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전쟁 포화 속으로

전쟁 포화 속으로

오선닥 2012. 9. 22. 14:27

 1986년 세계 7대양엔 선박이 포화상태.

일본 자민당 거물 정치인이 은행 돈을 뭉텅이로 끌어들여

벌크 선대를 공룡으로 키웠다.

 

설상가상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석유수송마저 어려워지자

해운시황은 나락으로 곤두박질.

배는 운임이 좋은 페만 지역으로.

 

후세인과 호메이니의 자존심 싸움은 계속돼

선원들은 호르무즈해협

전쟁의 포화 속으로 내몰리고……

 

 

 

 

전쟁 포화 속으로

 

 

일본에서 액화가스를 하역하고 출항할 무렵 해부무장이 승선했다.

급한 발걸음으로 곧장 선장실로 들어온 그는 예의를 갖춘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용무에 들어갔다.

 

“특수한 상황입니다. 선장님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이번 항차는 페르시아만으로 결정됐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위험은 있습니다만 선적항은 카타르의 도하입니다. 이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서 보다 안전한 편입니다.”

 

같은 전쟁해역인데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오선덕 선장 자신은 이미 각오가 돼 있으나 선원들이 걱정됐다.

 

“일단 선원들의 개별 의사를 점검해봐야겠습니다.”

 

해무부장은 바로 선장의 뜻을 알아챘다.

 

“물론 하선을 원하는 선원은 싱가포르에서 교대해드리겠습니다. 위험수당은 한 달치 급료로 하고요.”

 

일주일 정도면 전쟁구역을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모가지수당은 일 개월 분이라는 뜻이다.

 

선원들은 위험을 잘 알고 있다. 1982년 한국선 삼보배너호가 반다르 호메이니항 부근에서 국적불명 군함에 의해 피격되어 선원 30명 중 13명이 실종된 적이 있다. 이후 많은 외국선이 공격당했던 터라 불안이 멈추지 않는 것은 당연.

 

영국 로이드 보험사는 페르시아만 남부해역을 운항하는 선박들에 대한 전쟁보험료를 종전보다 두 배 많은 선적화물가격의 0.1%로 인상했다. 쿠웨이트 선적 30만톤급 유조선이 이란 공군기로부터 로켓 공격을 받은 후 취해진 일이다. 2년 후에는 페만 입구 오만만에서 기뢰가 발견된 후 보험료가 더 올랐다.

 

싱가포르를 통과할 때 하선을 신청한 선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기특하다는 말로 표현할 순 없다. 언제나 순한 양처럼 따라 왔으니까.

 

 

전쟁이 왜 발발했냐구?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과 이란의 아야톨라 호메이니 최고지도자 간에는 역사적으로 관계가 개떡이었다. 우선 민족이 다르다. 이라크는 셈족 계통의 아랍인이고, 이란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페르시아인이다. 종교는 어떻고? 이라크는 메카파로서 수니파이고, 이란은 메디나파로서 시아파이다.

 

종교 갈등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유언을 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세계는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커다란 분열을 맞이했다. 메카파는 예언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최고령자인 아부바크르를 칼리프로 선출했다. 하지만 메디나파는 예언자가 사위 알리를 후계자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친구로 하느냐, 사위로 하느냐의 문제로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한다는 완전무결성의 칼리프를 인간 중에서 뽑으려니 그럴 수밖에.

 

아랍인들은 637년 페르시아의 사산조를 멸망시키고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제국을 건설했다. 이란인들은 민족의 우위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이란인들은 다수파인 수니파를 버리고 소수파인 시아파를 선택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란인으로선 16세기 사파비조가 시아파를 국교로 한 최초의 페르시아 민족국가였다. 두 민족 간의 반목과 대립관계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 이슬람 이후 아랍사회에 나타난 문명만을 추종한다. 하지만 이란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그 자체로 거대한 문명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아랍 무슬림에 의해 나라가 점령당했지만 자존심 있는 제국이었고 또한 이란인의 정체성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시아파는 이슬람세계에서 약 10%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파로 알려져 있다. 시아파의 종교지도자를 이맘으로 부른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는 이맘들이 대마초 마취제인 ‘하시신’에 의해 많이 죽었다고 했다. 암살을 뜻하는 영어 ‘어새신(assassin)'의 어원이 되었다나. 그래서 시아파에서 이맘은 비극의 상징이자 저항의 원동력이었다.

 

호메이니의 가문은 이맘의 후손으로 전통적인 성직자 집안이다. 그의 조상들이 18세기말 이란 북동부 마을에서 인도 북부 지역으로 이주해 간 적이 있다고 해서 팔레비 정권은 그를 인도 이방인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라크의 나자프는 시아파의 중요한 성지로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터키제국의 영토였지만 이란 정부의 영향력이 훨씬 더 강력하게 미친 곳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견원지간인 두 나라에 갈등이 심화된 것은 1979년 이란혁명이 성공한 데에 있다. 후세인은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우선 혁명을 이웃 이라크로 수출하려는 호메이니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호르무즈 해협 세 개 도서와 샤트알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다. 팔레비 왕 때는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알제이협정에서 수로를 그냥 같이 쓰자고 한 것뿐인데…….

 

그리고 혼자 분을 삭이지 못했다.

후세인은 격노했다.

 

“섬 세 개와 수로가 저들 것이라고? 나쁜 놈들!”

 

명색이 중동에서 제일의 군사강국 이라크를 이렇게 대접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

배알이 뒤틀린 후세인은 1980년 9월 선전포고 없이 이란 침공을 명령했다.

 

“돌격!”

 

이라크는 먼저 바그다드와 근접한 중부 접경지대로 진격하여 수로를 넘어 주요 도시 호람샤흐르와 아바단을 점령했다. 이란의 주요 수송루트와 산업지역을 테헤란 정부와 단절시킴으로써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 성공으로 욱일승천해 있던 호메이니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다. 백 년 전 조상이 담배불매운동까지 한 가문 아닌가. 자존심 상하게.

 

“혁명수비대를 앞세워라!”

 

이란의 반격으로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란의 인해전술에 이라크는 이란 영토에서 후퇴했다.

 

혁명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불안에 싸여있던 이란은 전쟁의 위기를 오히려 국민을 전쟁 참여에 동원하는 구실로 삼았다. 혁명임무 완수까지 대가 없이 전쟁을 종결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천일야화(千一夜話)처럼 계속 전쟁을 몰고 나가려 했다.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는 걸 믿는 사람처럼.

 

“양탄자는 둬서 뭐 하느냐? 모든 걸 동원하라.”

 

호메이니는 어린이 만화의 주인공이 쓰는 마법 양탄자가 머리에 떠올랐던가 보다.

하늘을 나는 비법을 써서 이슬람의 배반자 후세인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이민족 방어를 위해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 마을의 지붕과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양탄자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승리의 환상을 준다.

 

이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페르시안 양탄자 아닌가.

터키의 것과는 매듭이 다르다고 했지.

7세기 페르시아 사산왕조가 폐망한 후 처음엔 아랍인, 다음은 몽골인의 지배하에 있다가 천년 만에 독립해 자신들의 왕조 사파비조(1501-1722)가 나타나 양탄자 문화를 부흥시킨 것.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에서 붉은색

인디고 나뭇잎에서 푸른색

사프란 꽃에서 노란색

흑양 털에서 검은색

오디나무에서 연두색

 

신이 창조한 자연의 색깔로 양탄자는 화려하게 탄생되는 것. 신은 유일한 창조주이니 사막이라고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호메이니는 27살에 띠동갑 15살 여학생에게 청혼했다. 여학생은 처음엔 결혼을 거절했으나 꿈에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이 결혼하라는 말을 듣고는 마음을 고쳐먹고 결혼했다. 그녀는 호메이니의 처음이자 유일한 아내였고, 그들의 관계는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란혁명 후 비행기에서 검은 도포 차림에 흰 수염을 휘날리며 내려오는 한 노인이 바로 호메이니였다. 부패한 독재권력에서 이란을 해방시킨 영웅이요, 이슬람세계에서 전설적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1989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장례식장은 일천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테헤란의 거리로 밀려들어 8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조문객의 검은 복장으로 테헤란 전역은 암흑의 거리로 변했다. 마침내 헬리콥터로 시신을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헬리콥터가 도착해 호메이니의 시신을 옮기자 군중들은 달려들었고 시신을 싼 천은 그들의 손에 찢겨서 그들의 유품이 되었다.

 

이천 년 전 예수의 옷을 찢어 보관하듯.

 

 

호메이니가 아무리 이란의 우월한 문화를 자랑하더라도 이라크의 후세인 앞에서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후세인은 은근히 오천 년 전통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들고 나왔다.

 

“바벨탑을 만들었고 공중정원도 만들었던 우리를 감히 넘봐?”

 

후세인 자신은 유복자로 가난하게 태어나 외삼촌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조상의 위대한 문화를 내세워 호메이니의 콧대를 꺾어 놓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기원전 6세기에 세워진 정원은 천국을 현실의 눈으로 보여준 거 아닌가.

 

이에 대해 호메이니는 코웃음을 쳤다.

 

“다 무너지고 없어진 것을 붙잡고 있으니 죽은 자식 불알 잡고 있는 식이군. 사담 너는 사상누각에 앉은 사람에 불과해. 빨리 손들고 항복해.”

 

티그리스강이 휘감은 바그다드의 영광은 후세인 자존심의 앙꼬이다.

 

“문명발상지 메소포타미아를 얕보다니? 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세계 최대의 도시 바그다드를 모르는가?”

 

서기 762년 아바스 왕조의 수도가 된 바그다드는 정말 자랑할 만하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칼리프는 인도와 중국에까지 손을 뻗었고, 수도 바그다드는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사람과 문화가 풍성히 교류하는 거대한 시장이 되었지. 영광은 1258년 몽골의 침략에 의해 이집트로 왕조를 옮겨가기까지 이어졌지만.

 

이라크는 가장 오래된 인류문명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성립됐다. 그리스어로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인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땅을 지칭한다. 중앙집권적인 관개시설을 토대로 강력한 왕권체제가 수립됐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고대 바빌론을 재발견하려는 계획으로 걸프전 이후 후세인은 이 유적 위에 수메르의 피라미드를 본 딴 현대적인 궁전을 건설할 계획을 진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 ‘사담 힐(Sadam Hill)’이라 부른 이 프로젝트는 실행 직전인 2003년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결국 상상 속의 바벨탑이 되고 말았다.

 

티그리스강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바그다드 르네상스 플랜’ 역시 이 도시가 꿈꾸고 있는 21세기의 천일야화가 되었다.

 

쿠웨이트를 침공해 다국적군의 반격을 받은 2003년 걸프 전쟁 중 후세인은 조상에게 미안한 일을 만났다.

 

“얘들이 박물관 소장품을 약탈했다고? 오천년 조상의 유산을……?”

 

바빌론, 수메르, 아시리아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 문명의 가장 중요한 유산들이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쟁 중 박물관 안의 소장품 17만 점 대부분이 손실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유네스코, FBI 등의 전문 인력이 동원되어 상당수의 유물이 회복되었지만, 바그다드의 영광을 되찾아 오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판이다.

 

세계 에너지 생명선이라고 불리는 호르무즈 해협은 폭이 50km, 최대 수심이 190m이고, 해협의 중간에 위치한 섬 3개에 이란은 해상공격용 대포와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 이란은 자국의 이익이 침범당할 때 호르무즈 해협 봉쇄론을 제기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을 계속 야기하기 전 천일야화 얘기를 하고 넘어가자.

천일야화는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6세기경 인도와 중국까지를 통치한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샤프리야르왕이 아내에게 배신당한 후 신부를 맞이해 결혼한 다음날 아침에 죽여 버리는 악취미가 있었다.

 

한 대신의 어질고 착한 딸 세헤라자데가 자진해서 왕을 섬기겠다고 나섰다. 그녀는 죽지 않기 위해 꾀를 하나 냈다. 자기 전에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왕이 막 흥미를 가질 때쯤 이야기를 딱 끊는다.

 

“내일 다시 이야기해드릴게요”

 

물론 왕은 내일까지 살려두었다. 그렇게 매일 밤 1001일 동안 들려준 이야기가 280여 가지. 왕은 종래의 생각을 버리고 그녀와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8세기 말경까지 아랍어로 번역됐다. 여기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다시 많은 이야기가 추가되었고, 그 후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여, 15세기경 현존의 것으로 완성된 것이란다. 작자는 한 사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이야기 중에는 인도를 비롯해 이란·이라크·시리아·아라비아·이집트 등의 갖가지 설화가 포함되어 있고, 그리스와 유대의 영향도 있어 그 구성이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아랍어와 이슬람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본래의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등의 이야기가 없었다. 18세기 초 프랑스 문학가가 아랍어로 번역하면서 임의로 끼워 넣기 한 것이다. 이것은 전세계에 퍼져 문학가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끝없는 흥미와 꿈을 심어주었다.

 

책의 이야기는 연애·범죄·여행·역사·우화·신선담·교훈담 등이다. 가장 긴 야기 중에는 십자군과 이슬람교도와의 격돌 일화들이 그려져 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무대는 바그다드가 가장 많고, 카이로·다마스쿠스·바스라 등도 자주 나오고,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로는 이베리아에까지 이른다.

 

바그다드의 카라마나 광장에는 ‘열려라 참깨’ 해서 벼락부자가 된 알리바바의 충직한 하녀 카라마나가 항아리에 든 도둑들에 끓는 기름을 붓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전쟁 이후 무법천지가 되어 도적 떼가 들끓는 바그다드는 땅 속의 기름 때문에 또 한 번 기름을 둘러쓰는 고난을 겪게 될까.

 

바그다드의 도로 양쪽에는 후세인이 세운 ‘승리의 손’이 있다. 두 손으로 거대한 칼을 서로 가로질러 들고 있는 모양의 손 아래로 백마를 타고 행진했다는 후세인은 피비린내로 끝낸 전쟁을 승리로 착각했는지.

 

 

 

1986년 늦은 여름

오선덕이 지휘하는 가스운반선 R호는 스리랑카를 돌아 몰디브 해안을 멀리 왼쪽에 두고 아라비아해로 들어서는 중.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전쟁포화가 난무하는 페만과는 달리 너무 조용했다.

 

천일야화의 수많은 이야기 중 <바다의 신드바드 이야기>는 선원들에게 꿈을 안겨준다. 신드바드가 일곱 번씩이나 인도양에 나아가 갖가지 위난을 극복한 끝에 바그다드의 부호가 되는 이야기.

 

평소 이야기를 좋아하는 기관장이 말문을 열었다.

 

“웬만큼 배를 탔으면 이제 신드바드처럼 부자가 돼야 하는데…….”

 

그리고 선장의 대꾸를 기다린다.

 

“알라딘의 램프나 알리바바의 꾀라도 있어야죠.”

 

선장은 질문자를 바라보는 대신 멀리 하늘만 쳐다보고 말했다.

그러나 기관장은 윙 브리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램프보다 더 강렬한 서치라이트가 있지 않은가요.”

 

기관장은 중국의 가난한 소년 알라딘이 갖고 있던 요술 램프보다 윙 브리지에 있는 서치라이트가 더 신기한 걸로 생각하는 듯.

 

그들은 전쟁터로 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이야기에 열중하려 한다.

로켓포가 비상하는 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차려질까.

 

전쟁 해역까지는 5일 항해거리.

 

조금 전 서쪽 바다로 가라앉은 태양이 남겨 놓은 빛으로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수평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황혼에 물든 하늘을 감상하기 전 일항사가 습관적으로 섹스탄트(Sextant)를 들었다. 선박의 위치를 내기 위해서다.

 

그는 거문고자리의 직녀별 베가를 잡았다. 섹스탄트의 레버를 천천히 끌어당겨 별의 영상을 수평선 위에 올렸다. 천측을 할 때는 여자의 치마를 끌어내리듯 레버(Index arm)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선배들은 말하곤 했었지.

 

 

 

천측계산을 하고 해도에 위치선을 그은 일항사에게 오 선장은 유의미한 말을 건넨다.

 

“일항사, 방금 천측한 쪽 멀리 몰디브 나라 있지? 난 시방 저 나라가 얼마나 평화로운지를 상상하고 있는 거야. 그 땅 위로 파란 하늘과 바다를 상상하고 있다네.”

 

몰디브라는 작은 섬나라. 육지 면적은 서울의 반밖에 되지 않지만 해안선은 천리 길이다. 인구 삼십만 명의 나라. 해수온도 상승으로 섬이 물에 잠겨 들어가는 것이 문제로 등장한다. 21세기 세계로 향하여 수몰위기를 시위하기 위해 잠수복을 입고 장관회의를 열기도 하는 나라.

 

일항사는 선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선장님, 우린 전쟁터로 가는 중입니다. 지금 이란과 이라크가 싸우는 곳 말입니다.”

 

“아, 그렇지. 전쟁터로…….”

 

오 선장은 일항사 앞에서 태연한 체했다.

그러나 긴장이 피부로, 근육으로, 그리고 뼛속으로 조금씩 스며드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어제 오후에는 그리스 벌크선이 선수에, 오늘 아침에는 덴마크 컨테이너선이 선미에 로켓포를 맞았다고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이런 정보가 선원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지는 제켜놓더라도 페만의 상황을 실시간 통보해줌으로써 선장의 항해계획에 도움을 주겠다는 뜻이다.

 

 

중동은 확실히 화약고다.

풍부한 석유자원이라는 화약이 쌓여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삼대륙이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는 전쟁의 뇌관이 터지기 쉬운 곳이다.

 

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로 산유국은 돈을 좀 챙겼다. 반면에 석유를 많이 수출하겠다고 산유국간에 갈등이 잦았다. 미국도, 소련도 힘이 빠지니 위험한 뇌관을 관리할 나라가 없다. 이슬람혁명과 국경문제가 겹쳐 전쟁으로 확대된 것은 당연한 길인지도.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고 하나 이젠 다스리기엔 너무 뜨거운 감자가 돼버렸다.

 

 

 

호르무즈해협이 가까워지자 라디오에서 알라 신을 찬송하는 가락이 흘러나왔다.

 

“라 일라하 일라 알라, 무함마드 라술 알라”

 

무슬림들의 신앙고백.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뜻이다.

 

더디어 전장으로 가는구나, 실감으로 다가온다.

 

선내는 갑자기 분주해졌다.

 

“모래주머니를 선교 우현에 쌓으세요.”

 

일항사는 갑판장을 불러 회사에서 공급해준 모래주머니를 설치하도록 했다. 우측 이란 해안의 로켓이나 이란 경비정 공격에 대비해서 취하는 조치이다. 걸프만을 나올 때는 반대로 좌현에 설치할 것이다.

 

총알도 아닌 로켓 공격에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지는 나중 문제이고, 우선 선원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방탄조끼 같은 걸 보급해주면 좋을 텐데…….”

 

통신장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한 번쯤 던져볼 만한 질문이다.

 

걸프 지역 항해를 아내한테 알리지 않았다는 삼항사는 심각해졌다.

 

“새댁이 2세를 임신했는데…….”

 

아내를 항상 새댁으로 지칭하는 삼항사는 결혼 두 달 만에 달성한 쾌거를 마냥 자랑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몰 시간에 맞춰 배는 호르무즈해협 입구에 도착했다.

걸프만의 입구 호르무즈 통과시점을 어둠이 완전히 덮이는, 목표물이 잘 포착되지 않는, 늦은 저녁시간대에 맞춰 배의 속력을 조정했던 것이다.

 

통과 중 항해등을 비롯해 모든 외등을 껐다. 마치 바다에 납작 엎드려 포복자세로 항해하는 것 같다.

 

호르무즈해협 입구에서 도하까지는 18시간가량 걸린다.

이란의 공격을 피해 반대편 두바이 해안 쪽으로 바싹 붙어 항로를 그었다. 정해진 항로가 아니어서 충돌의 위험이 커져 긴장이 많이 된다. 길어진 항정으로 항해시간이 길어지긴 하나 위험 구간에서 전속으로 달리므로 도착시간에는 별 차이가 없다.

 

넓디넓은 페만이 암흑천지.

먹물을 부어 놓은 듯 까맣다. 무슬림들이 좋아하는 쪽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슬림에게 초승달의 의미는 신앙적이다.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점성술에서 신성시 되어 왔다. 금식 성월인 라마단의 시작과 끝을 초승달의 생성과 소멸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상응하는 형상이다. 무슬림 국가들의 국기와 건축물 장식과 조형물, 여성 악세서리 등에 초승달 문양이 다양하게 사용된다.

 

이슬람은 믿음의 실행으로 오행(五行)을 강조한다. 신앙고백, 예배, 금식, 종교세, 순례가 그것이다.

 

예언자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에는 금식을 정신적, 물질적 차원에서 절제를 뜻한다. 모든 음식물을 동트기 전부터 일몰까지 금하고 모든 악의 요소로부터 멀리한다. 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일출과 일몰 사이에 모든 성인 무슬림은 먹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부부관계를 삼가는 것이 요구된다.

 

라마단 달을 신성한 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달에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라마단의 목적은 신에게 복종하고 은총에 감사하며 소외된 자의 고통을 함께하여 무슬림의 연대의식을 권장하는 집단적 훈련이다.

 

라마단이 끝나면 축하하는 집단예배는 일출부터 정오 사이에 적당한 시간을 골라서 행해진다. 시장엔 ‘라마단 특수’ 현상이 나타난다.

 

이슬람력은 일년이 12개월이지만 354일 또는 355일이다. 모든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차례 즉,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 예배를 드린다. 반드시 메카 방향으로.

 

모든 무슬림들은 매년 종교세인 자카트를 낸다. 재산의 일부를 내어준다는 의미에선 기독교의 십일조와 비슷하다. 성지순례(Hajj)는 매년 이슬람력 12월 행해진다.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행적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순례객들이 두 개의 흰 천으로 된 이흐람을 입는 것은 무슬림들의 단결 및 인류 평등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베일은 여성의 노출 부분을 가리는 이슬람식 복장을 의미한다. 즉, 머리카락, 손목과 발목을 가리는 것이다. 베일 논쟁은 여성뿐만 아니라 계급과 문화의 논쟁이기도 하다. 베일을 벗어야 한다는 식민 담론과 베일 관습을 보전해야 한다는 저항 담론의 상징이 되었다.

 

시아파에서는 존경과 충성 서약의 표시로 상대방의 손 또는 발에 키스하는 전통이 있다. 발에 키스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대 복종과 충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독히 희생적인 종교인데 왜 세계 곳곳에서 자꾸 충돌이 일어나는가?

종교의 독단성에서 탈피하는 게 답일지도…….

 

 

 

레이더를 열심히 주시한다. 충돌의 위험이 있으면 잠시 항해등을 켰다가 다시 소등하면 된다. 군함들은 무장을 하고 있어 불을 켜 놓기도 한다. 겁날 것이 없다는 뜻이겠지.

 

이란이라크전쟁 발발 후 아랍 국가들에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심화된 양극화 현상이다. 이란을 지원했던 아랍 국가들은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과 같은 친소련 국가들이었고 이라크를 지원했던 국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및 걸프 연안국들이었다.

 

우선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와 걸프만의 항해에 있어서 안전 확보가 문제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걸프 연안국에 입항하는 배들은 주로 미국 우방국들의 소유선이라 간주되어 미국 군함이 경비를 담당한다. 그러나 미군함정의 수가 적어 해역을 다 커버할 수는 없다.

 

선원들이 베개를 갖고 좌현 침실로 옮기고 있었다. 남의 방에서 몸을 포개고 자더라도 공격 반대방향의 침실로 피신하겠다는 것이다.

 

항해등이 꺼진 상태에서는 접근하는 선박은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오로지 레이더로만 알 따름이다.

 

동경 54도 자오선을 지날 무렵.

갑자기 어디선가 굉음이 들렸다.

 

“피~ 피~ 피웅!”

 

선수 우현 일 해리쯤 떨어진 곳에서 섬광이 비치고, 곧

 

“펑!”

 

하는 굉음이 터졌다.

 

앞서가던 배가 한 방 맞았다.

항해등을 켜지 않았으므로 얼마나 큰 배인지 알 수 없지만 작은 배는 아닌 것 같다. 원유탱크가 아니라면 다행이나 위험물이 있는 급소 부위라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란의 쾌속정이나 연안 섬에서 발사했던 로켓인가 보다.

 

“이항사, 레이더에 들어오는 물체를 잘 관찰해. 이동하는 이란 경비정일지 모르니까.”

 

“라저. 우현엔 가까운 물체 없음. 현재 선수 방향의 배는 마주보고 오는 탱커로 사료됨.”

 

해군에서 배운 대로 대답하는 모습이 아주 전쟁을 실감케 한다.

 

“연안경비 중에 있는 미국 군함들은 다 숨어버렸나?”

 

호소하고 싶었지만 저들인들 아무 선박이나 도와줄 의무는 없다. 그리고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마당에.

 

피격된 선박에서 붉은 불꽃이 솟았다. 비상통신 채널 16에서 긴급구조 메시지가 떴다.

조난신호 ‘MAYDAY’를 연달아 듣다보면 내 배가 긴급 상황에 처해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선교에 모여 있는 선원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 쳐다본다. 로켓포가 떨어졌다는 것은 전쟁 중이라는 뜻이고, 배는 전쟁터 안에 있다는 뜻이다. 야간이라고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니구나.

 

오선덕은 불현 듯 전쟁지역 베트남에서의 경험이 생각난다. 사이공강을 따라 항해하는 중 앞서가던 배가 포탄을 맞아 선수갑판에서 허연 연기가 솟았던 일. 강변 숲속에서 베트콩이 띄운 폭탄에 맞았던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 지금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앞서가던 배에서……. 인연도 참 기이하다.

 

전쟁해역 항해는 전쟁보험 부보가 필요하다. 전쟁보험 구간은 호르무즈 해협부터 동경50도까지. 그 서쪽은 보험담보 밖이다. 민간선박 항해는 거의 불가능하고 대체로 정부의 위험 담보로 군함의 호위를 받아가며 항해할 뿐이다. 목적지 카타르는 보험 구간에 속한다.

 

이튿날 카타르의 도하에 도착했다. 몸은 무사했으나 정신은 파죽음이 됐다.

신문에는 어제 밤 다른 화물선 한 척이 이란 경비정으로부터 거주구역에 공격을 받아 두 명의 선원이 부상했다고 한다.

모래주머니를 쌓아두지 않았나.

 

항구에 도착하자 본사에서 전문이 왔다.

 

「안전한 입항 축하! 출항시 아랍에미리트 연안근접 항해 바람」

 

출항하는 길 또한 넘어야 하는 산이다. 위험한 길을 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두 배의 심적 부담을 준다. 공격당한 배를 본 마당에는 더욱 그렇다.

 

컨테이너선이 맞았고

벌크선이 터졌으며

탱커가 폭발했다.

 

운명을 피해갈 길은 없다. 알라 신끼리 싸우다가 박이 터지는 판이다.

신이 수백 개인 일본 배도 얻어터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신들끼리 싸우는 전장에서 찰과상조차 입지 않고 호르무즈를 빠져나온 오 선덕의 R호는 어떤 신이 보호해줬을까.

 

“월급을 열 배 더 준다 해도 이젠 안 갈래.”

 

선원들의 한결같은 다짐이다. 그러나 그 다짐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두 배라도 괜찮으니’로 몸을 낮춰 다시 나오곤 하는 선원들은 순진하기만 한 것인가?

 

전쟁터로 항해한다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선원이 절반이 넘었다. 눈치 빠른 가족은 월급이 두 배로 입금된 것에서 기미를 알아챌 수도.

 

“우리 남편 목숨 값이구나. 이런 줄도 모르고…….”

 

헤프게 써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국경전선에 머물러 있던 이란이라크 전쟁은 언젠가부터 도시전으로 확대됐다.

학교와 열차, 항공기 등이 파손.

이란에선 어린 소년들까지 학교 대신 전쟁터로 행진.

인해전술로 방어선이 뚫리는 이라크는 신경가스와 겨자가스까지 사용.

 

1984년 이라크는 불리한 전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란의 유조선과 카그섬의 석유기지 공격.

이란은 이라크 석유를 수송하는 유조선에 반격.

이라크는 헬리곱터와 전투기로 이란의 카그섬 반복적 공격.

이란은 이라크를 지원하는 모든 유조선 공격 확대 선언.

 

이란 정부는 사실상 두 개의 전쟁, 즉 이라크와의 전투와 내부 좌파 세력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1987년 쿠웨이트 유조선은 소련과 미국의 국기를 달고 석유 수송.

이라크 전투기가 미사일로 미 호위함 공격 60명 사상.

이라크가 이란 석유를 적재한 초대형 유조선 시와이즈 자이언트(55만DWT)를 미사일 공격.

미국은 미국기를 게양한 쿠웨이트 유조선이 공격받자 이란의 석유기지 공격.

 

1988년 미 순양함이 경고에 무응답하는 이란 민항기 격추 290명 사망.

이로 인해 호메이니 전쟁 종식 절감.

호메이니는 전지전능한 신을 위해 독성배를 마실 것이라고 하면서,

 

“신이시여! 당신의 의지를 존경합니다.”

 

부르짖고, 마지못해 1988년 7월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당사자끼리 싸우는 건 괜찮다.

그런데 왜 전쟁과 관계없는 제3국 상선을 건드리나?

 

그것은 이라크의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기타 걸프 연안국들의 석유수출을 방해함으로써 미국과 서방국가를 압박하고, 나아가서는 이라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함이다.

 

결과적으로 두 우두머리의 자존심 싸움에다 종교적, 종족적, 정치적 차원의 복합적 요인이 얽혀 있었던 전쟁은 8년간 양쪽에 백만 명가량의 사상자(이라크 30만명, 이란 70만명)를 남기고 무승부로 끝났다.

   

 

 

승자도 없이 상처만 남긴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양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전쟁 후 이라크가 중동정치에서 급부상했다. 이는 서구세계가 후세인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안정적인 석유 공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라크를 지지하고,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보수왕정국가들과 친미국가 이집트도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미국의 지원으로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등장했다.

 

일이 꼬인 것은 그 다음이다.

이라크는 산더미 같은 전쟁부채와 전년에 원유과잉공급과 관련해 쿠웨이트와 갈등을 빚어왔다. 쿠웨이트는 OPEC의 원유감산 방침과는 달리 오히려 증산을 하기도 했다. 또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라크 영토의 일부를 포함한 유전을 개발해 이라크를 자극했던 것이다. 거기다 전쟁 중 발생한 채무변제까지 요구했다.

 

후세인의 다혈질은 이 대목에서 발끈.

 

“우리 영토를 영국이 강제로 떼어놓은 건데…… 쿠웨이트 너희가 감히?”

 

1990년 2월 단숨에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역사적으로 이라크 남부 바스라 주의 한 군에 지나지 않았던 쿠웨이트를 후세인은 당연히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20세기 초 중동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영국이 엄청난 석유 매장을 확인하자 이라크의 지방토호를 쿠웨이트왕가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라크는 수차례 병합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영국의 저지를 받았다. 이후 미국 패권시대가 되면서 쿠웨이트는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국가로 변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계기가 되어 1991년 초 이라크는 33개 다국적군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지 채 3년도 안 됐는데 또 전쟁을?

전쟁귀신이 붙었나.

 

미국이 2001년 9.11테러사건을 겪고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2003년 봄 25일간 동맹국인 영국과 호주와 함께 바그다드 남동부 등에 미사일 폭격을 가함으로써 전쟁을 개시했다.

 

45일 만에 이라크가 항복했지만 첨단신무기가 동원된 전쟁은 마치 컴퓨터 게임 같았다. 이라크 측 희생이 15만 명에 이르렀으나 다국적군은 백여 명의 사망에 불과했다.

 

후세인 대통령은 바그다드 교외로 도주 했지만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가 2006년 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라크 역사의 페이지에는 눈물과 포탄의 자국이 가득하다.

 

 

 

전쟁의 씨앗인 석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흔히 석유를 ‘검은 황금’ 또는 ‘땅 속의 진주’라고 부른다. 석유를 지배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다양한 음모가 나타나면서 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산유국에서는 고통과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석유를 두고 말이 많다.

 

- 석유 한 방울은 피 한 방울

- 석유는 ‘악마의 눈물’이자 ‘재앙의 씨앗’

- 역사는 잉크 대신 석유로 쓰여진다

- 석유를 장악하면 세계를 지배한다

 

1901년 영국이 이란 석유 채굴권을 얻기 시작해서부터 석유자본은 서방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950년대부터 각국은 석유 국유화 운동을 주창했다.

 

- 외국을 몰아내자.

- 빈곤을 추방하자.

- 우리 땅은 우리의 손에!”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 불리는 제1차 중동전쟁,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촉발한 제2차 중동전쟁, 1967년 PLO의 테러로 촉발한 제3차 중동전쟁은 석유 생산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은 석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전세가 유리한 이스라엘이 정전 제의를 거부하자 아랍석유수출국기구는 이스라엘 지원국에 석유 금수조치를 발표하면서 자원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나 세계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전쟁지역의 원유수송은 운임상승을 가져왔고 결국 소비자는 비싼 기름을 쓰게 되는 것이다. 2012년 한국은 30만톤짜리 대형유조선이 매일 한 척씩 입항해야 한다. 한 항차 45일 소요된다고 하면 45척의 VLCC가 항상 운항한다는 뜻이다.

 

석유수송 항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대국의 해군력이 집중되고, 그중에서도 일본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란은 이라크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란은 아리안족으로 인도유럽어족의 동부 지파에 속한다. 기원전 2500년경 이란고원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을 아케메니아 제국이라고 불렀다. 아케메니아 제국은 인더스강, 나일강, 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만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란 역사상 가장 방대한 지역을 통치한 제국이었다.

 

이란(Iran)이라는 용어는 1935년 이란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조로아스터교 경전에선 귀족들이란 뜻이다. 이 때문인지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한국과 이란은 거리 이름을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1977년 서울에 ‘테헤란로’, 한편 테헤란에는 ‘서울로’와 ‘서울공원’을 지정했다.

 

이란-이라크 관계의 커다란 전환점은 1997년 모함마드 하타미가 이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였다. 양국 간의 전쟁포로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라크와의 관계개선을 제안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사담 후세인 순니파 정권이 붕괴되고 시아파 정권이 집권하면서 이란과 이라크 관계는 시아파 연대가 형성되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2005년 잘랄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은 이란을 방문했고 2008년 3월 2일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이슬람혁명 이후 최초로 이라크를 방문하면서 양국 관계의 새로운 역사를 선언했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이란과 이라크의 관계를 적에서 동지로 바꾸어 놓았다.

 

 

1988년 영국에서 출간된 살만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면서 이슬람의 거센 반발이 나타났다.

 

1989년 2월 호메이니는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종교 칙령을 발표했다.

 

“이슬람과 예언자, 쿠란에 반대하는 악마의 시 작가와 출판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루시디가 이슬람 추종자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끼쳐서 죄송하다고 했음에도 호메이니는 사형선고를 기각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이란 국내의 혼란을 무마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강화시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현재 이란에서는 이슬람법학자통치론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슬람의 루터’가 탄생 중이다.

 

 

이란은 중동의 자존심이다. 이란은 중동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이며 이란인들은 사실상 중동의 역사를 움직인 주역이다. 1906년 입헌혁명, 1951년 석유국유화운동은 석유민족주의 운동을 탄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979년 이슬람혁명은 종교가 국가를 다스리는 체제를 탄생시켰다.

 

이 때문에 이란인들의 개혁열망은 점차 증가하고 있고 이를 둘러싼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그리고 보수파와 신보수파의 갈등은 확산되고 있다.

 

2003년 말경 이란 남동부에 규모 6.3의 강력한 지진으로 이천년 전 사산조의 유적이 붕괴되고 약 5만여 명이 사망했지만 다시 일어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21년 영국의 지원 하에 쿠데타로 팔레비 왕조가 탄생했다. 터키를 모델삼아 공화제를 시도하려는 사건을 계기로 왕과 성직자 간에는 티격태격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호메이니는 이슬람을 파괴하는 팔레비 왕조를 뼛속까지 싫어했다.

 

“나는 혈관에서 피가 흐르는 순간까지 반대할 것이다.”

 

호메이니는 종교와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 즉 지하드(Jihad)를 찾으라고 했다. 1964년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정체제를 미국에 종속된 친미정권이라고 규정한 이유로 해외로 추방되었다. 투옥보다는 해외추방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그의 존재를 지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호메이니는 터키를 시작으로 15년 동안 기나긴 망명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이란인들은 그를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구도자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레토릭 같은데.

호메이니는 망명 중에도 항상 망토와 터번을 착용했다. 망명 이듬해 터키에서 이라크의 나자프(Najaf)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13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 나자프 신학교에서 이슬람정부에 관해서 강의했다.

 

“이슬람에서 입법권은 신에게만 귀속된다.”

 

이슬람법의 절대성을 강조했던 것도 이때였다.

 

지미 카터가 인권외교를 강조하자 팔레비 왕조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악화되고 더디어 1978년 대학살극이 발생했다. 계엄령 선포를 항의하는 집회에서 시민 이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혁명의 불길을 잠재우기 위해 호메이니를 이란에서 먼 곳 프랑스로 보냈다. 하지만 76세의 노인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세계의 언론은 이 신기한 노인에게 집중적 관심을 보였다.

 

테헤란 아슈라 광장에는 2백만 명의 시위대들이 운집했다. 무력진압에 수천 명이 사망했지만 더 이상 반샤 시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979년 1월 모함마드 레자 샤는 이란을 떠났다. 이집트로 망명한 뒤 모로코, 멕시코, 미국, 파나마를 전전하다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카이로의 한 사원에 그의 무덤이 있다.

 

파리에서 샤의 망명 소식을 전해들은 후 2주 만에 이란으로 귀국한 호메이니는 또 부르짖었다.

 

“신은 위대하다.”

 

이란은 국민의 98% 지지로 ‘이란이슬람공화국’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정치독재 대신 종교 독재국가로 되었다.

 

1980년 미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로 미국의 자존심이 땀 먹은 바지처럼 구겨졌다.

미국의 중동정책, 즉

 

- 석유자원의 확보

- 대소련 방어망 구축

- 이스라엘 안보

 

등의 정책이 테헤란에 떨어지는 헬리콥터 날개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냉전체제의 해체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세계정치는 철저히 국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나타났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성직자들에 대해서 경고했다.

 

 

1989년 초여름 호메이니는 자신이 곧 신을 만날 것이라면서 아들 아흐마드와 딸 자흐라의 시중을 받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를 위해 울지 마라. 그것은 신의 뜻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가족들과 측근들의 통곡소리가 퍼져 나왔다. 라디오에서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쿠란을 암송했다. 흐느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들렸다.

 

“우리는 쿠란과 하디스(예언자의 언행록)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제 이란 젊은이들은 보수파뿐만 아니라 개혁파에게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2005년 이란 대통령 선거는 이란의 내부 분열을 가속화시킨 또다른 사건이었다. 대통령은 보수파의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지지기반은 신보수파라고 부를 수 있다. 신보수파의 지지기반은 급진적인 성직자, 군부 및 민병대이다. 신보수파는 이슬람가치를 수호하는 보수파와는 달리 사회정의를 강조하고 있다.

 

현재 이란사회는 핵문제를 둘러싸고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보수파 내부의 갈등 등 다양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란의 핵 강경책은 이란 정계의 내부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끝난 뒤 세계는 자원 확보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01년 9.11 테러 사태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이는 지구촌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이원화시켜 세계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테러와의 전쟁은 본질적으로 자원 패권을 위한 전쟁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되고, 미국은 카스피해 연안국가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는 고대로부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교역로, 즉 비단길이었지만 이제 석유길로 바뀌는 판.

 

고대의 실크로드는 현재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및 우즈베키스탄의 영토를 관통했다. 옛날 동인도무역회사의 이권은 유노칼(Unocal), 토탈(Total) 등 다국적기업의 이권으로 대체되었다. 중앙아시아를 구성하는 5개 ‘스탄’ 국가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열망하고 있다.

 

교묘하게 돌아가는 광경을 보는 죽은 호메이니로선 머리 뚜껑 열릴 일이다.

 

“아니, ‘스탄’은 이란어 아닌가. 양키놈이 우리 형제 스탄 나라들을 꼬드겨?”

 

더 기분 나쁜 일이 벌여졌다. 미국이 석유 사업에서 러시아, 중국, 이란을 견제하고 약화시키는 목적으로 구암(GUUAM)을 조직했다.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등 5개국의 첫 글자를 따서 미국령 태평양 섬 괌과 비슷한 글자로 만들었다.

 

호메이니가 생시에 가장 좋아하는 욕설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양키 놈은 정말 사탄이야. 석유 깡패 록펠러가 석유를 악마의 눈물이라고 했지? 악마 같은 놈들!”

 

미국의 에너지 전략은 이제 페르시아 만에서 카스피 해로 연결되고 있다. 페르시아 만은 세계원유매장량의 2/3 이상, 카스피 해는 1/5 이상이 매장된 자원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석유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카스피 해에서 지중해 터키의 항구까지 운반된다. 때문에 새로운 중동지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라크에 시아파 정권이 들어서자 이란은 고무됐다. 종파는 민족보다 더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준다.

 

“중동은 단합해야 합니다. 시아파를 중심으로! 우린 핵도 가졌소.”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이제 미국이 두렵지 않다. 중동이 단합하면 엄청나게 큰 그룹이 된다고 착각까지.

 

그런데 대체 중동의 범위는?

 

종동 용어는 원래 페르시아 만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 사이를 중동으로 지칭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중해 부근의 근동을 포함해 오늘날의 중동이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동은 정치적인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21세기 미국의 에너지 전략이 페르시아 만에서 카스피 해로 연결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포함하는 확대된 중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분쟁의 중심지로 등장하고 있다.

 

중동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호르무즈해협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란의 으름장이 기싸움을 부추긴다.

 

호르무즈해협을 항해하는 선원들이 무슨 죄가 있나. 세계무역에 첨병 역할을 하는 약한 선원들에게 로켓포를 쏘다니?

 

"쏘는 자에겐 알라 신의 질책이 있을지니라."

 

오 선장의 객기.

페르시아만을 수없이 항해하는 오 선장은 신비한 이슬람 나라들에 대해서 좀 알아보려고 했으나 알면 알수록 신비에 빠져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로 했다.

 

무엇보다 안전한 항해가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