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치섬 상륙작전

아치섬 상륙작전

오선닥 2010. 10. 6. 09:35

부산 앞바다에 있는 섬 아치섬(조도)은

 1970년대 초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섬 주민이 강제로 퇴거당하고 상선학교가 들어섰다.

애환이 묻어나는 스토리가 있었다.

 

 

 

아치섬 상륙작전

 

 

야간에 부산항을 찾는 외국 선원들은 세 번 놀란다.

 

입항하는 날 항구 뒤로 우뚝 솟은 고층빌딩 불빛에 놀라고, 이튿날 아침 그 고층빌딩이 산등성 판자촌으로 변한 것에 놀라며, 또 판자촌 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무리의 규모에 놀란다. 적어도 1970년대 초의 풍경은 그랬다.

 

배들이 부산항으로 들어가는 동안 우측에 있는 오륙도(五六島)는 잘 보건만, 좌측에 있는 제법 큼직한 섬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는다. 영도 섬에 붙어 있는 것으로 착각해 지나쳐버리는 것일까. 부산에서 아침이 가장 먼저 온다는 아치섬(朝島)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겠지. 오륙도의 섬을 다섯 개로 보든 여섯 개로 보든 자유이니 눈길 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

 

 

 

 

역사적으로 아치섬은 조용했다. 임진왜란 부산포 해전 때 왜군이 세워 놓은 깃발을 눕히고 섬을 탈환한 사건을 제외하곤 그랬던 것 같다. 고기잡이배가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는 등 극히 평범한 생활을 하는 섬이었다. 간혹 소형 밀수선이 어둠을 타고 작은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으나 큰돈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섬이었다.

 

이러한 섬에 개발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동네를 밀어내고 학교를 짓겠다는 것이다.

 

“오라부니, 이젠 우린 우찌되는 거예?”

 

“끝까지 버텨봐야제. 설마 우릴 바다로 밀쳐낼까부.”

 

문짝이 찌부덩한 초가집의 마루에 걸터앉은 두 오누이는 핏기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아치섬에 국제해양대학교의 이전이 결정되자 두 오누이는 앞길이 망망했다. 섬의 130가구 중 100가구는 이미 영도로 혹은 시내로 이사를 했지만, 나머지 30가구는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했다. 오누이는 섬에 남아 있는 그들과 함께 물 건너 영도의 봉래산에 운명을 맡겨버린 듯 초점 잃은 눈으로 산봉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국가가 준비한 보상비도 적었지만 무엇보다 조상대대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온 섬을 떠나서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부모를 여의고 살아온 것도 벌써 5년째다.

 

섬에 남은 30가구는 결사항전에 들어갔다. 매일 한 번 이상 모여 전의를 다졌다. 조개와 미역을 따며 생계를 이어온 해녀들도 몇 명 남아 전투에 합류했다. 오누이 집의 누이동생 을님은 막 해녀가 되려는 어린 처녀다.

 

 

 

***

 

영도에 있는 국제해양대학교의 총장실에서는 심각한 작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주민의 저항이 너무 크니 상륙팀을 세 파트로 나누죠. 남쪽과 남서쪽 그리고 북쪽에서…….”

 

연습선처장이 열심히 브리핑했다.

이때 교무처장이 끼어들었다.

 

“이왕 상륙작전을 감행할 바엔 대대적으로 하면 어떨까요. 동서남북에서 일시에 말입니다.”

 

연습선처장이 가만있지 않고 말을 받았다.

 

“물론 일시에 실시해야죠. 그러나 동쪽엔 해안선이 가팔라서 배가 접안할 수 없습니다.”

 

물정도 모르고 아는 체하던 교무처장은 연습선처장의 한 마디에 움츠리고 말았다.

 

분위기를 총장이 잡는다.

 

“에~ 알겠습니다. 그러면 세 파트로 나누기로 하……고. 학생들 동원계획은 차질 없겠지요?”

 

총장은 마지막으로 학생처장에게 학생동원 상황을 확인하고 회의를 교통 정리했다.

 

조용한 ‘아침의 섬’은 이렇게 해서 상륙작전에 휘말렸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 시행하는 상륙작전이다. 섬은 조용했건만 140미터 첨봉(尖峰)에는 국제해양대학교 깃발이 꽂힐 운명이다.

 

아치섬은 이미 대한민국 법령에 의해서 국제해양대학교의 새로운 캠퍼스 부지로 지정되었다. 칠대양 제패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교를 이전해야 하고, 이전장소로서는 이만한 부지가 없다고 총장은 정부를 상대로 침이 마르도록 주장해 왔다.

 

영도 남단 해변 언덕에서 20년 이상 바닷바람을 맞으며 지탱해온 현재의 캠퍼스보다는 부산항 입구에 위치한 이 아담한 섬이 더없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오륙도를 적당한 간격에 두고 서로 윙크하는 친근 거리가 일품이라고 강조한다.

 

부산항을 드나드는 외항선들이 섬을 지날 때마다 교정의 웅장한 모습을 보며 감탄할 것이고, 더욱이 섬 꼭대기의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민요 아리랑을 듣고 감탄을 넘어 눈물까지 흘릴 것이라는 게 총장의 설명이다. 이 설명이 정부 관료들을 설득하는데 주효했고, 마침내 새로운 캠퍼스의 설계가 이뤄졌다.

 

“확성기 용량은 휴전선 대형 크기 정도면 되겠지요?”

총장은 벌써 섬에 확성기를 설치한 것처럼 흥분했다.

 

총장의 꿈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에 총무처장은 전혀 아이디어가 없어 당황해했다. 휴전선 확성기는 개성까지 들린다는데 그렇다면‘이거, 야단났네!’ 즉흥 반응일 수밖에 없다. 부산항 구석구석 소음측정기를 달아둬서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아닐지 걱정이 될 판.

 

“확성기 용량은 한번 조사를 해봐야겠습니다만…….”

 

총장은 구태여 답을 바라지 않았지만 총무처장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중용이 가장 좋은 대답이라는 걸 경험으로 터득한 사람처럼 얼버무렸다.

 

주저할 시간 없이 새 캠퍼스 조감도가 총장실에 걸렸다. 총장실에 드나드는 손님마다 새 캠퍼스의 장래성과 상징성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설명을 하는 총장은 스스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자부심에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아이디어가 자신의 조그만 머리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치섬은 순도 높은 배움의 전당으로 바뀌어야 할 절체절명의 사명을 안고 정신적 및 물질적 준비에 돌입했다.

 

 

 

***

 

 

불행히도 아치섬 캠퍼스 건설은 섬 주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떠안겼다. 이 섬에게 1970년은 바로 ‘전쟁의 해’로 기념된다.

 

오랫동안 어업과, 때론 밀수 보따리장수로 비교적 풍요롭게 살아왔던 섬이 어느 날 난데없이 학교를 짓겠다며 육지로 이주하라는 퇴거명령을 받고는 초상집이 돼버렸다. 을님 남매도 우울했다. 또 분노했다.

 

“죽어도 여길 못 떠난다. 섬을 사수하겠다.”

 

섬 주민들은 버텼다. 그러나 정부의 결정은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물레방아일 뿐이다. 때가 때인 만큼 운신의 폭은 없다. 유신헌법 준비를 위해 공포정치를 밀고나가는 시대 아닌가.

 

정부가 제공한 육지의 아파트로 이주한 가구를 뺀 나머지 30가구는 결사대를 구성했다. 죽으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턱뼈보다 더 단단하다.

 

할 수 없이 정부는 디데이를 정했고, 여기에 국제해양대학생들이 동원됐다.

 

“세 척의 바지선 편대는 반도호 지휘부의 지시에 경청해주기 바랍니다. 상륙지점은 이미 배부한 작전계획서에 명시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럼 곧 작전에 들어가겠습니다.”

 

작전 돌입에 앞서 학생처장의 간단한 작전 설명이었다.

 

곧 바지선에 불도저를 나눠 실어 세 방향에서 동시 섬 상륙이 감행됐다.

 

불도저가 육상에 오르자 뒤이어 학생들이 상륙진을 형성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바로 이런 것임을 실감하는 현장이다.

 

가까운 앞바다에는 실습선 반도호가 앵커를 박아놓고 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배에서 쌍안경으로 보면 상륙진의 모습과 주민들의 동태가 렌즈로 확대되어 들어온다. 작전 지휘관은 무전으로 작전을 지휘했다. 반도호가 함대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역사적 사건이 기록되는 순간이다.

 

반도호로 말하면 석탄을 연료로 왕복동 엔진을 돌려서 1962년 초 하와이를 갔다 왔다. 학생들의 해외실습 운항이었지만 신문기자와 카메라맨, 의사 등 많은 외부인들이 동승하여 자랑스럽게 항해를 했다. 하와이 교포들이 눈물을 흘렸을 뿐만 아니라 망명길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비운의 대통령은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배가 출항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하와이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유서 깊은 반도호에서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치섬 주민들이 순순히 섬을 넘겨줄 리가 만무하다. 주민들은 불도저 앞에 드러눕고, 돌팔매를 하며, 삽과 곡괭이를 들고 상륙부대 쪽으로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이때.

 

바지선에서 섬으로 올라간 학생 부대들이 돌격 진형을 갖추기 전에 갑자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 달아나는 학생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여?”

 

반도호 지휘부는 당황했다. 멀리 섬에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젊은 여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학생들 쪽으로 돌진해오고 있는 것이다.

 

가까이 왔을 때 여인의 몸은 범상치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매캐한 냄새가 물씬 하는가했더니 온몸이 무언가 범벅이 돼 있었다. 오물이다.

 

삼십육계!

 

무서워서라기보다 더러워서 피한다는 속담을 확인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여자의 광란적인 돌진으로 잘 짜였다고 믿었던 상륙진은 삽시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갑자기 한 여자의 육탄전을 당한 학생들은 이미 해변 쪽으로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적진이 감행한 기습반격 주인공은 을님이었다. 어린 스물한 살 처녀가 이날의 잔다르크로 등장한 것이다. 자기 집 헛간 화장실에 뛰어들어 오물을 뒤집어쓰고 뛰쳐나와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탱탱한 피부에서 유리알 같은 오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모두들 한눈은 을님 쪽으로, 다른 한눈은 먼 바다 쪽으로 돌리는 상황이 돼버렸다. 현장을 쳐다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갈등은 순간 최고치에 이르렀다.

이날의 상륙작전은 완전실패로 끝났고, 며칠 동안 소강상태로 있다가 주민대표를 설득하여 다시 불도저를 섬으로 옮긴 다음, 겨우 캠퍼스 공사를 시작했다.

 

 

 

***

 

학생을 지도하는 교관이던 중위 유성훈은 2년 전 그 치열했던 ‘아치섬 상륙작전’을 잊을 수 없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을님의 과감한 행동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상륙진 전방에 위치해 있었던 자신은 재빨리 몸을 비키지 않았더라면 을님의 돌진과 충돌할 뻔했다.

 

그녀의 뜀박질은 겁나는 속력이 실렸었다. 두 개의 젖가슴이 신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힘쓰고 있던 모습은 애절할 정도였다.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배꼽 밑의 가랑이는 부끄럼을 재치고 앞모습을 내밀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허리에서 멈춘 것으로 기억된다. 스쳐가는 옆모습과 지나가는 뒷모습 모두 생존을 강조하는 행위였다.

 

일상의 세상이 흘러가듯 을님 오누이도 결국 육지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버틸 힘이 없었다. 구청 직원과 마을 동장이 시간이 멀다하고 찾아와 반회유, 반협박을 되풀이하는 것을 참을 도리가 없었다.

 

이사 가는 날 을님의 모습에는 오물의 흔적이라곤 한 점도 없었다. 원피스 밖으로 드러난 살결은 진흙 팩으로 가꾼 몸 같았다. 그러나 순진한 자태는 ‘비는 내리고 어미는 시집가는’ 체념이 묻어나왔다.

 

“저리 순박한 애한테서 매서운 용기가?”

 

보는 이마다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여러 해 동안 을님과 가까이 지내온 옆집 할머니는 이삿짐을 거들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을님에게 물었다.

 

“그래 아파트로 이사하는 거여?”

 

“아니예, 아파트는 비싸서예. 청학동 중턱배기 반지하 집을 월세로 얻었심더. 방이 두 개라서 오빠랑 살기에는 불편이 없을 거 같심더. 할무이는 내일 이사하심니꺼?”

 

“그래, 우린 내일이여. 용달차가 온다카네.”

 

남아 있는 집들의 이삿짐은 그리 많지 않다. 언제 집이 헐릴지 몰라 살림살이를 많이 두지 않았고, 또 넉넉지 못하니 많이 둘 수도 없었다.

 

불도저는 겨자씨만한 양심이라도 있었던지 이사나간 순서대로 지붕을 뭉개어 나갔다. 할머니 집은 다음날 이삿짐만 밖으로 내어지면 헐릴 것이다. 지붕이 내려앉으면 누울 곳, 앉을 곳이 없으니 당연히 몸을 비켜야 한다.

 

을님은 이삿짐을 다 싣고 작별인사를 위해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무이, 어데로 이사하실 검니꺼?”

 

“대신동 막둥이가 같이 살자캐서 그리로 갈끼라. 걔도 혼자서 밥 해묵는 것보다 낫다카이. 이사 후 나중에 연락함세. 한 번 놀루 오렴.”

 

“할무이 감사함니더. 그러문 이제 가 보겠심더. 몸조심 하이쇼.”

 

을님은 ‘어무이’라고 부르려고도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막내아들을 을님에게 맞춰보려고 뜸을 들여 보기도 했으나 을님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을님은 사실 할머니의 아들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오빠 장가부터 보내야 하는 처지라 할머니의 뜻을 모른 척해 왔다.

 

비록 집이나 뜰은 불도저에 뭉개지고 허물어졌을지라도 가난한 사람끼리 정 주고 살았던 기억은 가슴에 안고 그들은 모두 섬을 떠났다.

 

 

 

 

***

 

주민이 퇴거한 섬에 불도저가 속속 올라왔다. 언덕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허름한 주택들이 불도저 갈고리 손에 하나 둘씩 무너져 갔다. 불도저는 섬 봉우리의 허리를 뭉개어 해안을 매립해 나갔다.

 

허리가 잘려나간 산등성이에는 기숙사가 들어서기 시작하고, 이어서 식당이 들어서고, 곧 B동기숙사가 들어섰다. 기숙사 하나는 먼저 섬으로 이주해온 일부 학생들을 위한 임시 교실로 사용됐다.

 

섬의 공사가 진행된 지 2년이 됐을 때 유성훈 중위는 아치섬 분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군인의 신분으로 섬에 있는 예비후보생을 위한 학훈단 업무를 총괄하기 위한 것이다.

 

기숙사 건물에는 보일러를 설치하지 않았다. 공사비를 절약하기 위해서다. 외로운 섬으로 몰아치는 찬바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런 때 아이디어는 총장한테서 나오기 마련이다.

 

“코다츠가 있지 않은가요. 집중적으로 데울 수 있어 효과적이라구.”

 

‘집중적으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다츠’는 전구 불알로 사람의 불알을 집중적으로 데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코다츠는 온돌문화가 아닌 다다미문화의 일본 사람들이 테이블이나 이불 밑에 놓고 자주 쓰곤 하는 난방기구이다. 취침 시 학생들은 사타구니에 넣고 추위를 녹인다.

 

우려했던 대로 허벅지가 데어 화상을 입은 학생이 생겼다. 심지어는 불알이 탔다고 피해를 호소하는 학생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난방은 스팀장치로 바꾸었다. 정부의 씀씀이에 여유가 생긴 덕분이다. 난방이 해결되긴 했으나 취침 중 스팀파이프에서 스팀이 세어 잠든 두 학생이 질식했다가 가까스로 회복된 사건이 발생했다. 새어나온 스팀이 사람의 숨통을 막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해보지 못한 순진함 때문이었다.

 

스팀파이프가 온수파이프로 바뀐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처음부터 온수파이프로 했으면 공사비가 덜 들었을 거라고 주장하겠지만 경부고속도로를 처음부터 튼튼하고 똑바르게 건설했더라면 보수비용이 덜 들었을 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행착오를 겪고 재정이 호전됨에 따라 캠퍼스의 시설은 개선을 거듭해 나갔다.

 

 

***

 

“기숙사 하나를 임시교실로 쓰는 만큼 수업시간과 내무생활이 불편하고 혼란스럽더라도 학생들을 잘 지도해주시오.”

 

학생처장이 당부했다.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어 학생 지도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유성훈 중위는 너무 당당하게 말했었는지 학생처장은 눈이 둥그래졌다. 잠시 후 학생처장은 오히려 그것 이상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말이 없는 듯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헤엄쳐 섬을 빠져나오지 않는 한 학생들은 감옥 안의 빠삐용과 다름없다. 울타리가 따로 필요 없다. 바닷물이 멋진 울타리 역할을 한다. 섬 캠퍼스에서 수업하는 학생들은 갇힌 몸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안전하게 보호받는 몸이기도 하다. 필요하다면 통선으로 육지와 섬을 왕래하면 된다. 진리탐구에만 매진하면 자유는 오히려 속박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을지 모른다. 현명한 학생이라면 이 정도의 깨달음은 있어야 한다.

 

만약 교복을 비닐보자기에 넣어 헤엄쳐 육지로 간다면, 용감성을 칭찬하고 탈사(脫舍)를 용서해주는 것도 괜찮겠다. 조오련처럼 도해(渡海)한다면 유명한 수영선수 배출에 오히려 박수를 보내야 할지도.

 

섬 캠퍼스가 완성되기까지는 약 4년이 걸릴 것이다. 상륙작전에 성공했으니 정부가 계획했던 대로 공사를 진행하면 된다. 평일 섬의 풍경은 ‘한쪽에선 강의, 한쪽에선 공사’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토요일의 섬은 학교건물 신축공사장에 불도저 소리가 없다. 섬을 찾는 시민들, 학생들을 면회 오는 가족들을 위해서 공사를 쉰다. 소음 때문에 공부가 어려울 텐데도 학점을 잘 극복한다. 배의 거대한 엔진 소리에 적응해야 하는 학생들은 이런 소음쯤은 견뎌내야 하는 줄 미리 알아 챈 것 같다.

 

“섬에서 큰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요?”

 

공사장 옆 간이농구장에서 학생들이 결렬하게 농구경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학생처장이 유성훈 중위에게 불안함을 내비쳤다.

 

“응급시엔 헬리콥터를 불러야겠지요. 보통은 통선으로 이송합니다만. 무엇보다 예방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운동 시설이 없으니 농구장은 인기장소에 속한다. 모두가 신동파 선수라도 되는 듯 몸이 훨훨 나는 것 같다. 오늘은 공사판의 먼지가 없어 마음 놓고 운동하기에 좋다. 공보다 몸이 더 높이 뛸 것 같은 상쾌한 날로 느껴진다. 이럴 때일수록 사고에 주의해야 한다. 헬리콥터는 비용이 무거워 뜨기가 어려울지 모르니까.

 

봄의 첫 전령사는 남쪽 해안 언덕의 봄나물 새싹이다. 공사판에도 올라올 만한 새싹은 올라왔다. 어쩐지 시선이 많이 간다.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다고 해서 식탐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용케도 솟아오르는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이면 어머니들이 열심히 기다렸던 나물로 기억되는 탓이다. 소화 기능을 좋게 하는 씀바귀, 머리를 맑게 하는 두릅, 냉증을 완화해주는 쑥…… 이런 것들을 보기만 해도 생명의 힘을 느낀다.

 

조용한 낭만을 즐기겠다고 섬을 찾는 남녀는 해안가로 가기 마련이다. 가는 동안 해수 펌프실을 지난다. 갑자기 앞을 휘익 스치는 작은 물체가 있는데 봄이 되자 몸놀림이 빠른 쥐새끼다. 손을 꼭 잡고 가는 아베크족이 놀라 부둥켜안거나 급히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해변의 바위는 물고기 낚시하기 좋지만 애인 낚시하기도 좋다. 바위에 걸터앉아 멀리 수평선을 보노라면 모르는 사이 아가씨가 옆에 와 앉는다. 남학생만 있는 학교에 웬 아가씨냐고? 물론 휴일 때의 장면이다.

 

이때 물새와 관련된 노래를 불러주면 안성맞춤이다. 하춘화는 작년 열여섯 살 때 ‘물새 한 마리’를 불러 대한민국 바닷가에 앉아 있는 남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곤 했다. 이제 두 마리의 물새는 더 넓은 바다를 노래할 것이다.

 

 

***

 

본교에서 회의를 마치고 섬의 분교로 돌아오던 유성훈 중위는 통선장에서 통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따라 손님이 없어 혼자 타고 가는 건가 생각했었는데 뒤따라 타는 아가씨 한 명이 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은 아가씨. 까만 생머리가 길다싶을 정도로 허리 가까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 꽃다발이 들려 있었는데 섬으로 가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구릿빛 피부는 단번에 봐도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어쩐지 눈에 익은 모습에 그는 수수께끼 풀기에 들어갔다. 집중해서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애썼다.

 

“혹시 아치섬에 사신 적 없으신가요?”

 

유성훈은 기어코 질문을 하고 말았다.

질문을 받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아가씨는 오히려 작은 미소를 띠며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절 기억하시겠심니꺼? 글키도(그렇기도) 하건네요. 중위님이 2년 전에 국제해양대학 학생이었다문요.”

 

중위 계급장에서 눈을 뗀 그녀는 시험문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사람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2년 전 그는 국제해양대학교 4학년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아치섬의 단다르크였다. 을님.

잔상이 쉽게 떠오르자 유성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때 제가 맨 앞쪽에 서서…… 그만.”

 

“절 봤다는 뜻인가부네요. 괜찮슴더. 그땐 각오를 했으니께요.”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작은 미소까지 머금었다.

 

유성훈은 잠시 숨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잠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머리를 들자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오히려 살짝 웃음을 짓는 여유를 보이며 말했다.

“오물이 튀었다면 오히려 지가 용서를 빌어야지예. 세탁은 필요 없었능기예?”

 

참으로 대담한 여성이다. 자연스럽게 사투리로 말을 받아나가는 모습이 전형적 부산갈매기 아가씨다. 만약 그때 오물이 튀었다면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상황이었었겠지.

 

“이렇게 만나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통선을 탄 후 유성훈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기 민망해 일부러 옆자리에 앉았다. 마주 보게 되면 마땅히 시선 줄 곳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유 중위님은 냄새도 싫지 않으신가배요. 지 옆에 앉으시게. 지 몸에서 혹시?”

 

그녀는 30센티 여유도 두지 않고 옆에 앉은 그에게 말했다. 눈치 빠르게 이름표까지 봐뒀던 그녀의 시선 동작은 확실히 민첩했다.

 

“들고 계시는 야생화가 참으로 예쁘네요. 향기도 은은하고요.”

 

그는 말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도 꽃향기로 봐주시문 쬐금 고맙고요.”

 

그녀의 대답은 능숙했다. 그러면서 다른 대화를 하고 싶었던지,

 

“향기 없는 얘기는 요쯤에서 고만하고요. 유 중위님은 아치섬에 근무하시는가배요?”

 

부드럽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어떤 일로 섬에 가십니까?”

 

을님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그 이름을 부른다면 그녀는 분명 싫어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체했다.

 

그녀는 꽃다발을 약간 높이 고쳐 들었다.

 

“이 꽃은 지 부모님 묘에 놓고 올 거에예.”

 

잔다르크는 효심도 대단하구나. 유성훈은 그녀의 다른 면을 보았다.

 

“부모님께서 따님이 찾아온 걸 아시면 아주 기뻐하실 것 같네요. 괜찮으시다면 산소까지 동행해드려도 될까요?”

 

“지가 미안해서…….”

 

“상륙작전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사죄하는 뜻을 표하고 싶고요.”

 

“유 중위님 고맙심더.”

 

쌍분 앞의 상석(床石) 위에 꽃다발이 놓여졌다. 부산항의 남쪽 외해를 바라보고 있는 묘는 햇볕을 잘 받는 위치였다. 왜군도 이 섬을 차지하지 못한 역사의 증인 같았다.

 

“부모님은 이 자리를 좋아하실 것 같네요. 섬에서 생애를 마치셨으니 고향을 지킨다는 의미에서도.”

 

유성훈은 앞이 확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을님의 부모가 좋은 자리에 누워 계시는 것 같았다.

 

봉분을 향해 절을 마친 그녀는 잡풀 몇 포기를 뽑고는 묘 옆에 앉았다.

“구청에서 이장하라고 닥달하는데 공사장과는 먼 산등성이라 버텨볼람니더.”

 

“그럴 수 있다면요.”

 

“근데 조건이 있다카네요. 봉분을 없애고 상석을 땅과 평면으로 하라카네요. 이장하는 게 원칙인데 섬에서 일생을 살았던 부모의 생애를 감안하여 조건부로 허용한담니더.”

 

묘가 없는 듯 보이게 해 달라는 구청의 요청이 있었다고 그녀는 부연 설명을 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를 섬 역사의 증인으로 남겨두고 싶은 게 그녀의 마음이다. 직장을 찾아 서울로 간 오빠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봉분이 납작해 있더라도 부모를 아치섬에 모시겠다는 게 을님 남매의 희망이다. 그 희망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아무도 모른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