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성아 힘내라

해성아 힘내라

오선닥 2013. 1. 11. 15:44

88서울올림픽이 막 끝날 무렵,

G호의 선장 오선덕은

출항을 앞두고

울산의 한 찻집에서

갑판원 정해성의 부친 정병훈을 만난다.

정병훈은 아들의 출생 비밀에 대해 털어놓는데

소설 같은 실화에

오 선장은 눈물을 흘릴 뻔……

 

 

 

 

 

해성아 힘내라

 

 

출항을 몇 시간 앞두고 오선덕 선장은 울산항만청 후방 50미터 떨어진 한 전통찻집에서 50대 후반의 남자를 만나고 있다. 남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찻집 분위기가 적잖이 무겁다. 남자가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말을 꺼낸다.

 

“우리 해성은 중학 때 엄마를 잃었어요. 고민이 많은 불쌍한 애예요. 선장님께서 잘 지도해주십시오.”

 

갑판원 정해성의 아버지 정병훈.

그는 홍삼 한 상자를 오 선장 앞에 내 놓으며 항해 중에 드시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오 선장은 포장을 풀었다.

 

“이렇게 많은 양을? 그러면 배에서 해성과 나눠 먹겠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하자 그 아버지는 오히려 선장을 늦게 찾아뵌 것이 죄송하다며 계면쩍어한다.

 

“해성에겐 다른 걸 줬어요. 홍삼은 그냥 선장님이 드시면 됩니다.”

 

그의 아들 정해성은 나이 25세, 해군 제대 후 처음 탄 배가 G호다.

 

출항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선장으로부터 듣고 아버지 정병훈은 대화를 한 시간쯤으로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홍삼 한 상자는 그만한 시간과 교환하는 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는 독신입니다. 그런데 해성이 제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제가 설명 드리면 선장님께서 우리 해성을 이해하실 겁니다. 저희 개인사지만 선장님께서 제 자식의 상담자가 돼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요.”

 

사연은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해야 한다.

마치 소설을 읽는 기분이 이어졌다. 그냥 혼자만 듣기에는 아까운 드라마 같은 것. 세상은 너무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 포화상태가 된 느낌이다.

 

“바쁘실 테니 한 시간 안에 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제 자식 놈을 위해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선장님을 만난 것은 해성이한테 비밀로 해주시고요.”

 

세상이 남의 일에 무관심하다 해도 독신자가 자식을 가졌다는 사실에는 귀를 대지 않을 수 없다. 탄생의 비밀? 궁금하면 500원을 줘서라도 알고 싶은 것이다. 한마디로 호기심과 충격, 그리고 혼란을 느끼게 한다.

 

아버지 정병훈이 거침없이 풀어 놓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휴가 나온 중사 정병훈은 전남 영광 법성포에 있는 약혼녀 조양희의 집에서 의미 있는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외출을 준비한다.

 

장롱에서 속옷을 꺼내는 중 편지 한 통이 시선을 끌었다. 봉투를 열어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병훈은 기절할 정도로 숨이 멎었다. 종이 한 장의 충격이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수준.

 

「우리의 사랑이 금지된 장난일지 모르지만 처제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어. 유성온천에서 보낸 그 감동의 시간은 더욱 잊기가 고통스러워…… (중략)」

 

꼼꼼한 글씨로 한 장을 꽉 채워 써 내려간 편지.

편지의 발신자는 작은 형부다. 그의 이름은 정달오. 공교롭게도 정병훈과 같은 성이다.

 

약혼녀 양희에겐 언니가 둘 있다. 둘 다 결혼해 서울에서 산다,

 

약혼남 병훈에게는 눈이 뒤집히는 일. 형부와 처제가 놀아난 주간지 스캔들 같은 것이 왜 자기에게 일어나야 하나. 만감이 뒤죽박죽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약혼녀와 장모는 바깥에서 집안일에 열중이다.

왠지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현실과 싸우고 있다.

 

‘진실은 새어나오는 김만으론 알 수 없어. 뚜껑을 열고 확인해봐야 돼.’

 

병훈은 다짐하면서 편지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법성포 해안 상점가에서 굴비를 샀다. 굴비를 사서 요리해 먹기로 어제 저녁 양희와 약속을 했던 것이다. 조기는 기운을 북돋우는 고기이므로 굴비도 남녀에게 좋을 거라고 하면서 장모가 특별히 추천했다. 일단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분으로는 한 발자국도 떼기가 힘들다. 약혼녀 가족 모두를 굴비 두름으로 엮어 방망이로 패주고 싶은 생각뿐이다. 굴비를 사서 어깨에 걸친 병훈은 엉덩이를 끌고 겨우 처갓집 마루에 다다랐다. 사 온 굴비를 마루에 내려놓는다.

 

“장모님, 굴비요리 맛있게 해주세요.”

 

자신의 음성이 미울 정도로 침착해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장모도 예비 사위의 싹싹함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요리는 양희가 잘해.”

그러곤

“양희야, 정 서방이 굴비 사왔네. 빨리 나와 봐.”

 

“엄마, 알았어요.”

 

대답하면서 방에서 나오는 양희의 행동이 너무 쾌활해 보여 병훈은 속이 미식거릴 지경이다.

 

굴비 양념구이 요리는 대부분 장모의 손을 거친 것 같다. 밥도둑이라 할 만큼 맛있어 보였다. 그런데 양희는 자신의 솜씨로 평가받고 싶은 모양이다. 더욱 상냥해지는 양희.

 

“병훈 씨 많이 드세요. 그리고 저녁에 법성포 해변 구경 나가요.”

 

이 여자가 남자의 심정을 알기나 하나? 지금은 소화불량으로 방 안에 뒹구를 판이라는 걸.

그래도 그는 최대한 침착하려 한다.

 

“바다 구경은 나중에 하고 오늘은 집에서 쉬자구. 휴가를 따뜻한 방안에서 오붓하게 보내고 싶어.”

 

뚜껑 열린 기분을 그녀가 알 리가 없다. 사나이가 이런 모멸을 당하고 참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저녁이 되고 날이 어둑해졌다. 산다는 의미는 퍼즐처럼 얽혀 끝내 삶의 근원을 찾지 못했다.

 

부엌에 들어가 칼자루가 얇은 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반달과 촘촘한 별이 파리한 빛을 법성포 해안을 넓게 뿌리고 있다.

 

옥상의 분위기는 배를 찔러도 좋고, 밑으로 떨어져도 좋은 곳이다. 목숨을 결단내는 데는 이 이상의 분위기를 기대할 수 없다. 확 터인 바다와 드높은 하늘이 죽음은 황홀하다는 걸 찬양하듯 유별나게 넓고 높다.

 

배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 갑자기 손을 멈췄다. 놓친 일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다. 일단은 큰처형한테 알리자. 여자의 가족 중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억울하다. 제부가 될 사람이 오죽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느냐는 사후 이해 정도는 있어야 한다.

 

칼을 거두고 옥상에서 내려온 병훈은 날이 밝자마자 상경 길에 올랐다.

약혼녀한테는 휴가 중 서울에 볼일을 보고 내려오겠다고 말한 다음이다.

 

 

 

“세상은 숨겨 놓은 비밀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들고 온 편지를 큰처형에게 보이자 그녀는 기절해 뒤로 자빠질 뻔했다.

뒤에 벽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 다행.

 

“세상에 이럴 수가?”

 

자초지종을 듣던 큰처형은 몇 마디를 지를 뿐이다.

잠시 후 정신을 되돌린 그녀는 침착해졌다.

 

“서울의 여동생, 그러니까 작은처형한테는 알리지 말아요. 일단 제가 제부를 좀 살펴볼 테니까요. 그 얌생이가 가족을 감쪽같이 속이다니?”

 

말을 하면서 ‘남녀관계는 아무도 몰라!’ 큰처형은 혼자 되뇌었다.

 

“병훈 씨, 미안해요. 편지는 제가 갖고 있을 테니 주세요.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을 게요.”

 

그러나 병훈은 편지를 가지려는 큰처형의 손을 떨치며 약간 뒤로 물러난 자세를 취했다.

 

“아녀요. 이건 제가 갖고 있겠습니다. 제 약혼녀의 문제니까요.”

 

서울을 떠난 병훈은 법성포로 내려와 약혼녀 양희를 만났다. 그녀는 예와 다름없이 약혼남을 깎듯이 맞이했다.

 

서해의 찬바람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방의 문 틈새를 뚫고 들어왔다. 분위기를 따뜻하게 할 필요가 있다. 병훈은 양희의 손을 잡고 최대한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나한테 고백할 거 있지? 우리 사이 숨길 게 없잖아.”

 

“갑자기 부끄럽게 왜 그래요?”

 

양희는 약혼남이 색다른 애정표현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군인은 원래 이런 면도 있구나’ 흐뭇해했다. 서른 살의 남자와 스물다섯 살의 여자가 만들어가는 사랑은 차원이 다르지. 군인 아저씨는 아는 것도 많네. 약혼이 이런데 결혼은 더 아기자기할 거야. 여러 생각에 행복해했다.

 

양희의 애교에 병훈은 반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 뜸을 들이다가는 오히려 우스꽝스런 광경이 벌어질 같은 느낌이 들어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시치미 떼 봐야 피곤해. 여기 당신이 이야기해야 할 내용이 다 들어 있어.”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는 병훈의 손이 떨렸다.

눈에 익은 종이를 본 여자는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나무막대기처럼 섰다. 한동안 정신을 묶고 섰던 그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걸?”

 

편지를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허사였다.

이젠 모든 걸 포기한 듯 그녀는 순한 양처럼 얌전해졌다.

 

“내용은 당신이 읽은 그대로예요. 그게 전부예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목소리는 끝없는 터널로 들어가는 듯 작아졌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병훈 씨를 만나기 전 일이었고 저도 당한 일이라……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은 건 죄송해요. 그러나 병훈 씨를 사랑하는 것만은 틀림없어요.”

 

병훈은 자세를 고추 세웠다.

 

“상대방 충격을 상상해봤어? 속여서 결혼하겠다는 게 가당치나 한 거여? 나도 남자니까 연애 정도는 묵인해. 이건 그게 아니잖아!”

 

“모든 게 제 잘못이여. 편지는 제게 주세요. 이렇게 빌잖아요.”

 

넘겨줄 리가 만무하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한 뭉텅이 구름이 별빛을 가리고 지나갔다.

 

병훈은 늦은 밤을 그녀의 방에서 보내고 내일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

편지를 이부자리 밑 깊숙이 집어넣었다. 조심스럽게 토끼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난 그는 이부자리 밑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편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옆자리를 둘러본다. 약혼녀 양희가 보이지 않는다.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새벽에 작은 보따리를 들고 나가던데…….”

 

양희는 떠났다. 그녀의 어머니도 모르는 일이다.

집을 나간 그녀는 유일한 의지자인 작은형부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양희의 최초 비밀은 그녀의 여고시절로 돌아간다.

열여덟 살 때 작은형부를 경험했다. 서울의 작은언니가 출산을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세 살배기 큰 조카를 돌보고 있었다. 방학 때라 상경해 한 달 동안 머물었던 것이다. 이때 일이 벌어졌다.

 

“거실이 너무 추워 방으로 들어왔어. 형식이 옆에 잘게.”

 

거실에서 자겠다고 하던 작은형부가 추위 때문에 방으로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추위에 떨고 있는 형부가 안타까워 보였다.

 

“알았어요. 형부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니까 따뜻하게 주무세요.”

 

겨울 바깥 날씨는 고드름을 줄줄이 엮어가고 있었다. 이럴 땐 단칸방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양희-형식-작은형부 순으로 누운 방은 온기가 더 오르는 것 같았다.

 

“아이 숨 막혀!”

 

한밤중 가위 누르는 것을 느낀 양희는 가슴의 무게를 호소했다.

 

“애 잠 깨. 조용히 하라구. 조용!”

 

작은형부는 양희의 입을 막고 침묵을 강요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마비되더니 고통이 물씬 덮쳐왔다.

 

고통이 지속되는 중에 밤은 아침으로 변한다.

 

작은형부는 처제에게 가정의 평화를 가르쳤다. 이를 위해 인내가 필요하고 때로는 침묵이 금보다 더 중요함을 과외 수업시켰다. 침묵의 결과는 평화롭게, 너무도 평화롭게 가정과 가족을 구원했다. 양희의 어머니는 물론, 같은 서울에 사는 큰언니 부부도 몰랐고, 심지어 작은언니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양희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든든한 백을 업고 법성포 농협에 취직했다. 동료들은 그녀를 성실하면서도 매력 있는 여직원으로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침묵의 가치를 깨달은 처제와 형부는 수년 동안 간헐적인 만남으로 관계를 이어갔다. 온양온천에 가는 일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동행이었다.

 

병훈과 양희가 약혼을 하기까지는 결정적인 중매자가 있다.

 

병훈과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법성포 출신의 선임상사는 양희의 작은형부와 고향 친구였고, 병훈의 군 보직이 좋으므로 결혼해도 처자 먹여 살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을 중매했다.

 

처제와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 가던 작은형부도 이 결혼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선임상사는 정병훈을 군부대 매점으로 불렀다.

 

“얼굴이 예쁘면 시골 여자라도 괜찮겠디라? 고등학교 졸업 후 농협에 근무하는디…… 직장도 좋은디라.”

 

혀가 짧은 그는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연애경험이 있을지 모르겠는디…… 별 상관없겠디?”

 

중매자는 친구로부터 여동생의 신상을 조금 들은 바가 있어 혹시 사후에 거론될지 모를 장애요인을 미리 언급해 두는 전략을 쓴 것이다.

 

늦장가 가는 마당에 그 정도 이해를 못할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 병훈.

 

“일단 한 번 만나보죠. 조선시대도 아닌데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게 아녀요.”

 

그래서 남녀는 만났고, 싫어하는 부분이 눈에 띄지 않아, 당시 생략하곤 하던 약혼까지 했다. 여자 쪽에서 우긴 탓도 있다.

 

고급시계와 사파이어 반지를 약혼녀에게 선물한 것만 봐도 병훈의 능력을 알 수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저축에다 보직 용돈을 보태 어느 정도 풍족한 총각이 된 것이다.

 

막내 여동생의 비밀을 혼자서 알고 있던 큰언니는 두 달이 지나기 전에 그만 가족들에게 알리고 말았다. 서울의 제부가 감시를 받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채자 공개를 결심한 것이다.

 

군 근무 중에 있던 병훈은 법성포에서 열리는 가족회의 참석 제의를 받았다.

가족회의에는 작은처형 외 전 가족이 참석했다.

병훈은 가족들이 피해자인 자기를 변호해주리라고 믿었는데, 그런 기대는 싹 사라져버렸고 분위기는 반전됐다.

 

우선 딸의 결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장모는 막내딸을 감싸고돌았고, 큰딸이 지원사격을 해줘 예비사위 하나를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큰딸은 결론에 상응한 말을 개진했다.

 

“의견을 종합한 결과 쌍방의 불명예를 외부에 알리는 건 좋지 않으므로 이 일은 덮어두기로 하죠. 병훈 씨가 괜찮으시다면 결혼식을 준비하는 게 어때요?”

 

듣자 하니 심하다.

 

“저더러 참으라는 겁니까? 저는 양희 씨를 만나기 전까지 여자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여자의 과거는 어느 정도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은 우리가 약혼하기로 합의한 이후의 일입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병훈은 냉정해지려고 했다.

그동안 듣고만 있던 가족들도 한 마디씩 내놓기 시작했다.

 

“양희를 사랑한다면 이해해줄 수도 있잖아요. 약혼선물까지 주고받았고요. 그리고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같이 자기도 했고요.”

 

큰언니는 잠자리 여부에 방점을 두는 뉘앙스였다.

 

“그래요. 우린 같이 잠자리를 했습니다. 그것도 장모님이 깔아준 이부자리에서요.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용을 몰랐을 때 일이잖습니까. 전 도저히 이해 못합니다.”

 

도도하게 대시하는 병훈을 본 양희는 그의 달라진 모습에 몸이 오그라들었다. 고양이 앞에서 쥐의 다리가 마비되는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일지도.

좀처럼 말을 아끼던 큰형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법적인 문제가 남아 있어서…… 좋은 게 좋은데…….”

 

은근히 위협을 느끼게 하는 억양이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녹녹치 않다.

 

“듣자하니 너무 하시는군요. 법으로 처리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예물로 드린 시계와 반지는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한때 사랑했던 사이의 징표로 남겨두겠습니다.”

 

가족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병훈은 부대로 돌아왔다.

 

“일찍 귀대했으니 남은 휴가기간은 나중에라디 사용허게나.”

 

정병훈으로부터 대충 전말을 들은 선임상사는 진실이 드러난 이상 친구의 여동생을 더 이상 변호할 의향이 없었다. 병훈에겐 진정한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다.

 

 

 

15년 후.

 

군부대로 한 젊은이가 정병훈을 면회 왔다. 면회 신청자는 교회 전도사라고 한다.

그런데 병훈이 면회자의 얼굴을 전혀 알 수 없다.

어색한 분위기를 면회자가 먼저 깬다.

 

“아저씨,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상일예요. 큰처형의 장남입니다.”

 

독신남에게 무슨 처형이 있단 말인가? 젊은이는 약혼녀 양희의 이질이다.

의외의 방문.

 

“내 얼굴을 기억하겠니?”

 

“저는 기억합니다. 그때 열두 살이었으니까요.”

 

15년 전의 기억 속에 열두 살 이질 아이는 포함되지 않았겠지.

 

“근데 여길 어떻게 찾아왔어? 군부대에?”

 

“아저씨가 제대를 하시지 않았다면 확인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병훈과 눈이 마주치자 조카는 말을 이었다.

 

“아저씨, 그동안 몸은 건강하셨고요?”

 

“그래. 독신이 자기 몸 하나 간수 못하겠어…… 건강하지. 너희 가족들은 다 편하고?”

 

독신이라는 말이 왜 쉽게 나오는지 병훈은 알 수 없었다. 양희에 대해서 따로 묻지 않고 묶어서 안부를 물었다.

조카는 아래를 한참 내려보다고 얼굴을 들었다.

 

“조금은 그러네요.”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다들 편하셔야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병훈은 덧붙였다.

 

“참 면회신청서에 전도사로 돼 있던데?”

 

“예, 전도삽니다. 신앙을 갖다보니 지난 일들이 이해가 되더군요. 가족들이 아저씰 원망하는 걸 들었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우리 가족들이 아저씨한테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

 

“아저씬 계속 혼자 사셨습니까?”

 

“그렇게 됐네. 한때였지만 막내이모가 나의 유일한 여자였어. 다른 여자와 결혼할 마음이 썩 내키지 않더군. 그래서 지금까지…… .”

 

“상처가 크셨던가 봅니다.”

 

“그때는 그랬지. 근데, 집안에 변화가 많았어?”

 

“그동안 일이 좀 생겼습니다. 서울 이모부는 삼 년 전 돌아가셨고요. 대장암으로요.”

 

원망할 끄나풀마저 끊어져 병훈은 멍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인생이 슬퍼졌다.

 

“아직 젊으신데…… 그러셨군. 막내이모는 잘 계셔?”

 

묻고 싶은 질문이 이제 겨우 입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조카의 입에서 먼저 그녀의 소식이 나오길 기다렸으나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막내이모 때문에 왔어요. 이모가 돌아가셨어요.”

 

“저런! 그동안 많이 아팠어?”

 

“아녀요. 자살했습니다. 두 남매를 남겨 두고…….”

 

“……!?”

 

"욕실에서 목매…… ."

 

조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둘이라는 것은 충격이다. 위 아들은 중학교 3학년, 아래 딸은 중학교 2학년. 연년생. 죽음을 애도할 겨를 없이 궁금증만 깊어간다.

 

“그럼 이모가 결혼했었다고?”

 

“아녀요.”

 

“어떻게 아이를 둘이나? 혹시 입양을?”

 

“그것도 아녀요. 다 작은이모의 아이들예요.”

 

수수께끼도 이런 수수께끼가.

 

“어떻게? 이해가 어렵군. 미안.”

 

“아들은 아저씨의 자식이고, 딸은 서울 이모부의 자식예요.”

 

“아니, 그럴 수가?”

 

충격이 가라앉은 후 병훈은 말을 이었다.

 

“왜 진즉 나한테 알리지 않았어? 그랬음 이모가 죽지 않았을 수도……. 독한 여자로군.”

 

“혼자서 죄를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더군요.”

 

조카 상일의 설명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아들 해성의 출생비밀이 풀어져 간다.

 

약혼녀 양희는 아이 둘 다 작은형부의 자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아들은 병훈의 자식이었다. 혼자만 비밀로 하고 지내왔으나 고민은 많았다. 생김새가 아버지를 닮지 않아 주위에서 수군거리기도 했으나 구설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침묵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생김새가 생부 병훈을 많이 닮아감에 따라 혼자 고민을 해온 것이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양희에겐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다. 작은형부가 작은언니의 묵인 하에 아이들 교육비를 얼마간 보태줬던 것. 문제는 작은형부가 2년간의 대장암을 앓다가 죽는 바람에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해졌다. 작은언니는 그녀대로 자신의 자식 셋을 키우는 데 어려웠으니까.

 

끝내 양희는 죄책감과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다.

5일 전 화장해서 장려를 마쳤다는 것.

 

병훈은 운명의 장난이 이런 것이구나 — 슬퍼졌다. 자살하겠다고 옥상까지 올라간 자기는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엉뚱하게도 약혼녀가 먼저 목숨을 끊었다. 하룻밤 인연이 아들 해성을? 그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조카 상일이 침묵을 깬다.

 

“죄송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드릴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유서에 아들 해성을 생부인 아저씨께 돌려주라는 겁니다. 단 장례 후에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병훈은 들은 내용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고맙다. 두 아이를 내가 키울 테니 보내주구려.”

 

“동생 해주까지요? 서울 이모와 상의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아저씨 대신 이모부라고 부를게요. 이모부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병훈은 떠나는 조카의 뒤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해성의 출생 비밀을 들은 오선덕 선장은 항해 중에 갑판원 해성을 선장실로 불렀다.

 

“군함은 탔었겠지만 상선은 처음이니 승선 생활이 어때?”

 

“파도의 급이 다른 것 같습니다. 한 항차 하고 나니 정신이 바짝 드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면 됐다. 차차 익숙해질 거야.”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배란 배움의 종합세트란다. 열심히 하면 그만큼 결과도 나타나지.”

 

“자주 불러주십시오.”

 

“그러마. 부모님께 자주 편지 올려라.”

 

“알겠습니다.”

 

“해성아 힘내라.”

 

약속한대로 해성에게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 선장이 지켜본 해성의 일상은 극히 정상이었다. 항구에 도착하면 러브레터가 오곤 하는데 정서적으로 좋은 일이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만 없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