이 오고 있다. 마지막 통선.

 

“학교 기숙사에는 남자들만 있어?”

 

“여기는 금녀의 섬이란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배라고 생각하면 돼. 외국 선박에는 여자도 태우고 다니지만 아직 우리나라 선박에는 여자가 타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진 나라니까.”

 

“그러나 여자를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배려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돼.”

 

“우리 조상 남자들의 이기적이고 미신적인 생각 때문이라구.”

 

통선이 오지 않았더라면 논쟁은 더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주영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

 

“다음에는 여자들을 위한 기숙사를 지어 놓으라고 건의해요. 통선 놓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뭐 걱정할 필요 없어. 미래엔 여자 학생도 입학시키겠지. 어쩌면 남자 기숙사에 여자가 머물러도 좋다는 규칙으로 바꾸는 것이 더 쉬울지.”

 

송대길은 좀 엉뚱하게 갖다 붙인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반응이 궁금했다.

주영이 걸치고 있던 런던포그를 그에게 건네준다. 섬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받아든 바바리가 퍽 따뜻하다. 사춘기의 혈기가 옷 안으로 전파되었는가 하는 착각이다. 젖었던 옷이 이미 말라 주영은 옷도, 얼굴도 뽀송하다.

 

그리고 말없이 일어설 준비를 한다.

 

통선은 제 시간에 섬을 떠났고 주영도 떠났다.

어깨를 껴안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공부와 친한 친구되라는 당부도.

 

 

 

 

***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가기를 소망했다.

화살이 아저씨에게 쏠리는 것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조카에 대한 지도 불량의 책임추궁이 들이닥칠 땐 송대길로선 쥐구멍을 찾을 길이 없다.

 

다행히.

주영은 나름대로 실속을 챙기는 영리한 얘라 2년 후 대학에 유감없이 입학했다. 캠퍼스에서는 아주 매력 있는 여성으로 인기를 얻었고, 부수적으로 결혼 프러포즈하는 남자들도 많아졌으며, 쇠뿔은 단김에 뺀다고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까지 순조로운 코스를 밟았다. 너무도 핸섬하고 예의바르고 균형 잡힌 남성이 그의 인생을 책임지게 되었다.

 

“둘 다 좋은 짝이니까 잘 살아야 돼. 고 서방이 너무 좋아 보이더라.”

 

몇 년 후.

조카가 깨 말을 옆에 두고 신혼살림을 열심히 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 때 송대길은 하선 휴가를 얻었고, 신혼살림을 방문해서 그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둘은 박장대소를 짓기도 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말은 헤어질 무렵에 나왔다.

 

“아저씨, 이상한 것은… 아직 결혼의 실감을 못 느끼겠어. 제가 너무 마음을 못 주고 있나봐. 고 서방은 잘 해주고 있는 데도 말예요.”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다행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지나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야. 마도로스인 나는 여자 사랑 한 번 못 챙겨보고 바다로 돌진했다구. 행복에 겨운 이야기는 내가 결혼한 후에 하라구. 그래야 나도 결혼을 논할 수 있을 것 아냐.”

 

조금도 위로가 안 되는 말인 줄 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것은 상대에게 더 괴로움을 준다.

짧은 군대생활 후에도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고 하는데 망망대해로, 그리고 이 나라 저 나라 지구를 몇 바퀴씩 돌고 귀국하면 고무신 바로 신고 기다려 줄 여자가 과연 있을까?

 

“내가 언젠가 말했죠? 아저씨 같은 사람 있으면… 하고.”

 

송대길은 이렇게 진지한 조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절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주영은 정말 배겨나지 못했을 뻔했다.

어떤 계기에선지 모르지만 주영은 절대자를 영접했고, 어느새 무릎 꿇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고마운 일이다. 의지하는 중에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절대자로부터 배웠고 인생에 복도 받았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앞으로 많은 사람이 애창할 것이다.

특히 뱃사람의 가족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