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군함엔 사람도 있다

군함엔 사람도 있다

오선닥 2010. 7. 25. 19:09

 1970년대 초 한국해군엔 구축함 3척밖에 없었다. 2차대전 당시 미해군이 사용했던 군함들이었다. 1942년 건조되어 1963년 한국해군에 인도됐다. 이들이 플레처급(2900배수톤)인 충무함, 서울함 및 부산함이다. 한국 해군의 주전투력으로 활약하다가 1991년 마지막으로 퇴역했다. 플레처급은 5인치 단장포 5문을 탑재해 강력한 펀치력을 자랑했으나 함재헬기 갑판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1973년에 도입돼 1994년에 마지막으로 퇴역한 2척의 섬너급(3200톤)은 5인치 2연장 3문의 화력과 함께 무인헬기 운용능력을 갖췄다. 한편 7척의 기어링급(3470톤)은 1972~1981년 도입돼 1998~2000년 퇴역한 것으로 유인헬기 운용능력이 좋았다. 퇴역한 기어링급 3척은 현재 진해, 강릉, 당진 등의 해상공원에 전시돼 있다.

 

 

한국형 구축함은 매년 한 척씩 진수돼 왔는데, 현재 1998년 광개토대왕급(3900톤) 3척을 비롯해, 2003년부터 진수한 충무공 이순신급(4500톤) 6척과, 2008년부터 진수한 이지스함 세종대왕급(9000톤) 3척으로 구성돼 있다. 장기적으로 추가 건조가 계획돼 있다.

 

 

휴전 이후 북한의 간첩선과 잠수함이 무수히 남으로 내려와 남한을 괴롭혔다. 해군의 레이더망에 걸려 대간첩작전까지 간 것은 그중 일부다. 북한은 간첩선을 어선으로 가장하기도 하고 물밑으로 잠수함이나 잠수정을 보내기도 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함정을 앞세워 공격하기도 했다. 1968년 원산 앞 공해(公海) 상에서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 호를 납치한 뒤 11개월 후에 승무원 82명을 석방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럼 2010년 3월 26일 서해의 천안함 침몰사고로 46명의 장병을 잃은 해군사(海軍史)는 어떻게 써야 할까?

 

 

소설의 주인공 송대길이 한반도 3면을 주름잡았던 때는 1970년대 초. 유신헌법을 공포하기 직전에는 분위기마저 삼엄했다. “군인도 사람이다”고 하면서 인권 운운하다간 골통 깨지는 시대. 제독이 수병을 조인트 깐다고 해서 부끄러울 게 없었다. 1968년 북한간첩의 청와대습격 사건 이후 나라 전체가 긴장 되어 있을 때 해군도 기합이 들어 …

 

 

 

 

 

군함엔 사람도 있다

 

 

‘남자는 얼굴에 자서전을 쓰고, 여자는 소설을 쓴다’고 누가 말했던가. 송대길의 말이 아니라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송대길은 이 유명한 문학가의 말에 동의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남자로서 그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 그러면서 자서전 냄새가 나는 이야기는 비빔밥으로 뒤죽박죽 섞어 놓는다. 오스카 와일드가 읽었다면,

 

“그것 봐, 자네 자서전 쓰고 있지 않는가?”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자서전이 아닌데도 말이다.

 

대학의 학점을 이수하니 송대길의 손에는 자동적으로 졸업장이 주어졌다. 그리고 4년 동안 국가예산으로 의식주 해결하고 학사모까지 받아썼으니 군에 입대한 그는 한마디로 의기충천했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그에게는 무궁화 꽃이 필 만하다.

현금 가치는 없지만 국가가 그에게 상 하나를 준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국가를 위해 문무(文武) 양수겸장으로 충성하라고.

 

“소집자는 이쪽, 비소집자는 저쪽으로!”

 

졸업식이 끝난 강단엔 졸업반 동료들이 두 무리로 나눠졌다.

 

‘소집자와 비소집자’

 

전자는 국방임무로, 후자는 기간산업체 근무로 나간다는 뜻이다. 전자의 무리에 송대길이 차출 당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복불복(福不福)의 결과다. 해군본부에서 구슬을 굴렸건, 제비를 뽑았건 알바 아니고, 현실은 그가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송대길은 ‘소집’이라는 용어 자체가 좀 못마땅했다. 신성한 국방임무에 임하는 사람을 일제 징용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꼭 그렇게 지칭해야 하는지.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다들 다이아몬드 계급장을 다는 것보다는 여러 곱절의 보수를 주는 해운회사(기간산업체)에 근무하고픈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군은 선호의 대상이 아니라 의무의 대상으로만 간주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인데도.

 

 

70년대 초의 봄은 배고프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인 면에서 초연하지 못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많이 구한다’의 속담이 세상을 세워나가고 있을 때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지런했다. 일하는 것이 여가 선용인 줄 알 만큼 바쁘고 초조하기까지 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송대길은 국가가 자신을 불러준 데 대해 일부러 자부심을 부여했다. 엄동설한에 봇짐을 메고 군항으로 떠나는 모습이 결코 우울하지 않다.

 

군복을 입혀 놓은 그의 모습은 임관식에 참석한 옆 동료의 애인이 부러워할 만큼 멋쟁이었다.

 

키 176cm, 몸무게 60kg, IQ…?

 

내공이 있는 신체 윤곽은 주위의 시선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했다. 가난한 나라에서 이만한 높이로 컸다는 것이 신기하고, 육중하지 않은 무게 또한 조화로운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사관후보생 하한신장이 162cm와 너무 대조적이어서 죄송한 점이 있으나 보기 좋은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곁들어 스마트한 품위는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둔 맥아더 장군의 모습이 오히려 초라할까?

 

군은 원래 들떠있는 사내 마음을 그냥 두지 않는다. 보따리 내려놓자마자 유격훈련, 보급창고 쉰 바퀴 돌기, 옥포탕에 고추 담그기… 등등.

 

한 달가량의 코피 터지는 훈련이 따랐고, 그 후 배치 받은 함정은 구축함이었다. 육군의 전방부대가 휴전선 부근의 전투부대라고 한다면 해군의 전방부대는 함대요, 함대의 주력은 구축함이다. 사관학교 출신들이 참모총장이 되기 위한 필수 근무 코스다. 필수코스인 만큼 근무가 빡빡하다.

 

군에서 말뚝 박을 사람도 아닌데 이런 배에 태우는 것은 국가적으로 낭비라는 걱정을 하기 전에 송대길은 부임 신고에 들어갔다.

 

“소위 송대길은 4월 1일부로 본 함정 근무에 명을 받았기에 신고합니다.”

 

직속상관인 대위부터 함장인 대령에게까지 신고가 마쳐졌다. 전신에 기합이 너무 들어갔든지 사방이 철판인 배에 부딪쳐 다칠까 염려스러울 정도다.

 

 

사람들은 흔히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같은 배를 탄다’고 한다. 그야말로 같은 함정을 타고, 고락과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진주만에 세워둔 군함 애리조나호의 피폭이나, 대서양을 항해하던 여객선 타이타닉의 빙산충돌과 같은 불행한 사고가 났을 때도 배 안의 사람들은 같은 운명을 짊어졌다.

 

“송 소위, 군함은 키 큰 사람 사절이라구. 보리 흉년에 왜 이렇게 컸어?”

 

직속상관인 서 대위가 친절하게 안내하는가 했더니 끝내 말꼬리를 꼬았다. 물론 재미있게 지내보자는 기대도 숨어 있을 테지만.

 

함정은 크기가 작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몸체가 크면 동력도 크게 소모하고, 운항비도 증가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적의 공격목표 면적이 클수록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함정의 설계는 작은 공간에서 많은 무기체계를 갖추도록 집약한다. 함정 내 공간은 바로 벌집 구조다.

 

이런 공간에 ‘키다리=천덕꾸러기’는 자연스런 공식이다.

 

“코 고는 습관은 없겠지요? 난 발동기 소리에 질린 사람이라서.”

 

철침대 3개씩 양 벽에 체인으로 매달아 놓은 초급장교용 작은 침실로 안내되었을 때 선임 소위가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좁은 방에서 여섯 명이 거주한다는 것은 동료의 잠 습관이 매우 중요함을 암시한다.

 

“침실에서 연애편지를 소리 내어 읽으시는 분은 없으시죠?”

 

신참의 위험을 무릅쓰고 송대길도 농담 섞인 말로 대꾸했다.

 

“이 양반 만만찮은 친구구먼”

 

새로 부임한 소위가 대시하는 폼이 보통이 아님을 보고 반은 놀라고, 반은 경계를 하며 초급 장교들은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염려 마십시오. 연애편지 낭송 듣기를 참 좋아합니다. 특히 남의 연애편지를…”

 

이번에는 시선의 밀도를 낮추기 위해서 그가 부드럽게 던진 말이다. 어이없다는 듯 억지웃음을 짓는 사람도 있다.

 

그에겐 애인은 없지만 편지 정도 띄워줄 만한 여자는 여럿 있다. 딱히 프라이버시를 챙길 만한 편지는 없을 것이지만 군대생활이 궁금해서 소식을 묻는 편지 정도는 있을 것 같고,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함에도 사람이 있기 때문.

 

 

 

 

 

배에는 침실 주위에 여러 총탄 흔적이 있다. 몇 년 전 북한 간첩선으로부터 총알세례를 받은 것이다. 하사관 식당에 있던 두 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한 명은 외판을 뚫고 들어온 총알에 직탄으로 맞아 생명을 잃었고, 다른 한 명은 뚫고 들어온 총알이 식탁을 맞고 당구공처럼 각도를 꺾고 스리쿠션으로 날아오는 바람에 운 없이 희생당했다.

 

조그만 낚시 배 같은 간첩선이 어떻게 4천톤급의 대형 구축함을 공격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기막힐 일이다.

 

그러나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대형포인 5인치포를 하늘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뱀같이 영리한 김일성 병사들은 수평 아래 15도 이하로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 대형포의 생리를 꿰뚫고 야밤중 구축함에 해파리처럼 달라붙어 근접 총질을 해대고 쏜살같이 달아난 것이다.

 

간첩선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기습공격을 받은 이 사건에서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만들어졌다.

 

다급해진 포술장교가,

 

“쏘아! 쏘아! 쏘아!”

 

병사들에게 마구 소리질러댔다.


"?…?"

 

병사들은 무엇으로 무엇을 쏘라는 것인지 몰라 무거운 5인치 포의 몸통만 열심히 헛돌리고 있었다. 평소 반복적으로 수행해온 전투훈련과 사격훈련도 다급해진 상황에서는 그 포술장교에게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낚시배 간첩선을 잡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미래의 참모총장의 꿈을 품고 있던 함장은 옷을 벗고 말았다. 사건의 교훈은 이후 구축함에도 M1 소총이 배급되었음은 물론이고, 함정에서 전투훈련 시 소총을 소지하게 된 계기도 됐다.

 

 

해군 역시 필수적으로 해병대 육상훈련을 거쳐야한다. 심신의 단련은 육해공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군인정신은 군인이면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기본에 속한다.

 

침투사격, 야간포복, 유격훈련, 각개전투, 완전무장행군 등을 포함해 상륙작전 훈련을 거쳐야 한다.

 

특히 쇠금파리와 깨진 병이 가득한 구릉을 맨발로 도하(渡河)하는 상륙작전 훈련은 해병대가 자랑하는 유별난 훈련에 속한다. 구릉 건너 방파제에 도착했을 때는 발바닥에 선혈이 가득하다. 깨진 유리조각이 발바닥을 핥고 간 것이다. 그러나 뭔가 해냈다는 자부심은 붉은 피로 증명 받는다.

 

완전무장 하에 천자봉 고지 정복에 낙오되지 않는 것은 사나이로서 하나의 자존심이다. 눈물이 쏟아지면서도 그 존심 때문에 끝까지 버텨내기도 했다.

 

몇 년 전 여름에는 구보 훈련 중 예비사관 2명이 도착지 목전에서 쓰러져 숨이 끊어졌다. 찜통더위에 무리하게 강행한 나머지, 결국….

 

거품 머금은 졸도 사건이 머리에 떠오르자 심신이 넉 다운된 가운데 송대길의 머리 속에는 왜 그렇게 여자들의 이름이 많이 떠오를까.

 

영자, 순자… 그리고 맹자, 공자…

 

“훈련이 고되면 제 생각날 거예요. 땀 닦을 손수건을 드릴 테니.”

 

입대하기 얼마 전 옆집 송희가 장난삼아 한 말도 떠올랐다.

 

제풀에 지쳤다가 제풀에 살아난다. 이것이 훈련 과정이다. 반복할수록 되살아나는 속도가 빠르다. 기합 받을 때는 ‘군인도 사람이다’고 부르짖고 싶겠지만 사람 취급하면서 기합 주는 군대는 없다. 그러나 이런 훈련 과정을 잘 마치고 나면 사람들은 ‘거듭났다’는 말로 위로할 것이다. 혹은 ‘군대 갔다 오더니 사람됐다’로 농담도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현존 정치인들은 군대를 용케 피해왔는데도 말이다.

 

 

해군의 주무대는 어디까지나 바다요 함정이다. 군인이라면 누구나 제식훈련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군함도 사람처럼 제식훈련이 필요하다. 편대를 갖춰야 하고 앞뒤, 좌우로 나열해서 퍼레이드도 해야 한다. 깃발이나 등화, 뱃고동으로 신호도 해야 한다.

 

배끼리 공중에 줄을 연결해 도르래를 굴리며 사람이나 물건 이송작업도 한다. 해상작전 훈련에 뒷받침되는 소화방수, 해상인명구조, 화생방 등의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육지에서는 땅 짚고 헤엄칠 수 있지만 바다에서는 물에 떠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맥주병이 되지 않으려면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물을 먹는 훈련이 필수 과정이다.

 

 

 

 

 

어느 군이든지 특수부대는 있기 마련이다.

육군은 특전사가 있고, 공군은 레스큐라는 전투기조종사들의 구조대가 있으며, 해병대에는 해병특수수색대가 있다. 그리고 해군에는 UDT라는 특수부대가 있다.

 

UDT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해군특수전여단’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특수부대로 수중폭파부대인 것이다.

 

UDT/SEAL의 이름에서 말해주듯 수중폭파(UDT: Underwater Demolition Team), 육해공 전천후특수타격(SEAL: Sea Air Land), 폭발물처리(EOD: Explosive Ordnance Disposal), 해상 대테러 등 4개 임무를 수행하는 해군의 비밀병기다. 지원자는 기초교육훈련 6개월과 기본공수훈련 3주 과정을 통과해야 UDT/SEAL 대원 자격이 주어진다. 기초교육훈련 과정에는 수영과 극기주 훈련, 스쿠버, 폭파, 특전전술, 사격, 팀별 기동, 대테러 훈련 등이 포함된다.

 

훈련생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관문은 역시 극기 훈련이다. 지옥주 훈련이란 별칭이 붙은 이 훈련은 최악 조건에서의 생존능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일주일간 지속되는 극기주 훈련 기간에 생도들은 잠을 잘 수 없다. 옷 한번 갈아입지 않고 갯벌과 시궁창과 물속에서 체력, 담력훈련을 받는다. 쥐나 개구리를 잡아먹어야 산다고 하면 일반인은 헛구역질을 할 것이다.

 

부상 등을 막론하고 3일 이상 훈련에 빠지면 무조건 퇴교다. 매 과정에서 요구수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교관 퇴교심사위’의 결정에 따라 방출된다. 생도들의 최종 교육 이수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해군에서 유별난 특수부대를 보유하고 있는가는 일반인에게는 궁금하다. 감성이 흐르는 세일러복을 입고 있는 수병들의 모습은 부드러운 부대의 이미지인데, 왜 강인한 부대가 필요한가,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물속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수행해야할 특수한 임무가 있다.

 

 

송대길의 룸메이트 김 소위가 UDT에 차출됐다. 아니 자원했다. 뭐 강요당한 자원이다.

 

어느 날 김 소위는 그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나라를 위해 애국할 기회가 온 것 같아. 난 UDT에 지원했어. 부대장이 지원자가 없어 차출해야 한다기에 그냥 자원한 거야.”

 

비교적 무던한 성격의 김 소위는 남의 고통을 보고 있는 것보단 스스로 십자가 지길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호리호리한 체격이 지옥훈련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긴 끌고 다닐 몸무게가 적으니 어쩌면 유리할지도 모른다. 간첩이 한반도에 우글거리는 요즘 특수부대의 훈련이 얼마나 세겠냐.

 

UDT 훈련은 장교와 사병의 훈련이 따로 없다. 계급장 떼고 같이 훈련 받는 거다. 훈련 수료 후에 역할이 다를 뿐이다.

 

“그래, 결심을 했다니 뭐라고 얘기 못하겠지만…. 아무튼 열심히 해봐. 그런데 황 양은 동의했어?”

 

김 소위의 여자 친구 황진희를 말한다. 송대길은 평소 그녀를 황 양으로 불렀다. 김 소위에겐 기생 황진이와 혼돈할 염려가 있으니 그냥 황 양이라고 호칭하겠다고 사전에 필요 없는 양해를 구했다.

 

“아직 말하진 않았어. 알면 실망할지 몰라.”

 

실망한다는 것은 긴 훈련기간도 그렇지만, 훈련 후의 근무도 불규칙하리라는 일반적 견해 때문이다.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다보면 애정의 끈이 느슨해지지 않겠냐는 염려도 숨어있다.

 

김 소위는 황 양을 황송하리만큼 좋아한다. 그러나 황 양은 김 소위의 결정에 대해 그렇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송대길의 견해다. 그녀의 주위에 말 상대 남자가 많다는 것도 그렇고, 둘은 나이트클럽에서 만나 가볍게 맺어진 인연이라는 것도 그렇다. 얼굴이 너무 예뻐서 때로는 부뚜막에 올려놓은 아이 같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눈치다.

 

군사령부 문관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는 그녀는 남자를 예사로 대하는 습관이 사람들 눈에 비치곤 했다. 자신감의 팽만함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얼굴을 내세우는 부문에서는 의기양양하다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황 양이 김 소위에게 반한 이유는 간단하다. 보기와는 달리 사교춤 솜씨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춤 하고는 한사코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도 언젠가 장교클럽에서

 

‘퀵퀵 슬로슬로’

 

박자가 너무 정확한 것에 황 양은 감복한 나머지 일단 친구로 프러포즈했다.

현재는 친구에서 약간 진전된 위치에 들어섰다는 게 주위에서 보는 평가다. 춤이라는 고리가 서로를 육체적 접촉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 수준까지 업그레이드시켜 놓았다.

 

“아무렴 알아서 했을라구. 훈련 기간 동안 몸 잘 챙기고 열심히 해서 멋진 군인 되게나. 황 양은 내가 밀착 감시를 할 테니 염려 접고….”

 

송대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인데도 쉽게 내뱉고 말았다.

 

“고마워. 일단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후련하군. 그런데, 황진이로 오해하지 말고 요조숙녀 황진희로 나를 위해 잘 챙겨줘.”

 

 

김 소위는 UDT에 입소하여 훈련을 통해 야무진 군인으로 담금질되고 있었다. 황 양이 정확한 시간에 출퇴근을 잘하고 있는지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마는지는 모르면서.

 

한편 송대길은 함정 본연의 근무에 열심을 다하고, 서해안 출동 순번이 돌아온 함정에 두어 달치 소지품을 챙기고 출항했다. 출항하는 날 아침 황 양한테서 전화가 왔다.

 

“대길 씨, 몸조심하세요. 요즘 위장 간첩선이 자주 내려온다던데. 간첩선 놓치지 말고 꼭 붙잡으세요.”

 

전화라도 걸어주니 고맙다. 애인이 없는 송대길에겐 친구의 애인이 걸어주는 전화가 여간 고맙지 않다.

 

“진희 씨 감사해요. 그런데 김 소위한테 자주 연락 주세요. 요즈음 훈련이 꽤 힘들 텐데…."

 

 

 

 

 

 해군은 대한민국의 삼면 바다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동해, 남해, 서해가 근무지가 되고, 각 해역에는 담당 사령관이 있다. 함정은 해상경비와 육상대기 업무를 순환하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항로와 경비구역을 점검하고 갑판상 함정 장비를 챙기는 것이 송 대길 소위의 주요 업무다.

 

 

출동 근무중 해역사령관이 기함인 본 구축함에 탔다. 그는 함장의 선배인 제독이다.

 

“여기 사관들은 모두 미남들이야. 함장이 미남들만 특별 주문하셨나?”

 

저녁식사를 위해 사관식당에 모였을 때 사령관은 함장 옆의 의자에 앉자마자 한마디 했다.


농담도 잘하셔.


사령관은 대각선 먼 자리에 유별나게 꼿꼿이 앉아 있는 젊은 장교를 보았다. 오늘 따라 근무복을 빳빳하게 다려 입은 송대길의 모습이 유난히 빛을 발했는가봐.

 

이번에는 함장이,

 

"여기 젊은 장교들은 현문 당직 세우기에 딱 알맞은 친구들입니다. 멋쟁이들이지요."

 

맞장구로 추겨 세웠다.

 

출동 임무를 마치고 함대의 부두로 들어가면 육지와 배를 연결한 현문에 당직사관이 배치된다. 현문당직은 배의 얼굴이요, 배의 첫인상을 좌우한다.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함장은 테이블 머리의 마스터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 자리는 사령관은 물론 대통령도 넘나보지를 못한다. 전투지휘의 책임은 사령관에게 있다 하더라도 함정 운영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함장에게 있다는 암시이자 그 자리는 신성불가침이다.

 

“미남들 때문에 지난번 울릉도 갔을 때는 마을이 뒤집혔습니다. 섬 처녀들이 황홀경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함장은 거짓말을 보탤 줄 안다.


모두들 웃었다. 웃는다는 것은 긴장을 풀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사관들의 구두가 유난히 빛난 것은 사령관을 모시는 자리에 단정한 몸가짐을 하자는 작전관의 사전 지침 때문이기도.


이러한 인상이 사령관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함정근무를 하고부터 식사습관이 많이 느려졌다. 함장이 밥술을 먼저 들어야 부하들도 따라 식사를 하고, 또 함장이 수저를 놓아야 부하들이 놓는다. 상관이나 여자를 우축에 두거나 보도를 걸을 때 안쪽에 둬야 한다는 것은 군대예절에서 배웠지만 숟가락 보조를 맞춰야 하는 것은 생소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200여 명이 좁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해상경비 임무를 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장병은 없다. 100년 전 15억 인구가 지금 60억이 됐다고 해서 지구상의 인간이 불평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함상이라고 해서 24시간 잠자지 않고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함정 운항과 경계 근무를 위해 8시간씩 3교대 근무를 한다. 당직에 임하지 않는 장병은 낮 근무시간에만 일한다.


저녁식사 후 운동하지 않는 장병들은 카드놀이나 마작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마작 블록을 쌓으면서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함내방송이 터졌다.

 

"상황, 상황, 상황 발생! 각자 전투배치!"

 

경보음과 함께 터져 나온 방송에 전 장병들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선다.

‘훈련’이라는 용어가 붙지 않은 이상 실제 상황이다.

 

지휘관은 함교로, 포술병은 포대로, 전탐병은 전탐실로, 음탐병은 음탐실로, 기관병은 기관실로, 갑판병은 갑판으로…

 

각자 전투복으로 전투배치에 임한다. 각자 정위치에 배치된 장병들은 마치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숨을 죽이고 명령 하달을 기다린다. 함교의 지시대로 움직일 준비가 돼 있다.

 

백령도 서쪽 30km 해상에 의심물체가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다. NLL 근처에서 경비업무를 맡고 있던 초계함에서 발견하고 기함인 구축함으로 보고한 정보다. 물체는 북쪽으로 향해 40노트(시속 약 80km)로 달리고 있다. 속력이 이렇게 빠른 것은 간첩선임에 틀림없다. 때로는 새떼로 발견되기도 하나 함포사격을 하면 놀라 흩어진다. 간첩선은 수십 척이 몰려 있는 어선 무리 속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종종 남한 바다를 이렇게 긴장시켜 놓고 간첩선은 숨바꼭질을 즐긴다.

 

 

두 달의 출동 근무 동안 간첩선의 전리품은 챙기지 못했다. 많은 어선들 속의 간첩선을 식별하지 못해서인지, 김일성이 간첩선을 남파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간첩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기록할 만한 사건은 하나 있었다.

출동 기간 동안 소령인 포술장이 하급 장교들의 근무태도가 느슨하다고 단체로 줄을 세워 놓고,

 

“이 개뼈다귀 같은 놈들, 너희들이 장교야? 포대까지 가는 동안에 적의 포탄에 맞아 배가 침몰해 버리겠어. 다 죽고 싶어?”

 

배가 침몰해서 다 죽는다는 뜻인지, ‘한 번 맞아볼래’라는 협박조인지, 좌우지간 그는 화가 머리끝으로 치솟아 있었다. 전투배치에 너무 꾸물댔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배에 힘 줘!”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두 주먹이 피스톤 움직임으로 초짜 장교들의 배꼽 위로 퍼부었다. 번개가 따로 없다. 반은 고꾸라졌고 반은 휘청거렸다. 흔히 있을 수 있는 기합이다.

 

‘집 떠난 지 두 달이 가까워지니 각자 히스테리가 도지기 시작하고…’

 

왕창 얻어터진 초자 장교들은 이구동성으로 상황을 그 쪽으로 초점을 몰아갔다.

 

 

 

 

 

출동임무를 마치고 모항으로 돌아온 배는 부두에 밧줄을 던졌다. 앞으로 3개월간은 부두에 옆구리를 붙이고 있어야 한다. 정박기간 동안 함정수리, 장병교육, 체력단련 등이 있을 것이다. 장기근속 병사들에게는 출퇴근의 기쁨을 주고 단기근속 병사들에게는 외출의 기회도 준다.

 

해상출동을 마치고 함정이 부두에 도착했을 때 부두 멀리쯤 4명의 여자가 보였다.

 

지프차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곧 함장 사모님과 세 딸임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함장 댁에 초대됐을 때 그네들을 보았었다. 갑판 주위로 사열한 200여명 장병의 눈이 모두 이 가족에게 쏠리면서 그 황홀한 모습에 일제히 시선을 주고 있었다.

 

딸 셋의 이름을 진, 선, 미로 끝 글자를 붙였다는 함장의 설명이 없었더라도 이 얘들은 이름값을 할 만큼 아리따운 공주들이다.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나이 간격은 자로 잰 듯 3살 차이다.

 

젊은 총각 장교들은 함장에게 각별히 충성심을 보였다. 군인의 의무요 자랑인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 셋 딸들 중 하나라도 자기 몫으로 배려해주지 않겠나 하는 소망이 있었을 법.

 

‘대길아, 너는 아냐, 정신 차려. 이 얘들은 정통 군인이라면 몰라도.’

 

함장이 그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맞다, 나는 공주 타입은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 망망대해에서 상선을 타고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느지막이 귀가해도 태연히 맞아주는 현모양처가 제격이야.’

 

송대길은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관학교에서 우등으로 졸업한 오 소위 정도가 이 공주들을 넘나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그의 행보를 주시해 볼 것이다.

 

출동으로부터 돌아와 부두에 접안하고 있는 동안 장병들의 훈련 및 교육 프로그램이 발표되었다.

 

훈련장에 유류탱크를 만들어 놓고 소화호스로 불을 끄고, 허름하게 지어놓은 건물에 진입하여 소화 훈련을 하며, 복수 격벽의 물탱크를 만들어 놓고 방수(防水) 훈련을 한다. 불꽃과 연기와 물을 보고 기겁할 뻔하나 경험에서 익힌 단순한 결론은 철저한 준비 하에 담력 하나만 있으면 모든 훈련은 통과한다는 점이다. 엉거주춤은 일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주특기별로 받은 그의 수업은 ‘군사학 교관’ 교육이 포함되었다. 1개월 동안 받은 교육의 확실한 수확은 흑판을 상하로 닦아야 분필가루가 얌전히 흑판 아래로 깔아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항은 교재에 다 들어있으니까 나중에 보아도 무방하다는 게 교관의 태평스런 가르침이다.

 

권총사격 훈련은 아무래도 서부활극의 영화배우가 담당해야 될 것 같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는 과녁이 제 마음대로다. 10미터 거리에서 두 손으로 힘줘 쏘아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은 권총을 쏘아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양쪽 눈을 뜨고 사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숙달된 사격수에게나 요구되는 자세일 뿐이다. 50미터까지 사용할 수 있는 권총도 있으나 25미터 이상이 되면 권총으로서의 역할은 없어진다. 25명의 장교 중 5명밖에 사격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현실이기 때문에 창피하지 않다.

 

정치권에서는 유신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태풍이 다가올 때는 나뭇가지의 흔들림이 세어지기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에서는 상부시달이 강화되고 비상소집이 자주 있었다. 방귀가 잦으면 바지에 쌀 수도 있는 법.

 

쏟아져 나오는 지침은 차트로 만들어져서 장병들의 왕래가 많은 현관이나 식당 등에 게시된다. 지침은 이행해야 하고, 이행한 것은 상부에 보고해야한다. 누구보다도 초조한 사람은 함대사령관이었다. 강직한 군인으로 대한민국에서 소문난 그다. 장병들의 훈련 강화를 몸소 진두지휘했다. 연병장의 군가가 군항 앞바다의 물살을 흔들기 시작하고 이젠 하늘로 울려 퍼졌다.

 

연병장에서 열심히 훈련 중에 있는 수병 한 명이 뒤에서 걷어차는 발길질에 쓰려졌다. 뒤로 돌아보니 아픔을 느끼기 전에 눈이 긴장하고 말았다. 건장한 사람의 모자에 붙어있는 별 두 개가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다.

 

“너 오늘 영광이야. 깨진 뒤꿈치에 약도 바르지 마. 기념이야.”

 

옆에 서있던 동료는 함대사령관이 상대해준 것은 큰 영광이라며 킥킥거렸다.

 

 

어느 날 한 함정에 사복을 입은 전대사령관이 불시 시찰했다. 현문을 건너려다가 당직사관의 저지를 받았다.

 

"나 전대사령관이야. 함장 만나러 왔어."

 

전대사령관은 기풍 있게 큰 소리쳤다.

그러자 제주도 섬 출신 현문 당직사관 유 소위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계급장 없는 전대사령관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일단 정지!"

 

그는 권총을 들이대며 사령관을 저지했다. 사령관은 움찔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소문은 그 당직사관에게 표창이 주어졌다는 것. 명분은 철저한 당직 자세가 모범적이었다는 점.


유신의 힘은 공포감에서 오고, 이런 때 기압 든 군인은 유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에 든든했다. 원래 독재는 우유부단한 조직을 보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남파간첩 김신조는 보초당직의 허술함을 뚫고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

 

군은 기본적으로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다. 허황된 구호나 전력 수치로는 승리도, 평화도 못 지킨다. 북한은 비무장지대와 서해 해상에서 숱한 도발을 했고, 대남혁명투쟁을 본격화하면서 베트남식 게릴라 전술을 구사한 1966~1972년 기간 중 한국은 무려 326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기도도 네 번 있었다. 변변한 대응조차 못했다. 미국이 전쟁을 원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남한의 군사적 열세가 뚜렷했다.

 

 

북한이라는 존재는 비열함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1986년 9월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6일 전 김포국제공항 쓰레기통에 시한폭탄을 설치해 35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나, 이에 앞서1983년 10월 평화 제스처를 보내놓고 다음날 아웅산 사건을 만든 위인들이다. 뒤통수치기의 달인이다. 1978년 11월 충남 홍성에 무장공비 3명이 침투해 부녀자 2명을 살해하고 도주했다. 군경 20만명이 동원돼 이 잡듯이 설쳤지만 간첩은 유유히 북한으로 복귀했다.

 

 

 

 

  항구에 정박하는 동안은 육지의 보편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이다. 수병들 외는 정상적으로 출퇴근한다.

송대길은 부두와 멀지 않은 시내에 하숙집을 마련했다.

퇴근 후 몸을 누일 수 있는 하숙집에 친구와 함께 거처한다. 말동무가 되는 장점 외에, 출동의 시차가 있을 땐 교대로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친구는 일주일 전에 동해로 출동 나가 이제 송대길 혼자 방을 쓴다.

 

어느 추운 겨울날.

퇴근하여 함정 동료들과 막걸리 한 순배하고 하숙집에 들어왔을 때 옆집 춘화가 방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빠,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나 정말 오래 기다렸어.”

 

글쎄, 춘화와 송대길 사이는 기다리고 어쩌고 하는 각별한 사이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그를 옆집 하숙 총각으로 알고 간혹 만날 때마다 목례하더니, 어느 날부터 그의 방에 불쑥 들어와 함대사령부 주위의 떠돌아다니는 부스러기 정보 몇 조각 주더니 이렇게 친숙한 체하는 것이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군부대에 근무하는 그녀는 그보다는 좀 더 많이 부대 소식을 알고 있었다.

 

“온다는 이야기도 없었잖아.”

 

송대길은 축약형으로 무관심하게 보였다.

 

“오늘 시간이 좀 있어서 놀러와 본 거야.”

 

일단 옷을 갈아입은 후 방바닥에 깔린 이불을 마주하고 앉았다. 이불 밑이 너무 따뜻하여 의아한 채 쳐다보는 그에게 춘화는 자신의 역할을 강조했다.

 

“내가 연탄 갈아 넣었어. 많이 따뜻하지?”

 

연탄만 갈아 넣는 게 아니라 때로는 라면도 끓여주는 친절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 물을 필요가 없다.

고마운 일이다.

 

상대는 이야기를 하고 그는 들어주는 게 보통 그들 사이라 오늘도 그녀는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는 들어주었다. 이야기 속에는 조만간 함대사령관의 교체가 있을 것이고, 새로운 정치체제에 거부감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도 포함됐다. 이건 확실히 부스러기가 아니라 고급 정보다. 오늘은 신비한 여자로 보인다.

 

이런 추운 날에는 옆에 여자가 같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다. 한편으로 방 안에 감지할 만한, 자석에서 퍼져 나오는 자장의 흐름도 느껴진다. 이불 밑으로 무언가 부드러운 촉감이 있는 듯 하더니 갑자기 따뜻한 느낌이 덮쳤다. 오늘따라 바지가 아닌 치마를 입고 온 것을 알았고, 그 치마도 아주 짧은 스커트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속옷의 유무다.

이불 밑으로 내민 다리에 걸리는 천 조각이 하나도 닿지 않았다.

 

어떻게…? 부드러운 감촉만.

 

갑자기 그의 다리는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오므라들었다. 반사적으로 경계심이 발동하고 그의 이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를 쳐다보는 그의 눈은 여자의 입술이 이 저녁 유난히 붉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옛날 개성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었던 서경덕을 무너뜨리려고 황진이는 일부러 흠뻑 비를 맞고 서경덕의 초당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비에 젖어 알몸이 드러나 보이는 황진이를 맞아 옷을 홀딱 벗기고 물기를 다 닦아 준 다음 이부자리를 펴 그녀를 눕히고 몸을 말리도록 했다. 그리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글 읽기를 계속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이윽고 밤이 깊었다. 황진이가 잠을 잘 수 없는 중에 삼경쯤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가버렸다.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이미 일어나 바깥 공기를 쐬고 있었다. 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아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는 뜻을 밝혔다.

 

수포로 돌아간 황진이의 시도와 오늘 저녁 춘화와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송대길은 한참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갑자기 소문으로 들은 한 친구의 일을 떠올렸다.

 

친구는 어떤 선배의 소개로 한 여성을 알게 되었는데, 실은 그 선배 자신의 애인이었다. 일시적인 불장난으로 골치를 앓고 있던 선배는 후배인 그의 친구를 낙점하고 작전을 세워 결국 자기 애인을 후배에게 자연스럽게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여자를 접수한 친구는 세상 물정 모르고 이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윽고 아들도 낳았다. 선배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듯했다.

 

그러던 친구는 국방임무를 마치고 재벌 기업에 입사하여 해외 근무하는 중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불쌍한 친구! 선배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좋은 일을 하고서도….’

 

송대길이 죽은 친구에게 보낼 수 있는 애석함의 표시는 이 말뿐이었다.

 

그날 저녁 춘화와의 이불 밑 상봉은 허벅지까지 갔다가 그 자체로 끝나고 말았다. 더 이상 적극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송대길의 무결단성을 눈치 채고 그녀는 적당한 순간에 뻗은 다리를 회수했다. 춘화가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바람에 실망하는 빛도 보지 못했다.

 

“오빤 황진희 씨 알지? 오빠 친구의 애인 말이야.”

 

이런 때 왜 다른 여자 이름이 나오나?

그러나 어색한 분위기를 돌려놓기에 적합한 질문이다. 언젠가 대화중에 김 소위와 더불어 양념으로 끼워 넣은 내용에 황 양의 존재도 묻어 들어간 것이 춘화의 기억에 깔려 있었던가 보다. 아니면 사령부 면회실에서 근무하는 춘화가 문관인 황 양을 벌써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군항은 그만큼 좁은 세계이니 말이다.

 

“근데, 왜?”

 

“임신했다고 하는 소문이 있어. 오빤 못 들었어? 혹시 김 소위의 아이가 아닐까?”

 

무관심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너무나 갑자기, 한편으론 황당하기까지 해서 귀가 긴장됐다.

 

“그런 얘기 전혀 안 하던데. 그러고 보니 김 소위 입소한 지도 5개월이나 됐군.”

 

“김 소위가 몰랐을 수도 있고, 뱃속에 있는 얘가 남의 아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어색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주제가 황 양 쪽으로 옮겨진 데 대해 둘은 일부러 무관심한 척 했다. 무엇보다도 김 소위와의 관계가 사실이라면 이건 여간 충격이 아니다. 김 소위가 아무리 입이 무겁더라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송대길이가 머리가 돌이 아니라면 눈치를 채지 못했을 리도 만무한데 말이다.

 

송대길은 춘화와의 육체 접촉이 개시되려는 순간에 움츠려든 터라 심히 당황한 후 벌어진 대화로서 주제가 꽤 무거운 것을 느꼈다.

 

또 황 양의 임신 소식이 이 저녁에 왜 등장했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았다.

‘춘화가 육체관계를 원한다는 신호인가? 그럴 리는 없지.’

 

송대길은 오늘 접수한 정보는 차후 더 검증을 해봐야 한다고 해놓고 춘화를 대문 밖까지 바래다주었다.

 

“확인되지 않은 일은 혼자만 새기고 있어. 알았지?”

 

‘조심해서 가라’는 말과 함께 당부를 잊지 않았다.

 

 

 

 

 

 

해군에는 출신에 따라 세 종류의 장교가 있다.

임관일 순서대로 ROTC, 해군사관학교, 일반대학 출신 장교 등을 말한다.

임관 시기는 대충 두 달씩 차이가 난다. 물론 하사관에서 장교로 승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극소수에 해당한다.

 

원래 해군사관생도와 ROTC생도는 같은 시기 2월에 임관했다. 그러나 어느 해 2월 대통령이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여 늦겨울 바닷바람으로 엄청 추위에 떨고 나서부터 졸업식을 두 달 늦추어 4월에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죄 없는 사관학교 생도들은 두 달 늦은 임관을 감수해야 했고, 함정근무 시 사관식당에서 좌석순서도 ROTC 출신의 뒷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군대는 먹은 밥그릇 수로 말해주니까.

 

시내의 주점이나 바에는 흔히 외상장부를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단기장교들의 외상장부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받는 월급에 비하여 외상금액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액수를 어떻게 갚을 것이며, 더욱 신기한 것은 이런 거액의 외상을 용인하는 주점 주인들의 용기이다. 그러나 수없는 여러 임관기수들이 지나갔음에도 갚지 않은 외상이 없다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혹 부도난 외상이 있으면 선배들이 당사자들을 불러 직장 세계에서 쫓아버린다는 불문율이 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제대하여 직장에서, 해상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외국에서도 술값을 송금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군부대가 있는 도시는 역시 군인들이 주인이다. 소비의 주인이 군인이기 때문이다. 밤에는 막걸리와 소주가 주류를 이루지만 품위가 있는 자리에는 맥주가 등장한다. 12시 통행금지에도 불구하고 자정을 넘기고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군복을 입은 채로다. 군복은 적어도 시내에서는 통행금지를 풀어주는 패스포트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정이 넘은 시간에 하숙집 주인이 문을 열어줄 리 만무하다. 이런 때는 담치기가 유용하다. 유격훈련이 평상시에도 잘 이용될 수 있다는 걸 이때 알았다.

 

4년 동안 사관학교와 다름없는 학교생활을 마치고 군생활을 하는 송대길은 군이 구속의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자유를 향유하는 곳으로 생각했다. 약간의 바람기를 타고난 그에게는 체질적으로 고삐 풀린 망아지 타이프에 해당한다. 시내의 카바레나 나이트클럽의 출입하는 횟수가 잦았다. 300원의 입장료는 하루 저녁을 즐길 수 있는 충분한 보증금이다. 약간의 춤 실력만 보유하고 있으면 여성들에게도 인기다. 그들의 마음을 사면 맥주까지도 얻어먹을 수 있다. 그래서 사교춤의 예술은 유행이라기보다 가난한 총각 군인이 월급 한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찾아낸 생활의 지혜였다.

 

“귀하는 군인이구먼.”

 

지르박을 마치고 블루스 곡으로 들어갈 때 상대 여성이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사복인데도 용케도 군인을 알아보는 군인 사모님이다. 군대 용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당당하다. 남편의 계급이 아내의 계급으로 통하는 게 군인 사회다. 남편 계급보다 낮으면 부하 다루듯 한다.

송대길은 순순히 대했다. 서른에 걸쳐있을 것 같은 여인인데 반말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그는 오늘만큼은 기분을 맞춰주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사모님의 춤 솜씨가 보통이 아니신 걸 보니 남편께서는 제보다 계급이 높으신가 봐요.”

 

“계급? 당연히 높겠지. 나이도 훨씬 높을 걸. 나보다도 일곱 살이나 더 얹어져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그 양반은 월남 파병 중이야. 그러니 귀하는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적어도 오늘 저녁은….”

 

오늘의 상대는 정말 예상 밖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부인이 이래도 되나, 하는 느낌이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파병된 지 일 년이 지났는데도 그 양반은 휴가 올 생각을 하지 않아. 뭐 월남 아가씨와 같이 산다나. 전쟁 중에 그게 가능한 건지…. 오늘 저녁은 귀하가 나를 위로해줄 의무가 있어. 대한민국 군인이니까.”

 

여자는 혼자서 이야기를 다하려고 한다. 이런 경우는 그냥 들어주는 게 예의다. 전쟁의 비극이 가정의 비극으로 이어진다면, 이건 정말 참담하다.

위로의 말 대신에 그는 어깨를 더 붙였다.

 

“곧 휴전협상이 있을 거라고 하니까 기다려보시죠. 전쟁은 삶을 잠시 바꿔놓지만 영원히 그러지는 못할 거예요.”

 

“돌아오든 말든 오늘 저녁은 잊을래. 근데, 귀하는 장교야?"

 

“괜히 알면서 왜 그래요?”

 

“내가 알긴 어떻게 알어? 그냥 넘겨짚어 본 거지.”

 

“아무렴 맞아요. 다이아몬드 하나.”

 

“징글맞게 매력은 있어가지고…”

 

그러면서 그녀는 더 가까이 밀착했다. 향수와 뒤섞인 체취가 송대길의 코에 진하게 느껴졌다.

 

“우리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면 귀하는 나를 한 번 더 만나줘야 해. 대한민국 군인이니까.”

 

여자는 하이힐 위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데 힘들어 했다.

송대길은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의무감 때문에 예사롭지 않게 취한 사모님을 떼어 놓는데 힘을 쓰다 보니 자신도 지쳐 다리가 꼬이는 기분으로 클럽을 나왔다.

 

춤에 얽힌 일이 또 생각난다.

지난번 춤 상대는 아가씨였다. 등줄에 땀이 배일 정도로 긴장된 여자였다. 이런 곳에 자주 드나들지 않는 것을 한 번에 느낄 수 있었다.

 

부담스런 밤으로 기억된다. 악수를 나누고 헤어지려는데 손바닥의 땀이 너무 끈끈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며시 자기 신분을 밝혔다. 1967년 1월 북한 해안포에 격침된 56함에서 전사한 상사의 딸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죽는 순간에 가족에게 보내는 유언을 젊은 장교가 전해줬다.

 

‘조국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한 아버지로 기억해 달라’는 유언이었다.

그 장교는 당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제대하여 미국으로 이민 갔다. 아가씨는 그 장교를 사랑했으나 이민 간 후 연락이 두절됐다. 심란한 마음을 종종 춤으로 달래곤 했다.

 

 

56함은 동해 북방한계선에서 남한 어선을 납치하려는 북한함정과 대치하던 중 북한 해안포로부터 불의의 기습 공격을 받은 것이다.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했다.

 

 

 

 

 

 

1960년대 말 한반도는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 북한의 대남공작은 극성을 부렸다.

 

1968년 1월 21일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가 실패했다. 대간첩작전에서 종로경찰서장이 순직하고 다른 2명의 경찰관이 부상했다. 민간인 5명도 사망했다. 간첩 29명이 사살되고 2명이 생존했다. 한 명은 북한으로 도주했고, 한 명은 생포돼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김신조는 후에 자신이 개신교 목사가 되어 목숨을 살려준 하나님께 감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와대 기습에 실패한 북한 군부가 의기소침해 있었던 때에 김일성은 “남한 혁명은 무력만이 가능할 뿐이다”고 강조함으로써 대남 폭력 혁명을 지령했다.

 

 

남한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면서 1968년 10월 30일부터 3일에 걸쳐 울진·삼척 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침투시킴으로 구체화했다. 무장공비들은 네 차례에 걸쳐 각각 30명씩 특수정을 이용, 해안에 상륙했다.

 

해안 침투에 성공한 무장공비들은 곧바로 산간 마을로 들어가 주민들을 모아놓고 김일성을 찬양 선전하면서 남자는 남로당에, 여자는 여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으로 위협했다. 군부대·경찰에 신고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함으로써 늦게나마 소탕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지리멸렬한 무장공비들은 육로를 통해 북상을 기도했고, 그 과정에서 잔당 5명이 강원도 평창군 산간 마을로 들이닥쳐 밥을 해 달라고 위협하면서 북한을 찬양하는 사상교육을 했는데 이때 초등 2학년이었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자 공비들은 잔인하게 이군의 입을 찢고 밖으로 끌고 나가 절굿공이로 머리를 쳐 죽이고 함께 있던 가족 세 명도 무참히 살해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군의 형과 아버지는 공비들에게 붙잡혔으나 다리에 칼을 맞고도 필사적으로 도주해 목숨을 건졌으며, 이웃집에 마실갔던 할머니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결국 남한 군경과 예비군이 약 2개월간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함으로써 소탕작전은 종료됐다. 우리 측도 전사 82명, 전상 67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피랍된 것은 청와대 기습사건 이틀 후인 1968년 1월 23일이었다.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업무수행 중 북한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됐다. 이 때 북한측의 위협사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수 명이 부상했다. 함정과승무원의 즉각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號)와 제7함대의 구축함 2척을 출동시켰지만 북한이 미 함정의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하도록 강요했다.

 

북한은 대내외적인 선전을 펼쳐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영해침범을 시인한 후 11개월 만에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 함정과 거기에 설치된 비밀전자장치는 몰수해버렸다.

 

 

 

 

일제강점기부터 군항은 조화롭게 조성되어, 심어놓은 벚꽃 가로수의 정렬이 보기 좋았고, 특별히 해군통제부의 거리는 아름다웠다. 때문에 군항제라 하면 벚꽃을 먼저 연상하게 된다. 군항제가 열리는 무렵에는 전국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해군부대의 정문이 열리고, 함정 현문이 개방되며, 관광객들이 함정 내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도 이 때다.

 

장병들에게는 구경나온 아가씨들로 괜히 들떠진다. 축제가 끝나면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기에 지휘관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관광객들은 벚꽃을 구경하지만 장병들은 여성이라는 꽃에 감동한다. 벌이 더듬이로 꽃가루에 심취하듯, 황홀경에 빠진 마음이 평상심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기관실 기계에 기름칠 하고, 갑판에 페인트칠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멍한 기분으로 인하여 현실적응이 쉽지 않아 탈영하는 병사들이 종종 나타나는 것은 옛적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번 군항제에는 송대길이 근무하는 함정이 관람을 위해 개방됐다. 개방된 현문으로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는 방문객들에게 경례하기 바쁘다.

 

“충성!”

 

함장이 특별히 안내하는 VIP 손님에게는 더 큰 소리로 경례한다. 군인정신이 투철한 부하는 지휘관의 자랑이 될 수 있다. 이런 부하는 보상으로 지휘관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4월 초부터 열흘간 계속되는 벚꽃축제는 봄바람을 타고 군항을 휘저어놓았고, 벚꽃 향기에 취한 수병들은 남자만의 세상에서 여자들이 뿌려놓은 화장 냄새에 취하여 얼마 동안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 수병, 정신 차려! 서울 아가씨들 다 상경했어. 기계에만 기름칠할 것이 아니라 자네 머리도 기름칠해야 되겠어. 제대로 정신을 붙잡고 있는 거야?”

 

좀처럼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는 수병에게 농담 반 격려 반으로 말했다.

서울의 애인이 군항제 때 내려온다고 했는데 전혀 연락이 없어서 그는 시종 낙담해 있었다.

 

그의 애인이 오든 안 오든 벚꽃은 지고 봄은 새로 피는 다른 꽃들과 함께 깊어간다.

 

송대길이 김 소위의 애인 황진희를 만난 것은 1973년 1월 베트남전쟁 휴전을 위한 파리평화협정체결이 이루어진 후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부산의 광복동 골목에서 마주쳤다.

 

“송 소위님 아니세요?”

 

막 스쳐 지나가는 중에 아이를 안고 있는 아가씨가 송대길을 불렀다. 중위로 제대한 지가 몇 달이 되는데 아직 ‘소위’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군가 하고 잠시 망설였다.

 

“…황진희 씨, 어떻게 여기 부산에서?”

 

자초지종은 가까운 다방에서 나눈 대화 속에 들어 있었다.

여전히 미인인 황 양의 역사는 특이한 것에 속했다.

그녀는 군항에서 부산으로 이사왔다.

 

“이 아이는 김 소위의 아들예요. 김 소위는 월남에서 돌아오지 못했어요. 전사했어요. 돌아오면 결혼한다고 했었는데…”

 

소문으로만 들리던 임신이 결국 김 소위의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작은 충격이 왔다. 더욱 감당이 안 되는 놀라움은 군대 친구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부산 해군기지 PX 매점을 운영한다고 했다. 월남 용사의 유복자를 뒀다는 점이 직장을 갖는 데 감안됐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71년 미군의 월남철수가 본격화되기 시작할 무렵 특수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김 소위는 베트남 중부 다낭에서 함정 밑 용골 파손 부분을 검사하다가 부근에 베트콩이 부설해 놓은 수중폭발물에 의해 순직했다.

하필이면 미혼 아버지에게 이런 비극이!

안고 있는 두 살배기 아기를 보았다. 엄마를 닮아 예쁜 남자 아기다.

나이어린 아가씨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송대길의 염려를 눈치라도 챘다는 듯 황 양은 아이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대길 씨, 우리 아기는 아빠 없이도 잘 커겠죠?”

 

왜 눈물 나는 말을.

송대길은 갑자기 부성애를 느껴야 했다.

 

닉슨 대통령이 재선된 지 일주일 후인 1973년 1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되어 월남 전역에 걸쳐 전투행위가 중지됐다. 미군이 월남전에 투입된 지 꼭 10년만이다.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은 60일 이내에 베트남에서 완전철수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은 휴전회담이 한창 진행돼가는 무렵에 미군 철수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자 월남에 심어놓은 월맹 프락치들이 행동 개시에 들어가 전쟁은 다시 일어났고, 2년 후 남베트남의 티우정권이 자중지란에 빠져 국가 붕괴에 처하게 되었다.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은 공산화됐다.

애매한 휴전협정 문구는 월맹과 베트콩의 공격 금지를 담보하지 못했다. 외교는 원래 불신이 바탕이라는 기본 메카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탓인가.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로 탈출을 시도했고,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 없이 유랑자가 되거나 보트피플이 되고 말았다.

 

통계에 의하면 1979년 7월까지 20만명 이상의 보트피플들이 여러 국가의 난민수용소에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베트남으로부터의 불법적 탈출이 계속 증가했다. 1976년부터 1992년 말까지 동남아지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수는 약 8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1980년대 말부터 베트남이 ‘도이모이’ 정책이라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도약을 위한 국가적인 노력을 가시적으로 시작했다. 본국귀환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는 3가지 방법, 즉 자발적 귀환, 순차적 귀환, 난민수용국의 추방에 의한 비자발적 귀환이 있었다.

 

“대길 씨, 우리 아기를 위해서 대부(代父)의 역할을 해주세요. 아기가 스무 살이 돼서 해군에 입대할 때까지라도요.”

 

“해군에 보내려고 합니까?”

 

“그래야죠. 그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송대길은 대답 대신에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을 비로소 똑바로 보았다. 눈물 속에 미소가 들어 있었다. 미혼모의 용기가 숨어 있었다.

 

옛날 6.25전쟁이 생산해낸 고아들의 대부는 누구였을까.

아마도 가난이었을 게다.

 

송대길이 고아의 대부 역할을 제대로 할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오션닥 sunghway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