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세 여자의 남자

세 여자의 남자

오선닥 2010. 4. 17. 14:29

 

1970년대 초 유신헌법이 확정되고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던 무렵.

달러가 귀한 때라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 송출이 한창이고,

그리고 선원들의 해외취업이 시작될 때, 송대길은 선원으로…

그러나 해양 진출 전에 일어났던 로망을 잊지 못해서.



 

세 여자의 남자

 

 

해군 복무를 마친 송대길에겐 바야흐로 칠대양 제패의 꿈이 실현될 시기가 왔다.

 

군에서 2년여 뚜렷한 업적 없이 애국하고 이제 해외로 나가 달러를 벌어 애국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의사나 변호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에겐 ‘사’라는 끝 글자가 들어 있는 ‘해기사’ 면허장이 품안에 있어 마음 든든하다.

 

혁명을 성공시킨 지 10년여 년이 지났는데도 경제가 제대로 펴지지 않자 박정희는 달러벌이에 총력을 쏟기 시작했다.

 

광부→성공, 간호사→성공 ……

 

그러나 미국돈이 더 필요하다.

 

아! 그렇다. 선원을 3번 타자로 출루시켜야 한다. 일본이 선박을 찍어내면서 경제가 무진 잘 나가고 있는데 선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의 생각은 옳았다.

 

일명 선원해외송출.

 

늘어난 선박에 해기사를 충당하지 못해 배를 세워둬야 하는 일본 선박회사들이 속출하다시피 하는 상황이다. 이때 해군에서 제대하는 해기사들은 구세주와 다름없다. 송대길 중위, 아니 일등항해사 면허소지자는 적시에 나타나 적소에 배치될 인재다.


제대 3개월 전에 일본 대형 선박회사 직원이 군부대로 찾아와 돈 꾸러미를 놓고 갔다. 뇌물 받을 일도 없는데. 돈 꾸러미에는 3개월치 월급이 들어있었다. 입사 전 무노동 유급이다. 군부대 주위 술집에 깔아 놓은 외상을 갚고도 남을 돈이라 김 빼지 않고 받아 두었다.

 

이렇게 입사는 일사천리.

송대길의 앞길은 <입춘대길>에 들어선다.

 

'족발이 회사, 진짜 괜찮네'

 

그는 흐뭇해서 혼자 지껄였다. 가난 탈출용으로 마도로스 학교를 선택했는데 마침 때를 잘 만나 일본 회사가 자신을 입도선매해 주니 세상은, 아니 지구는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해군은 하루의 날짜도 착오 없이 그를 국방의무에서 해방시켜줬다. 이젠 언제 상선을 타도 상관없다. 떠밀리다시피 입대했지만 명예롭게 제대한 대한민국 제대 군인 송대길은 차분하게 회사 명령을 기다릴 뿐이다. 무위도식해도 나쁠 건 없다. 최소한 승선 월급의 반은 나오니까.

 

단지 태평양횡단의 꿈이 빨리“come true" 돼야 하는데. 마음이 다소 조급한 상태다.

 

그런데 어느 날,

 

“송군, 일에 좀 차질이 생겼네.”

 

일본 회사의 부산 사무소장이 밝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큰 차질입니까, 선배님?”

 

“그건 아니고, 한국 정부의 해외취업 허가가 늦어서 말일세. 6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요즈음 한국 선박회사들이 해기사 부족을 정부에 호소한다는 소문이 떠돈다. 월급을 트리플로 주는 일본 회사로 몰려드는 탓이라나. 해방 후부터 줄곧 졸업생을 매년 백 명씩 배출해 왔지만 그 옛날 한두 명 정도 승선할 수 있었던 바늘구멍 취업이 요즘 갑자기 호전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개발계획으로 선박 수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한국 해운회사로서는 해기사 수급 해결에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걱정하는 선배를 안심시켜야 한다. 반쪽 월급이라도 나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창자가 댕기는 일본 선주로서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일이 꼬이는 것일까.

 

“혹시 출국이 지연될지 모르니까 부산 사무소에 나와서 회사 업무를 도와줄 수 없겠나?”

 

현재의 방책으로서는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선배는 말하는 것 같다. 젊은 친구 하나 무위도식시키기가 아깝다는 뜻인지, 아니면 자기 보좌관 노릇이라도 하라는 뜻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

 

그러나 송대길 자신은 승선근무 전에 육상 업무를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응했다.



 

이런 상태에서 송대길의 인생 드라마는 재미에 빠져든다. 앞으로 6개월 동안 흥미 있는 일이 펼쳐질 줄도 모르면서.

 

여자 셋 때문에 송대길이 소설의 주인공 자리에 오른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근무 기간은 짧더라도 우선 숙식의 해결이 필요하다. 큰 가방 하나가 소지품의 전부이니 방 하나면 그의 몸을 눕혀서 쉬기에는 충분하다.

 

회사 부근의 한 하숙집을 선택했다.

걸어서 왔다 갔다 할 만한 거리가 마음에 들었고,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언덕도 칠대양을 제패할 사나이의 사기를 세워주기엔 부족함이 없다.

 

 

입출항하는 배들의 모습은 보기에 좋다. 그 많은 배가 어깨도 닿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들락날락 하는 것은 항해사인 그에게도 신기할 정도다.


“숙박비는 알아서 주시고, 지내는 동안 편안하게 생각해요.”

 

키가 크고 약간 마르면서도 지성적으로 보이는 중년 아주머니가 인상 좋게 그의 옷가방을 받아주면서 작은 방 하나로 안내했다.

 

그러면서, 

 

“이 주위에 식당이 많으니까 식사는 원하시는 대로 해결하면 돼요.”

 

주인 아주머니는  반드시 있을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답을 해버리는 것 같다. 확실히 지혜롭고 머리 회전이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든다. 알아서 줘야 하는 하숙비가 얼만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작은 방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전망이 좋아 마음에 들어요.”

 

방이 작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감사의 표시가 그의 입에서 절로 나왔다. 숙식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휘하 함선을 내려다보듯 부산항의 배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세계 상선의 지휘관이 된 듯한 뿌듯함을 저항할 수 없다.

 

회사 근무는 군을 제대한 송대길에게는 인생의 새출발과 다름없다. 우선 출퇴근하는 생활이 흥미롭고, 더하여 퇴근 후 하숙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청춘은 꿈이요’다.


이 하숙집은 원래 하숙을 업으로 하는 집이 아니다. 다만 여섯 달 동안만 머물겠다는 송대길을 위해서 특별히 방 한 칸을 제공해준 것뿐이다. 송대길에게는 이런 집이 전문 하숙집보다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이다.

 

아주머니는 지붕 아래 여자만 셋 있어서 청년 하숙생에게 불편하지 않을까 양해 아닌 양해를 구했다. 싫으면 딴 집을 찾으면 되는 하숙생에게 이렇게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는데도.

 

이제 현실을 직시하니 여자 셋과 지낼 일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형제가 없는 집에서 살아온 송대길에겐 여럿 여자와 지내는 일에는 준비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해 전에 고등학교 교장인 남편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주머니는 딸 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 이 어린 것들을…? 여자 셋이서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세상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은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과부로 남은 아주머니, 대학 2년생 은주, 그리고 고교 2년생 은희.

송대길은 부끄럼도 없이 여자의 소굴로 들어간 것이다.


“송군, 외식만 하기 지루하면 종종 우리와 함께 식사해요.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되니까. 단 하숙비는 좀 더 내야겠지?” 

 

어느 날 아주머니는 외식만 하는 그가 보기에 딱했던지 그렇게 말하며 함께 식사하기를 제안했다.

 

송대길은 혹시 부담을 느낄까봐 안심시키는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하숙비는 더 내야죠.”

 

기다린 질문도 아니었는데 대답이 쉽게 나왔다. 밥값에 해당하는 액수는 유동적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설거지를 해준다든지 장바구니를 들어주면 디스카운트가 될지도.


이렇게 해서 송대길의 직장 초년생 생활은 윤곽이 잡혀나가고 있었다.

 

은주와 은희는 새로운 식구가 나타난 데 대해 별로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여자만 있는 집에 남자가 하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든든한 버팀을 느끼는 표정들이다. 마주 보고 식사하는 중에 아주머니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도 변화된 모습 중의 하나다.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이런 변화가 생겼다면 송대길도 대단한 몫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일본어는 언제 배웠는지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곧 답장을 쓰는 아주머니의 일본어 실력이 대단하거니와, 답장을 단숨에 써내려가는 문장실력도 감동의 대상이다.

 

어딘가 비범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매력적인 여자.



 

“은주와 은희가 요즈음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지 않아? 둘이 공부는 별로지만 나에게는 너무 귀여운 얘들이야. 송군,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아?”

 

어느 날 딸들이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채로 아주머니와 둘만 저녁상 앞에 앉았을 때 상을 마주 하며 아주머니가 꺼낸 말이다. 딸 둘 다 저녁 늦게 온다고 연락이 온 터이다. 요즘 아주머니는 송대길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는지 말끝에 존대 표시가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그게 불만은 아니다.

 

“네, 둘은 귀염덩어리예요. 또 쾌활하고요.”

 

대화에는 1-2-3의 법칙이 있다. 일 분 말하고, 이 분 듣고, 삼 분 맞장구치라고 했다. 세 번째의 법칙에 제일 충실했다.

 

제 자식 귀엽지 않은 사람 어디 있을까. 그러나 딸 둘은 확실히 귀여운 애들임에 틀림없다. 엄마한테도 애교덩어리다. 쾌활하다는 말은 좀 의도적이다. 아버지 안 계시는 점을 감안해서 위로해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송군, 우리 커피 한 잔 해. 내가 끓여올게”

 

저녁상을 물리고 아주머니는 커피 생각이 났던지 주방으로 들어갔다.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향 연기가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밥상에서의 대화와 커피 잔 앞의 대화는 좀 달라야 하는 법. 혼자 사는 여인에게는 칭찬할 만한 언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커피 맛이 아주 좋습니다. 향이 너무 좋아요.”

 

“집안의 남자는 확실히 기둥이야. 얘들 아빠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너무 비교가 돼. 빈자리가 너무 큰 것 같아. 이웃 분들과 교제도 익숙치 않고.”     

 

그녀는 청년이 던진 말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우선 남편 생각부터 하는 것이다.

 

적어도 송대길의 판단으로는 이웃에 이 아주머니와 대화상대가 될 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6.25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동네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접촉이 쉽지 않을 테고, 지적으로나 교양 면에서 그녀와 상대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우주에서 온 사람처럼 달라 보인다. 몇 년 동안 외로움을 짊어지고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웃에 새로운 교양인을 찾든지 하기 전에는 문제가 풀릴 것 같지 않다.

 

“은주와 은희에게는 꼭 계셨어야 할 아버지 아니겠어요.”

 

아주머니를 위로해주기 위해 무언가 한 마디를 한 것이지만 송대길이 청년의 나이로 할 수 있는 대화의 내용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금새 들었다.

 

“오늘 저녁은 송 군이 커피 상대를 해주니 그래도 괜찮구먼. 언제 배 타러가지?”

 

“이제 두어 달 남았습니다.”

 

“마도로스 멋있더라. 송 군은 더 멋있을 거야. 특히 여자들한테 인기일 거야.”

 

송대길은 우쭐하지 않았다. 자주 듣는 칭찬 항목이라 청년이라면 누구나 받는 칭찬으로 여겨 왔다.

 

내용은 평범하지만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는 지루하지 않았다. 어머니와도 같은 아주머니와 청년 사이에는 잔잔한 교양이 흐르고 있었다. 세대간 공감을 만들어내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았다. 대화의 제목을 찾기보다는 대화의 희소가치를 즐기며 머뭇거리는 시간의 감촉을 느끼는 것도 괜찮았다.

 

이 때 송대길의 눈은 한 장면에 집중되었다.

 

“아주머니, 커피 흘렀어요. 옷에!” 

 

대화의 깊이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아주머니의 가슴 쪽 흰 블라우스 위에 커피 방울이 떨어졌다.

 

송대길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티슈를 뽑아 들어 커피 묻은 자국을 닦았다.

잔을 내려놓은 아주머니의 오른손도 커피 묻은 쪽으로 올라왔다.얇은 흰 블라우스가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티슈 대신에 갑자기 송대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덮는 순간 송대길은 비로소 그녀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구나, 후회하며 부끄러운 손을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 손등에 작은 압박이 왔다. 아주머니는 청년의 손등을 눌렀고 청년의 손은 어느덧 그녀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푸짐한 감촉을 느끼기 보다는 불안에 떨고 있는 자신의 손을 청년은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딱딱한 꼭지가 그의 손바닥에 저항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송군, 분위기가 이상해. 내가 왜 이러지? 커피까지 흘리고….”

 

아주머니는 약간 상기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현실과 이성을 분간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청년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얇은 블라우스 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제는 가슴을 가린 천 밑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녀는 왜 이러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송대길 자신 또한 왜 아주머니의 감정을 도와주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덧 청년의 손이 그녀의 살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가슴이 빈약해서… 실망했지?”

 

숨죽이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는가 했더니 아주머니가 먼저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송대길은 여자의 가슴을 만졌다기보다는 젖을 찾는 아기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는 기분을 느꼈다. 뭔가 편안한 분위기를 느껴가는 그 자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의 가슴이 커진다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아주머니의 가슴은 두 딸의 어머니라 하기에는 풍요치 않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지성인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주머니는 적어도 송대길에겐 지성의 친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간 청년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녀는 눈물을 글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남편을 잃고 처량해진 자신을 비추면서 나이어린 청년을 사랑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러면서 그녀는,

 

“두 딸 중 하나를 데려가. 나는 송 군이 정말 좋아.” 

 

묘한 감정에서 해방하려는 노력에서인지 그녀는 주인공 청년을 자신의 관계로부터 딸의 관계로 옮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작정했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다. 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 두 딸에게 적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위로 삼아야 하는 이기심이 발동했을까.

 

커피는 다 마셔지지 않은 채 테이블에 있다. 밤이 깊이 흘렀고 두 딸의 발자국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이날 이후 아주머니는 두 딸과 청년 하숙생 사이에 ‘남녀부동석’이라는 경계를 확실히 없애버린 것 같다. 시와 때와 장소의 구분 없이 적어도 이 집 내에서는 청년의 제한구역이 없어졌다. 딸 중 하나를 데려가라는 말에 대답은 필요 없을 것이다. 종종 샤워를 하고 나오는 여자들의 반라를 쳐다봐도 아주머니는 청년을 책망하지 않았다. 아니 보여주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대길 오빠, 들어가도 돼? 나 은주야.”

 

어느 날 밤,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이집의 큰딸 은주가 찾아왔다.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잠옷을 입은 모습이 대학생의 성숙도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자기 전에 책 좀 읽고 있었어. ‘머리 없는 처녀 귀신’을 읽고 있는데, 더위가 도망가는 것 같아.”

 

읽고 있는 책을 덮으며 험상궂게 송대길은 말했다.

 

“무서운 책을 읽고 어떻게 잠이 와? 섬뜩해!”

 

내용은 알 필요 없이 제목만 들어도 무섭다는 듯 은주는 몸을 떨었다. 식구같이 지내는 그들 사이에 잠옷 바람으로 방에 들어오는 것이 전혀 거리낄 일이 없지만 시선이 은주의 잠옷을 뚫고 들어가는 것 같아 그는 민망하기도 했다. 은은한 향기가 잠옷을 흘러내리는 느낌도 멈출 수 없다. 어쩌면 은주가 책의 주인공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그런 무서운 상상을?

그는 금방 뉘우쳤다.

 

얇은 여름이불 밑으로 은주는 다리를 넣었다.

 

‘정말 잘했다. 은주야!’하고 속으로 뇌이며 그는 안심했다. 그렇지 않아도 샤워로 적셔진 머리며, 얇은 잠옷이며, 길고 흰 다리가 그의 시선을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에 빠졌었다. 고혹적인 몸을 스스로 이불 속으로 피해주었으니 그의 고민은 해방돼 가고 있는 것이다.

 

“오빠, 내일 우리 미팅하는데 파트너가 없어. 오빠가 상대해줘. 파트너가 없는 사람은 자기들끼리 제비뽑아야 된대.”

 

이불깃을 약간 끌어당기며 은주가 말했다.

 

이 딸애는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다. 송대길이 아직 학생인 줄 착각하나? 학교를 졸업하고, 거기다가 군대를 마치고, 더군다나 지금은 직장인이며, 예비 마도로스인 것을 모르고 있나? 무엇보다도 대학 초년생들 모임에 노숙한 청년이 끼어들 자리는 아니잖은가.

 

“회사는 누가 대신 가주지? ……짝 없는 사람끼리 제비뽑기 하라구.”

 

너무 쉬운 대답에 실망의 눈빛이 역력하다.  

 

“오빠는 진짜 매력 없어! 하루 정도 회사를 쉬면 어때? 정말 융통성이 없어. 날 미워하지?”

 

여자 아이들은 진짜, 정말 등 강조 부사를 좋아하나봐.

 

“미안해. 다음에는 꼭 청을 들어주마.”

 

여자는 단순해서 좋다. 부드러운 말에 감동을 받을 줄도 안다. 은주가 미소를 보여주니 송대길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서 다소 미안한 감이 든다.

 

“내 볼에 뽀뽀 해봐! 청을 들어주지 못해 내가 미안하니까.”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는 그의 노력인데 은주는 정말 자기의 입을 그의 볼에 갖다 대었다. 동작도 빠르거니와 물러나는 중 입가에서 피어나는 웃음이 아름다웠다.

 

“굿나잇!”

 

그리고 방을 나가는 뒷모습도 아름다웠다. 엄마한테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으나 송대길은 참았다. 아주머니는 이미 은주가 청년의 방에 들어간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뭔가 잃어버린 듯 멍하니 은주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그는 하루를 도둑맞은 기분으로 한참을 누워서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집은 왜 자꾸 로맨스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송대길은 은주의 미팅 건에 대해 협조해주지 못한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쪽달이 약간 구름에 가려있는 어느 날 저녁,

 

“은주야, 우리 바닷바람 쐬러 가지 않을래? 동백섬에 말야.”

 

그가 제안을 했다.

 

“오빠, 웬일이야! 내 시험 끝난 줄 어떻게 알았어?”

 

“실은 나도 한 달 후면 너와 바이바이 하잖아! 추억을 만들어 놓았다가 배 안에서 추억의 필름을 돌려봐야지.”

 

“좋아! 필름의 여주인공이 돼주지. 나가요”

 

해운대 동백섬은 좀 멀기는 하나 같이 가기에는 시간이 그다지 걸리지 않았다.

동백섬은 비교적 조용했다. 해변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가 크게 들릴 정도다. 걸어서 한 바퀴 산보하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산위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예비 마도로스와 대학 초년생은 윌리엄 워즈워드가 시를 읊어도 괜찮은 분위기 있는 짝이 되었다. 둘은 남쪽 바다가 바라보이는 넓은 바위 끝에 걸터앉았다.

 

“오빠, 에덴공원에 연인들이 많이 가는데, 왜 그리로 가지 않고 여길 데리고 왔어?”

 

이 딸애는 궁금한 것도 많다.

 

“우린 연인 사이가 아니잖아. 피도 안 마른 대학생을 거길 왜 데리고 가?”

 

말해 놓고도 멋쩍어서 그는 연주에게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오빤 나를 애로 보지 마. 이래 뵈도 이미 60학점을 완수한 사람이야.”

 

그래 은주 말이 맞다. 어엿한 대학생을 애 취급하다니.

 

“나는 곧 바다로 나가야 돼. 마도로스잖아. 에덴공원에는 갈대숲이지 바다가 아니잖아. 내가 무슨 청둥오리야? 거기 가게.”

 

이렇게 직업정신이 강한 송대길을 회사는 앞으로 출세 길을 깔아줄지 모르겠다.

 

“색다른 기분이 드는데. 바람이 왜 이리 쌀쌀해. 역시 바닷바람은 달라.”

 

바람의 강도가 다름을 느끼며 송대길은 은주의 손을 잡았다. 여기에 있는 동안만은 이 애를 보호해주고 싶다. 망망대해로 나가면 이 바람은 더욱 세어질 것이며 때로는 폭풍이나 태풍으로 변하기도 할 것이다. 그때는 타고 있는 배를 보호해야 한다. 선원의 생명을 지키고 선박과 화물을 보호하는 것이 선박사관의 직무이다. 이쯤 되면 송대길은 프로 선원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긴소매 옷이 좋았는데.”

 

소매 짧은 옷을 당기며 은주는 어느새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송대길은 윗도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런 때는 보호자로서의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허리를 약간 끌어당겨주는 것도 보호자로서 잊지 말아야할 부분이다. ‘시키는 대로 따르리라’는 표정이기도 한 듯 은주는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청년 오빠 쪽으로 밀었다. 목자를 잘 따르는 양 같다.

 

“우리 여기 온 걸 엄만 알고 계시겠지? 얘기 안 하고 나와서 말야!” 

 

“엄마는 신경 안 써도 돼. 오빠의 팬이잖아.”

 

“내가 무슨 연예인이야?”

 

“좌우지간 엄만 오빠를 좋아하는 여자야.”

 

이 말에 그는 움칫했다. 혹시 이 애가 엄마와의 해프닝을 알고 있는 것일까?

상황의 반전은 행동이 따라야 한다. 송대길은 자신도 모르게 은주의 허리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엄마의 팬이 아니라 그녀의 팬이라는 것을 애써 보여주려는 듯.

 

“배라는 것은 많은 인내심을 요구할 것 같애. 망망대해에서 보고 싶은 사람도 참아야 하고.”

 

멀리 어둠에 깔려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은주가 내 눈에 잔상으로 계속 남아있으면 나는 못 견딜 것 같아.”

 

“거짓말은 아니겠지?”

 

은주는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표정을 한다. ‘그래, 이 애의 말이 맞는지도 몰라! 형제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남이나 다름없어. 눈에서 멀면 마음도 멀어지니까.’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송대길은 의도적으로 대화의 관심을 그녀 쪽으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에베레스트의 안나푸르나 암벽을 타는 것도 아닌데 그의 손은 어느덧 은주의 옷 밑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대화에 열중하는 듯한 그녀는 이제야 긴장을 느끼는 듯 움찔거렸다.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한 사형수처럼 조용했다. 손바닥이 끈적거리는가 했더니 그녀의 등줄기에서 땀이 배이고 있었다. 은주의 머리가 그의 목 밑에 묻히자 긴 머리카락이 감촉으로 느껴지고 코 밑에서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숨을 들이키기만 하고 내쉬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 냄새였다.

 

등줄기에 있던 손이 은주의 옆구리를 감아 가슴 밑으로 가려는 순간 그는 움칫 손을 멈췄다. 어린 학생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죽은 공원의 숲이나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이나 차가운 이슬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바위가 아무리 그들을 무아지경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이 정도에서 이성을 챙겨야 한다. 화물을 실어도 만재흘수선까지만 싣지 않은가. 관계가 주는 고통에 대하여 책임질 자신이 없다.

 

어두운 밤은 무섭지만 이런 때는 좋았다. 얼굴이 잘 안 보이는 것도 이 시간만큼은 축복이 될 수 있다.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주는 어둠이 고맙기까지 하다. 송대길은 은주의 모습을 빛 아래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행복과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그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원에 사람이 안 보여. 오빠, 이제 내려가요.”

 

겨우 정신을 차린 은주였다.

 

“은주, 미안해. 떨고 있는 거야? 미안해. 더 어둡기 전에 내려가자구.”

 

내년 동백꽃이 필 무렵에 송대길이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을지. 그리고 익지 않은 이 어색하고도 어중간한 애정의 시간을 도로 찾을 수 있을지. 은주와 더 짙은 추억을 보태기 전에, 정확히 한 달 후에 송대길은 밥벌이 무대인 바다로 나갈 것이고 고독과 씨름을 시작할 것이다.



 

신성한 국방의무를 필한 자에게는 해외취업이 허용된다는 게 정부의 발표.

애국의 보답이 헛되지 않았다.

 

출국하는 날이 왔고, 이날은 날씨마저 청명했다. 머리 위 태양의 조도가 적당하여 전송 나온 사람들도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부산국제여객부두에는 시모노세키로 가는 부관페리 아리랑호가 접안해 있다. 송대길은 늠름한 발걸음으로 사다리에 올랐다. 현문에 서 있는 승무원이 인사를 야무지게 한다. 마치 미래의 유능한 상선사관을 알아보는 것처럼.

 

승객들은 갑판 위에서 부두에 전송 나온 가족과 친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송대길은 부두 쪽으로 시선을 둘 필요가 없다. 전송의 수고를 하지 말라고 미리 부모님과 친지들에게 알려 놓았기 때문이다.

 

더디어 묶였던 밧줄이 풀리고 아리랑호는 출항할 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출항 뱃고동이 3번 울렸다.

 

“붕~ 붕~ 붕~”

 

오늘 따라 전송 나온 여자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부두에서 서서히 떨어지고 있는 배를 향해 여기저기서 손을 흔들어댄다. 손수건을 꺼내는 사람도 많아졌다. 눈물은 손수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도 아닌데 왜 눈물을 흘려야 하나. 삼류 마도로스 영화 때문일까. 눈물 많은 민족성 때문일까.

 

이때 교복 입은 여학생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우연히 송대길의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저앤 은흰데.”

 

하숙집의 작은딸 은희가 맞다.

다른 사람을 전송 나온 것도 아닌 것 같다. 송대길 쪽으로 계속 올려보면서 손을 흔든다. 어머니와 언니는 눈에 보이지 않고 혼자서 손을 흔든다. 1972년 월남전 철수까지 월남 참전용사 전송은 여고생들이 도맡았다. 젊은 군인들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해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펜팔의 위력도 대단했다.

 

그런데 여객선 전송에 여고생이….

 

은희는 훤칠한 키에 교복이 돋보였다. 어디에 갖다 놓아도 눈에 띈다. 언젠가 하숙집 아주머니가 두 딸 중 막내의 미모를 은근히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아, 그랬구나.’

 

어머니가 막내를 의도적으로 부두로 보냈나? 세 여자의 집 귀신이 되겠다고 약속하지 않고 떠나는 청년을 마지막까지 설득해보려고 막내를 히든카드로 썼나?

 

앗! 헷갈린다.

 

지금쯤 아주머니는 집에서 여자 셋에게 사랑의 불을 질러놓고 끄지 않은 채 현해탄을 건너는 청년 송대길을 원망하고 있는 것일까.

 

“은희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무럭무럭 자라라.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고.”

 

물론 들리지는 않겠지만 송대길은 손을 흔들고 있는 은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송대길은 어느 여자의 사람이 될지 모른다. 기도하지 않는 사이에 누가 낚아채 갈지 모른다. 그는 이제 철판에 실린 몸이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분명한 것은, 여객선 아리랑호가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 고용주는 그를 픽업해서 자기 회사 배에 얹어 놓을 것이고, 거기서 청년 송대길은 일본말을 열심히 익히면서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 끝 -